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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화 〉탐식마(貪食魔) (184/429)



〈 184화 〉탐식마(貪食魔)

쿠드득- 끼이익- 끼기긱! 프레임이 휘어지면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 고막을 긁어내는 것 같았지만 귀를 틀어막는 이는 없었다. 제 몸뚱이의 두 배 세배는 되는 쇳덩어리들이 수수깡마냥 부러지고, 휘어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뿐.

물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그 정도의 완력이 없어서 놀라는 건 아니었다. 이들 중에서 신체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화련 조차, 모루 같은 것에 주먹을 내리치면 주먹 자국이 남을 정도였으니까.


초인이라고 불러도 부족함 없는 수준에 오른 이들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행위 예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접히고 있는 쇳덩이의 숲 중심에 있는 검은 리치성! 그들이 남극에서 분투 끝에 함락시키는  성공한 얼음성보다 더한 화력을 보유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유럽의 걱정거리로 떠오른 검은 리치성이 그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검은 리치성에서  같은 것이 뻗어 나와서 그러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검은 리치성을 중심으로 가라앉았던 쇳덩어리들이 떠올라, 쇳소리와 함께 구부러지고 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더라도 검은 리치성이 주도하는 것이 분명했다.

좌중이 침묵한 가운데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모니터에 가장 가까이 붙어있던 화련이었다.


“혹시 파견했던 항모의 무기들은 모습이 확인된 게 없나요? 원래 모양 그대로 떠올라서 그대로 붙어있는 거라든지.”


화련의 물음에 클라우드 윈스턴은 표정을 굳혔다. 부리나케 달려오느라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지만, 명색이 협회장이라는 자가 그런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화련의 말처럼 검은 리치성이 항모전단에 탑재되어 있던 화기들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끔찍해질지 어렵지 않게 예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해서 전례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류 현의 추론대로라면 최초로 등장한 8성 리치가, 필리핀을 패닉으로 몰아넣은 본 드래곤  마리와 리치성  곳까지 장악하고 있는,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클라우드 윈스턴은 고개를 돌리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내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군. 당장 확인해 보리다.”


클라우드 윈스턴은 곧바로  휴대폰을 조작해서 어디론가 연락하기 시작했다. 화련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서 왠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류 현을 바라봤다. 자신들을 부를 때 보인 다급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모니터를 향한 류 현의 시선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보면 시선만 그리로 가있고, 다른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왜 저러지?’ 화련은 제 머릿속에 떠올랐던 의문을 애써 떨쳐내었다. 겨우 그를 쉬게 하는 쪽으로 노선을 잡고, 류 현도 슬슬 그것에 적응해 가는 것 같은데 제 궁금증을 충족하겠다고 말을 꺼냈다가 일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화련은 다시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 편 류 현은,

‘갑자기 뜬금없이 여기 철에는 왜 손을 대는 거지?’


화련의 생각대로 정말 딴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의 시선은 모니터에 가있었지만, 류 현은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방안에 있는 팀원들과 클라우드 윈스턴이 나누는 대화들도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류 현은 이전 생에서 붕괴시켰던 리치들의 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중력을 거부하는 것 같이 아래 위가 바뀐  같은 것에서부터, 중세성 양식을 그대로 따온  같은 것까지. 하나같이 부수기 엿 같았다는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질을 섞어지었다는 사실도.

현실에 존재하는 소재들을 끌어다가 성을 지은 리치들이 더 많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소재를 아예 섞지 않은 쪽이 더 강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섞는 쪽이 정석에 가깝다고 그는 결론 내린 상태였다. 이전 생에서 만난 엘더 리치도 자기 성을 지을 때 현실에 존재하는 소재는 섞지 않았었다.


그래서 놈이 성과 연동해서 포격을 퍼부을  뚫느라고 배로 고생했던 기억이 꽤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기억이 류 현에게 고민을 제공한 것이다.

‘8성 리치가 그것도 성을 두 채나 지은 놈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아닐 테고...얼음성이 부서진 것도  텐데 문제라도 생긴 건가?’


놈이 성을  채나 지었다는  남극에서 확인했을 때는 뒤통수를 후려 맞은 느낌이었다. 이전 생에서 그가 먹어치운 엘더 리치는 성 하나가 부서지면 다시 짓는 정도 밖에 못 했었으니까. 본 드래곤이라는  다른 네임드 몹을 수족처럼 부리는 놈이 자체 기량마저 8성 리치라는 타이틀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이전 생의 놈보다 압도적이라는 소리 아닌가?

류 현이 꾹꾹 눌러둔 내상을 안고 움직인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두 성을 완성시킨 놈이 본격적으로 분탕질이라도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기 때문에  현은 무리를 감수했었다.  결과 얼음성을 부수고, 놈의 라이프 배슬에 작지만 타격을 입혔으니 성공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겁 많은 리치의 특성상 라이프 배슬에 타격을 입었으니 본 드래곤들을 따로 돌릴 생각은 못하고, 옆에 끼고 있을게 뻔했으니까. 류 현은 어렵사리나마 유예를 얻은 것에 만족했다. 내상이야 네임드 몹을 상대하면서 피할 수도 없고, 겁 많은 리치가 몸을 추스르고 다시 움직일 즈음에는 자신의 회복도 끝나있을 테니까. 놈을 잡아 족칠 준비 또한 말이다.


‘대체 왜? 왜 뜬금없이 덩치를 불리는 거지?’

그런 류 현에게 있어서 검은 리치성이 가라앉힌 항모전단을 끌어올려서 덩치를 불리는 모습은 정말 불가해한 일이었다.


모르는 이들이 보면 위협적으로 보이겠지만, 저렇게 덩치만 무작정 불리면 커다란 표적이 될 뿐이다. 리치성에 걸린 마법이 어느 수준인지는 모르나, 저렇게 덩치를 불리고 그 위를 방어막으로 커버하려고 들면 오히려 방어력의 절대치는 떨어지게 될 터.

‘저기까지 접근할 수 있는 실력자들 상대면 저건 힘 낭비지. 차라리 똘똘 뭉쳐놨다가 질량병기로 써먹는  훨씬 효과적이야. 내가  번씩이나 진입해서 껄떡거렸으니 모를 리가 없는데 뭘 노리고 저러는 거지? 엘더 리치놈은 아예  놓은 건가?’
‘...내가 입힌 타격이 생각보다 컸나? 성  채를 운용할 수 있는 놈이 그걸 포기할 정도로? 그럼 지중해에 나타난  말이  되잖아? 마음만 먹으면 세상 끝에서 끝으로 이동할 수 있는 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네임드 몹이 던전의 게이트를 이용해서 이동할  있다는 걸 아는  현에게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놈은 지중해에 제 성을 던져놓을 것도 없이, 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생성된 던전을 타고 그곳에 성을 안착시킨 후에 천천히 회복해도 문제가 없었다.

‘뭔가 껄적지근하단 말이야. 하는 꼴을 보면 이리로 와서 때려보라고 유혹하는 거 같은데...젠장, 뭐하는 건지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전 생처럼 소속이고 의무고 없는 상태였다면, 류 현은 지중해는커녕 유럽 근처도 가지 않고 사태를 관망했을 것이다. 검은 리치성은 엘더 리치가 나타나면 언제든 바다 건너의 필라델피아 같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종착지가 한국이 되지 말란 법도 없으니 세아가 최우선이었던 그 때의 그는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세아의 우선순위가 떨어진 건 아니지만, 그  같은 태도를 고수하긴 힘들었다. 그랬다간 이전 생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테니까.


유럽을 갈아 마실 기세로 미쳐 날뛴다면 이전 생의 그라도 좀 달리 생각해봤겠지만, 검은 리치성은 한 번의 선제공격과 방어전 이후로는 지중해에 떠서 쇳덩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는 상태. 쇳덩이를 주물럭거리는 모양새가 꼭 공격을 유도하는 것 같아서 찝찝했다.

검은 리치성이 화기를 운용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한 화련 같은 경우를 보면, 류 현이 이전 생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찝찝함이라고 해야겠지만, 떨쳐내긴 쉽지 않았다.


‘안 갈순 없어. 가긴 가야하는데...자꾸 켕기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아마 가자마자 원정대 구성 끝내고 돌입해야 하는 상황일 텐데...젠장, 느낌이  좋다고 대기하자고 할 수도 없고.’


결론이 나오질 않자 애꿎은 뒷머리만 헤집어대었다. 류 현은 대호가  소득 없이 자꾸 삼천포로 빠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박수를 짝 쳐서 주의를 끌어 모았다.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탁상공론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리에 안 계신 분도  분이나 되고요. 칼리프 클랜의 두 분이랑 지벡 건터 씨가 오시고 나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웨인 씨, 죄송하지만 급하게 한국에서 가져와야할 물건이 있는데 좀 부탁드릴  있을까요? 이번 원정에 요긴하게 쓸  있을 것 같아서요.”
‘‘브류나크’ 시험 건은 이걸로 퉁 치면 되겠고...’

웨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것을 보며 류 현은 지나가는 투로 슬쩍 물었다.

“이번 유럽 원정이 곤란하시거나 탐탁지 않은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나처럼 문자든 뭐든 연락해서 조용히 보자고 하시면...압니다. 두 분 다 의욕 넘치시는 거. 혹시나 해서 다시 말씀드리는 겁니다.”


화련과 희란이 대체 그런 소리는 왜하냐는 식의 눈빛을 보내오자 류 현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이런 거 보면 운이 영 나쁘기만 한 건 아닌데 말이지. 아, 두 사람 입장에서 보면 아닌가?’


혼자서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픽 웃는 류 현을 보고 화련과 희란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녀들로서는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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