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탐식마(貪食魔)
[크르르-]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하얀 동체가 움직이자 그 아래에 깔린 창백한 모래의 바다가 출렁거렸다. 그 영향으로 모래 밑에 있던 전같 같은 곤충들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본 드래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사막의 열기 이상으로 불쾌한 건 아마 없을 테니까.
지시가 없었다면 진작 날아올라서 떠났을 메마른 땅. 본 드래곤 두 마리는 겨울이라는 곤란한 시기를 맞이한 곰이라도 된 양, 동면한 것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약간의 뒤척거림이 소란을 일으키는 일상이 반복될 뿐. 거기에 반응하는 동물들이라고 해봐야 본 드래곤에게는 어떻게 해도 해를 끼치지 못한다. 사막이라는 네임드 몹 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환경을 제외하면 이 사막의 어떤 것도 영향을 줄 수 없으니, 본 드래곤들은 반쯤 동면 상태를 유지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듯 보였다.
버적버적 상위 괴수의 감각으로 듣지 못하는 게 이상한 모래 밟는 소리가 셋. 그러나 본 드래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발소리가 자신들이 늘어져있는 공간 바로 앞의 사구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륵?] 발소리들이 사구에 도달한 것이 기점이었다. 아무리 늘어져있다곤 하나, 무의식중에 펼쳐놨던 감각의 그물 안에 들어와 있던 것들이, 사구에 도달한 것을 기점으로 갑자기 신경 쓸 만한 존재로 바뀐 것이다. 그 이전까지 없었던 마력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그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이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본 드래곤이 모아온 정보에 의하면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류 현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아니, 조금 짜증나는 일이라고 해야겠지. 기껏 기척이나 마력규모를 숨기기 위해서 수련했는데, 100미터 안 쪽으로 들어가면 들키고 만다는 걸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본 드래곤이 반응한 건 류 현의 기척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계획대로 진행할 뿐이지만. 자신보다 훨씬 감각이 좋은 네임드 몹을 상대로 기습이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크게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 작전대로 갑니다. 제가 저 놈이랑 탱고를 추든 말든 내버려두셔야 합니다. 아니면 남은 한 놈을 제대로 물고 늘어질 수가 없으니까요.”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귀에 달고 있는 무선 무전기를 통해서. 항마석을 말 그대로 갈아 넣어서, 한 짝에 영이 여덟 개는 붙는 물건이라 대여해준 호주의 관료가 쩔쩔 매면서 되도록 회수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괴수 밀집지역에서 작전 수행할 때, 쉴드 공명과 마력응집 현상 때문에 통상적인 통신장비는 제대로 기능하지를 못해서 나눠주는 물건이지만, 류 현은 당당하게 대여를 요청했다. 네임드 괴수의 말도 안 되는 마력 보유량과 쉴드의 질을 생각할 때 이 마저도 제대로 기능해 줄지 의문이었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희란의 목소리 섞인 긴장한 기색까지 생생하게 전달 해주는 걸 보면 말이다.
“제가 돌입하고 5초입니다. 승하 씨는 남은 놈 방해를 해주시는 것도 좋습니다만, 화련 씨 보호에 좀 더 신경 써주시고요. 덩치가 워낙 큰 놈이니 잠깐만 지체해도 사정거리 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브레스는...”
“알았어, 알았어. 만전을 기하려고 총리 징징거리는 걸 이틀 동안 그냥 들어준 거잖아? 나 완전 팔팔하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럼에도 쉽사리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류 현은 친구를 한 번 돌아봤다. 승하는 류 현의 걱정을 공연한 것으로 만드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응했다. 류 현은 픽 웃었다. 뭐라고 말을 더하는 대신, 류 현은 허리뒤쪽에 매달고 있는 거대한 몽둥이 같은 것의 자루를 움켜주었다.
‘이것도 병이라니까. 고쳐지긴 하려나?’
“그럼 갑니다.”
퍼엉! 시작 선언과 함께 모래먼지가 폭발하듯이 솟아올랐다. 불안한 발판에도 불구하고 류 현은 발 구름 한 번에 쏜살이 되었다. 본 드래곤들이 그에 반응 하듯, 몸을 일으켰지만 류 현이 닿는 것이 훨씬 빨랐다.
콰지직! 류 현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거대한 몽둥이가 본 드래곤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류 현이 내려친 몽둥이를 끌어당겨 제 2격을 내리치려던 그 때였다.
콰르르릉! 맑다 못해 메말라 비틀어진 사막의 하늘을 벽력이 꿰뚫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으로 발동된 청뢰가 토해낸 전격의 창! 그것이 남은 작은 본 드래곤, 타칼란을 후려쳤다.
찌지직! 짜작! 청뢰에서 뿜어져 나온 번개는 단 번에 꿰뚫지 못하고 쉴드 부근에서 막히는 듯하다가, 기어코 비집고 들어가 동체 위를 내달렸다. 쉴드를 뚫느라 힘이 소모된 탓에, 멈칫하게 만드는 게 전부였으나 승하에게는 충분한 틈이었다.
키기기긱! 전격의 창에 이은 올려 베기! 승하의 몸집보다 수십 배는 더 큰 본 드래곤의 대가리가 위로 쳐올려졌다. 그 대가가 없진 않았지만.
“가면 갈수록 맞는 무기 구하기가 빡세질 거 같네. 한 번 휘두르고 이 꼴이라니.”
평소 그녀가 애용하는 크기가 아닌,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검신은 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두꺼웠다. 날카로움이나 속도를 경외시한, 단단함과 무게에서 나오는 물리력에 치중한 무기. 그럼에도 한 번 휘두르기에 날이 나간에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마력검으로도 이 이상 손상을 줄이는 건 무리였다.
콰르릉! 승하가 만들어낸 틈을 비집고 다시금 벽력이 본 드래곤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지체 정도가 훨씬 덜했다. 거의 쉴드에 부딪히자마자 뚫고 들어갔으니까! 본 드래곤도 타격이 없지는 않는지, 대가리를 좌우로 흔들더니 포효했다.
[크오오오!] 공기를 밀어낼 폐도, 떨어줄 성대도 없었지만 본 드래곤의 포효는 살아있는 샌 드래곤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했다. 샌 드래곤의 피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팔다리를 잠시나마 뻣뻣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승하는 이를 사려 물며 검을 뒤로 뺐다. 한 번의 심호흡을 끝내자, 그녀의 몸 위로 넘실거리던 마력과 적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화련이 싸우다 말고 대체 무슨 해괴한 짓거리냐고 지적하기 전에,
끼기기기기기긱! 카각! 퍼석! 검은 선이, 번개가 그녀의 칼끝을 따라 내쏘아졌다. 아니, 화련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본 드래곤의 눈구멍에 큼직한 상처를 남긴 검은 뭔가가 끝없이 허공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 그리 추측할 뿐!
“방금 그거 대체 뭐...”
“...끙.”
화련이 물음을 다 내뱉기도 전에 승하의 코에서 코피가 터져 나왔다. 마지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전처럼 시커멓게 죽은피가 아니라 시뻘건 그런 피였고, 3초도 안 되어서 살벌한 기세는 수그러들었지만 화련은 기겁을 했다. 설마 류 현이 스쳐지나가듯이 말하던 내상의 원인이 된 그 기술이라도 쓴 것인가? 저 여자가 아직 초반인데 무슨 정신머리로 저런 짓을! 화련이 다가서려고 하자, 승하는 손을 내저어 저지했다.
“괜찮아. 호흡 마무리를 하다가 조금 흐트러졌을 뿐이야. 내상까지는 아니야.”
턱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증발하는 피를 훔치면서 승하는 태연하게 굴었다. 실제로 그리 대단한 타격이 아니기도 했고, 진짜 내상이라도 그걸 티낼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진짜 말도 안 되게 단단하군. 권유대로 칼 안 바꿨으면 한 번 휘두르고 작살났겠는데.’
눈앞의 괴수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괴물이었다. 붙어서 칼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괴수의 쉴드 때문에 마력이 아주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희란이 류 현과 ‘링크’해서 나눠주는 마력이 아니었다면, 한 시간 버티기도 힘겨울 터.
‘딱 달라붙어서 칼질하다간 자멸하기 딱 좋겠네.’
빠아악! 찰진 타격음에 승하는 제 생각을 수정했다.
‘쟤만 빼고.’
류 현은 세 번째 타격을 본 드래곤의 대가리에 때려 넣으며 숨을 골랐다. ‘이쯤 하면 됐겠지.’ 류 현은 쥐고 있던 몽둥이 같은 것을 곧추세우더니, 그 끝으로 본 드래곤의 동체를 겨냥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마력검 기술로 감싸기만 했던 몽둥이에 검은 안개가, 탐욕의 안개를 더했다. 몽둥이치고는 꽤 벼려져 있던 끝부분에 탐욕의 안개가 집중되었다.
그 때, 류 현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던 본 드래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크르락!] 뼈밖에 없는 날개가 홰를 치는 동작도 없이 아래위로 움직이며 날개짓을 시작했다. 뼈밖에 없는 날개가 이질적이었지만, 누가 봐도 비행준비였다. 전투개시 직전에도 집중하라는 주의를 들은 화련과 승하 듀오가 돌아볼 정도로 요란한 비행준비. 괴수의 몸에 매달린 스트라이커 입장에서는 하등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류 현은 관심 없다는 듯이 본 드래곤의 동체를 노려보더니,
콰직! 쿠우욱! 겨냥하고 있던 몽둥이를 있는 힘껏 쑤셔 박았다. 기괴하게 생긴 몽둥이로 보이던 물건은, 제 진가는 이런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본 드래곤의 동체를 뚫고, 자루 앞까지 쑤욱 들어갔다. ‘송곳’이 파고들면서 낸 구멍 주변의 상처는 순식간에 수복되었지만, ‘송곳’을 밀어내진 못했다. 그 모습에 류 현조차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크라악!]
본 드래곤의 비명이 그의 미소를 더 짙게 만들었다.
‘성공이다.’
강 찬에게 샌 드래곤 뼈를 제공하면서, 수정을 거듭하며 수주해온 ‘송곳’이 제 자리를 찾아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본 드래곤놈들 덩치랑 마력량이 예상보다 커서 어떻게 되나 했는데, 그래도 동족의 뼈는 먹히는군.’
류 현은 성공에 고무되어 지체 없이 두 번째 세 번째 ‘송곳’을 꺼냈다.
그리곤,
쿠우욱! 콰직! 까각! 있는 힘껏 그것들을 본 드래곤의 척추를 따라서 쑤셔 박았다. 뼈뿐이라도 고통은 느끼는지, 본 드래곤이 쇳소리 같은 비명을 토하며 몸을 뒤채었다. 날아올라서 몸에 달라붙은 작은 벌레를 떼어내려던 생각은 고통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류 현은 미친 듯이 몸을 뒤틀어대는 본 드래곤에게 총 열 개의 ‘송곳’을 꽂고 나서야 튕겨져 나왔다. 가뿐하게 착지하는 모습은 의도적으로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가 떨어졌다고 본 드래곤의 발광이 그친 것은 아니었지만, 류 현은 그대로 굴러서 전투현장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희란 씨, 지금!”
콰르르릉! 전투 개시 때 두 발 이후 침묵하고 있던 청뢰가 다시금 벽력을 토해내었다. 이번에는 작은 쪽, 타칼란이 아닌 큰 쪽인 타쿨란이 타겟이었다.
짜자작! [캬학!] 본 드래곤 타쿨란에게 덮쳐든 벽력은 첫 두 방과는 확연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쉴드 앞에서 약간 주춤거리긴 했지만, 뚫자마자 앞의 경우와는 다르게 본 드래곤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어갔다. 바로 류 현이 박아놓은 ‘송곳’을 타고!
쿠웅! 류 현이 열 개의 ‘송곳’을 꽂아 넣는 동안에도 뻣뻣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던 놈의 대가리가 땅에 쳐 박혔다. 축 늘어진 채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뼈 밖에 남지 않은 본 드래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나, 류 현에게는 쾌재를 지를만한 광경이었다.
‘됐다! 희란 씨가 청뢰 출력을 계속 끌어내고 있을 때부터 기대하긴 했지만...진짜 말도 안 되는 물건을 얻은 거였어.’
입 밖으로 소리치진 않았지만, 류 현은 청뢰 한 방에 잠깐이나마 그로기 상태가 된 본 드래곤을 바라보며 희열마저 느꼈다. 청뢰와 통짜 샌 드래곤의 뼈로 만든 ‘송곳’. 류 현이 본 드래곤을 대비한 준비들이었다. 이 준비에 류 현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수가 그의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본 드래곤이 두 마리가 나타났을 때 류 현은 자신의 준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수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자신이 낸 ‘견적’이 먹혀들까? 응당 가져야만 하는 의심이었다. 어설픈 준비를 믿고 뛰어들었다가 팀이 전멸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차라리 혼자서 도전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런데 그 준비가 헛되지 않았음을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전투 중, 아니 전투가 막바지에 달하기만 했어도 그는 환호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이제 전투 초입이기에, 팀원들의 집중력을 깰 수 없으니 속으로만 미쳐 날뛰고 있을 뿐!
그가 해온 준비가 얼마만큼의 성과를 내었는지는 또 다른 본 드래곤, 타칼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놈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승하에게 열 댓 발의 칼침을 맞고도 화련의 지원 때문에, 승하에게 긁힌 상처 하나 못 내서 미쳐버리기 직전인 놈마저 고개를 돌려 동료를 살필 정도였다.
‘‘예거즈’ 미친 새끼들, 이런 물건을 그냥 쥐고 있다가 날려먹어?’
오죽하면 끄집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과거의 좋지 않은 감정들까지 떠오를 정도로, 극적인 효과였다.
‘후우, 집중하자 집중. 이 새끼들 다 족쳐도 아직 엘더 리치가 남아있어.’
끓는 속이 다 가라앉은 건 아니었지만, 류 현은 기세를 가다듬었다. ‘송곳’과 청뢰의 연계가 생각보다 훌륭하긴 했지만, 본 드래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긴 어려웠다. 애초에 자신이 하나를 족치는 동안, 나머지 팀원들이 하나를 물고 늘어지기 위한 준비였으니까.
궤도를 제대로 조정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 출력으로 세 번이나 청뢰를 발동시킨 희란은 아마 지금쯤 기진맥진해 있을 것이다. 안 되겠다 싶으면 붙여준 백혜라와 교대하라고 하긴 했지만, 아마 정신 놓기 직전까지는 이 악물고 자신이 할 터.
‘많아 봐야 두 번 이상은 그 위력으로 쏘기 힘들어. 승하가 있으니 그렇게까지 쥐어짤 필요는 없겠지만...그래도 최선은 빨리 끝내는 거지.’
류 현은 기세를 가다듬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칠게 제 안의 마력들을 밖으로 내뿜어내었다. ‘강림’의 준비 운동으로서.
미리 언질을 주긴 했지만 신경 안 쓰일 수는 없는지, 앞에서 작은 놈과 치고받는 중이던 화련과 승하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후우, 이번 생 들어서 제대로 된 ‘강림’은 처음...아니었지? 깨달음 얻었을 때 짧긴 했어도 제대로 발동했으니까...그 때 아무 문제없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수련도 했고.’
후욱! 류 현이 주변에 흩뿌린 마력을 타고 번져나가는 물감처럼 검은 안개가 그의 몸에서 스며 나왔다. 그의 흰자위에도 검은 안개가 스며든 것처럼 검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흰자위를 다 덮은 검은 기운은 눈동자까지 침범하더니, 얼굴을 갈아 끼우듯 눈동자를 하얀 빛으로 물들였다.
뚜둑! 우드득! 내부에서 뭔가 터져 나올 것처럼 류 현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음에도 물결치듯이 꿈틀거리는 팔 근육의 움직임이 기괴했다. 그의 입에서는 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과 같은 검은 안개가 날숨 대신 뿜어져 나왔다.
평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탐욕스러움을 가진 검은 안개가, 메뚜기 때가 들판을 갉아대는 것처럼 주변을 갉아대었다. 아니, 장악해 나갔다. 마력이 희박한 공간에는 검은 마력을 불어넣었고, 본 드래곤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마력은 미친 듯이 먹어치웠다. 마력의 흐름에 이상을 느낀, 얻어터지느라 바쁜 본 드래곤들이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련과 승하도 제 앞에 있는 것이 전장 30미터는 우습게 넘는 괴물 중의 괴물이 아니었다면 돌아봤을 것이다. 류 현의 에너지 드레인과 억누르긴 했지만 ‘강림’을 보아온 덕에 참을 수 있을 뿐.
얼굴이고, 팔이고 다리고 검은 안개가 갑옷처럼 감싼 꼴을 하고 있는 류 현은 슬쩍 무릎을 굽혔다. 그 때 였다.
“...?”
당장이라도 본 드래곤에게 달려들 것 같던 류 현의 고개가 뒤쪽으로 휙 돌아갔다. 류 현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본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려는 것처럼,
치지직! 허공에 갑자기 노이즈가 터져 나오더니, 공간이 열리고 리치가 튀어나왔다. 거의 4미터는 되어 보이는 장신의 리치는 휘황찬란한 금실 자수가 놓아져있는 로브와 그것을 꾸며주는 큼직한 보석 외에도 인상적인 장신구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 위의 왕관. 류 현이 아는 한 역사상 단 한 마리의 리치 밖에 가지지 못했던 그 상징이 리치의 머리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이다. 잘 살피면 머리 위의 이름 또한 볼 수 있겠지만, 류 현은 도저히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엘더 리치!’
그의 골머리를 썩이던 존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류 현이 그것을 말로 내뱉는 것보다 빠르게 엘더 리치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타겟은 화련이었다.
치지직! “꺄악!”
리치의 뼈뿐인 손가락이 화련을 겨냥함과 동시에 승하와 함께 떠있던 그녀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엄청난 타격은 아니었지만, 굳건하게 두르고 있었던 방어막을 아주 자연스럽게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화련은 방어막을 두드리는 무엇도 느끼지 못했다. 공격당했음을 느꼈을 때는, 이미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련아!”
화련이 무력화되자 마법이 풀려 마찬가지로 땅위로 내려선 승하는 그대로 화련에게로 내달렸다. 류 현도 그녀에게로 내달렸다. “엎드려!” 류 현의 외침에 승하가 빙글 뒤돌아 반전했다. 그런 그녀를 반기는 것은 본 드래곤의 꼬리 공격!
“이 새끼가!” 승하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고, 마력이고, 검기고 그녀의 모든 것이 칼끝에 집중되었다. 류 현은 일전에 느꼈던 오싹함이 등허리를 두들기는 것을 느꼈다. 미친, 지금 그걸 이 상황에서 쓴다고? 류 현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끼이이이익! 카가각! 검 끝에서 검은 선이, 번개가 내달렸다. 첫발과는 차원이 다른 농밀함을 지닌 검은 번개가!
도화지 위에 대충 연필로 그은 것 같이 비틀거리던 검은 선은, 본 드래곤의 꼬리를 우습게 관통했다. 쿠웅! 아니, 칼의 수백 배는 되는 굵기의 꼬리를 끊어놓았다. 본 드래곤이 고통에 찬 울음을 내뱉었지만, 승하 또한 멀쩡하진 못했다.
철퍽! 본 드래곤의 물리력에 밀려서 저만치 날아간 승하는 모래와 함께 핏물을 한 움큼 뱉어내었다. 쉽사리 일어서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이,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좋지 않은 곳에 얻어맞아서 늑골이라도 부러진 것일까? 아니면 또 다시 내상? 류 현은 고민할 새도 없다는 듯이 그저 내달렸다.
빌어먹을 리치의 손가락이 아직도 화련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리치의 등장으로 희란의 청뢰 지원이 잠깐 끊긴 사이에 류 현이 ‘송곳’으로 칼침을 박아준 큰 쪽 본 드래곤까지 회복해서 리치의 곁에 떠있었다. 류 현은 놈이 아가리를 벌린 채 멈춰있는 것에서 불길한 예감 이외에는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류 현은 화련에게 도달하자마자, 그녀를 끌어안고 전력으로 에너지 드레인을 펼쳤다. ‘강림’을 이미 시작한 터라, 검은 안개는 류 현의 수족처럼 움직여주었다.
“마, 마스...”
무슨 마법을 맞은 것인지, 아직도 온 몸을 떨고 있는 화련이 더듬더듬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류 현은 고개를 내젖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 직후,
냉기의 폭풍이 밀어닥쳤다.
푸화악! 쩌정! 콰드드득! 첫 시작은 본 드래곤의 프로스트 브레스였다. 방금 전까지 사막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존재가 내뿜는 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기가 두 사람을 덮쳐들었다. 류 현의 몸 주변을 뒤덮고 있던 검은 안개가 주인을 해하려는 마력에 반응했다.
까드득! 콰드득! 검은 안개가 갉아대고, 냉기가 검은 안개를 얼리려는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얀 폭풍 속에서, 류 현은 리치의 존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놀고 있는 오른팔을 뒤로 당긴 채로, 장전을 끝낸 포수마냥 때를 기다렸다.
쩌어엉! 콰드득! 우드득! 눈앞을 가리고 있는 냉기의 폭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류 현은 허공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류 현의 행동이 헛된 짓이 아니었다는 건, 바로 다음 순간 알 수 있었다. 류 현의 주먹이 후려친 바로 앞공간에 그의 몸뚱이 보다 더 큰 얼음 덩어리가 생겨났으니까!
“크윽...”
빠드드득! 뜨드득! 그리고 허공을 후려친 류 현의 왼 주먹에 서리가 끼더니, 그 세를 점점 불려서 류 현의 왼팔을 전부 먹어치울 기세로 커져가는 게 아닌가?
‘젠장, 아직 힘 조절까지는 안 되는군.’
류 현은 거의 어깨 죽지까지 타고 올라온 하얀 서리를 한 번 슥 보더니, 엉거주춤하게 반쯤 앉은 자세를 취했다. 아직도 마비가 풀리지 않는 건지, 꼼짝도 않는 화련을 제 가슴에 기대게 하더니,
우드득! 찌직! 카드득! 자유로워진 왼손으로 오른팔을 어깨 죽지부터 뜯어내었다. 뼈까지 냉기가 미친 것인지, 뜯어낸 오른팔의 손목 아래 부분은 떨어지더니 깨져나갔다. 화련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류 현은 머리 위쪽 일에 집중했다. 냉기가 어깨부근에도 미쳤는지, 출혈도 거의 없어 신경 쓸 것도 못되었다.
어느 새 하늘에는 승하에게 꼬리를 잘린 작은 본 드래곤도 떠있었다. 리치를 보좌하듯이 좌우에 한 마리씩. 류 현은 그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
‘젠장 20분만, 아니 10분만 있었어도 하나는 족칠 수 있었는데!’
그런 류 현의 분함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리치는 그들을 한 번 쓱 돌아보고는 휘적 손을 휘둘렀다.
지지직! 슉!
노이즈와 함께 리치와 본 드래곤들은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