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탐식마(貪食魔)
“뭐해? 빨리 가자!”
마치 소풍 나가는 어린 아이처럼 쾌활하게 말하며 승하가 앞서 달려 나갔다. 그녀의 두 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바닷물 위를 제대로 박차고 있었는데, EU에서 독점하고 있는 물의 오브라는 아티펙트의 효과였다.
이름과 달리 새끼손톱의 반도 못 미치는 크기의 보석같이 생긴, 이 아티펙트는 비싼 제작비용이 무색하게 일회용이라는 것과 무게제한이 꽤 낮은 편이라는 문제점 때문에, 해양괴수 토벌 때나 가끔 쓰이는 귀하신 몸이었다.
이번 검은 리치성 공략전에 참가한 원정대원들은 제각기 이 물의 오브를 박아 넣은 반지나 목걸이를 네 다섯 개씩 지니고 있었는데,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의 발등에 불이 제대로 붙었다는 증거 중 하나였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쌓아두고 있던 물의 오브를 여유분 전량 공급하겠다는 제안에 류 현은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그 본인은 물의 오브는커녕 일회용 방어 아티펙트 하나 지니지 않은 채였다. 경지가 오르면서 더욱 다루기 까다로워진 에너지 드레인 탓이었다.
괴수의 몸뚱이 일부로 만든 장비는 덜한 편이었지만, 아티펙트의 경우에는 여지없이 에너지 드레인에 마력이 빨려나가 망가지기 일쑤라, 류 현은 화련의 보조를 받아야만 했다. 화련의 마법조차 조금 더 버틸 수 있다 뿐이지, 에너지 드레인 때문에 풀리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승하의 부름에 헛웃음을 짓고 있던 류 현은 내달리면서 ‘가방’을 조작해서 도끼창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동안에도 거리가 무섭게 좁혀져, 류 현의 시력으로도 커다란 덩어리 정도로 보이던 검은 리치성이 지척까지 가까워진 상태였다. 거의 3미터에 달하는 그 도끼창은, 특이하게도 반대편 창끝에 무게추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망치머리가 달려있었다.
그 크기가 거의 성인 남자 머리통만 해서, 무기에 대한 문외한도 고개를 내저을만한 기괴한 모습의 망치머리는 그들이 강철의 대지에 발을 들이자마자 가치를 증명하기 시작했다.
콰직! 도끼창의 망치머리 부분이 항모전단의 승무원이었던 구울의 머리통을 터뜨렸다.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고 쓰러진 구울의 몸뚱이를 류 현은 밟아 으스러뜨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항모전단이었던 금속 덩어리들을 이어놓은 부분은 도무지 효용은 알 수 없었지만, 발판으로는 딱 이었다.
류 현은 리치놈들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속으로 곱씹으며 다리를 계속해서 닦달했다. 류 현의 뒤편으로 이인 일조로 무리지은 서른 명 가량의 플레이어들이 그를 따라잡겠다는 듯, 바쁘게 내달리고 있었다.
콰직! 류 현이 가볍게 휘두른 도끼창의 궤도에 걸린 구울 셋이 동시에 터져나갔다. 검은 리치성을 둘러싼 강철로 이루어진 발판부분을 새카맣게 뒤덮을 정도로 머릿수가 대단하긴 했지만, 승하와 류 현은 조금도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가로막는 것들을 치우며 앞으로 내달았다. 구울로 이루어진 장막이 단검으로 찢긴 것처럼 갈라진 곳에, 서른 한 명의 플레이어들이 달라붙어서 공백을 두 배 세 배로 늘려나갔다.
맥이 풀릴 정도로 쉽게 쓰러져나가는 구울의 파도에 류 현은 조금 느슨해지려는 긴장의 끈을 더욱 조이며, 눈으로는 머리 위쪽 사방을 살폈다.
쩌엉! 뜨드드득! 까창! 그런 류 현의 우려에 응하는 것처럼, 그의 머리 위쪽 방향에서 거대한 뭔가가 덮쳐들었다. 류 현은 감이 시키는 대로 도끼창을 있는 힘껏 그곳을 향해서 내휘둘렀다가, 동시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앗다.
‘젠장! 이거...’
휘두른 도끼창의 도끼날부분이 순식간에 얼음에 감싸이더니 깨져나갔다. 창 자루에 서리가 슬쩍 어렸을 뿐인데, 그의 손끝으로 냉기가 파고들었다.
류 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창자루를 쥔 채로 얼어붙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억지로 폈다. 찌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자루에 달라붙은 피부가 찢겨나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냉기에 당한 오른손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는 사실에 더 신경 쓰였다. 재생까지 눈에 띄게 더딘 것이 확인되자, 그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직 7성 리치 얼굴도 구경 못한 전투 초입이라, 부담이 큰 ‘강림’이나 검은 안개를 끌어올리지 않고 있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항마력을 우습게 뚫고 몸 안의 저항까지 무시하는 이런 빙결 마법은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7성 리치 주력마법 두 개는 섞은 위력이다. 아까 불꽃채찍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가? 기상조작 대신 융합마법을 가지고 있는 건가? 중국에서는 왜 안 썼지?’
“류 현! 야 너 괜찮...”
“앞을 보십쇼! 앞!”
류 현은 뒤돌아서 자신에게 달려올 것 같은 승하의 뒤통수 부근에서 모여들기 시작한 마력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씨발 그런 걸 연발로 쏴?’
승하가 다시 정면을 향했을 때,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레이저 포인터의 빨간 빛이었다. 그 빨간빛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인지한 순간, 승하는 등골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붉은빛이 더는 붉어질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을 때, 허공이 쩍 열리면서 새빨간 피 같은 하지만 더 걸쭉해 보이는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승하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입술이 순식간에 말라붙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열기를 띈 그것은 천천히 쏟아져 내렸다.
승하가 그것의 정체를 판단하기도 전에, 그녀의 팔이 그녀의 머리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키기기기긱! 뻐벙! 마력이, 적의가, 검기가 그녀의 칼끝에 모였다. 그런 칼끝으로 내 휘두른 검은 선이 내달렸다. 붉은 액체에 커다란 구멍을 낸 검은 선은, 뒤쪽의 검은 리치성의 무너진 첨탑중 하나를 더 뭉개놓으며 저 너머로 사라졌다.
치이이익! 화륵!
“크으...”
대부분을 흩어놓았다고는 하나, 붉은 액체 몇 방울을 뒤집어 쓴 승하는 제 머리칼에 붙은 불을 손으로 끄려다 실패하자 손에 쥔 검으로 석석 잘라내었다.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자마자 머리카락은 재가 되었다.
“아까 그거 왜 안 쓰셨습니까? 불붙는 게 아니라 저주일 수도 있는데요.”
“그거 연발로는 못 써. 방금 전에 쓴 것도 그게 제일 잘 된 거였어. 연습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연습도 두 세 번 밖에 못했지만.”
몸 여기저기를 손으로 툭툭 치며 피어오르는 연기를 쫓아 보내고 있는 승하에게 어느새 몸을 추스른 류 현이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영 시원찮다 못해 황당한 것이었다. 불꽃채찍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류 현은 그녀에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진짜 별의 별 마법을 다 쓰네. 7성 리치 짓이겠지? 얼음성에서 상대한 그 놈보다 이쪽이 몇 배는 센 거 같은데. 같은 7성 리치인데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나?”
이 쪽이 기상조종 마법 대신 융합 마법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겁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꾸하려던 류 현은 입을 틀어막고 턱을 매만지는 채 했다. 그러는 동안 이인 일조의 플레이어 다섯 무리가 그들을 제치고 지나갔다.
“잠깐만, 쟤들 앞서 나가도 되나?”
승하가 그리 말하며 바로 앞으로 뛰쳐나가서 선두에 선 이들을 붙잡을 것 같은 자세를 잡았다. 류 현은 그런 승하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를 만류했다. 승하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내보이자, 류 현은 턱짓으로 검은 리치성의 유일하게 멀쩡한 첨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를 노리는 겁니다.”
“뭐? 난 중국에서 별 짓 안 했었는데? 저 성 안에 7성 리치 상대한 건 너잖아.”
류 현도 두 번째 불꽃채찍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승하의 돌격방향과 우연히 일치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세 번이나 고위마법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류 현에게는 그 세 번이 충분한 근거였다.
저 놈이 네임드 몹 수하가 아니라면 그렇겠죠. 류 현은 속으로만 그리 대답하곤 몸을 휙 돌려서 마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후욱! 검은 안개가 그의 몸에서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평소와 달리 류 현의 몸을 뒤덮는 데 그치지 않고, 승하를 감쌀 정도로 대량의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승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뒤로 빼려고 했지만, 류 현이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서 옆으로 당겼다.
“어어? 왜? 왜?”
그것에 맞춘 것처럼,
빠지직! 짜자작! 검은 벽력이 승하를 덮쳐들었다. 아니, 덮쳐들려고 했으나 류 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안개에 가로막혀 그 목적을 다하지 못했다. 앞선 두 발의 마법에 비해서 꽤나 힘없이 저지당한 것이지만, 류 현은 안심하지 않고 옆을 슥 돌아봤다.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승하가 입만 뻐금거려서 물었다. ‘어떻게?’
그녀의 상식 내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본 드래곤이 중국을 무시하고 필리핀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무런 인명피해도 내지 않은 것도 그랬지만, 괴수가 서로 정보를 공유하다니.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고 싶진 않지만, 가면 갈수록 세상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저놈의 대장이 사람 상대로 간보면서 정보를 모으는 놈인데 서로 정보를 공유 안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웃긴 일이죠.”
“...진짜 가면 갈수록 이상해지네.”
“동감입니다.”
빠드득! 파앙! 두 사람이 말을 더 나누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거대한 얼음의 창이 첨탑으로부터 내쏘아졌다. 류 현은 말없이 앞으로 나서더니 오른팔을 뒤로 당겼고,
콰지익! 투포환 선수가 포환을 있는 힘껏 내던지는 것처럼 내휘둘렀다. 얼음창이 거짓말처럼 뭉개지며 그 뒤에 있던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류 현을 집어삼킬 것처럼 덮쳐들었으나,
키이이이! 퍼엉! 퍼엉! 연달아 내달리는 두 개의 검은선에 의해서 흔적도 없이 흩어지는 신세가 되었다. 상체를 바짝 숙인 류 현의 뒤편에서 총을 조준하는 것처럼 검끝을 내밀고 있던 승하는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녀가 다시 코피나 각혈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던 류 현은 조금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미친 천재 같으니라고.
“남극에서 족친 놈이랑 같은 급이 맞긴 한 거야. 이거?”
“그런 걸 저한테 물으셔도...”
“아니, 네가 중국에서 저놈 가지고 놀았으니까 하는 말이지. 아무리 마법사가 준비 끝내면 답이 없다지만...이런 마법을 연달아 쏘면 스트라이커들은 뭐 먹고 살라고?”
남극에서 같은 7성 리치를 둘이서, 실질적으로는 혼자서 몰아붙인 사람이 할 말이냐고 대꾸하려던 류 현은 첨탑 쪽에서 다시금 거대한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하자 고개를 내저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자신도 비슷한 기분이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싶기도 했다. 인간 마법사들도 준비할 여력이 주워지는 순간 화력의 질이 달라지는데, 7성 리치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원래라면 놈이 아직 되찾지 못해야 하는 이성까지 엘더 리치가 보충해주고 있을 테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할 일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다행 아닙니까. 아까 그 불꽃채찍 같은 걸로 휘저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리고 또 옵니다.”
“으엑...저놈은 무슨 마력 치트라도 쳤나. 야, 그리고 무슨 말이 그래? 나 이거 머리카락 탄 거 안 보여?”
“예, 예. 그만큼 술 살 테니까. 일단 갑시다. 여기서 계속 탱킹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여자의 목숨을 술로 갚겠다고? 그러니까 아직 모쏠이지!”
류 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승하를 바라봤지만, 승하는 더는 말을 안 섞으려는 것인지 다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후였다. 류 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을 향한 것 같은 마력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