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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화 〉탐식마(貪食魔) (180/429)



〈 180화 〉탐식마(貪食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두어 차례 주변을 살피던 화련은 더 이상 시도하지 않고,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낑낑거리고 있는 류 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진짜, 버둥대지  마요!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몰라서 이래요?”


화련은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당당한 기세는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전투의 피로 이외에도 당황스러움이 그녀의 목소리에서 묻어났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아서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팀의, 그녀의 중심을 잡아줄 류 현이 콜록거리면서 계속 피를 토해내고 있었으니까.


겨우 6성 리치들의 포위진을 뚫고 얼음성으로 진입하려던 상황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텔레포트를 시도한 건, 뜬금없이 발동한 육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뒷덜미를 짓누르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슬쩍 돌아본 것뿐이었다.

그런데 맞추기라도  것처럼 본 드래곤이  순간 모습을 드러내었고, 류 현이 브레스를 받아치기는커녕, 피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것까지 본 화련은 내부가 진탕되든 말든 마구잡이로 좌표를 찍어서 텔레포트를 감행했다.


그 결과 그녀는 6성 리치 포위진을 뚫기 위해서 무리한 것 보다   내상을 입게 되었고, 꾸역꾸역 밀려올라오는 핏물을 삼키며 저보다 덩치가 두 세배는 큰 류 현이 일어서지 못하게 달래며 억누르는 신세가 되었다.

언질조차 없이 대열에서 이탈하고, 스스로 내상까지 내었으니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도   없는 처지였지만 화련은 후회 따윈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본 드래곤이 발 한 번만 휘둘렀어도 치명적이었을 거야.’


마구잡이 텔레포트의 여파로 내부가 진탕돼서, 이동직후 마법은 쓰지도 못했을 자신이 낀다고 뭔가 크게 달라질 상황은 아니었지만 화련은 그 부분을 위안 삼기로 했다.


‘...마력이 다 한 걸까? 아니야, 희란이의 ‘연결’은 그대로야. 마력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

 드래곤의 브레스에 직격당한 류 현의 반신은 서리의 형태로 남은 냉기에 지금도 좀 먹히고 있는 중이었다.

화련은 그곳으로 손을 뻗으려는 자신을 가까스로 제지했다. 지금은  놓고 걱정만 할 때가 아니야!


점점 세를 불리려는 서리와 맞닿은 지점이 타닥타닥 뭔가가 타는 소리와 함께 서리가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모습 또한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류 현은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회복불가 상태까지 빠진 건 아니었다는 증거였다.

평소의 그라면 대수롭지 않게 몇 번 털어내고 “좀 따끔하네요.”하고 넘어갈 것 같은 냉기를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은, 화련의 인내심을 갉아내기에 충분했기에 그녀 또한 내뱉는 말과는 달리 손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정신 차려! 마스터도 이런  나까지 정신줄 놓으면...’

화련은 류 현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훨씬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어?”


뒤로 돌아선 화련은 제 얼굴을 향해서 쫙 펼쳐진 다섯 개의 손가락을, 뼈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의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건 무슨...’

그녀가 자신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리치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자신의 이탈로 손을 맞추고 있던 진입조에 상대하던 리치를 놓칠만한 커다란 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린 건 리치의 뼈밖에 없는 손과 그녀의 코와의 거리가 불과 3센티를 남긴 시점이었다.


‘못 피해...!’

거기까지 생각한 화련은 안아들고 있던  현의 몸 위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끼이이이익! 카가각! 푸확!

그런 화련을 일깨운  쇠를 잡아 비트는 것 같은 굉음과 목덜미에 확 끼얹어진 눈이었다.


“으앗!...어?”


차가운  아니었지만 목덜미에 뭔가가 끼얹어지는 불쾌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광경은,

[크아아아!] 두개골 뚜껑이 반쯤 열린 채 허연 액체 같은  더 하얀 눈밭 위에 흩뿌리고 있는 리치와,

쉭!  몸뚱이만한 대검을 무슨 젓가락 다루는 것처럼 연속해서 휘두르고 있는 승하의 모습이었다.

“미안! 류 현이 갑자기 자빠지길래 놀라서 마크가 느슨해졌어!”


뭔가 이것저것 생략된  같은 말이었지만, 화련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리치의 손에 끼워져 있는 일곱 개의 반지가 무엇보다 확실하게 그녀의 이해를 도왔다.

지금 머리에서 허연 국물을 흘리며 승하의 검격을 급조한 방어마법으로 받아내고 있는 리치는, 승하와 마람 압둘아지드의 몫으로 낙점된 7성 리치였다. 류 현이 두 여자의 대 마법사전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둘만 붙였었는데, 승하가 잠깐 넋을 놓은 잠깐 동안 둘의 포위를 뚫었던 모양.

“저 여자가 진짜...”

한 소리 늘어놓으려고 입을 떼었던 화련은 그 이상 말을 늘어놓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도 승하와 별 다를  없었으니까. 아니, 자리를 무단으로 이탈한 것을 생각하면  보다 더하면 더했다.


‘그래, 내가 저 여자한테 잔소리  처지는 아니지...당장 마스터가 회복하면 내가 제일 욕 먹을텐데.’


콰직! 뒤이어 도착한 마람 압둘아지드가 7성 리치의 배후를 덮쳐들었다. 마람은 더 이상 방패역할을  생각이 없는지, 7성 리치의 허리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내휘두른 주먹에 그녀의 별칭이자 능력인 올 브레이커가 발동  인건 말할 것도 없었다. 리치의 허리께에서 뼛가루로 보이는 허연 분진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허물어지는 7성리치의 등을 향해서 마람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정면에서는 잠깐의 틈을 얻은 승하가 대검을 뒤로 길게  채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치명적인 타격을 피할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7성 리치가 선택한 수는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일곱 번째 반지였다. 주인인 7성리치의 소망에 응하듯, 일곱 번째 반지가 언데드의 아티펙트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하얀 빛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쿠우우우! 콰콰콰! 휘오오오!


“크윽...?!”
“이건 또 뭐야!”

7성 리치의 몸을 보호하는 것처럼 갑자기 생성된 회오리! 마치 벽이 생긴 것처럼, 그 너머를 도무지 볼  없을 정도로 강하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은,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승하와 마람을 5미터 가량 날려 보내었다.

휘우우- 쉬익- 승하와 마람이 지면에 발을 딛고, 돌격태세를 갖추었을 때 회오리바람은 거짓말처럼 사그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회오리바람이 드리웠던 장막이 걷히자 확보된 시야에는, 회오리바람의 중심부에 있었을 7성 리치 또한 회오리바람과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너 계속 삐져있을 거야?”


승하는 침대 위에 작은 언덕을 이룬 이불에 대고 그렇게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승하는 팔짱을 낀 채로 이불을 계속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썽꾸러기 남동생을 향한 것 같은 한숨에  현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누가 삐져있다는 겁니까. 좀 조용히 쉬려는 겁니다.”

말과는 달리 신경질적인 몸짓을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승하는 다시금 한 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럼  식사시간에는 자는 척하다가 혼자 식당가서 궁상맞게  먹는 건데?”
“......”


궁상맞다니 말을 해도  저렇게 해야 한단 말인가. 머릿속으로는 이런 저런 불평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류 현은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놓진 않았다. 그랬다간 승하의 말처럼 정말로 삐진 것을 시인하는 셈이 되니까.

승하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린 친구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 숨과 함께 다시 말문을 틔웠다.

“결국에는 얼음성은 잡았으니까, 된 거잖아? 검은성 쪽은 못 찾았지만, 솔직히 그건  때 얼음성 바로 잡고 찾아 나섰어도 찾기 힘들었을 걸. 어떻게 해도 그 뒤에 사흘 휴식한 건 필수였으니까.”

또다시 남동생을 달래는 듯한 어조로 승하가 말을 걸어오자 류 현은 조금 발끈해서 대꾸했다.


“그 날 바로 얼음성을 잡았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화련 씨나 제가 내상을 입긴 했어도, 마력을 공급하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잖습니까. 7성 리치도 도망간 상태였고. 그  바로 얼음성을 잡았으면 검은성을 추적할 수...”
“너   제대로 의식도 없었잖아. 그런 상황에서, 그래도 ‘연결’은 유지되고 있으니까 마력을 끌어다 써서 얼음성을 공략했어야 한다고? 너 대체 우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검은성 쪽은 이야기 끝난 거 아니었어?”


 현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스스로도 모르진 않았다. 그녀들의 결정이 그렇게까지 틀린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아니, 자신이 그녀들 정도만 알았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라는 것도.


엘더 리치의 라이프 배슬에 금을 내놓고 그 대가로 여태 차곡차곡 쌓아온 데미지가 폭발했었을 때,  현은 회귀 이후 가장 큰 상처를 입었었다. ‘강림’을 무리하게 운용한 반동과 함께 내상이 터졌을 때, 전투 중에 정신을 놓았을 정도로!


엘더 리치가 왕관의 힘으로 불러들인 본 드래곤의 등장에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다시 생각해도 섬뜩한 순간이었다.

류 현의 꽁해져 있는 이유는 그 이후 있었던 전개 때문이었다.

엘더 리치에게 중상을 입힌 류 현에게 정신이 팔린 7성 리치에게도 똑같이 중상을 입히는 데 성공한 승하는, 화련과 함께 원정대의 후퇴를 주장했다. 화력 부분에 있어서 탄약고나 다름없던  현이 내상으로 피를 꾸역꾸역 게워내는 상황에서, 희란의 ‘연결’이 류 현과 제대로 그들을 연결 시켜준다고 해도 도저히 마력을 끌어다 쓸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류 현을 제외하고 모두가 그 의견에 찬성했고, 류 현은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지금 당장 얼음성을 파괴해야한다고 계속해서 웅얼거렸다. 옆에 붙어서 그를 달래던 화련마저 완전히 퍼져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류 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닷새라는 시간이 흘러버린 뒤였다.

본 드래곤과 그 배후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술래잡기를 시도하던 엘더 리치를 추적하면서 쌓인 피로와 자잘한 내상은 류 현의 무시무시한 재생력으로도 어찌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 내상들이 제 능력 때문에 생긴 것이었기에 더 했다. 의식을 되찾는  닷새 밖에 안 걸렸다고 표현해야  테지.

그러나  현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의식을 되찾자마자 얼음성 공략과 검은성 추적 여부에 대해서 물었다. 돌보던 환자가 깨어나자마자 내뱉은 그 같은 질문을 들은 화련의 표정이 썩어들어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현을 병원에 집어넣고, 병원 침대에 묶어버리고 싶었던 화련은 자세히 설명하기 보다는 대강의 개요만 설명하고 그를 다시 눕히려고 들었다.


하지만 기절하기 전 기억하고 있던 급박한 상황과 좋지 못한 몸 상태로 신경이 곤두서있던 류 현은 그 제의를 단칼에 거절하며, 그녀를 다그치고 따지고 들었다. 간병인을 자처하긴 했지만, 본인도 내상을 끌어안고 있었던 화련의 인내심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바닥났다.

결국 대판 말싸움을 벌인 두 사람은, 승하가 대놓고 삐졌냐고 물어볼 정도로 서로에게 화난 티를 팍팍 내면서 대놓고 얼굴 맞댈 일을 피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간 중간 얼음성 공략 일시에 대해서 말다툼을 추가하면서.


화련은 자신이 독단으로 정한 일이 아님에도 그 결정에 대해서 자신이 결정권자였던  마냥 열변을 토했고, 류  그 결정에 대해서 열심히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영원히 같은 주제로 말싸움을 반복할 수는 없는 법. 편들어주는  하나 없고, 점점 뭔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에 빠져들던 류 현은 침묵으로 시위 방법을 바꾸었다.

미국에서 보낸 추가 지원함에 올라타서 얼음의 대지를 벗어나는 항해를 시작한지 사흘째가 되는 지금까지 말이다. 류 현이 깨어난 게 내일이면 일주일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승하의 표현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셈이었다.


“너 그러다가...아니다, 됐어. 지금 말해봐야 귓등으로  듣겠지. 일단 일어나봐. 너한테 온, 아니지. 네가 받아야하는 전화가 와 있으니까.”
“...?”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건장한 체격과 대비되어 퍽 우스웠다. 승하 겉으로는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검지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검은성의 행방이 잡힌 거 같아.  시커먼 섬 같은 게 지중해에 나타났는데, 그게 트리폴리인지 어디의 항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데. 그...리비아 수도라고 했었나?”

류 현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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