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탐식마(貪食魔)
“세상에...이게 대체 무슨 일...”
화련은 밑을 살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희란은 그 옆에서 할 말조차 잊은 듯, 멍하니 언덕 아래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이제 괴수한테 후방도 털리네. 그것도 아주 계획적으로 턴 거 같은데.”
공식적으로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경험 많은 승하마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 이외에는 이렇다 할 반응을 내보이지 못했지만, 류 현은 담담하게 베이스캠프가 있어야하는 곳에서 올라오고 있는 연기를 바라봤다.
“일단 제가 가서 한 번...”
“아니요. 단독행동은 제가 제일 낫습니다. 막말로 팔 하나 물어 뜯겨도 그냥 떼어주고 나오면 그만이니까요. 전력이 좀 감소하긴 하겠지만, 다른 분들만큼 타격이 크진 않고요.”
기다리다 못한 웨인이 다시 한 번 운을 땠지만, 류 현이 만류하고 나섰다. 그 자신의 말처럼, 아직 괴수가 남아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단독행동은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뿐더러 그렇게 말하는 웨인조차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으니까.
류 현은 이 상황에 대해서 타박하기 보다는 그럭저럭 납득하는 쪽이었다.
‘지금까지 멘탈 안 나가고 버틴 게 기적이지. 엘더 리치가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나도 예상은 못 했으니까.’
티는 안 내곤 있지만 그 또한 굉장히 놀란 상태였으니까. 이번 생에서 맞닥뜨린 첫 네임드 몹인 엘더 리치가 네임드 몹의 기준마저 파괴할 것 같은 미친 괴물이긴 했지만, 이렇게 인간스럽게 행동할 줄은 몰랐다. 떨어져 나온 자신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후방부터 박살을 내놓을 줄이야.
‘중국에서 그놈 턱주가리를 날린 게 독이 된 건가? 날 위협인자로 확실하게 인식해서? 아니야...그 때 바로 빼게 안 만들었으면 한 번 더 분탕질치고 튀었을 거야. 화련 씨가 또 내상입고 앓아누웠을 거고. 그럼 한 달은 우습게 지나갔을 테지. 그렇지 않아도 그놈이 언제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시간을 더 주는 건 미친 짓이야.’
‘...일단 생존자가 있는지 보고 오자고,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다만.’
류 현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언덕을 내려다보다가, 언덕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
“그러니까, 갑자기 본 드래곤이 나타나서 브레스만 뿜고 돌아갔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었으면 다 죽었겠지.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고. 그 빌어먹을 뼈다귀 놈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났다고! 이게 말이 돼?”
이틀 사이에 꽤나 험악해진 몰골이 된 지벡 건터가 씨근덕거리는 것을 애써 받아넘기며, 류 현은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남극이니 안 그런 곳이 더 드물긴 하지만, 그가 앉아있는 주변 공간은 완벽한 빙판이었다.
흡사 눈축제 행사장에라도 온 듯한 모습이었다. 조잡하긴 해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이글루나, 사람 형상의 얼음 조각상이 그런 분위기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줬다.
사실은 이글루 안에는 동상으로 손발 중 하나가 떨어져나간 중상자들이 누워있고, 주변에 깔린 사람 형상의 얼음 조각상은 조각상이 아니라, 동사자였다. 본 드래곤의 프로스트 브레스가 만들어낸 별세계 같은 광경.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병사도 접하기 힘든 참상이었지만, 류 현은 분노나 동정을 표하진 않았다. 아직 그럴 시간이 아닐뿐더러, 이런 꼴을 본 게 한두 번 일도 아니었다.
브레스 한 방에 수천의 목숨이 날아가고, 리치들의 연계 저주에 역전의 용사들이 서로 검을 찌르는 꼴 같은 걸 보고면서 싸워온 류 현에게는, 박살난 쇄빙선이 훨씬 뼈아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내려와서 발만 몇 번 구르면 괴멸시킬 수 있는데도 그냥 브레스만 쏘고 갔다는 건...그놈들 판단은 아니겠지. 어지간히 조심하는군. 직접 와서 마법 몇 번만 쏴줬어도 생존자가 열 명도 안 되었을 텐데...진짜 괜히 턱주가리 날린 건가?’
새삼, 그런 생각이 다시 들 정도였다. 다시 돌아간다면 또 망설임 없이 리치 놈의 턱을 날려버리겠지만.
“알겠습니다. 일단 텐트로 돌아가서 내상이라도 돌보시지요. 저는 다른 분들 증언들도 모아봐야 해서.”
“...물어봤자 별 의미 없을 거야. 마람인가 뭔가 하는 그 여자 말고는 본 드래곤의 모습을 똑바로 본 인간들이 거의 없으니까. 거기에 정신 팔렸던 놈들은 나랑 그 여자 말고는 다 죽었지.”
꺼림칙하다는 듯이 더듬더듬 말을 꺼내는 지벡 건터를 바라보던 류 현은 고개를 까딱해보이고는 자리에서 털고 일어섰다. 그도 지벡의 말처럼 별 의미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증언을 모으는 것 이외에도, 불시에 습격을 당해서 큰 피해를 당한 원정대원들을 일 대 일로 달랜다는 지극히 리더스러운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내키지도 않고, 잘할 자신도 없었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그런 일.
‘진짜 이런 건 안 맞는다고...’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푸념이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
휘오오오! 차갑다는 말보다 아프다는 말이 훨씬 어울리는 바람이 일단의 무리를 덮쳐들었다. 얼음의 땅 위에 살짝 얹어져있던 눈들이 같이 휘날려 시계를 확보하는 것마저 변변치 않았지만, 열 명이 채 안 되는 인원으로 구성된 무리는 계속해서 전진했다. 정면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리는 계속해서 언덕을 올라갔다.
그 일단의 무리의 최후미에 위치하고 있던 지벡은 이 바람이 감사하기까지 했다. 자신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제 불평은 바람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을 테니까.
“미쳤어. 류 현이라는 놈은 미친 게 분명해. 이 상황에서 그냥 전진한다고? 진짜 미친 거 아냐?”
끊임없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중얼거리는 지벡의 말은 반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중국 동부 도시들을 전부 초토화시킬 기세로 날뛰던 리치성을 돌입할 때와 똑같이, 어영부영 이 무리에 낀 자신에 대한 분노!
‘미친새끼들. 어떻게 이런 계획에 두 번씩이나 동의할 수가 있어?’
자신에 대한 분노는 곧 앞서 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어떻게 반응해도 그놈들 움직이는 속도는 못 따라잡으니까. 우리를 따라오게 만들자고? 말은 쉽지 미친놈.’
지금으로부터 사흘 전. 그러니까 본 드래곤의 기습으로 쇄빙선과 베이스캠프를 잃은 날, 류 현은 원정대원들을 어르는 작업이 얼추 끝난 밤에 여덟 명을 불러들였다. 중국의 리치성 돌입 당시 자신과 같은 폭격기에 몸을 실었던 이들을 말이다.
나승하, 백혜라, 오희란, 백화련, 마람 압둘아지드, 알 라시드, 웨인 크로이츠, 지벡 건터. 평균 헌팅 레벨이 이백 중반대에 이르는 원정대원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전력을 가졌다고 해도 이견이 없을 이들. 제각기 자신이 속한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괴물들.
그런 이들을 모아놓고 류 현은 이렇게 말했다. “쇄빙선이 당했으니, 바로 지원을 요청해도 지원군이 도달하기까지 최소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보급품도 상당수를 잃었고요. 당장 일주일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닙니다만, 원정대 전체가 움직이면서 넉넉하게 지낼 정도는 안 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베이스캠프를 다른 곳에 차리고 자리해주신 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을 그냥 베이스캠프에 남기고, 이 아홉 명만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지벡은 잠시간 공황상태에 빠졌었다. 후방을 공격해서 퇴로와 보급까지 작살내놓는, 그것도 무력수치로 따지면 여기 있는 놈들 다 합쳐야 비빌까 말까한 괴물을 상대로 달랑 아홉 명만 움직이자고? 이게 무슨 용사가 마왕군 뚫고 마왕 족치는 그런 만화인줄 아는 건가?
그 짧은 공황상태를 벗어난 지벡은 수 없이 많은 반론을 제기했었다. 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논리적인 반박을 말이다. 중간부터는 끼어들지 않고 구경만 하는 다른 놈들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류 현이라는 또라이는 지벡의 생각보다 훨씬 굳건한 또라이였다. 그는 한 문장으로 지벡의 반박들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이대로 뭉개고 있으면 사흘 안에 본 드래곤이 다시 날아와서 브레스 폭격가하고 튀는 패턴에 괴멸당합니다. 여러 번 할 것도 없이 한 번만 더 하면 지금 인원의 반도 안 남겠죠. 일주일? 식량이 다하기 전에 먹을 입이 열도 안 남을 겁니다.”
지벡은 그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지벡이 그날 낮에 온몸으로 겪었던 재앙이었으니까. 다른 놈들은 아무런 도움조차 안 되었다. 알 라시드와 마람 압둘아지드는 아예 스트라이커 몰빵형이었고, 다른 놈들의 안위는 조금도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벡이 인류애가 넘치는 성격이냐면 그건 아니었지만, 그는 적어도 베이스캠프가 통째로 얼어붙는 개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내상까지 감수하고 방어 마법을 펼쳤다. 중간 중간 그보다 급수 낮은 마법사들이 손을 보태려고 들었지만, 채 5초를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본 드래곤은 브레스를 내뿜는 짓을 5분가량 반복하더니, 미련 없이 지평선을 향해서 날아가 버렸다. 추가공격이 없었던 덕에, 지벡은 방어 마법이 깃든 반지 다섯 개를 제물로 바친 대신, 내상을 피할 수 있었다. 망가져나간 반지 값이 최소 수십억에서 백억 단위의 것도 있다는 사실은 지벡에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반인 병사들은 동사를 피하지 못했고, 쉰 명에 달하는 상위 플레이어들 중에서 내상이나 동상으로 거동불가능 상태가 된 이들이 속출했다. 뭘 해보기도 전에 원정대가 결딴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끔찍한 재앙을 직접 겪은 지벡에게 있어서, 류 현의 말은 필사적으로 반박하고 싶으면서도 반박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 말고 제대로 반박하려는 놈이 없는 게 말이 돼?’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긴, 나도 몰랐는데 그딴 식으로 찾을 줄 누가 알았겠어? 씨발...’
지벡의 반대를 모두 물리치는 데 성공한 류 현은, 화련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시켰다. 이 눈밖에 없고 더럽게 넓기까지 한 곳을 스캔해서 리치든 본 드래곤이든 찾아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지벡은 그 소리를 듣고 류 현이라는 놈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돌아버리는가 했다.
화련이 희란과 손을 맞잡고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더니, 마력을 말 그대로 땅에 흩뿌리면서 난리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벡은 적의 필드나 다름없는 곳에서의 마력 낭비는 둘째 치고, 맹수의 영역에 개가 영역표시 하는 것과 별 다를 것 없는 그 짓을 멈출 수도 없었다. 반대할 기색을 본 류 현이, “그 쪽은 어차피 저희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대꾸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수행한 화련은 80km가량 떨어진 곳에 성 비슷한 것이 있다는 걸 말하고는 반 탈진 상태가 돼서는, 류 현의 등에 업히게 되었다.
지벡은 그 광경을 보고 2차로 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보통 저런 짓거리를 하고 나면 코피 분수쇼는 당연하고, 사흘은 아무것도 못먹는 상태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화련은 그런 상식 따위 제 알바 아니라는 듯, 당일에 밥만 잘 먹었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류 현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생각해둔 것처럼,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더니 그곳을 베이스캠프 삼아서 버티고 있으라고 이제는 마흔 다섯 명이 된 플레이어들에게 당부한 후, 화련에게 마법적인 조치를 부탁한 뒤 그대로 출발신호를 올렸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리치성까지 언덕하나만 남겨둔 상황. 무리는 금세 언덕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내 눈이 잘 못 된 건가? 저거 검정색이 아니라, 얼음성 같은데...나랑 다른 게 보이는 사람?”
지벡은 친해질 예정도, 마음도 없는 이들에게서 다른 대답을 바라며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앞에 서있는 성이 중국에서 본 그 검은 리치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얼음성이라는 사실만이 있을 뿐.
“제 생각보다 리치들이 훨씬 부지런 했군요.”
류 현의 말에 지벡은 그의 정신 이상을 의심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