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4화 〉탐식마(貪食魔) (174/429)



〈 174화 〉탐식마(貪食魔)

문이 벌컥 열리며 잔뜩 상기된 얼굴의 화련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발소리나 다가오는 마력의 기색으로 화련임을 알아채고 있었지만  현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정을 요하는 환자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서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화련 씨?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상식적으로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그녀가  현보다 더 빨리 어떤 소식을 접하는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만, 류 현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곧바로 자신이 헛소리를 내뱉었다는 걸 인지하였지만.


“무슨 일은, 마스터가 치셨죠! 이거 대체 뭐에요? 제가 자고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인터뷰를 한 거에요?”


화련의 손에는 신문이 들려있었다. [유명세에 눈이 먼 것인가? 호주 정부의 절규를 무시한 류  대장.] 이라는 글자가 강조되어 있고, 보도 못한 남자가 등 돌린 사진이 실려 있었다. 어떻게 봐도 류 현이라는 인간을 천하의 개자식으로 보이게 만드는 기사였다.

 현은 화련이 흔들어 보이고 있는 신문의 최상단에 쓰여 있는 신문사 이름을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저런 가십지를 왜 우리 숙소에 넣어주는 거야?’

“그거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아니,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먹어도  욕만 들어먹게 생겼는데! 화나지도 않아요?”
“그 기사 쓴 인간 이름이 레넌 슈웰 아닙니까?”

화련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류 현을 한  보고는 기사 하단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류 현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류 현은 그녀의 시선에 차분하게 대꾸했다.


“기자회견...이라고 하긴  그렇고, 두 분이 주무시는 동안 가볍게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었는데,  인간이  때문에 좀 엿을 크게 먹었거든요. 아마 기사  새도 없이 잘릴 줄 알았는데...총리가 묵인한 건지 아니면 일처리가 느린 건지...거  자기 안위 문제에는 칼같이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람 잘 못 본 건가?”

질의응답 진행을 지켜보지 못한 화련은 그저 아리송할 뿐이었다. 그녀가 한결 진정된 얼굴로 고개만 갸웃하자 류 현은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죠.  그냥 돌아가서 휴식하셨으면 합니다만, 사정을 듣기 전에는 방으로 안 돌아가실 테고...어차피 아셔야 하는 이야기니. 그런데 희란 씨는 아직 주무시는 겁니까? 두 분이 같은  쓰신다고 들었는데.”
“언제 깼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보다 먼저 일어나서 제 자리를 봐주고 있더라고요. 그냥 봐도 제대로 못 잔 거 같아서 재우고 나온 거에요.”


그 대답에  현은 이마를 부여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희란은 중환자라고  것까진 아니었지만, 청뢰를 연발로 그것도 낼 수 있는 최대 위력으로 쥐어짠 덕에 꽤 소모가 심각했다. 당분간은 마력운용을 자제해야할 정도로 말이다. 환자가 중환자를 돌보는 격이다.


따로 치료할 것도 없이 푹 쉬면 닷새내로 완전히 회복할 테지만, 이래서야...

‘그렇다고 승하를 붙여줄 수도 없고. 걔도 정도만 덜하지 환자인데. 백혜라는 승하가 엉뚱한  못하게 계속 붙여 둬야하고...’

팀원들의 상대를 곱씹어보니 절로 한 숨이 새어나올  같았다.  드래곤 둘 중에서 한 놈도 심각한 손상을 못 입혔는데, 이쪽은 부상자투성이다. 플레이어 특성상 금방 털고 일어나서  실력을 발휘할  있기야 하겠지만, 골치 아픈  매한가지다. 화련의 경우에는 일 이주로는 완전 회복을 장담할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한 놈이라도 잡았다면 이정도면 남는 장사지만...’


엘더 리치의 난입 때문에 계획이 헝클어졌다. 이 정도 부상에 그친 것이 다행일 정도로 곤란한 순간에 등장한 엘더 리치로 인해서, 건지는 것 없이 부상만 당한 상황인 것이다.


겉보기에는 가장 멀쩡한 류  마저 오른팔이 이전의 전력을 되찾으면 한  이상이 걸릴 터. 중간에 자잘한 부상이나, 싸움이 낀다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플레이어의 육체가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보여주는 건, 점진적으로 마력에 적응해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화련 같이 작은 몸에서 고층빌딩을 그대로 뭉개버릴  있는 마법이 발현되고, 10톤 트럭에 들이받혀도 다시 벌떡 일어날  있는 것이다.

이게 하루아침에 그게 가능하다면, 상위 길드는 아예 퍼플 블루급 던전에 쩔파티라도 꾸려서 운용했을 것이다. 현실은 루키를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 중 하나일 뿐.


류 현마저 이 법칙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벗어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새로 돋아난 팔을 마력에 적응시킬 수 있는 정도다.

그 이전에도 실력 발휘를 아주 못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대가로 다시 오른팔이 터져나가게 되겠지.


‘맘 같아선 전부 휴양지에 던져 넣고,   정도 아무것도 못하게 하고 싶다만...’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본 드래곤 두 마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까! 단순히 엘더 리치가 존재한다는  넘어서, 그 놈이 본 드래곤 두 마리를 장악할 정도의 괴물이라는 것도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 손 놓고 몇 달씩 휴식기를 가지는  불가능해졌다.


‘막말로 중국이나 여기 호주나 어찌되든  알바 아니긴 하지만...이젠 모른 척하기도 힘들어졌지. 달고 있는 명패 떼지 않는  그건 안 될 말이지.  할아버지가 기자회견에서 거하게 터뜨려준 덕택에 유명세도 탔고.’

거기다 플레이어 협회장, 클라우드 윈스턴에게 요구했던 직함을 이제 세계가 안다. 류 현이라는 남자가 그 본의는 어떻든 간에, 협회와 UN의  드래곤 대책반 직함을 달고 초유의 괴물과 싸우고 있음을 안다. 과장 좀 많이 보태서, 뉴스나 신문에 손도 대지 않는 수준이 아닌 이상 그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희망에서 천하의 개새끼 되는  순식간이지.’


명성이라는 건 얻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 거기다  현이 바라는 것은, 그냥 입에 오르내리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상징. 빌어먹을 괴수놈들의 머리통을 장난하는 것처럼 따버리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최선두에 서는 선봉장! 그 등을 외면할  없게 만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뒤쫓게 만드는, 제 몸을 불태우는 혜성처럼 빛나는 자!


‘뭐, 그 정도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목표를  정도 잡아둬야 전생처럼은  되겠지.’


정확히는 영웅이 아니라 냉정한 침묵 속에서 변변한 지원도 없이 외롭게 싸웠던, 전생의 처지를 벗어나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지만, 대략적인 지향점은 그것으로 삼았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누나인 세아의 행동을 참고한 것처럼 말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엘더 리치가  드래곤 데리고 잠수 탔으니, 당분간은 치료에만  쓸 수 있어. 그 기자놈...그 때는 좀 짜증나긴 했지만, 덕택에 좋은 핑계거리를 얻었어.’


류 현이 대꾸할 가치도 없는 질문에 그렇게 극적으로 반응한 이유는 그거였다. 당분간 아무도 그들을 못 건드릴 좋은 명분으로 삼을 수 있으니까. 이만 리 타국에서 괴물과 싸우다가 부상당한 이들을 들쑤신 가십지 기자. 화난 채하며 뭉개고 있기 이보다 좋은 핑계가 어디 있겠는가?


이전 생, 기자들이 접근조차 못하던 시절에도 그런 질문을 받으면 그냥 무시했지, 이번처럼 반응한 적은 없다. 혼자 행동할 때는 이런 눈치를 볼 필요도, 생각도 안 했었다.


‘대장 노릇하기  힘들군. 역시 이런  나랑 안 맞아.’

“마스터?”

사정을 설명하겠다던  현이 멍하니 있자 화련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표정을 살피려 상체를 내밀어왔다.  현은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하하, 저도 피로가 없진 않은가 보군요. 잠깐 멍해졌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류 현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정정기사를 들고 레넌 슈웰이라는 기자가 총리와 함께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그게  현과 호주 총리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

최악의 형태로 끝이 난 그 질의응답으로부터 삼주 후.

해먹 위에 늘어져있던 류 현은  휴대폰의 우는 것을 듣고는 화면을 확인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웨인이었다. 류 현과 팀원들의 부상 소식을 듣고 나서, 전화통화를 포기하고 메일과 문자로만 연락하던 그였다.

“예, 웨인 씨. 류 현입니다. 일단 숨 좀 고르고 말씀하시죠.”


지난 삼주  호주 정부의 어떤 요청에도 들은 척도 안하고 침묵을 유지하던 류 현의 입은, 휴대폰 화면에 출력된 웨인이라는 두 글자에 너무도 쉽게 열렸다. 총리가 이 모습을 봤다면 지난 삼주 간 그를 찾아온 스트레스성 탈모가 더욱 박차를 가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 현은 전화기 너머의 웨인이 숨을 고르는 것까지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지금 전용기를 수배해서 그 쪽으로 보냈습니다. 지금 부상을 치료 중이시라는 건 알고 있지만, 중국으로 와주셔야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로서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웨인이 답지 않게 횡설수설하자 류 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중국 쪽이면 그 리치성 문제일 텐데, 그놈들이 구덩이 안에서 튀어나오기라도  것일까? 큰일이긴 하지만 사방이 사막이라서, 정부에서 대피만 잘 시키면 괜찮을 것이다. 그로인한 국가산업 정지나, 재산피해는 그가  바 아니었다.

“혹시 리치들이 구덩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했습니까?”
-아, 아닙니다. 훨씬  끔찍합니다!-

웨인이 외치는 소리에 류 현은 불길한 예감을 넘어서, 호기심마저 느꼈다. 대체 뭐가 터졌기에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당황한 것일까.

-지금 리치 성이 부상해서 남하하고 있습니다. 진격로에 동부 대도시들이 대부분...-

 현은 그제야 웨인의 당황을 이해했다. 호주 내 여론이 어떻게 들끓던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회복에 힘쓰던 그조차 무시하기 힘든 아니, 무시해서는  되는 천만 단위의 인명이 갈려나갈 수 있는 그런 사건이 터진 것이다.


곧바로 가겠다고 대꾸하려던 류 현은 잠깐 멈칫했다. 그 잠깐 동안 생각을 마친 류 현이 입을 열었다.


“웨인 씨, 정신없으실 텐데 죄송합니다만, 요청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 말씀하시죠.-
“쇄빙선을 한 척 수배해주셨으면 합니다.”
-예...?-
“가능하겠습니까?”
-쉽진 않을 거 같습니다만...구할 수 있기는 할 겁니다. 아마 많이 남아있지는 않아도...그걸 대체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는지...?-

웨인이 제기한 것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드물지만, 무역선을 덮치는 해양괴수들 때문에 일정 규모이상의 선박에 플레이어 1개 팀이 동승하는  법제화 되어있는 상태다. 괴수가 없어도 위험한 북극해나 남극해 개척은 완전히 백지화 되었다.


당연히 그 얼음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쇄빙선들은 조기 은퇴를 당해서 무기한 정박 중이거나, 해체되었다.

그런 용도가 사라진 커다란 고철덩어리를 류 현이 왜 요구하는 것일까? 웨인은 숨죽여 류 현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기다렸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일단은 그쪽으로 제가 가도록 하지요. 팀원들이 동의한다면 다 같이 그 쪽으로 가게 될 겁니다. 그럼 거기서 뵙지요.”

류 현은 웨인이 뭐라고 할 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입에서 긴 한 숨이 터져 나왔다.

“후우...좋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눈치 볼 것 없이 정면 돌파 해주마. 해골 대가리 놈아.  수작질 부리기 전에 박살을 내주지.”


류 현의 눈은 자신이 향하게 될 중국이 아니라 남쪽을, 남쪽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쪽의 끝을.


‘...막상 가봤더니 사실은 북극에 진치고 있었다. 이런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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