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탐식마(貪食魔)
중간에 무시할 수 없는 잡음이 끼어들긴 했지만, 항해는 매우 순조로웠다. 샌디에고를 향해 나아가는 배는 해양괴수도, 폭풍우도 만나지 않고 아주 평온한 항해 끝에 미국의 영해에 들어섰다. 항해를 시작한 지 사흘째에 걸려온 전화를 제외하면 이후, 원정대가 신경 쓸 만한 연락은 일체 없었고 그 덕에 원정대는 극지에서 구르면서 쌓인 피로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전화 통화 이후 내내 굳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류 현과 셋을 제외하고 말이다. 승하와 화련 그리고 희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류 현의 표정에 제각기 우려를 표하긴 했지만, 그것을 류 현 앞에서 티를 내진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내상을 꾹 참아서 닷새 동안 의식불명이 될 지경이 된 그에게 그런 걸 티냈다간, 그 때 일을 반복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는 채를 했다가, 류 현이 내상 때 그랬던 것처럼 꼭꼭 숨기기 시작하면 정말 답이 안 나올 테니까.
세 여자는 지벡 건터나 마람 압둘아지드, 알 라시드 같이 추적행 과정에서 합류한 이들의 접근을 막은 채, 아무 말 없이 류 현이 하는 짓을 지켜만 봤다. 하루의 대부분을 방에 쳐 박혀서 가끔 앓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헤집는 모습에서 다른 추측거리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그가 고민을 안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원정대는 종착항에 도착했고, 곧바로 버스로 이동하여 LA땅을 밟게 되었다.
***
“각하. 정말 가실 작정이십니까?”
“이보게, 제프. 지금 안 가면 그 친구 얼굴을 언제 직접 마주하겠나? 한 달 뒤? 육 개월 뒤? 아니면 일 년 뒤? 그 친구 유명세가 얼마나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는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그리고 흐름을 보면 미대통령 정도는 씹어 먹는 유명세를 갖게 되겠지.”
“......”
미국의 부통령. 제프 리어던은 이마를 짚고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의 상사라고 할 수 있는 제럴드 던컨 대통령이 쏟아낸 말들은, 부정하고 싶은 말들이긴 했지만,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곧 떠날 겁니다. 애초에 미국 땅을 밟을 예정도 아니었고요. 미국 땅에 있는 괴수를 잡아주려고 온 것도 아니니, 공화당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국민들도 대통령이 굽실거린다고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쇄빙선과 병력을 무료로 제공했다가 엄한 장병들만 죽어나갔다고 난리 아닙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눈치보고 뭘 했다고. 지지율이 좀 깎이는 것 정도는 괜찮아. 정치라는 게 다 그렇지. 남극에서 죽어간 장병들은 안타깝지만...우린 그런 결정을 하라고 이런 자리에 있는 것 아닌가? 남의 아들들이 죽을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리고 욕먹는 거 말일세. 나는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같은 결정을 내릴 걸세. 자네 말처럼 금방 떠날 게 뻔 하니, 엉덩이 붙이고 있는 사이에 만나봐야 하지 않겠나?”
리어던 부통령은 다시금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는 제럴드 던컨이라는 인간을 존경하긴 했지만, 이 대책 없는 긍정적 사고는 도무지 감당이 안 되었다. 이런 이미지를 잘 키워서 대선에서 승리한 것도 사실이지만...
“문제는 국민들이 그걸 싫어한다는 거 아닙니까. 각하께서 지금 LA로 날아가서 그 친구와 악수하시면, 국민들 눈에는 미대통령이 이제 막 이름 날리기 시작한 20대 초반 동양인한테 굽실거리는 걸로 밖에 안 보일 겁니다. 네임드 몹이 하와이라도 폭격했으면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뉴욕에 있는 그 환영성의 존재는 알지도 못하니 국민들 눈에는 그렇게 밖에 안 보일 겁니다.”
“설마 제프 자네도 환영성의 존재를 밝히자는 건 아니겠지? 그건 절대로 안 되네. 차라리 다 해결되고 나중에 밝혀서 욕먹는 게 훨씬 나아.”
“그렇게 되면 재선은 물 건너 갈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밀문제에 민감하게들 반응할 텐데...”
“재선 같은 건 바라지도 않네. 자네 커리어에 흠이 나는 게 좀 걱정되긴 하네만...자네라면 그 정도 흠 정도는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어떻게든 내가 최대한 뒤집어쓰면 되겠지.”
떨어지고 있는 건 각하의 지지율이란 말입니다! 리어던은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꾹 눌러서 참았다. 제럴드 던컨은 그런 현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으며, 정말로 그 부분에 대해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정통적인 정치인과 거리가 먼 의욕과잉의 대통령은 무슨 핑계를 대든 간에 LA로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부상 중이라는 것도 문제죠. 지금은 누가 찾아가도 싫다고 할 겁니다. 지벡 건터야 팝스타 누구부터 불러달라고 하겠지만, 그 류 현이라는 친구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 친구 무슨 신부가 꿈이었던 거 아닐까? 내가 플레이어를 잘 안다고는 못하겠지만, 그 친구들은 보통 뭐 하나 꽂히면 거의 범죄가 될 정도로 몰입하지 않나.”
“예. 상위권으로 갈수록 정상보다는, 자기가 피우는 약값가지고 장난친다고 동네 갱단을 불태우는 그런 놈들이 더 많죠.”
“가족 사랑을 바보 취급하려는 건 아니지만...그 친구는 너무...”
“병적이죠. 취미 같은 게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 친구는 병문안이 취미라고 해도 될 정도니까요. 덕분에 비서실 친구들이 각하 입에서 그 친구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단체로 위경련을 일으킨다더군요. 어디 비벼볼 구석 없으니 말입니다.”
“끙, 골치 아프군...그래도 뭐 어쩌겠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을 기약하기가 어려울 텐데, 좀 짜증내더라도 감수해야겠지. 다음 행선지가 유럽만 아니었으면 다시 재고해 볼 텐데 말이지.”
리어던은 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동의한다는 듯이 한 숨만 푸욱 내쉬었다.
***
또각또각 하고 하이힐 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꽤나 경쾌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류 현은 전혀 경쾌하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결국 류 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뒤따라오던 하이힐의 발소리가 멎었다.
“희란 씨.”
“네.”
“그건 대체...”
류 현은 입을 열려다, 드물게 자신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는 희란을 보고 할 말을 잊은 듯 제 얼굴을 왼손으로 덮었다.
오피스 룩이라고 더 자주 불리는 정장 차림의 희란은, 정말 비서라도 된 것처럼 태블릿PC에 일정을 끄적거리면서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말이다.
희란이 동글동글한 패션 안경 너머로 의아한 시선을 보내오자, 류 현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갑자기 왜 어울리지도 않는 비서행세입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지만 류 현은 내뱉지 못했다. 상대가 화련이나 승하라면 그냥 내뱉고 보겠지만, 상대는 희란 아닌가.
같은 팀이 된지 2년이 넘어가는 판국에 아직도 류 현이 부르면 죄지은 것 마냥 흠칫흠칫 놀라고, 눈 맞추고 이야기하기가 힘든 그녀다.
그런 그녀가 굉장히 뜬금없긴 해도, 적극적으로 류 현이 참가하는 미팅에 동석하면서 도우려는 듯한 행동을 보이는데 쏘아붙일 순 없지 않은가. 기행을 보이고 있긴 해도 희란은 희란인데.
‘지금 저 멘탈 터지면 난 감당 못해.’
그리 생각은 했지만, 몇 마디 한다고 희란의 멘탈이 무너지고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멘탈로 여태껏 자신을 따라오진 못했을 거니까. 류 현은 순수하게 희란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는 게 무서웠다. 안 하던 짓을 뜬금없이 시작했는데, 정상적인 반응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팀 합류 이후 자신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미묘한 시선을 이따금씩 보내곤 하는 그녀라서 더 캐묻기가 힘들었다. ‘강림’을 사용했을 때의 반응도 켕겼고.
“마스터?”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좀 피곤한 가 봅니다.”
“두 분 때문에요.” 류 현은 그 뒷말도 삼켰다.
“아, 한 시간 후에 윈스턴 경과 미팅을 미룰까요? 윈스턴 경도 비행 후에 바로 미팅 참석하시는 거라서 피곤하실 텐데...”
“그럴 정도는 아니고요. 미팅 전 한 삼십 분 정도만 눈 붙이면 괜찮을 겁니다.”
뭐라고 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희란이 정말로 비서 역할을 꽤 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대로 라면 그러기 힘들었겠지만, 희란의 얼굴을 잘 알 턱이 없는 미국 관료들이 희란을 정말로 류 현의 비서로 착각하면서 이리 된 것이다.
설마하니 초신성 소리를 듣는 최상위 플레이어가 대장이라고 해도 같은 플레이어 비서 노릇을 하겠어? 하고 말이다.
‘아무리 서양인들이 동양인 얼굴을 구분 못 한다지만...’
희란이 정장차림으로 따라붙은 첫 날에 떼어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류 현은 새어나오려는 한 숨을 삼켰다.
‘결국 던컨 대통령은 못 만나고 유럽행인가.’
예정대로라면 류 현은 오늘 제럴드 던컨 미대통령과 만남을 가질 예정이었다. 멕시코에서 건너와서 상위 플레이어라는 명패만으로 시민권을 따낸 마약 중독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니, 그놈이 학교를 날려버리지만 않았다면 던컨 대통령이 그리 급하게 돌아가진 않았을 테지. 가뜩이나 플레이어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미국에서 그런 일이 터졌으니, 한가롭게 외국인 플레이어와 미팅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뉴욕에 떠있는 환영성을 모르는 일반 미국민 입장에서는 이 만남자체도 별로 좋게 보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당장 환영성을 처리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여기서 더 우리한테 신경을 쏟아 부울 수도 없을 테고. 애초에 던컨 대통령이 직접 오겠다고 한 것 자체가 이상한 거였지.’
“정말 괜찮으세요? 윈스턴 경도 피로하실 테니까 한 시간만 더 미루고...”
류 현이 멍하니 서있자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여겼는지, 희란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거듭 권해왔다. 류 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사양을 표했다.
“그랬다간 윈스턴 경이 제 숙소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어제 전화상으로 듣기만 해도 당장 이리로 날아오고 싶어 하시는 게 느껴졌거든요.”
“그래도...”
“아침에 화련 씨가 직접 확인하고 오케이 싸인 주셨잖습니까. 저 멀쩡합니다. 미팅도 길어봐야 한 시간도 안 갈 테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윈스턴 경 연세에 비행직후에 길게 이야기할 기력이 있을 것 같지도 않네요.”
류 현은 그리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미국에서의 일정에 대해서 일관적으로 반대 의사를 내비치고 있는 화련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일단 갑시다.”
복잡한 속내를 떨쳐내려는 것처럼 류 현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나섰다.
***
“너희 대체 뭐하는 거야? 좋은 경찰, 나쁜 경찰 놀이라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