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탐식마(貪食魔)
“너희 대체 뭐하는 거야?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라도 하는 거야?”
승하는 곧바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태블릿pc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화련이 험악한 표정으로 자신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 표정만으로 그녀에게는 차고 넘치는 대답이었다. ‘진짜 작정하고 그런 모양이네.’ 승하는 조금 질린다는 표정이 되었다. 승하의 표정에서 그런 의도를 읽어낸 것인지, 화련의 표정이 더 찌그러졌다. 미간에 주름에 세 줄이나 잡힐 정도로.
“뭐, 왜요.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하시죠?”
“너 요새 사람들 앞에서도 언니 소리 안 하더라?”
반쯤 장난조로 내뱉은 말에 화련의 표정이 다른 쪽으로 썩어 들어갔다. 승하는 화련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녀가 뭐라고 말하고 싶은 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애초에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호칭을 붙이기로 했을 때도 정말 마지못해서 라는 느낌이 꽤 강했으니까.
“언니 소리 듣고 싶어요? 혜라가 충분히 해주고 있던 거 같은데.”
“농담이지 농담. 농담을 그렇게 받아치면 난 어떻게 해? 애초에 언니 소리 시작한 것도 내가 시킨 것도 아니잖아? 네가 시작한 거였고.”
승하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승하가 좀 대하기 불편했던 화련은 이상한 호칭을 섞어 쓰다가 승하가 사실상 한 팀이 되자, 더 꼬이기 전에 언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것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만 이라는 조건을 붙였지만 말이다.
“농담 같은 소리를 해야지...”
“네가 네 표정을 못 봤으니까 그런 소리도 할 수 있는 거지.”
화련이 눈을 흘겼지만 승하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승하는 빙글빙글 웃으며 질문을 반복했다.
“그래서 희란이랑 둘이서 번갈아가면서 그러는 이유가 대체 뭐야? 새로운 괴롭힘 방법?”
“누가 누굴 괴롭힌다는 거에요. 우린 그냥...”
“그냥?”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겠다 싶어서 뭐라도 해보려는 건데...사람 의도를 어떻게 그렇게 곡해할 수가 있어요?”
말을 하다 보니 열이 뻗친 화련의 어조가 끝에 가서 급격하게 사나워졌다. 저보다 한 뼘 가량 작은 대다가,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화련이 눈을 흘겨봐야 아는 여동생의 앙탈을 보는 기분이었지만, 승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져주기로 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둘이서 무슨 비밀 얘기를 했길래 그러는 거야? 희란이는 갑자기 비서로 변신하고, 너는 류 현이 무슨 말하든 간에 일단 반대의견부터 내고보고.”
승하의 말에 화련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얼굴에 들어간 힘뿐만 아니라, 몸에 들어간 힘까지 풀렸는지 화련은 앞에 있는 테이블 위로 늘어졌다. 화련은 엎드린 채로 웅얼거렸다.
“누가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아요?”
“그거야 알지. 그러고 나서 류 현이 나가면 너 울 것처럼 부들부들 떨잖아. 들어보면 영 아닌 부분 태클 건 것도 아니던데 대체 왜 그래?”
“누가 울...!”
고개를 치켜들고 반박하려던 화련은 중간에 힘이 다한 것처럼 볼을 테이블에 대고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승하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희란은 LA에 도착한 당일에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정장을 몇 벌 구하더니 비서행세를 시작했고, 화련은 류 현이 정적이라도 되는 양 반대 의견만 줄창 내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반대는 아니었지만, 이전에는 질문을 하면 했지 반대의견을 잘 내지 않는 화련이었다. 눈치 채지 못할 수가 없는 변화. 류 현도 위화감은 느끼곤 있겠지만, 선뜻 말을 못 꺼내는 것일 테지.
“마스터는 숨기고 있는 게 많잖아요.”
“응? 어어, 뭐 그렇지.”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승하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끄덕끄덕 동의를 표했다. 친구에게는 좀 미안한 소리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류 현은 거짓말은 물론 뭔가를 숨기는 것에도 파멸적으로 재능이 없었다. 기회가 온다면 그의 누나에게서 류 현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듣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건 세 여자 모두가 알면서도 류 현 앞에서는 크게 티내지 않는, 세 여자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청뢰 확보 전까지만 해도 캐볼 생각이 가득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를 캐볼 단서조차 없다는 사실에 의욕도 같이 떨어져갔다. 그저 숨기고 있는 사실자체에 대한 궁금증 보다, 뭔가를 숨기면서 혼자서 끙끙 앓는 류 현 때문에 아직 완전히 접지 못한 상태였다.
뭔가를 알아냈는지, 스리슬쩍 모임에서 발을 빼버린 희란이야 그렇다 쳐도, 순수한 궁금증에서 안타까움으로 변한 화련은 눈에 불을 켜고 뭐라도 류 현을 관찰하다가 최근 들어서 포기한 것인지 뭔가 팍 수그러든 기색이었다.
그런 화련이,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내다니? 승하는 한층 더 이해가 안 갔다.
“다시 캐보려고? 류 현이 이번 일 끝나면 털어놓겠다고 했으니까 일단 기다려 보는 게 낫지 않겠어? 그거 들어보고 영 아닌 것 같으면...”
“그런 거 아니거든요.”
“엥? 그럼?”
“그런 부분도 신경은 쓰이지만...마스터, 이번에 남극에서 크게 다쳤었잖아요.”
“그렇...지.”
승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화련은 승하의 얼굴을 한 번 힐끔 훔쳐본 후에 말을 이었다.
“피는 꾸역꾸역 게워내면서 쟤들 잡아야한다고 버둥거리는 거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못 미더운가.”
화련의 말에 승하는 가슴께가 뜨끔 하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머릿속을 열어본 것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승하가 항해 내내 류 현에게 볼멘소리조차 하지 않은 건 그런 생각이 꽤 크게 작용했었다. 승하에게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자신보다 약한 동료들을 이끌면서 미덥지 못해서 불안해 한 적은 많아도, 그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남극에서 류 현의 내상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팔을 재생시키는 그 괴물 같은 재생력으로도 어떻게 안 돼서, 닷새 동안 의식을 잃을 정도로 내상을 꾹 눌러 담고 있었다니, 불평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해소할 길 없는 분노를 어찌해야하나 하고 고민하는데, 가라앉은 화련의 목소리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처음에는 화났었죠. 배 타고 있는 동안 그래서 싸웠던 거고...근데 그런다고 뭐가 나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어요. 능력도 안 되면서 다 뜯어고치려 들지 말고, 일단 호전부터 시키자고. 마스터가 아무리 우릴 못 미덥다고 생각해도 일단 동료 대우는 해주잖아요? 그럼 그거라도 써먹어야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조하는 듯한 어조로 바뀌었지만, 승하는 뭐라고 위로 같은 걸 건네기가 힘들었다. 자신도 별 다르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그런 소리를 해봐야 류 현이 한 마디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말 꺼냈을 때는 희란이가 반대하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희란이 성격에 그게 잘 되겠어요? 마스터 안 그런 척해도 은근히 독재자 스타일인데. 다른 부분에서 챙겨주니까 티가 안 나서 그렇지.”
“그래서 걔가 그렇게 뜬금없이...정장차림도 네 아이디어야?”
“아뇨, 나도 희란이가 갑자기 숙소에 정장을 잔뜩 들여오길래 깜짝 놀랐다니까요. 벌어놓은 게 있으니까, 그 정도로 쪼들리거나 하진 않겠지만 희란이도 참...”
“희란이 걔도 나름대로 비서놀이에 심취해서 만족하던 거 같던데 그럼 된 거지. 그래서?”
“뭐 별 거 더 있겠어요. 내가 마스터가 잡은 일정에 적당히 반대하면서 휴식시간 넣고, 그 양반들 몰아내고...마스터가 혼자 끌어안고 끙끙 앓는 거 다 해결은 못해줘도 휴식이라도 좀 늘려야겠다 싶어서요.”
“흐응...그런데 그 양반들? 그건 또 누구야?”
“칼리프 클랜이랑 유럽에서 날아온 망나니 말이에요. 마스터한테 바로 안 가고 희란이한테 접근해서 은근히 일정 캐려고 하더라고요. 그 커플 쪽은 별 의욕이 없어 보이긴 했는데 그 껄떡남은 진짜...”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지 화련은 주먹을 거머쥐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최근 지벡 건터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승하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 뺀질거리는 듯한 얼굴은 스쳐지나가면서 봤어도 잊기 힘든 성질의 것이다.
“지벡 건터 그 인간이 여기로 찾아왔었어? 아니, 그럴 거면 왜 시내 호텔로 따로 숙소 잡은 거야?”
“내가 그 인간 속내를 어떻게 알겠어요. 그 인간 그러면서 희란이한테 껄떡거리는 것도 다시 시작했던데. 언니랑 마스터가 자리 비우면 귀신같이 알고 온다니까요. 마음 같아선 한 대 확...”
“그렇다고 네가 손대진 말고. 이야기 복잡해지니까. 정 못 봐주겠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몇 대 쥐어박으면 위쪽에 꼰지르는 것도 못할 테니까.”
“...대체 예전에 뭘 하고 다닌 거에요?”
“떠벌리고 다닐만한 건 아니고. 그래서 네가 나쁜 경찰 역할을 하기로 한 거야?”
“어쩌겠어요. 희란이한테 그걸 시킬 수도 없고, 언니도 그런 거 못하잖아요. 정말 별 거 아니지만, 이거 말고는 딱히 취할 수 있는 조치도 없고.”
“인정, 난 얼굴에 다 티 날거야. 그럼 류 현이 신부님 같은 표정으로 말하겠지. 전 무리 같은 거 안 합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겁니다. 개뿔, 그런 녀석이 몸이 그렇게 상할 때까지 막 굴려?”
자신의 말을 듣고 열이 받은 것인지 승하는 씨근덕거리기 시작했다. 화련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봐야 언니 손해라니까요. 아니, 차라리 그 에너지를 다른 데 써서 마스터 좀 쉬게 해줘요. 내상 거의 나았다는 건 거짓말 같진 않은데...그래도 아직 환자잖아요. 다른 인간들은 환자를 환자 취급도 안 해주고 여기저기 부르기나 하고.”
“...여기선 내가 할 게 없는데. 어, 지벡 건터 그 인간 몇 대 쥐어박고 올까?”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요.”
“근데 좀 의외네. 난 그 일 때문에 더 혈안이 돼서 뒷조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화련이 다시금 눈을 흘겼지만, 승하는 눈치 보는 기색 없이 히죽 웃을 뿐이었다.
“아무리 궁금해도 그런 짓은 안 해요. 그리고 마스터가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요. 이번 일 마무리 되면 털어놓겠다고. 일단 그 때까지는 기다려봐야죠.”
“그 때가서도 해소가 안 되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만에 하나 그렇게 되더라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을 거에요. 못 미더운 짐 덩어리 신세를 면해야 뭘 캐묻든 말든 하지.”
한 숨과 함께 말을 마무리 하긴 했지만, 이전과는 달리 자조나 우울한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승하는 친구가 사람은 잘 골랐다고 할머니 같은 생각을 하다가,
“응?”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우는 소리에 그것을 꺼내봤다. 화면에는 류 현이라는 글자가 출력되고 있었다. 화련을 한 번 슬쩍 본 승하는, 화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무슨 일이야?”
-승하 씨, 저도 따로 연락을 하긴 할 건데 숙소에 계신 거면 화련 씨랑 백혜라 씨 불러서 같이 여기로 좀 와주셨으면 합니다.-
“응? 어디? 뭐하는 데?”
-지금 윈스턴 경과 미팅 중인데, 두 분 다 와서 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나중에 불러 모을 겁니다만...-
“무지 급한 일인가 보네. 알았어. 마침 같이 있거든. 혜라랑 련이 데리고 가면 되지? 어, 알았어. 위치 찍어서 보내줘.”
승하가 전화를 끊자 화련이 달려들 것처럼 몸을 내밀며 물었다.
“무슨 일이래요?”
“말을 안 해서 그건 가 봐야 알 것 같은데. 일단 준비하자. 혜라는 내가 불러올 테니까, 네가 차 좀 준비해줘.”
화련은 고개만 까딱이고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승하도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급하게 윗층계로 올라갔다.
“혜라야, 백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