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탐식마(貪食魔)
짠 내와 비린내가 뒤섞인 바닷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류 현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기묘한 비린내에 코끝을 찡그렸지만, 자리를 떠나진 않았다. 그는 바다를 보고 있는 게 매우 중요한 일 인양,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다. 시야 안에서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음에도 말이다.
실제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건 그의 머릿속이었다.
시드니의 본다이비치. 세계 최초로 이름을 달고 나타난 본 드래곤 두 마리의 추적 및 섬멸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출국한 이들이 있기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곳.
‘협조를 받게 된 건 좋은데...지금 상황을 좋아라 하는 건 좀 그렇지.’
계획의 이정표에 들어있지 않은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은, 그가 목표로 한 본 드래곤의 예기치 못한 기행 때문이었다.
‘얌전히 눈이나 퍼먹던 놈들이 갑자기 필리핀에서 분탕질 칠 줄은...괴수가 인간을 공격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엘더 리치의 지휘를 받는 것치고는 일관성이 없어.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건가?’
류 현이 비밀 공개를 공약으로 내걸며 본 드래곤 추적을 천명한 다음날, 필리핀 상공을 지나던 본 드래곤은 뭐가 거슬린 것인지 필리핀의 케손시티를 공습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는, 어린아이의 변덕 같은 공격이었다.
초토화. 어린아이의 변덕처럼 갑작스럽게 시작된 그 공격에,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참상이 벌어졌다.
본 드래곤의 공격방법은 간단했다. 20m상공까지 내려온 그것들은 러시아에서 눈과 얼음을 퍼먹은 게 이걸 위해서였다는 듯, 브레스를 있는 힘껏 내뿜었다. 자신들의 시야 안에 살아 움직이는 도시 내의 인간이 남김없이 얼어붙을 때까지. 케손시티는 말 그대로 얼어붙은 도시가 되었다.
필리핀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 드래곤의 공습이 계속 되었던 2시간동안 투입한 공군병력이 본 드래곤의 몸뚱이에 긁힌 자국조차 만들지 못하고 격추 당했을 뿐.
그렇게 두 시간동안 브레스를 번갈아가면서 퍼붓던 본 드래곤들이 떠나고 나서야, 케손시티에 사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임드 괴수가 만들어낸 참상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도시 상공에 나타난 본 드래곤을 보고 몸을 웅크렸다가 그대로 얼어붙어버린 여자나, 서로 자식들을 감싸다가 한 덩어리로 얼어붙은 가족 등. 몇 시간전만해도 살아 움직이던 도시가 통째로 얼어붙은 참상에, 어떻게든 생존자를 찾으려고 진입했던 구조대는 할 말을 잊었다.
구조대를 넋 놓게 만든 그 참상은 만 하루가 되기도 전에 전 세계에 알려졌고, 세계 시민들의 불안감은 증시 폭락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왔다. 2차 ‘대소환’ 초기에나 보이던 폭락폭에 증시 문을 일시적으로 닫아야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리 대 괴수전력이 약하다고는 하나, 두 시간 만에 도시를 통째로 얼려버리는 괴수의 존재는 사람들의 이성까지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 괴수가 비행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필리핀의 공군력에도 끄덕도 안 했다는 소식까지 보도 되자, 대형마트의 통조림 코너가 거덜 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당장 본 드래곤을 때려잡지 않는 한, 혼란을 수습하기는 요원해 보였다.
시민들을 진정시켜야하는 각국 정부마저 이 사태에, 자국의 최고 길드의 장이나 기관장을 불러서 저 미친 괴수를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닦달할 지경이었으니까.
핵이라도 쏘지 않는 이상 화기로는 생채기 내기도 힘들어 보이는, 저 커다란 괴물이 두 시간이면 작은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 그것도 뼈밖에 없는 날개로 날기까지 한다! 던전이나 플레이어에 대해서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자들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저건 전투기로 떨굴 수 없는 전략 폭격기나 다름없다는 것을 말이다. 플레이어들이 어떻게든 매달려서 상처를 내야하는 상대임을 감안하면 그 보다 더 끔찍해질 수 있다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 또한!
본 드래곤의 이동경로에서 멀찍이 벗어난 국가마저 그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저 미친 괴수는 생긴 것처럼 지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니, 길을 가다가 심심풀이로 자국에 와서 도시 하나를 얼려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도시를 보고도 본채 만 채 하며 제 갈길 가던 놈이 왜 갑자기 필리핀에서 분탕질 친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 때 협회가, 협회장 클라우드 윈스턴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민들의 혼란에 전염된 것처럼 아우성치는 기자들을 향해서 윈스턴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협회는 이미 대책반 가동에 들어갔으며, 대책반의 인선은 현실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라인업으로 짜였습니다.”
한 기자가 반문했다. “제가 알기로는 대책반을 신설하기는커녕, 각국 정상들과 협조를 구할 시간도 없으셨을 텐데 어떻게 최고의 라인업을 구축했다는 겁니까?”
‘최고의 플레이어들은 협회에 속해있지도 않은데, 각국 정부에 손도 안 벌리고 어떻게 최고의 라인업을 짰다는 거냐?’라는 속내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질문이었다.
무례하다면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질문에, 윈스턴은 젊었을 시절 뭇 여인네들의 가슴을 녹인 자신만만하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대책반은 파주, 뉴욕, 카이로에 등장했던 X던전을 클로징을 주도한 용잡이 팀. 그 팀의 장인 류 현대장과 검성이 진두지휘하기로 했습니다. 이 정도면 만족할만한 대답이 되셨는지?”
윈스턴의 대답에 기자들은, 오늘 집에는 다 갔구나 하고 야근을 직감했다.
그렇게 본 드래곤의 분탕질과 협회장의 언론 푸쉬까지 더 해져서, 류 현은 예상보다 훨씬 협조적인 호주 총리와 이야기를 끝마친 상태였다.
진행방향을 봤을 때, 본 드래곤이 갑자기 미쳐서 왼쪽 깜빡이를 넣고 미국으로 돌진하지 않는 이상, 다음 휴게지는 호주가 될 것으로 보였으니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곤란한 건 총리 쪽이긴 했지만.
‘그 영감님이 이런 식으로 밀어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었는데 말이지.’
끽해야 거쳐 가는 나라들의 수뇌부에게 부탁해주는 정도가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예상을 비웃듯이, 기자회견 한 방으로 이렇게 인지도를 끌어올려줄 줄이야.
전생의 기억을 가진 그였기에 생각지 않고 있었던 맹점이었다. 언론이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같은 편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인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으면서도, 전생에서 쌓은 언론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적극적으로 언론을 이용하는 짓은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류 현은 스마트 폰을 조작해서 기사 하나를 띄우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신을 무슨 본 드래곤이라는 괴수의 공포로부터 세계를 구해낼 영웅 취급하는 기사가 이것뿐만이 아니라 수십 개는 되었다. 화련이 깔깔거리면서 보여준 것들이 그 정도는 된다는 의미다. 류 현에게는 제 이름을 검색해보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나 원, 기사 내리라고 깽판 칠 수도 없고...안 될 것까진 없지만 벌써부터 이렇게 설레발치다가 역풍 맞는 거 아닌가 몰라.’
당장 지금 상황만 놓고 봐도 호주에 온지 사흘째, 용잡이 팀과 승하, 백혜라 듀오가 더 해진 본 드래곤 대책반은 관광지에서 빈둥거리는 중이다. 협회장에게 구두로 대책반 직함을 받고 본 드래곤 추적을 결심한지는 일주일이 되었다.
본 드래곤이 필리핀에서 호주로 직행하는 게 아니라, 뱅골 만까지 빙 둘러서 인도양에서 미적거리는 동안 다음 휴게지로 예상되는 호주로 재빨리 입국한 것이다. 그러니 본 드래곤을 기다리는 건 딱히 이상할 건 없지만,
‘총리라는 인간이 이런 상황에 접대에 더 정신 팔려있다니...전생에서 그렇게 망한 게 당연하긴 하네.’
총리의 권유로 관광지에서 대기하면서 놀고 있는 건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 권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놀고 있는 팀원은 없으니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신경 안 쓰고 있었던 언론이 신경 쓰이게 되었으니, 별 일이 다 켕기기 시작한 류 현이었다.
‘...본 드래곤 놈들이 안 오니까 별 생각이 다 드는군.’
의도적으로 두 괴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도 있었다. 두 마리 전부가 네임드 몹이라는 것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는데, 하는 짓이 단순히 지휘개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해괴한 짓거리를 거듭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을 공격한 건...이해 못할 건 아니야. 괴수놈들의 적의가 논리적으로 설명될만한 것도 아니고, 잠깐 제어가 풀린 순간에 눈 돌아가서 도시 하나 작살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왜 이렇게 미적거리는 거지?’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케손시티 파괴 사건은 류 현에게 있어서 일어나야할 일이 소규모로 벌어진, 다행스러운 케이스였다.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아마, 인간에 대한 괴수의 적의를 다시금 인지하게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난 이상, 이전처럼 다른 세상 이야기 취급 받을 일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그 두 놈의 목적지는 남극이 분명해. 거기에 엘더 리치가 있든, 없든 그리로 가겠지. 엘더 리치의 명령일 가능성이 크지만...그냥 가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두 놈한테 이득이 되는 곳이니까. 지나치게 미적거리는 것만 빼면 말이야.’
언데드라는 육안으로 보이는 인상적인 특징 말고도 본 드래곤은 냉기를 제 마력으로 축적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전 생에서, 네임드 몹이었던 첫 번째 본 드래곤은 아니었지만 엘더 리치 휘하의 보통 본 드래곤이 북극에서 싸울 때, 냉기를 끌어 모아서 한 단계 높은 브레스를 내쏘거나 수복속도를 빠르게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 류 현이 보기에 본 드래곤 두 마리가 남극으로 가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필리핀의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봤던 무수히 많은 인간들의 도시를 무시한 게 더 이상했지.
‘뜬금없이 필리핀을 공격한 거나, 괜히 뱅골만으로 선회해서 미적거리는 건 엘더 리치의 지휘로는 그냥 퉁치기가 힘들지. 지휘 개체의 명령이었으면 남극으로 직행했을 거다. 그 엘더 리치놈은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지들 본능을 상당히 억누르는 데 성공한 걸로 보이니, 그렇게 갑자기 비효율적인 공격을 명할 가능성은 낮아. 인간을 족치는 게 목적이면 바이칼 호까지 움직이면서 중국을 빙판으로 만들었어야 하고.’
류 현은 왜 자신이 본 드래곤들의 행적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는 걸 자제하고 있었는지,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오 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차라리 이전 생처럼 그냥 미쳐 날뛰었으면 그냥 쫓아가서 때려잡기만 하면 될 텐데. 류 현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터무니없는 불평을 토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다 사서 하는 고생이지.’
“왜 혼자서 또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
제 뒷머리를 헤집으려던 류 현은 뒤쪽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뒤돌아보니, 가벼운 차림의 승하가 히죽 웃으며 서있었다.
“제가 마력 운용은 이틀 뒤부터 하시라고 말씀 안 드렸던가요? 그러다가 다 아문 게 말짱 도루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자청해서 입었던 내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할 말이 없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인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대꾸했다.
“하지만 비상사태에 그런 걸 가릴 순 없잖아?”
“비상사태요?”
“본 드래곤이 호주에 상륙했어. 호주의 뭐에 꽂힌 건지 갑자기 가속하더니 전투기 뺨치는 속도로 날아왔다더라. 총리는 당장이라도 지하벙커에 들어갈 기세던데?”
“...하여간. 다른 분들은?”
“네 방에 모여 있어. 네가 또 궁상떨고 있을까봐 내가 온 거고.”
“일단 갑시다. 그리고 두 분 앞에서 궁상이니 어쩌니 하면 진짜로 국물도 없을 줄 아십쇼. 대련이고 뭐고 다 쌩깔 겁니다.”
“야, 너 배려해서 아픈 몸 이끌고 마중온 친구한테 이러기야?”
“그럼 그 배려 계속 해주시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