〈 187화 〉탐식마(貪食魔)
쿠웅! 떠엉! 콰직!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뼈 주먹이 방패를 후려친 바로 다음 순간, 웨인은 그대로 앞으로 밀고 나가더니 있는 힘껏 오른손에 쥔 전투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 자루가 부러질 것처럼 낭창거리며, 뼈 주먹 뒤에 숨어있던 리치의 후두부를 박살내놓았다. 리치의 몸이 허물어졌다.
휘둘렀던 망치를 거두려던 웨인은, 망치가 어디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자 두 번 시도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놓아버리고는 방패에 몸을 집어넣다 시피하며 몸을 뒤로 뺐다.
쩌엉! 그가 쥐고 있었던 망치와 방패표면에 갑작스레 생겨난 얼음덩어리가 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웨인은 ‘가방’을 조작해서 철퇴를 꺼내 움켜쥐고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쓰러뜨린 리치의 등 뒤에서 마법을 조준한 리치는, 그를 손가락으로 겨냥한 모습 그대로 멈춰선 상태였다. 리치가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웨인의 오른팔이 먼저 움직였다.
촤륵! 후웅! 빠가각! 리치 또한 멍 때리고 있기만 한 건 아니었는지, 철퇴가 리치의 왼팔을 후려치자마자, 손끝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며 앞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원 조준점인 웨인의 미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른쪽 위쪽 방향을.
꽤나 떨어진 곳에서 불타고 있음에도 피부가 익어버릴 것 같은 열기에, 웨인은 방패를 거북이 등딱지처럼 등으로 옮긴 후에 앞서 쓰러뜨린 리치 위로 허물어진 두 번째 리치에게 철퇴를 거듭 내려쳤다.
촤륵! 콰직! 촤륵! 빠지직! 철퇴를 내려칠 때마다 5성 리치의 뼈마디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가며, 동시에 웨인의 마력도 쭉쭉 빠져나갔다. 리치의 뼈뿐인 몸뚱이를 부수고 있는 철퇴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시퍼렇게 마력에 휩싸여 있었다.
무리한 마력검 운용으로 공격 한 번에 현기증이 밀려들 지경이었지만, 웨인은 이를 악물고 철퇴를 내려쳤다. 라이프 배슬이 저 성 안에 있는 한,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놈들을 지체 시키는 것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모처럼 마력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내상을 얻더라도 이 경험을 최대한 누려볼 작정이었다.
‘다른 사람의 마력을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이 옮겨주다니 이건 대체...’
웨인 크로이츠는 마력이 빠져나가기 무섭게 자리를 채우고 들어오는 마력의 흐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희란의 ‘연결’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웨인은 작전 돌입 이틀 전에 그런 황당한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일방통행이 아니고, 쌍방통행이 가능하며 다른 이의 마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조차 없는 ‘연결’.
오희란이 능력을 막 각성했을 때,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를 꼬여낸 협회가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아내긴 했지만, 그녀의 능력이 성장한 뒤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그녀의 능력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었으니까.
염동력처럼 눈에만 안 보이고 작용결과는 훤히 보이는 그런 게 아니라, 감추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숨길 수 있는 그런 부류였다. 초기 데이터만 쥐고 있던 협회는 그 때의 데이터는 마력량이 적어서 가능했던 것이고, 옮겨야하는 마력이 양이나 밀도가 올라갈수록,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부작용을 겪겠지 할 뿐이었다. 여태껏 수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리할 때, 그게 정상이었으니까.
쌍방통행만 놓고 보더라도 기존의 능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종류였으니, 류 현이라는 괴물 루키가 끼고 있을 만 하다고 그렇게 여겼었다. 거기다가 용잡이 팀은 청뢰와 유성우라는 규격외의 아티펙트를 보유하고 있으니, 부작용을 감수하고 쓸 만하다고 알아서 결론짓고 납득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 또한 용잡이 팀이라는 초신성이 둘이나 모인 괴물팀에 일원으로 부합한 괴물이었던 것이다.
웨인 크로이츠가 저주 한 방에 자신을 몇 달간 앓아눕게 한 5성 이상의 리치들을 돼지 도살하는 것처럼 퍽퍽 때려 부술 수 있는 것도 말도 안 되는 마력공급으로 인해 구축된 항마력 덕택이었다. 본 바탕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저주를 완전히 씹진 못했지만 저주를 내쏜 리치를 박살내고 약화된 저주를 떨쳐낼 정도는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활약은 그 마력을 활용할 웨인의 기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연결’이 끊기면 한동안 고생 좀 하겠군...이런 걸 한 번 느끼면 돌아가기 싫어지지.’
웨인은 거듭 놀랄 뿐이었다. 힘을 쏟아 부어 적을 때려잡았는데 순식간에 힘이 차오르면서 느껴지는 고양감은, 베테랑인 그 조차 흥분을 억누르기 힘들 정도였다.
속으로 거듭 감탄하던 웨인은 뭔가 낌새가 느껴지자 뒤에 지고 있던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콰창! 지지직! 뒤로 날려가지 않게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충격이 끝이 나면 여지없이 돌격해서, 콰지직! 잠깐의 딜레이에 빠진 리치에게 아주 제대로 된 정타를 때려 넣었다. 놈이 무너지자, 놈을 상대하고 있다가 놓친 여자가 뛰어와서 놈의 몸을 완전히 가루를 내놓았다.
웨인은 그제야 방패에 들러붙은 얼음덩어리와 뭔지 모를 검은 덩어리를 털어낸 후, 다음 표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후우...”
그가 혼자서 무력화 시킨 5성이상의 리치 수만 해도 거의 서른에 달할 정도였다. 지금부터 전투에서 빠져서 제 몸 돌보는 데 치중해도 누구도 불평 못할 전공이었다. 아니, 후방으로 빠져서 휴식을 취할 것을 권하는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서 간간히 들여올 정도였지만, 웨인은 늘어지려는 어깨를 추스르며 방패의 고정밴드를 꽉 조였다.
마력이 공급되곤 있지만 체력이 차오르진 않기 때문에, 새로운 리치를 상대하는 매 순간 한계에 다다르는 기분마저 들었지만,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직 팔이나 다리에 힘이 풀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또한 있었다.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비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차지한 수급만이라도 늘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둘이서 그런 괴물을 상대하는 데 5,6성짜리 몇 마리 상대했다고 뻗어버릴 수는 없지. 이런 버프까지 등에 업고서는 더더욱.’
불과 1,2년 전의 자신이 들었다면 얼이 빠질만한 생각이었으나, 웨인 크로이츠는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이 분투하고 있을 첨탑 쪽을 한 번 힐끔 쳐다본 웨인은, 자신을 닦달하며 다음 타겟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
타닷- 류 현은 오른손에 내려앉은 묵직한 무게감에 위를 힐끔 올려다봤다. 자신의 손위에 올라탄 채, 위를 노려보고 있는 승하의 모습에 아까 전의 복수를 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고개를 쳐들었지만, 류 현은 그 생각을 억눌렀다. ‘미친놈아, 전투 중에 무슨 뻘 생각이야.’
“하나둘셋에 갑니다. 하나, 둘.”
구우웅! 머리 위쪽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의 압력에 류 현은 카운트를 빨리했다. 류 현의 오른팔과 등근육이 목표를 겨냥한 활시위처럼 긴장했다.
“셋!”
후웅! 류 현이 셋을 외친 순간 내던져지던 승하는 오로지 한 곳에 온 신경을 쏟아 붓고 있었다. 자신들을 내려다보면서 마법 세례를 날려댄 7성 리치!
간발의 차이로 그녀의 가슴께를 스치며 마법이 아래로 내쏘아졌지만, 승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순식간에 첨탑 꼭대기까지 도달해, 이제 같은 눈높이를 가지게 된 7성 리치를 향해서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를 뿐!
끼이이이- 키아악! 수차례 7성 리치의 마법을 파괴한 검은 선이 그녀의 칼끝에서 내쏘아졌다. 검을 휘두르는 승하는 불꽃채찍을 소멸시킨 그 기술이 실패한 것에 대해서 혀를 찼지만, 그녀가 내쏜 검은 선만으로도 7성 리치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것이었다.
파캉! 찌지직! 뿌지직! 검은 선은 가릴 것 없다는 듯이 7성 리치가 드리운 방어막을 부수고, 괴수 쉴드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넘어서 리치의 미간을 관통했다. 연이어 미간을 기점으로 두개골에 금이 내달리며, 정수리 부분이 날아갔다. 승하를 따라서 검지를 겨냥하고 있던 7성 리치의 움직임이 덜컥 멎었다.
후와앙! 뒤늦게 7성 리치가 내쏘았던 마법이 그녀의 밑쪽에서 폭발했다. 승하는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류 현이 따갑다고 툴툴 거리면서 나올 미래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첨탑에 도달하기까지 인간 방패 역할을 수행한 류 현이었으니 그녀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발밑 쪽에서 폭발한 녹색 안개 속에서 류 현의 모습이 보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화르륵! 머리 뚜껑이 날아간 7성 리치가 손끝에서 불꽃을 내쏘기 시작하자, 그녀는 생각을 달리해야만 했다.
“뭐야? 저거 대체 뭔데 라이프 배슬이 저렇게 단단해?”
승하가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어 봐야 리치가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첨탑을 붙잡은 채로 한 바퀴 빙 돌아서 화염방사를 피했다. 그 와중에 머리 뚜껑이 날아간 7성 리치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라이프 배슬의 존재도 확인 할 수 있었다.
류 현의 추측대로 한 번 떡이 되도록 얻어터졌던 놈은 라이프 배슬을 성안에 두고 있지 않았다. 문제는 방어 마법을 뚫고 닿았다지만 승하의 검격으로 라이프 배슬을 파괴하지 못했다는 것!
아주 멀쩡한 것은 아닌지 놈은 검은 피 같은 것을 질질 흘리고 있었지만, 첨탑까지 오르느라 체력을 꽤 소모한 승하에게는 크게 주목할 만한 낭보까지는 아니었다.
류 현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류 현...?”
승하가 녹색 안개을 향해서 친구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류 현은 재생에 온 신경을 쏟느라 외부 자극에 반응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크으...”
타닥- 치이- 녹색 안개가 닿는 곳마다 하얀 연기가 솟아올랐고, 연기가 치솟는 곳은 여지없이 피부가 녹아내렸다. 손톱은 이미 모두 녹아내려서 손끝에서 핏방울들이 떨어져 내렸고, 눈은 계속해서 피눈물을 쏟아내었다.
‘이건 그냥 7성 리치 수준이 아닌데...? 엘더 리치 이 새끼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거야?’
하지만 류 현의 몸뚱이는 그 괴물 같은 재생력을 자랑하는 것처럼 꾸역꾸역 피부와 살이 녹아내린 부분에 새살을 돋우며, 독기를 천천히 몰아내갔다.
아직 완벽하게 회복된 것도 아닌 몸으로, 인간 방패 노릇을 하느라 쌓인 피로와 불시에 얻어맞은 7성급을 넘어선 마법이 독안개가 아니었다면 멀쩡한 척을 하며 걸어 나갈 수 있었겠지만, 상성이 좋지 않은 마법이 수준까지 높았으니 별 수 없었다. 현생의 그는 독 면역력을 높이겠다고 극독을 마구 주워 먹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젠장, 미리미리 독이라도 먹어둘 걸 그랬나.’
연전으로 인한 피로 누적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류 현은 자신의 준비성 쪽을 탓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괴수 족치는 일에 대한 준비는 과하다는 개념이 없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녹색 안개를 뚫고 거대한 불기둥이 자신을 후려쳤을 때, 류 현은 그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콰아앙! “현!”
7성 리치가 세 번째로 뽑아낸 불꽃채찍을 이리저리 피하며 놈의 몸에 금 몇 개를 더 선사하던 승하는, 7성 리치가 갑자기 자신을 무시하고 녹색 안개를 후려치자 대경실색했지만 폭발은 막을 수가 없었다. 승하가 이를 갈아붙이며 부상위험이고 뭐고 재지 않고 달려들려던 그 때였다.
“...?”
리치에게 달려들려던 승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빼었다. 말 그대로 몸이 저절로 움직인 것이었다. 승하가 자신이 그렇게 움직인 이유에 대해서 따지고 들기도 전에,
퍼엉! 폭발 속에서 시커먼 뭔가가 쏘아져 나왔다.
콰각! 순식간에 첨탑 꼭대기에 도달한 그것은, 먼저 첨탑 꼭대기를 점거하고 있던 7성 리치에게 달라붙더니 입같이 보이는 것을 벌리고는,
콰직! 우지직! 뿌지직! 한 입에 리치의 상체를 집어삼켜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남은 리치의 몸뚱이는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강철보다 단단한 리치의 뼈를 씹는 소리 사이에 승하의 갈라진 목소리가 공허하게 흘렀다.
“...류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