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탐식마(貪食魔)
승하는 석상을 보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류 현의 표정을 보고, 그를 불러온 것이 실수였나 하는 생각을 했다. 친구는 보통 사람, 아니 플레이어라도 한 달 넘게 앓아누워야할 심각한 내상을 품은 상태였다.
말하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협회장을 위시한 영국총리나 프랑스 대통령 같은 거물들을, 간략한 전화통화 뿐이긴 해도 상대하기에 적절한 상태가 아닌 건 분명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전화를 돌리긴 했지만.
워낙에 멀쩡하게 밥을 먹고 생활해서 가끔 까먹고는 하지만, 그런 류 현조차 닷새 동안 의식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 중이라는 건 분명했다. 친구의 부상을 뒤늦게 알아챈 것에 대해서 그녀가 자책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애들 몸은 그렇게 챙기면서 자기 몸은 그렇게 막 굴리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불평 아닌 불평을 뇌까려 보지만, 그런다고 그녀의 속이 편해지진 않았다.
변명의 여지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본 드래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류 현이 본 드래곤 대책반이라는 직함을 끌어오면서 술래잡기가 시작된 이후로 몸 성히 돌아다닌 팀원은 없었으니까.
희란은 청뢰의 위력을 최대치까지 끌어내느라, 화련은 팀의 발 역할을 해주다가 엘더 리치에게 저격당해서, 승하 본인은 어지간한 검격은 이빨도 안 먹히는 괴물을 상대로 무리를 해서 자잘한 부상을 안고 있다. 활동하는 데 큰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 악물고 참고만 있을 뿐이지.
어쩌겠는가? 완전 새로운 거대 괴수가 날아다니면서 도시 하나를 통째로 얼려버리고, 사막에 내려앉아서 분탕질 칠거라고 예고하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이는데 몸 상태가 만전이 아니라고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라면 모를까.
하지만 류 현이 이런 부상을 꾹꾹 눌러 담고 있을 거라고는 승하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런 전조 같은 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대륙과 대륙을 건너는 술래잡기 내내 류 현은 평소처럼 움직였다. 팀원들의 몸 상태를 재차 확인하고, 지겨울 정도로 사냥 참가 여부를 재확인하기를 거듭했다. 새벽에 웨인에게서 온 전화를 받아서 정보를 정리하고, 귀찮게 구는 호주 총리를 자기 선에서 커트했다.
지벡 건터나 마람 압둘아지드가 합류한 뒤에는 더했다. 계속해서 희란에게 추파를 날렸던 지벡이 엄한 짓을 못하게 감시자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묘하게 그에게 적의를 내비치는 마람 압둘아지드와 부딪히지 않게 제 행동도 주의해야만 했다.
일개 팀원이 아니라, 팀의 대장인 그가 말이다. 같은 일개 팀원이라면 그냥 얼굴 맞댈 일 자체를 피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대장이 어찌 그러겠는가. 차선책으로 같이 온 알 라시드에게 지시사항 전달을 부탁할 수도 있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류 현은 남극행이 정해진 이후 거의 2주 가까이 마람 압둘아지드와 부딪히지 않도록 외줄을 타야만 했다.
본 드래곤 추적행 내내 그것을 지켜본 승하는 류 현이 한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할 말을 알고 있었다. 류 현은 팀의 엄마 역할과 돌격대장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런 몸 상태로 말이지. ...상태가 그러면 신호라도 주던가! 아마추어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승하는 상대가 환자라서 눌러놓은 화가 다시 들끓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류 현을 향한 것이 아닌, 자신과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주변을 향한 분노가.
‘...하나같이 꽤 무리한 싸움이긴 했지만 그래도 난 여유가 있었어. 눈치 못 챈 내가 나쁜 년이지.’
동시에 류 현을 향한 원망 아닌 원망도 떠올랐다.
그렇게 못 미더웠던 것일까?
지금까지 그의 부상을 눈치 못 채고, 자신이 괜히 이리저리 참견하면 팀 내의 권위가 분산될 거라고 생각해서 대장의 권위를 실어준답시고, 뒷짐 지고 그에게 모든 업무가 쏠리도록 한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화련이 그리 화낸 것도 아마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테지. 그 본인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건 류 현 본인의 잘못이라기보다도, 옆에 있으면서 그런 상태가 될 때까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들의 잘못이라는 것을.
‘할 말이 없으니까 더 화나네. 어휴...’
자신이 생각해도 엉망진창인 말이었지만, 승하는 그 말 이외에 자신의 심경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류 현의 무모함이나 팀원들을 못 믿는 것 같은 행동에 뭐라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이기에 더욱 화가 났다. 류 현이 직접 그렇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가 자신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들의 행동을 근거를 들이미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팀원의 부상도 눈치 못 채고, 대장이랍시고 모든 업무를 몰아넣는 무능한 동료들. 승하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자신이 한 행동들을 그 이상의 평가를 줄 수가 없었다.
그런 복잡한 기분 속에서 류 현을 바라보던 승하는, 류 현이 장고 끝에 입을 여는 것을 보고 답지않게 긴장했다. ‘당장 들이받자고 하면 뜯어말려야 하는데...대체 어떻게?’
“골치 아프게 됐군요. 아무래도 팀이 찢어질 것 같은데...”
“응? 팀이 찢어진다고?”
“예, 예상 못한 건 아닌데... 통화를 해보니까 더 심각하더군요. 지중해 인접 국가들은 아예 반쯤 정신 놓은 것 같고, 영국 쪽도 발등에 불붙은 건 아는지 난리도 아니고...당장이라도 이 배 기수 돌려서 지중해로 끌고 갈 기세더군요.”
“...뭔가 말이 안 맞지 않아? 걔네가 원하는 건 검은성을 가라앉힐 수 있는 팀 아니야? 아무리 멍청해도 단독으로는 못 깨부순다는 거 알 텐데. 걔네 항공모함 하나 이미 꼬라박았다고 들었는데?”
강제 극지체험을 끝내고 귀환 중인 원정대에 전화가 걸려온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남극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다가 뜬금없이 지중해에 모습을 드러낸 검은 리치성은, 지중해에 인접해 있는 국가들이 눈치 채기도 전에 리비아를 향해서 움직였다.
사람들이 검은성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은 트리폴리의 항구에서 검은성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다가왔을 때였다.
그리고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트리폴리의 항만은 말 그대로 초토화 되었다. 항만 시설은 전부 뜯어내고 다시 지어야 할 정도로 파괴되었고, 항구에서 5km이내에 존재하는 10층 이상 건물들은 전부 그 윗부분이 날아갔다.
대피할 겨를조차 없이 리치성에서 쏟아진 마법폭격에 만 단위 인원이 2시간여 만에 갈려나갔다. 무너진 고층건물에 깔리고, 가스시설이 폭발해서 폭사하고, 마법폭격이 잠잠해지자 지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독안개에 당해 죽어나간 인원들이 3만을 훌쩍 넘겼다. 때마침 역풍이 불지 않았다면 리비아의 수도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검은 리치성이 상륙하거나 항구에 조금 더 접근했다면, 희생자 수를 만이 아니라 십만 단위로 헤아려야 했을지도 모르는 끔찍한 화력.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검은 리치성은 2시간의 공격을 끝으로 리비아에서 미련 없이 물러났다.
그 이후 뒤늦게 트리폴리가 폭격 당했다는 사실을 접한, 지중해와 인접해있는 모든 국가들의 골칫거리로 부상한 것이다.
개중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영국과 프랑스였다. 영국은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를, 프랑스는 항공모함을 호위할 항모전단과 플레이어들을 대거 파견했다. 검은 리치성의 존재를 알아낸 지 불과 사흘째의 일이었다. 움직인 병력 규모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신속이라고 할 만한 대처속도. 그 준비기간 동안, 리치성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게 떡밥을 뿌리듯 탄도미사일을 몇 발 날린 건 덤이었다.
그러나 그 빠르면서 조급하지 않은 대처는 대참사로 끝을 맺었다.
검은 리치성은 리비아의 수도를 공격할 때, 탄도미사일이 방어막을 두드릴 때도 내보이지 않았던 최대 화력을 꺼내 보이며 항모전단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 전투가 끝나기까지 채 2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투의 끝은 항공모함 퀸 엘리자베스가 두 동강 나서 침몰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항모전단을 갈아버린 검은 리치성 꼭대기에서 뻗어 나온 불의 채찍이 항공모함을 후려치자, 정말 비현실적으로 깔끔하게 양단되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 안에 타고 있을 장병들의 죽음과 고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공격방법이었다.
검은 리치성에 상륙하는데 성공한 플레이어는 전무했다. 항공모함에서 쏟아낸 함재기 중에서 리치성에 탄환 한 발이라도 맞춘 기체 또한 없었다. 리치성이 반응하기 전에 함포를 쏘는데 성공한 전투함이 몇 대 있긴 했지만, 리치성의 방어막을 뚫지 못했을 뿐더러 곧바로 불 채찍의 첫 제물이 되었다.
열 명 남짓한 생환자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처참한 결과.
병력을 파견하면서 어느 정도 큰 피해는 감수했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수뇌부가 패닉에 빠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해 하던 그들이 떠올린 돌파구는, 필리핀의 케손시티를 얼려버린 본 드래곤을 잡겠다고 남극이라는 극지로 떠나간 원정대였다.
듣기로는 타고 간 배도, 배를 움직일 인원도, 보급품도 상당수 잃은 상태에서 정면 돌파를 감행해서 또 다른 리치성을 공략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검은 리치성이 처음 나타나, 중국의 동부도시들을 초토화 시키던 것을 저지하고 쫓아낸 것도 그 원정대였다.
뜬금없이 등장한 류 현이라는 초신성과 그 초신성만큼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용잡이 팀원 둘, 거기에 검성과 그녀가 키워온 것으로 추측되는 마법사 하나가 낀 원정대. 처음에는 본 드래곤 대책반으로 행보를 시작한 그들은 뜬금없이 끼어든 리치성이나, 지금껏 등장한 리치들을 상회하는 능력을 가진 걸로 보이는 리치의 난입까지 대처해가면서 몸집을 불려왔다.
때 마침 남극에서 귀환 중이라는 정보를 얻자마자 협회와 미국 두 쪽을 전부 압박하여, 류 현과 통화를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승하가 지레짐작으로 걱정거리를 만들 정도로 류 현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매달리는 총리나 대통령의 태도는 전생에 있었던 좋지 못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었으니까.
‘...이거 유럽 도착하자마자 팀 찢어질 느낌인데. 유럽에서 땡깡 부려서 빼낼만한 건 끽해야 웨인이나 지벡 건터가 정도지만...그 지경까지 가면 칼리프 클랜도 팔짱 끼고 있지는 않을 거야.’
각국에서 보내온 인원들을 쏙쏙 빼내가고, 자연스럽게 팀이 공중분해 되면서 혼자서 언데드 군단을 뚫고 리치성을 공략했던 일은 다시 경험하기 싫은 일 중 하나였다. 그 때 류 현은 리치성에서 쏟아내는 언데드 군단을 뚫는다고 사흘이 넘는 시간을 버려야만 했다. 에너지 드레인이 없었다면, 언데드 무리에 밀려서 공략 시도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런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을 터. 류 현은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그의 내상을 안 뒤부터 친구에게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는 승하가 눈치 못 챌정도는 아니었다.
“정확한 건 가봐야 알겠습니다만...아마 가자마자 지벡 건터 씨나 웨인 씨는 본국으로 소환될 겁니다. 강압적으로 나오진 않겠지만, 이 상황에서 본국의 소환을 거절하기도 힘들겠죠. 소환을 거부하면 언론에서 신나게 떠들어 댈 겁니다. 조국의 부름을 외면했니. 어쩌니 하면서요. 두 분 다 그 상황이 되면 버티고 있기 힘들어질 겁니다.”
“...이 상황에서? 빨리 리치성을 가라앉히는 쪽으로 진행하는 게 아니라?”
승하의 물음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느낌보다는, 류 현의 부정을 바라는 듯한 의도가 묻어나왔다. 그녀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다. 류 현은 한 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면 협회가 지금 같은 규모를 겨우 유지하는 일도 없겠죠. 자기 안위가 달린 일이라면, 이후 일은 보지 못하는 게, 아니 보지 않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고요. 뭐, 중국이나 호주만 봐도 예시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류 현 또한 승하와 비슷한 심정이었지만, 그는 너무 이런 상황을 많이 봐왔다. 아닐 거라고, 그 정도까지 멍청한 판단을 할리 없다고 부정하는 것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도 일단, 종착지가 미국으로 정해졌으니 그 동안 어떻게든 팀이 안 깨질 방도를 찾아봐야겠지요.”
마음 같아선, 팀이 깨지든 말든 승하와 백혜라, 희란과 화련을 이끌고 리치성 부터 박살내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팀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지금 눈앞에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승하도 오른팔에 쌓인 데미지 때문에 식사도중, 숟가락 같은 걸 자꾸 놓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체 뭐하려고 리치성을 지중해에 드러낸 거지? 규모가 크긴 해도 못 숨길 건 없을 텐데. 그 안에 틀어박혀서 회복하다가 우리가 공격해 들어오면 미끼로 넘기고 튀는 게 정상적인 판단 아닌가?’
그러는 와중에도 류 현은 엘더 리치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바쁘게 돌렸다.
어느새, 그의 방을 찾아와 열린 방문 사이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화련을 등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