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8화 〉탐식마(貪食魔) (178/429)



〈 178화 〉탐식마(貪食魔)

“세상에...이게 대체 무슨 일...”

화련은 밑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희란은 그 옆에서 할 말조차 잊은 듯, 멍하니 언덕 아래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제 괴수한테 후방도 털리네. 그것도 아주 계획적으로 턴 거 같은데.”


공식적으로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경험 많은 승하마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 이외에는 이렇다  반응을 내보이지 못했지만,  현은 담담하게 베이스캠프가 있어야하는 곳에서 올라오고 있는 연기를 바라봤다.


“일단 제가 가서 한 번...”
“아니요. 단독행동은 제가 제일 낫습니다. 막말로 팔 하나 물어 뜯겨도 그냥 떼어주고 나오면 그만이니까요. 전력이 좀 감소하긴 하겠지만, 다른 분들만큼 타격이 크진 않고요.”


기다리다 못한 웨인이 다시 한  운을 땠지만,  현이 만류하고 나섰다. 그 자신의 말처럼, 아직 괴수가 남아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단독행동은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뿐더러 그렇게 말하는 웨인조차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으니까.

류 현은  상황에 대해서 타박하기 보다는 그럭저럭 납득하는 쪽이었다.


‘지금까지 멘탈 안 나가고 버틴 게 기적이지. 엘더 리치가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나도 예상은 못 했으니까.’

티는  내곤 있지만 그 또한 굉장히 놀란 상태였으니까. 이번 생에서 맞닥뜨린 첫 네임드 몹인 엘더 리치가 네임드 몹의 기준마저 파괴할  같은 미친 괴물이긴 했지만, 이렇게 인간스럽게 행동할 줄은 몰랐다. 떨어져 나온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후방부터 박살을 내놓을 줄이야.

‘중국에서 그놈 턱주가리를 날린 게 독이  건가? 날 위협인자로 확실하게 인식해서? 아니야...그  바로 빼게  만들었으면 한 번 더 분탕질치고 튀었을 거야. 화련 씨가 또 내상입고 앓아누웠을 거고. 그럼 한 달은 우습게 지나갔을 테지. 그렇지 않아도 그놈이 언제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시간을 더 주는 건 미친 짓이야.’
‘...일단 생존자가 있는지 보고 오자고,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다만.’


류 현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언덕을 내려다보다가, 언덕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


“그러니까, 갑자기 본 드래곤이 나타나서 브레스만 뿜고 돌아갔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었으면 다 죽었겠지.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고. 그 빌어먹을 뼈다귀 놈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났다고! 이게 말이 돼?”

이틀 사이에 꽤나 험악해진 몰골이  지벡 건터가 씨근덕거리는 것을 애써 받아넘기며, 류 현은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남극이니 안 그런 곳이 더 드물긴 하지만, 그가 앉아있는 주변 공간은 완벽한 빙판이었다.

흡사 눈축제 행사장에라도  듯한 모습이었다. 조잡하긴 해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이글루나, 사람 형상의 얼음 조각상이 그런 분위기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줬다.


사실은 이글루 안에는 동상으로 손발 중 하나가 떨어져나간 중상자들이 누워있고, 주변에 깔린 사람 형상의 얼음 조각상은 조각상이 아니라, 동사자였다.  드래곤의 프로스트 브레스가 만들어낸 별세계 같은 광경.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병사도 접하기 힘든 참상이었지만, 류 현은 분노나 동정을 표하진 않았다. 아직 그럴 시간이 아닐뿐더러, 이런 꼴을 본 게 한두 번 일도 아니었다.


브레스 한 방에 수천의 목숨이 날아가고, 리치들의 연계 저주에 역전의 용사들이 서로 검을 찌르는 꼴 같은 걸 보고면서 싸워온 류 현에게는, 박살난 쇄빙선이 훨씬 뼈아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내려와서 발만 몇 번 구르면 괴멸시킬 수 있는데도 그냥 브레스만 쏘고 갔다는 건...그놈들 판단은 아니겠지. 어지간히 조심하는군. 직접 와서 마법  번만 쏴줬어도 생존자가 열 명도 안 되었을 텐데...진짜 괜히 턱주가리 날린 건가?’

새삼, 그런 생각이 다시 들 정도였다. 다시 돌아간다면 또 망설임 없이 리치 놈의 턱을 날려버리겠지만.

“알겠습니다. 일단 텐트로 돌아가서 내상이라도 돌보시지요. 저는 다른 분들 증언들도 모아봐야 해서.”
“...물어봤자  의미 없을 거야. 마람인가 뭔가 하는 그 여자 말고는  드래곤의 모습을 똑바로  인간들이 거의 없으니까. 거기에 정신 팔렸던 놈들은 나랑 그 여자 말고는 다 죽었지.”

꺼림칙하다는 듯이 더듬더듬 말을 꺼내는 지벡 건터를 바라보던 류 현은 고개를 까딱해보이고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섰다. 그도 지벡의 말처럼  의미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증언을 모으는 것 이외에도, 불시에 습격을 당해서 큰 피해를 당한 원정대원들을  대 일로 달랜다는 지극히 리더스러운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내키지도 않고, 잘할 자신도 없었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그런 일.


‘진짜 이런   맞는다고...’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푸념이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


휘오오오! 차갑다는 말보다 아프다는 말이 훨씬 어울리는 바람이 일단의 무리를 덮쳐들었다. 얼음의 땅 위에 살짝 얹어져있던 눈들이 같이 휘날려 시계를 확보하는 것마저 변변치 않았지만, 열 명이  안 되는 인원으로 구성된 무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정면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리는 계속해서 언덕을 올라갔다.


그 일단의 무리의 최후미에 위치하고 있던 지벡은 이 바람이 감사하기까지 했다. 자신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불평은 바람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을 테니까.

“미쳤어. 류 현이라는 놈은 미친 게 분명해.  상황에서 그냥 전진한다고? 진짜 미친 거 아냐?”


끊임없이 미친  분명하다고 중얼거리는 지벡의 말은 반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중국 동부 도시들을 전부 초토화시킬 기세로 날뛰던 리치성을 돌입할 때와 똑같이, 어영부영  무리에 낀 자신에 대한 분노!

‘미친새끼들. 어떻게 이런 계획에  번씩이나 동의할 수가 있어?’

자신에 대한 분노는 곧 앞서 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어떻게 반응해도 그놈들 움직이는 속도는  따라잡으니까. 우리를 따라오게 만들자고? 말은 쉽지 미친놈.’


지금으로부터 사흘 전. 그러니까  드래곤의 기습으로 쇄빙선과 베이스캠프를 잃은 날, 류 현은 원정대원들을 어르는 작업이 얼추 끝난 밤에 여덟 명을 불러들였다. 중국의 리치성 돌입 당시 자신과 같은 폭격기에 몸을 실었던 이들을 말이다.


나승하, 백혜라, 오희란, 백화련, 마람 압둘아지드, 알 라시드, 웨인 크로이츠, 지벡 건터. 평균 헌팅 레벨이 이백 중반대에 이르는 원정대원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전력을 가졌다고 해도 이견이 없을 이들. 제각기 자신이 속한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괴물들.

그런 이들을 모아놓고 류 현은 이렇게 말했다. “쇄빙선이 당했으니, 바로 지원을 요청해도 지원군이 도달하기까지 최소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보급품도 상당수를 잃었고요. 당장 일주일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닙니다만, 원정대 전체가 움직이면서 넉넉하게 지낼 정도는 안 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베이스캠프를 다른 곳에 차리고 자리해주신 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을 그냥 베이스캠프에 남기고, 이 아홉 명만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지벡은 잠시간 공황상태에 빠졌었다. 후방을 공격해서 퇴로와 보급까지 작살내놓는, 그것도 무력수치로 따지면 여기 있는 놈들 다 합쳐야 비빌까 말까한 괴물을 상대로 달랑 아홉 명만 움직이자고? 이게 무슨 용사가 마왕군 뚫고 마왕 족치는 그런 만화인줄 아는 건가?

그 짧은 공황상태를 벗어난 지벡은 수 없이 많은 반론을 제기했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논리적인 반박을 말이다. 중간부터는 끼어들지 않고 구경만 하는 다른 놈들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류 현이라는 또라이는 지벡의 생각보다 훨씬 굳건한 또라이였다. 그는 한 문장으로 지벡의 반박들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이대로 뭉개고 있으면 사흘 안에 본 드래곤이 다시 날아와서 브레스 폭격가하고 튀는 패턴에 괴멸당합니다. 여러 번 할 것도 없이 한 번만 더 하면 지금 인원의 반도 안 남겠죠. 일주일? 식량이 다하기 전에 먹을 입이 열도 안 남을 겁니다.”


지벡은 그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지벡이 그날 낮에 온몸으로 겪었던 재앙이었으니까. 다른 놈들은 아무런 도움조차  되었다.  라시드와 마람 압둘아지드는 아예 스트라이커 몰빵형이었고, 다른 놈들의 안위는 조금도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벡이 인류애가 넘치는 성격이냐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는 적어도 베이스캠프가 통째로 얼어붙는 개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내상까지 감수하고 방어 마법을 펼쳤다. 중간 중간 그보다 급수 낮은 마법사들이 손을 보태려고 들었지만, 채 5초를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본 드래곤은 브레스를 내뿜는 짓을 5분가량 반복하더니, 미련 없이 지평선을 향해서 날아가 버렸다. 추가공격이 없었던 덕에, 지벡은 방어 마법이 깃든 반지 다섯 개를 제물로 바친 대신, 내상을 피할 수 있었다. 망가져나간 반지 값이 최소 수십억에서 백억 단위의 것도 있다는 사실은 지벡에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반인 병사들은 동사를 피하지 못했고,  명에 달하는 상위 플레이어들 중에서 내상이나 동상으로 거동불가능 상태가 된 이들이 속출했다. 뭘 해보기도 전에 원정대가 결딴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끔찍한 재앙을 직접 겪은 지벡에게 있어서, 류 현의 말은 필사적으로 반박하고 싶으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 말고 제대로 반박하려는 놈이 없는 게 말이 돼?’


억지라는  알면서도 그런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긴, 나도 몰랐는데 그딴 식으로 찾을 줄 누가 알았겠어? 씨발...’


지벡의 반대를 모두 물리치는 데 성공한 류 현은, 화련에게 말도  되는 짓을 시켰다. 이 눈밖에 없고 더럽게 넓기까지 한 곳을 스캔해서 리치든 본 드래곤이든 찾아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지벡은 그 소리를 듣고 류 현이라는 놈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돌아버리는가 했다.


화련이 희란과 손을 맞잡고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더니, 마력을 말 그대로 땅에 흩뿌리면서 난리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벡은 적의 필드나 다름없는 곳에서의 마력 낭비는 둘째 치고, 맹수의 영역에 개가 영역표시 하는 것과 별 다를 것 없는 그 짓을 멈출 수도 없었다. 반대할 기색을 본 류 현이, “그 쪽은 어차피 저희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대꾸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수행한 화련은 80km가량 떨어진 곳에 성 비슷한 것이 있다는 걸 말하고는 반 탈진 상태가 돼서는, 류 현의 등에 업히게 되었다.


지벡은 그 광경을 보고 2차로 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보통 저런 짓거리를 하고 나면 코피 분수쇼는 당연하고, 사흘은 아무것도 못먹는 상태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화련은 그런 상식 따위 제 알바 아니라는 듯, 당일에 밥만 잘 먹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류 현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생각해둔 것처럼,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더니 그곳을 베이스캠프 삼아서 버티고 있으라고 이제는 마흔 다섯 명이 된 플레이어들에게 당부한 후, 화련에게 마법적인 조치를 부탁한 뒤 그대로 출발신호를 올렸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리치성까지 언덕하나만 남겨둔 상황. 무리는 금세 언덕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내 눈이 잘  된 건가? 저거 검정색이 아니라, 얼음성 같은데...나랑 다른 게 보이는 사람?”


지벡은 친해질 예정도, 마음도 없는 이들에게서 다른 대답을 바라며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앞에 서있는 성이 중국에서  그 검은 리치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얼음성이라는 사실만이 있을 뿐.


“제 생각보다 리치들이 훨씬 부지런 했군요.”


류 현의 말에 지벡은 그의 정신 이상을 의심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