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탐식마(貪食魔)
하얀 종이가 펼쳐놓은 것처럼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있던 얼음판이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살살 깨져나갔다. 눈과 얼음이 뒤엉킨 하얀 얼음판 위로 바닷물이 찰랑거렸다.
쇄빙선은 선수를 들이밀며 얇게 내려앉은 얼음판을 헤치고 나갔다. 웨인 크로이츠는 드물게도 경외감 속에서 쇄빙선의 선수부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가장 놀라고 있는 부분은 얼음판을 깨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속도였다. 쇄빙선은 올라타서 깨부숴야하는 얼음판을 만난 이후에도 성인 남성이 구보하는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통 쇄빙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선장의 정신상태가 의심되는 진행속도였다.
하지만 웨인 크로이츠는 함 내로 뛰어들지 않고, 느긋하게 그 광경을 감상했다.
‘미국은 역시 미국이군. 다른 나라들은 이런 쇄빙선을 다 해체하는 추세인데 오히려 투자를 해서 이런 물건을 만들 줄이야.’
류 현의 요청으로 웨인이 미국에서 ‘대여’해온 이 쇄빙선은, 2차 ‘대소환’ 이후 잊을만하면 나타나서 무역선을 덮치는 해양괴수들의 위협 때문에 각국에서 남극과 북극 개발을 손을 놓으면서 쇄빙선을 해체하는 추세에 반하는 그런 물건이었다.
해체는커녕, ‘대소환’ 이후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소재로 보강한 물건이었으니 타국의 관료들이 봤다면 아마 좋은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장비에 돈지랄을 해놓은 거니까. 아니, 류 현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미국 측에서도 이 물건을 쓰는 작전자체를 진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물건을 두 번 묻지 않고 대여해줬다...하긴, 미국이 탐내기에는 차고도 넘치는 남자긴 하지.’
웨인 크로이츠는 어지간해서는 통화할 일이 없는 미대통령인 제럴드 던컨과의 통화를 회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럴드 던컨은 아주 노골적으로 류 현을 미국의 친우라고 지칭하며, 침이라도 바르는 것처럼 그 호칭을 반복했었다. 쇄빙선 대여에 대한 계약에 관해서는 딱 두 마디만 했다. ‘보내주겠소. 어디요?’
아무리 던전의 시대가 열린 이후로 중심부에서 밀려났다지만,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강대국의 대통령이 보일만한 언행은 아니었다. 웨인 크로이츠는 어느 정도 그 언행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의문을 가졌다.
‘던컨 대통령은, 미국은 그의 그런 모습을 알고 있는 걸까?’
웨인은 그 생각을 하며 몸서리쳤다. 갑판 위에는 경계를 서고 있는 인원들이 있었지만, 웨인의 행동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냥 남극이라는, 엿같이 춥다는 말 밖에 안 나오는 이 곳에서는 플레이어도 별 수 없구나 하고 넘길 뿐이었다. 웨인이 몸서리를 친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그건...단순히 플레이어 능력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야.’
웨인 크로이츠는 얼음 바다에서 시선을 올려 먼 곳을 바라보며 제 기억을 헤집었다. 그리 오래된 기억도 아니어서, 웨인은 그 소름끼치는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검은 안개에 완전히 뒤덮여서 날뛰던 류 현의 모습을.
‘딱히 특별한 대가를 치르는 것 같지도 않았어. 겉으로 보기에는 이주일 넘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웨인 크로이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남극 원정이 결정되기까지 이주일의 공백기동안, 웨인은 굳이 핑계거리를 만들 필요도 없이 류 현을 관찰할 수 있었다. 중국 동부를 쑥대밭으로 만들던 리치성을 저지하기 위해서 소집되었던 최상위 플레이어 아홉은, 중국 당국에서 소집한 백여 명의 플레이어들과 달리 바로 해산하지 않았으니까. 중국에서 끌어 모은 인원과 달리 별다른 피해도 입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은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발을 빼버렸다.
중국이 숨겨놓은 리커창 같은 패를 알고 있는 웨인은 내심 못마땅하긴 했으나, 그 자리에서 그것을 터뜨리진 않았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중국이었으니까. 초토화된, 아직 피해액의 추산조차 덜 끝난 도시 피해는 제쳐두고도 말이다. 그 짧은 전투 동안 서른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온 것이다. 반 년 가까이 요양해야하는 부상자까지 넣기 시작하면 투입 인원 거의 과반에 달한다. 송장목이나 포션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패를 숨긴답시고 헛짓거리를 했다고 말하는 건 속은 시원할지언정, 협회 소속인 웨인에게는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웨인은 중국정부에 항의하는 대신, 너무 급진전된 사태에 벙쪄 있던 이들이 귀국하지 못하지 않게 달래는 것에 치중했다. 그 와중에 틈틈이 류 현을 관찰한 건 덤이었다.
류 현은 왕관을 뒤집어쓴 리치가 성을 통째로 텔레포트 시킨 직후부터 귀국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굴었기에, 관찰에 힘쓰기에 더 용이했다. 욕먹을 만한 짓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웨인은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경질 반응조차 없었어. 분명히 그 때 풍기던 기도는 타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달랐어. 그런데 그런 커다란 힘을 그런 식으로 쓰고도 변화가 없다고...?’
관찰을 거듭할수록 혼란만 더 해져갔지만 말이다. 웨인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 전투 당시, 검은 안개에 완전히 밀봉되어있던 상태의 류 현과 2시간 전에 인사를 나눴던 류 현을 비교해봤지만 어떻게 봐도 동일 인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플레이어들 중에서 전투시와 평상시가 아주 딴판인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그 경우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으로 봐야하는 거고.’
류 현은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플레이어 기준에서는 인격자까지는 아니어도 대하기 편한 편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류 현과 협회 간의 소통창 역할을 오래 해온 웨인이 보기에 지난 이 주간 류 현은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벡 건터가 오희란에게 자꾸 껄떡거리자 좀 짜증을 내긴 했지만.
‘그런 힘을 쓰고도 아무런 반동이 없다는 게...말이 안 되잖아?’
물리법칙을 대놓고 엿 먹이는 것 같은 플레이어들도 한 가지 법칙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큰 힘을 쓸수록, 그 힘을 발휘한 몸뚱이가 상한다는 것이다. 굉장히 높은 효율로 마력검을 사용하는 검성이나, 온갖 아티펙트로 제 능력의 반발을 막는 지벡 건터 또한 이 법칙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검성은 마력검을 한 시간 이상 사용한 날에는 팔에 감각이 이상이 생긴 것 같은 행동을 보이고, 지벡 건터는 또라이라는 세간 평이 의심될 정도로 축 쳐진 채로 침묵한다. 그 괴물 같은 류 현이 키운 용잡이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쓰는 힘에 비해서 회복이 이상하리만치 빠르긴 했지만, 그녀들은 리치성 돌입 당일 날 꽤나 힘들어 했었다.
아니, 그 작전에 참가한 모든 플레이어가 그랬었다. 단 한명, 류 현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거기다가 그 검은 기운의 꺼림칙함은...’
웨인은 다시 떠올리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어 그 기억을 떨쳐내었다.
‘...그래, 지금 이렇게 고심해봐야 답이 나올 리도 없고...’
웨인은 한 숨을 푹 내쉬었다. 한 숨과 함께 제 고뇌도 쓸려나가는 것처럼.
‘...베이스캠프 구역이 얼마 안 남았지. 지금 생각해봐야 결론도 안 나고...당장은 거기에만 집중하자.’
웨인의 생각을 긍정해주려는 것인지 때 마침, 항해사 직책을 달고 있던 사내가 웨인에게 달려왔다. 웨인은 남자의 표정만 봐도 뭘 말하는 지 알 것 같았다.
***
“젠장, 이런 눈밖에 없는 곳에서 대체 무슨 뻘 짓이야.”
지벡 건터는 욕지거리와 함께 침을 퉤 뱉었다. 바닥에 닿자마자 그가 내뱉은 침이 얼어붙었다. 지벡 본인은 실감하기 어려웠지만, 정말 지랄 같은 날씨였다. 궁시렁 거리며 주변을 돌아보려던 지벡은 강렬한 시선과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시발, 깜짝이야.’
마람 압둘아지드가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 것 같은 험악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벡 건터는 먼저 슬쩍 눈을 돌렸다. 평소의 그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반응이었지만, 상대는 마법사를 엿먹이려고 태어난 것 같은 괴물이었다.
‘...되는 일이 없네. 그 때 그냥 원정대 안 끼겠다고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약 삼 주전의 자신을 탓해보지만,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중국에서 리치성을 완전히 끝장내놓는데 실패한 지벡은 어영부영 이렇게 남극까지 오게 되었으니까.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지만, 지벡은 갈수록 자신이 글러먹은 선택을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친놈 옆에서 뭘 관찰을 하겠다고!’
온갖 것들이 다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남극행에 어영부영 참가하게 만든 호기심을 유발한 류 현이라든지!
물론 그 원망을 겉으로 드러내는 미친 짓은 제아무리 지벡 건터라도 할 수는 없을 테지만.
‘빌어먹을 뼈다귀 새끼들. 대체 남극에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기어들어온 거야? 괴수면 도시 폭격이나 하고 있는 게 정상이잖아?’
임시이긴 하나, 협회의 본 드래곤 대책반의 일원으로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벡은 그 부분에 대해서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본 드래곤 두 마리가 갑자기 필리핀의 케손시티를 공격했을 때부터 말이다. 리치성 공략 이후로는 류 현이라는 미치광이 때문에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하지만 그 괴물은 정찰이랍시고 베이스캠프를 지나쳐서 전진기지로 점찍어둔 구역까지 가버렸으니까. 그게 어제 일이니, 최소한 이틀간은 볼일이 없는 것이다. 대신 칼리프 클랜의 알 라시드와 마람 압둘아지드가 지벡 건터와 함께 베이스캠프에 남았다. 각국에서 마지못해 파견해온 쉰 명가량의 플레이어들 또한.
졸지에 알지도 못하는 인간 사이에서 고립된 처지가 된 지벡의 기분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일과가 끝난 이후에 스트레스 발산할 유흥가조차 없는 남극이 아닌가. 할 일이라고는 제 텐트에 틀어박혀서 짜증을 곱씹는 것 밖에 없었다. 던전 안이면 몰라도, 현실에서는 정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이야기였다. 지벡은 하등 쓸모없는 감정 소모 대신, 차분하게 사태 파악에 힘쓰기 시작했다. 소집 같은 것에 무조건 응해야하는 의무 같은 건 없지만, 눈뜨고 목 날아가는 상황은 피해야할 것 아닌가?
‘이상해. 그 본 드래곤인지 뭔지 하는 것들부터 시작해서, 이번에 튀어나온 괴수 놈들은 다 상태가 이상해. 대체 뭐가 바뀐 거지? 6성 리치가 뜬금없이 튀어나왔을 때가 기점인건가? 아니면 X던전? 하지만 그건 발견된 지 일 년이 넘었다고 했잖아. 클로징 되었을 때가 기준인가?’
남극의 말 그대로 칼바람이 대충 여며놓은 앞섶을 후벼 팠지만, 지벡 건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을 계속했다. 주변에서 플레이어가 아닌 이들의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전이랑 비교도 안 되게 진전속도가 빨라. 6성 리치가 나타난 지 일 년이 채 안 됐는데 7성에 그 이상 급으로 보이는 놈이라니...본 드래곤 그 새끼도 원래 있던 기준으로는 분류 불가야. 괴수 질이 갑자기 널뛰기한 이유가 대체...거기다가, 이 새끼들 어디 던전에서 나온 지도 모르잖아? 류 현 그 새끼 설마 X던전 클로징 못했는데 구라를...’
쿠웅! 발밑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에 지벡은 생각을 멈추고 근원지로 추측되는 방향을 바라봤다. 주변에는 수많은 일반인 병사들이 널브러진 상태였다.
[---!] 다음 순간, 지벡의 오금마저 저리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피어가 원정대를 덮쳐들었다. 일어서려던 일반인 병사들은 거품을 물면서 기절했고, 그들은 양반이라는 듯이 제 팔을 쥐어뜯으며 자해하는 이들마저 있었다. 플레이어들이라고 해서 사정이 훨씬 낫거나 하진 않았다.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던 플레이어 중 과반 이상이 기절해버렸으니까. 정신을 유지한 이들도 상태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부지불식간의 기습이었으나, 이곳에 모인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피어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윽박지르며 버티고 서있던 지벡은 제 머리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보며 욕지기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본 드래곤. 제 머리 위에 친절하게 자신이 어떤 괴수인지와 각각 타쿨란, 타칼란 이라는 이름까지 달고 나타난 본 드래곤 두 마리에 베이스캠프 위에 제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친...본 드래곤...? 그 새끼는 대체 어떻게 저런 걸 버틴 거야...?”
지벡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두 마리의 본 드래곤은 각각 아가리를 턱관절이 걱정될 정도로 벌렸고,
푸화악! 있는 힘껏 브레스를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