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탐식마(貪食魔)
‘지금...!’
제 허리만한 폭을 가진 검 끝을 땅에 대고 있던 승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그녀의 팔과 다리는 그 자신의 생각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그 뒤를, 그녀의 아랫배에 머물고 있던 마력들이 뒤따랐다. 승하는 제 허리 아래 부분이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허리를 거쳐 어깨, 팔을 타고 올라온 뭔가가 손끝으로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승하는, 팔이 빠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있는 힘껏 팔을 내휘둘렀다. 그녀의 팔꿈치, 어깨, 골반부근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여지없이 터져 나왔다.
키이이이! 카가가각! 그녀가 있는 힘껏 내휘두른 검 끝에서 검은 선이, 검은 번개가 내뿜어져나왔다. 도화지 위에 연필로 대충 선을 그은 것 같은 모양새의 검은 선은, 비틀거리는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녀의 앞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관통하며 나아갔다.
그녀에게 달려들던 6성 리치도, 포위공격을 시도하던 5성 리치 무리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그대로 영원히 나아갈 것 같던 검은 선은 순백의 얼음성의 첨탑을 박살내는 것으로 진격을 멈추었다.
검은 선의 거침없는 진격에 충격을 먹은 것인지, 그녀가 틈만 보이면 달려들 것 같던 리치 군단은 멈칫한 상태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후우우...”
날숨과 함께 코피가 몇 방울 뚝뚝 떨어졌지만 승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만했으니까.
첫날, 류 현에게 쏴서 검은 안개를 뚫었을 때와는 위력이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긴 했지만, 이젠 쏘는 족족 내상을 입지도 않고 나름대로 페이스 배분을 할 수도 있는 수준이 되었다. 연이은 실전에 힘입어, 기술이라고 칭할 수준까지는 올라온 것이다.
‘아직 부족해.’
그렇다고 그녀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위력을 반의 반 정도로 줄여서 이렇게 된 것이니까. 거기다가 딜레이 자체가 어디 간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주로 사용하는 한손 검이 아닌 양손 대검 같은 걸 쓰면 그 딜레이가 더 길어진다.
지금 그녀의 얼굴을 향해서 아무런 방해도 없이 손가락을 조준한 7성 리치가 보여주듯,
쩌어엉! 대검이든 한손검이든 1:1이 아닌 상황에서는 도저히 쓸 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처럼 7성 리치의 마법조차 받아넘겨줄 동료가 있던가!
승하는 조금 헐떡이며 제 앞을 가로막아선 등을 쳐다봤다. 자신보다 조금 더 얇은 몸을 가진 여자는 손목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굵직한 건틀렛을 양손에 착용하고 있었다. 남극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롱코트가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그로테스한 외형을 지닌 아티펙트였다.
올 브레이커. 마법사의 천적이라고 해도 좋을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마람 압둘아지드는, 남극에 올 때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검성의 그림자 역할을 충실하게 실행하고 있었다. 그녀 본인도 7성 리치의 마법을 정면에서 받아치는 역할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법을 받아친 반동으로 내부가 진탕되는 첫 경험을 겪을 거라는 사실 또한.
이렇게 두 여자가 7성 리치와 그 휘하의 5성급의 리치 스무 마리와 대치하는 동안 원정대는,
뻐억! 콰직! 우두둑! 퍼어엉! 도무지 무시하기 힘든 소란을 일으키며 얼음성으로 진격하기 위해서 분투 중이었다. 최상위 플레이어 여섯이 작정하고 내뿜는 화력은 6성 리치 열로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희란과 화련이 화력을 쏟아 부어서 리치 하나가 움찔하면, 그 틈을 웨인 크로이츠와 알 라시드가 사정없이 후벼 팠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두 남자의 맹공에 리치들은 여지없이 팔이나 경추 하나를 내줘야했고, 그건 언데드 괴수의 정점이라고 할 만한 리치에게도 그냥 넘기기 힘든 타격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들은 견제마법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그저 그런 플레이어가 아니라, 괴물 중의 괴물들이었으니까! 거기다가 방어에 전념하기 시작한 지벡 건터는, 거너 건터라는 별칭이 무색할 정도로 철벽 수비를 보여주고 있다. 어찌할 길 없는 똥 씹은 표정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웨인 크로이츠와 알 라시드를 보조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결국 6성 리치만으로 구성된 포위망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얼음성으로 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하자 승하, 마람 압둘아지드 듀오와 대치하고 있던 7성 리치의 시선이 자연히 그리로 돌아갔으나,
끼이이이이! 카가가가각! 승하가 칼끝으로 재차 쏘아낸 검은 선이 7성 리치의 로브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괴수의 쉴드 말고도 7성 리치가 항시 발동중인 방어마법이 지벡 건터가 가진 최대 화력의 아티펙트 마저 두 발 이상 막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허점이 허점으로 보이지 않을 위력이었다.
라이프 배슬이 위험한 상황에서 두 여자에게 발이 묶이게 된 7성 리치가 눈구멍의 안광을 번뜩이며 살의를 내뿜었지만, 두 여자는 시큰둥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승하의 앞을 가로막아 서고 있는 마람 압둘아지드 보다, 헐떡거리고 있는 승하의 반응은 좀 더 노골적이었다.
그녀는 대놓고 ‘너 말고 다른 놈 아직 멀었어?’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슬슬 팔에 피로감이...아직 인가?’
경계는 마람 압둘아지드에게 맡겨둔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 때였다.
치지지직! 앞서 몇 번이나 들어온 노이즈와 함께 허공에 빨간 로브가 불쑥 나타났다. 승하는 로브 안에 든 것이 뭔지 확인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이 때를 기다리고 숨죽이고 있을 친구를 향해서!
퍼엉! 승하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이 내려온 언덕에서 눈더미가 폭발하며 솟구쳤다. 그와 함께 저도 모르게 뒤돌아보게 만드는 섬뜩한 느낌 또한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승하는 거기까지 확인하고 다시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
콰직! 덥썩! 우당탕! 후두두둑! 류 현은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손아귀의 힘은 풀지 않았다. 아니, 더욱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엘더 리치의 뼈마디를 그대로 뭉개버릴 기세로!
[크아아아!] 콰직! 우지직! 눈밭 위에 뒤엉켜 뒹구는 와중에 엘더 리치 또한 나름대로 발악을 해왔다. 4미터에 달하는 장신이 이리저리 뒤채기 시작하자, 온몸을 들썩거리며 그 반동을 받아내던 류 현은 그대로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는 기다렸다는 듯이 리치의 몸을 갉아대기 시작했다. 류 현조차 처음 목도하는 8성에 이르는 리치, 엘더 리치의 몸을 말이다!
에너지 드레인 운용만 봐도 그의 기량이 이전 생의 전성기 이상이 되었음은 분명했지만, 류 현은 그런 것에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엘더 리치의 양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의 개수가 8개, 그리고 머리에 얹어져있는 왕관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한 순간 류 현은 다른 생각은 모두 집어치우고 한 가지에 몰입했다. 눈앞의 이 빌어먹을 리치에 대해서!
“이제 좀 끝내자!”
콰직! 검은 안개에 휩싸인 주먹이 엘더 리치의 요골을 박살내놓았다. 류 현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이 악물어 버티며 다시 주먹을 끌어당겼다. 억지로 ‘강림’을 억누르고 있는 반동이었지만, 지금은 페이스 배분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여덟이나 되는 원정대원들을, 그것도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괴물들을 미끼로 써서 겨우 성공시킨 기습이다. 녀석의 지능을 생각하면, 다음은 기약조차 할 수 없을 터.
‘적어도 성들을 다 박살내기 전까지는 못 움직이게 만들어주지!’
류 현이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핏물을 삼키며 끌어당긴 주먹을 내뻗었,
퍼어엉! 푸스스! 주먹이 채 다 내뻗치기도 전에 거대한 충격이 류 현의 복부를 후려치며 그의 몸을 높이 띄워 올렸다. 같이 일어난 눈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젠장! 아직 몇 대 치지도 못했는데!’ 거의 구르다시피 착지한 류 현은 곧바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화르륵! 카드득! 카가가! 그런 류 현의 몸 위로 불꽃, 바람의 칼, 얼음의 꽃이 차례대로 터져 나왔다. 류 현의 항마력을 뚫은 것으로는 성에 안 찬다는 듯, 세 마법은 서로 상쇄하기는커녕 다시금 커다란 폭발을 일으키며 류 현의 몸을 뒤로 날려버렸다. 땅에 발이 닿지 않은 상태였기에 류 현조차 별 수 없었다.
[흐아아아-] 류 현이 달려들던 방향을 향해서 손가락을 조준하고 있던 엘더 리치는 여유를 되찾은 듯, 소름끼치는 귀곡성을 흘려보냈다.
푸화악! 하지만 엘더 리치의 여유는 바로 다음 순간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연이어 터져 나온 충격파로 눈으로 이루어진 안개를 찢어발기며, 검은 안개가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그 특유의 소름끼치는 느낌에서 엘더 리치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하게 만드네...빌어먹을 뼈다귀 새끼.”
‘승하한테 타박할 처지가 아니군. 젠장, ‘강림’ 수준이 올라가서 더 제어하기 힘들어 질 줄은...’
모습을 드러낸 류 현은 중국의 리치성을 향해서 돌격했을 때처럼,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갑옷을 두른 상태였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그의 눈 부위만이 하얀빛으로 번뜩거렸다. 그 때와 달리 그의 입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다가 증발한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기 백에 달하던 리치들의 마법을 몸뚱이로 받아내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
승하의 검격을 받아내면서 개척한 경지의 편린. 전성기 기량을 회복한 그조차 온전하게 제어하지 못할 정도의 농도를 자랑하는 탐욕의 안개!
류 현은 머리가 핑 도는 걸 넘어서, 당장이라도 머리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애써 티내지 않고 참아왔지만, 류 현의 몸 상태는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본 드래곤과 엘더 리치와 술래잡기를 시작한 이래로, 자잘한 내상을 달고 살아야만 했으니까.
네임드 몹을 상대하려면 ‘강림’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고, 승하의 그 괴상망측한 검격을 보고 전성기적보다 한 단계 오른 ‘강림’은 지금의 류 현에게도 버거울 정도였다. 이제는 ‘강림’을 쓰지 않아도 실체가 있는 것 마냥 끈적하게 스며나오는 검은 안개 또한 그에게는 부담이었다. 전혀 다른 기술이 된 것처럼 제어하기가 난해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다고 쓰지 않을 수는 없기에, 류 현은 지난 싸움마다 내상을 감수하면서 두 기술을 병행해서 사용했다.
그 결과, 한 번 더 ‘강림’을 쓰고 나면 도저히 내상의 존재를 숨기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지금까지 숨긴 것도 기적이었다. ‘오늘 지나면 난리 나겠군.’ 엘더 리치의 도주행은 보이지 않은 곳에서 조금씩 성과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5분. 그 이상은 제정신 유지 못한다.’ 그의 눈에 어린 하얀빛이 폭사되며, 류 현은 쏜살이 되었다.
콰드드득! 그 불길한 눈빛에 반응한 엘더 리치가 뼈로 된 장벽과 단거리 텔레포트를 동시에 시전 했지만, 그 어느 것도 류 현을 방해하진 못했다. 뼈로 된 장벽은 그 강도가 의심될 정도로 쉽게 터져나갔고, 류 현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가 엘더 리치의 존재를 잡아채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텔레포트 같은 섬세한 마법이 작용하는 데 검은 안개가 끼어들면, 흐트러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정도였다. 우악스러운 힘의 행사에 엘더 리치의 눈구멍에 어린 빛이 흔들렸다.
어쨌든 다시금 엘더 리치의 팔뚝뼈에 제 손가락을 박아 넣는데 성공한 류 현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가 의도한 웃음은 아니었다. 류 현의 정신은 오로지 제 힘을 제어하는 데 다 가있었으니까.
츠츠츠! 류 현이 움직이기도 전에 검은 안개들이 메뚜기 떼 마냥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엘더 리치를 갉아대기 시작했다. 엘더 리치가 펼쳐낸 방어마법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후웅! 콰직! 엘더 리치의 몸을 붙잡은 류 현은 젤 것도 없다는 듯이 주먹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엘더 리치는 방금 전의 실패로 마법으로 류 현을 떨쳐내는 건 포기했는지, 붙잡히지 않은 오른팔로 어설프게나마 가드를 올려 머리통을 보호했다.
우드득! 빠드득! 과연 엘더 리치의 몸뚱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기라고 할만 했다. 처음보다는 월등히 기세가 줄어들었다지만, 검은 안개에 휩싸인 류 현의 주먹질에도 버텨낸 것이다. 가드를 올린 오른팔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방어마법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류 현은 제 알바 아니라는 듯, 끌어당긴 주먹을 다시 내뻗기만을 반복했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지만, 그라고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 미..치겠네. 뭐가 이렇게 빡세...?’
이 상태를 유지한 지 삼 분이 채 되질 않았는데도 현기증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이제 뚝뚝 수준을 넘어서, 일부가 잠깐이나마 눈밭에 빨간 족적을 남겼다가 증발할 정도였다.
엘더 리치를 후려치면 후려칠수록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순히 능력을 제어하는 데서 오는 부담이 아니라, 뭔가 흘러들어오는 듯한 감각이 안 그래도 터지기 직전의 그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휘저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으니, 미칠 노릇 아니겠는가! 마치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지껄인 그 괴상한 단어를 들었을 때 그런 기분이었다. 서로를 비교해 볼 수 있다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나, 류 현에게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눈앞의 빌어먹을 뼈다귀를 두들겨 패는 것에 집중력을 다 쏟아 붓고 있으니까!
‘그래도 이 새끼 대갈통에 한 방은 먹여야 수지가 맞아...!’
류 현은 혼이 나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몸을 한껏 뒤틀었다. 이대로 자잘한 타격만 계속 꽂아 넣어도 놈에게 한 달은 꼼짝도 못할 타격을 입힐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수지가 맞지 않는다. 류 현은 처음 달려들었을 때보다 확연히 시들해진 검은 안개를 다시 오른 주먹에 북돋우며 안광을 불태웠다.
그 때였다. 류 현이 허락한 2초 남짓한 틈, 텔레포트나 공격마법으로는 절대로 류 현을 떨쳐낼 수 없을 그 짧은 틈을 엘더 리치는 놓치지 않았다. 엘더 리치의 의지에 호응해 머리 위의 왕관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콰자작!
하지만,
그것은 류 현의 주먹을 막아주진 못했다. 체중을 제대로 실은 라이트 훅! 류 현이 있는 힘껏 내휘두른 주먹이 엘더 리치의 좌측 측두부를 깨부쉈다.
그의 주먹에 실려 있던 검은 안개는 엘더 리치의 단단한 두개골과 12중으로 중첩시켜놓은 방어막을 뚫고, 리치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라이프 배슬에 닿았다.
엘더 리치가 강구해놓은 방어기제들을 뚫는데 힘을 소모한 검은 안개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진 못했다. 라이프 배슬에 아주 작은 금 하나를 그어놓은 정도.
3,4 성급 저급 리치라면 모를까. 류 현이 아는 최고 등급이었던 7성을 넘어서, 8성 이라는 전무후무한 경지에, 네임드 몹이라는 타이틀이라는 달고 있는 엘더 리치에게는 몇 주간 요양한다면 회복 못할 것도 없는 정도의 손상.
그러나 신체 일부가 소멸되어도 별 지장이 없는 리치에게도 중상이라고 할 만한 타격임은 분명했다. 일순간이지만, 강대한 엘더 리치의 의식이 날아갈 정도! 4미터나 되는 장신의 리치가 거짓말처럼 휙 날려갔다.
실수라면 실수였지만, 류 현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코에서는 쌍코피가 줄줄 흘렀고, 왼쪽 눈은 막이라도 씌인 것처럼 온통 하얀색 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지나치는 모든 혈관들의 맥동이 북소리처럼 쿵쿵 울렸다.
시각을 대신해서 엘더 리치를 쫓아야할 마력감지망은 꽈배기마냥 뒤엉켰고, 그의 몸 주변에서는 제어하지 못한 마력 때문에 쌓인 눈들이 들썩거렸다.
류 현이 제 머리 위에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를 보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크르르릉!] 푸화악!
엘더 리치의 부름에 응해 나타난 본 드래곤 타칼란, 타쿨란은 제각기 드래곤 피어와 브레스를 내뿜으며 제 주인에게 중상을 입힌 건방진 인간을 밀어내었다. 차징 과정도 없이 가볍게 내뿜은 브레스였지만 류 현은 그대로 쓸려나갔다.
아무런 대비 없이 브레스를 얻어맞고 가을바람을 만난 낙엽마냥 붕 떠오른 그를 받아낸 건,
“마스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음성으로 진격해 들어가고 있던 화련이었다. 화련은 강제로 행한 텔레포트의 여파를 온 몸으로 느끼기도 전에 전력으로 방어막을 펼쳤다. 그리고 몸을 훽 돌렸다.
그녀는 어깨 넓이만 해도 제 두 배는 달하는 류 현을 받아들고는 등을 돌려, 본 드래곤의 2차 공격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어...?”
그녀가 돌아본 곳에는 본 드래곤도, 엘더 리치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