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탐식마(貪食魔)
바닷바람이 실어온 짭짤하면서 비릿한 냄새에 류 현은 코를 찡그렸다. 익숙하지 않는 바닷바람 냄새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섞인 썩은 내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에 불어터진 시체가 썩는 냄새.
‘유령선이라도 만들 셈인가?’
보지 않아도 이 냄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시야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검은 리치성에서 저번에 가라앉힌 항모전단의 병사들을 구울로 일으켰다는 사실을.
‘여기선 아무리 구울을 찍어내 봐야 별 의미 없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육지로 진격하는 것도 아니고...엘더 리치가 장악력이 약해진 건가? 그래서 혼란상태에서 저러는 건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류 현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뻘 짓이람. 일단 족치고 생각하자.’
그리 결론 내린 류 현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시커먼 단창을 한 번 허공에 그어보고는 오른팔을 뒤로 당겼다. 동시에 마력을 밀어 넣자 시커먼 단창이 황금빛을 발하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부우웅! 마치 투포환 선수의 투척 직전 동작을 선보인 류 현은 끌어당긴 힘이 정점에 달하자,
피잉! 뻐엉! 대각선 방향으로 있는 힘껏 내쏘아냈다. 단창은 순식간에 점이 되었다. 류 현은 곧바로 제 옆에 박아두었던 새 단창을 뽑아들었다. 바다 위에 창이 꽂혀 있는 이 기괴한 모습은, 화련이 류 현에게 걸어준 공간 마법으로 인한 것이었다.
화련이 말하기를 그의 몸 주변에 격리공간인지 뭔지를 펼쳐준 것이라는데, 언제나 그렇듯 류 현은 알아듣지 못하고 대충 넘겼다. 전투 중에 에너지 드레인 때문에 마법이 풀리면 다시 걸어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을 뿐.
바다 위에 떠있는 것처럼 꽂혀있던 단창 하나를 뽑아낸 류 현은 다시금 마력을 밀어 넣고 자세를 잡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대각선 방향이 아니라 정면을, 전방에 있는 검은 리치성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점!
피잉! 뻐버엉! 팔소매가 찢을 것 같이 부풀어 올랐던 오른팔이 다시금 황금빛 선을 내쏘아내었다. 류 현은 세 번째 단창을 뽑아든 채로 그것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가장 먼저 도달한 것은 대각선 방향으로 내쏘아내었던 첫 번째 단창이었다.
하늘 끝까지 다다를 기세로 솟구치던 첫 번째 단창은 무슨 조화인지, 갑자기 방향을 직각으로 틀더니 검은 리치성을 향해서 맹렬하게 내리꽂혔다.
키이이이! 검은 리치성을 관통할 기세로 내리꽂히던 단창은 3미터를 남기고 덜컥 멈춰선 채로 맹렬하게 진동했다. 항모 전단과 함재기들의 포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던 방어막. 웬만한 상위 괴수의 그것을 넘어서는 벽에 가로 막힌 것이다.
맹렬하게 진동하던 단창은,
파창! 유리가 깨지는 듯 한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첫 번째 단창이 황금빛 티끌을 휘날리며 소멸하기 무섭게,
키이이이! 파창! 어느새 방어막까지 도달한 두 번째 단창이 그 뒤를 따르며 황금빛 티끌을 흩뿌렸다. 두 단창이 흩뿌린 티끌들은 그냥 바람에 흩어지지 않고 방어막에 달라붙더니,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하얀 연기는 보지 못했지만 단창이 터져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류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째 단창을 슬쩍 뒤로 당기며 귀에 걸린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희란 씨, 차지 끝나셨습니까?”
-네, 준비 끝났어요. 마스터.-
“그럼 제 신호에 맞춰서 들어갑니다. 셋, 둘, 하나!”
피잉! 퍼엉! 류 현의 오른팔이 세 번째 황금빛 섬광을 내쏘아내는 것과 동시에 그의 뒤편에서는 검붉은 빛이 하늘을 향해서 치솟았다. 류 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네 번째, 다섯 번째, 섬광을 내쏘아보냈다.
쿠르르르! 검붉은 빛이 하늘로 솟구친 지 채 2초가 되기도 전에 그 효과가 드러났다. 구름이 끼긴 했지만 비가 내릴 기색은 보이지 않던 하늘이 거친 울음을 토해내더니,
쿠구구구! 이윽고 거대한 불덩어리들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안쪽의 돌덩어리들이 비쳐 보일 정도로 맑은 불이 아니라, 대충 봐도 뭔가 뒤섞인 것 같은 시커먼 불꽃에 휩싸여 있다는 것! 희란이 마력통을 전부 비워낼 기세로 마력을 때려 박은 유성우는 마력의 불꽃을 시커멓게 불태우며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유니크 아티펙트, 유성우. 용잡이 팀이 보유하고 있는 두 번째 아티펙트가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식은땀을 쏟아내며, 붉은 빛을 흩뿌리고 있는 유성우를 조작하고 있는 희란의 주변에 서있던 플레이어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주변에 넓게 퍼져서 바다 위에 서있는 이들이 멍하니 올려다볼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그들의 뇌리에서 최선두에서 단창을 열 발을 연달아 내쏘아낸 류 현의 존재는 지워진지 오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 현은 계속해서 단창을 내쏘아내었다. 유성우가 닿기 전에 전량 소모해야만 했으니까.
세상의 마지막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듯한 광경에 작전에 참가한 인원들 대부분이 그 사실조차 잊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어떤 이는 이 폭격만으로도 검은 리치성이 붕괴할 테니 자신은 돌격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곧바로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목격한 건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유성우 때문에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검은 리치성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류 현만이 그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시작은 작은 불꽃이었다. 소화기 하나 정도면 진화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불꽃. 그 작은 불꽃은 갑자기 덩치를 확 불리는 가 싶더니, 제 몸을 가느다랗게 늘리기 시작했다. 제 몸을 늘리고, 늘리던 불꽃은 류 현이 손가락을 세 개 접기도 전에 100미터가 넘는 불꽃 채찍으로 화했다. 사람들이 불꽃채찍의 존재를 인식한 것도 그 때 쯤 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서 조각날 것 같던 불꽃채찍은 한 번 크게 흐느적거리고는,
휘잉! 쉬익! 콰르르! 검은 리치성을 향해 날아들던 커다란 불덩어리 중 하나를 박살내버렸다. 쏟아지는 파편까지는 손댈 생각이 없는지 불꽃채찍은 곧바로 불덩어리 대열의 중앙의 가장 큰 것을 노리기 시작했다.
휘잉! 휘이잉! 카드득! 콰각! 하지만 연이은 공격에도 가장 큰 덩어리는 조금 깎여나갈 뿐,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충돌이 시작되었다.
콰르르! 콰광! 콰르릉!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돌음에 응하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발밑의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어떤 이는 귀를 틀어막았고, 어떤 이는 최선두에 있는 류 현을 멍하니 바라봤으며, 또 어떤 이는 귀에 꽂고 있는 통신기로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바다를 때린 불덩어리들이 일으킨 수증기와 분진 때문에 잠깐 모습이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난 검은 리치성은, 이전의 위엄을 꽤나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가장 높은 첨탑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그보다 약간 낮은 것들은 여지없이 무너져나갔고, 플레이어들이 집중하면 부옇게 안개마냥 성 주변에 드리운 방어막은 누더기처럼 찢겨져 나간 상태였다.
누군가가 통신망에 대고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미친...”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해서 공격했을 때는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바다위의 성이 한 번의 공격에 저리 된 것이다. 아티펙트 발동 한 번에.
사실은 유성우가 닿기 전에 류 현이 부지런히 내쏘아낸 ‘브류나크’의 약빨이 단단히 한 몫 한 것이었지만, 류 현은 유성우의 화력에 대해서 어지간한 리치성은 뭉개버릴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말았기에,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건 화련, 희란, 승하 이렇게 세 여자뿐이었다.
발등에 떨어진 유럽의 지도자들이 알아서 인원을 긁어모아주는데, 가진 패를 까발리며 설득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곳에 모인 인원들의 불만 가득한 태도 또한 류 현이 그런 노선을 택하는데 영향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정확한 사실 관계를 알지 못했기에 더욱 충격적인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잊고 멍하니 망가진 검은 리치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계획대로 분산 대형으로 돌입합니다. 카운트 하겠습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그들을 일깨운 것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류 현의 목소리였다. 몇몇이 유성우를 추가로 쏠 수 없는지 물으려고 했지만, 퍼뜩 정신을 차린 다른 이들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돌격 준비를 하자 차마 내뱉지 못하고 그에 동조했다.
그렇게 물었어도 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유성우를 최대 위력으로 내쏘느라 탈진 직전까지 몰린 희란은 부축을 받은 채로 두 번째 폭격은 고사하고, 제 능력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상태였으니까.
카운트를 끝마치기도 전에 치고 나간 건 두 사람, 승하와 류 현이었다. 류 현은 조금 황당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제치고 치고 나가는 친구의 등을 바라봤지만 별 다른 잔소리를 늘어놓진 않았다.
말이 계획대로지, 전략이고 전술이고 아는 게 없는 류 현이 생각한 거라곤 ‘브류나크’와 유성우 폭격으로 사기를 조금이나마 끌어올린 뒤 돌격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면서 조금 앞으로 나섰다고 잔소리할 생각은 없었다. 길을 못 뚫을 정도로 실력이 없는 이도 아니고, 그녀였으니까. 요즘 들어서
화르륵! 휘이잉! 검은 리치성의 첨탑에서 불꽃채찍이 다시 치솟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류 현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시 발동된 불꽃채찍을 보고 소리쳤다. 내려치는 궤도가 승하가 내달리는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저건 최소 7성 리치 주력마법 두 가지는 섞은 거야. 나도 아무것도 안 쓴 맨몸으로는 못 버텨!’
“승하 씨, 위! 위!”
승하는 류 현의 외침에 위를 힐끔 보더니, 덮쳐오는 불꽃채찍의 궤도에 벗어나기는커녕, 더욱 박차를 가했다. 류 현이 그녀를 붙잡기 위해서 두 다리를 닦달하기도 전에 그녀가 훌쩍 위를 향해서 뛰어올랐다. 자신을 향해서 덮쳐드는 불꽃 채찍을 향해서.
승하와 불꽃채찍이 맞닿으려는 찰나, 류 현은 공간이 찌그러지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승하도, 불꽃채찍도 모두가 느리게 움직였다. 아니,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였다. 검은 리치성에서 불어온 바람에 흩어지는 수증기도, 제 주변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안개 같이 펼쳐진 마력의 잔흔마저 느리게 움직였다.
그 중 가장 느리게 움직인 것은 승하였다. 그녀는 원래 감각 하에서 봤어도 보는 사람이 조급증을 느낄 정도로 느리게, 진이 빠질 정도로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검이나 싸움에 대해서 문외한이라도 보고 몸을 뒤로 뺄 수 있을 것 같이 아주 천천히.
검술에 대해서는 문외한 이지만, 싸움에 대해서는 백전노장을 자칭할 만한 류 현이 보기에도 장난치는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류 현은 그 광경에 황당함마저 느꼈지만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퍼어엉! 콰르르!
일 검. 장난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휘두른 일 검에 불꽃채찍이 잘리는 게 아니라, 잔불씨를 흩날리며 터져나갔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돌았는지, 성의 정면에 커다란 검상이 남길 정도였다. 폭만 해도 1미터에 달할 것 같은 패인 흔적은, 크기만 봐선 절대 검상이 아니었지만 류 현은 격렬한 부정보다는 황당함을 느꼈다.
‘미친, 뭐야 뭘 어떻게 한 거야? 방금 마력이 움직였나...?’
“뭐해? 빨리 가자!”
답지 않게 전투 중에 멍해진 류 현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멀쩡하게 달려나가는 승하의 등을 바라보며 류 현은 헛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