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9화 〉탐식마(貪食魔) (169/429)



〈 169화 〉탐식마(貪食魔)

좋지 않은 일은 손을 잡고 몰려온다고 했던가? 아니 불행이었던가?


류 현은 그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금언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정확한 것임을 실감하며,  앞에 펼쳐진 세계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실 탁자를 치우고 펴자, 카펫 같은 모양새가 된 세계지도를 말이다.

그의 옆으로는 화련, 희란, 백혜라가 순서대로 자리를 잡은 채 같이 세계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과 달리 류 현을 제외한 그들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 해봐야 몇 시간 전 웨인이 전해온 본 드래곤의 남하소식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추가적으로 어디를 지나고 있다는 소식은 협회의 라인으로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지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네임드 몹의 진가를 아직 알지 못하는 그녀들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새로운 괴수가 던전 밖으로 튀어나와서 세계 일주를 시도하는  정도의 사건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대 사건이긴 했지만. 정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계속 물고 늘어질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으으, 모르겠다.  아파.”

화련은 앓는 소리를 내며 뒤쪽의 소파에 기대었다. 화련이 시작을 끊자, 류 현을 제외한 일행은 모두 지도에서 떨어져 나왔다. 담요를 덮고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있던 승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들여 본다고 안 보이던 게 보이는 것도 아닌데, 대체  그리  쓰고 그래?”


화련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턱짓으로는  현을 가리키면서.

“저렇게 애쓰는 사람을 두고 그런 소리가 나와요? 같이 고심하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하항, 점수 따려고 연기한 거야?”
“이 여자가 진짜...혜라야.”
“네, 언니.”

짝! 작게 이를 갈던 화련의 부름에 백혜라의 등짝 스매싱이 승하의 등판에 작렬했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고 노려보는 승하의 시선에 백혜라는 슬쩍 외면하는 것으로 응했다.

“혜라 너 진짜...내가 회복하기만 해봐...”
“네에, 저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화련 언니한테서 이거저거 듣고 적어놨는데, 다 나으면 같이 보죠.”

나이에 걸 맞는 산뜻한 미소였지만, 승하는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화련을 노려봤지만, 화련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승하는 승산 없는 싸움 대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자신들이  하든 간에 지도에 시선을 두고, 꼼짝도 없는  현으로 말이다.


“저건 아무리 봐도 뭔가 알고 있는 거 맞지?”
“직접 캐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하겠지만...어떻게 봐도 뭔가 알고 있는  확실하죠.  드래곤이나 리치성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저렇게 반응 안했었으니까요.”

음모 모의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여자가, 뭐라고 수군거리던 류 현은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실 그는 듣고 있지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래, 지금은 미적거릴 때가 아니지. 노림수든 도박수든 던져야 할 때지.’


결심이 서자  현은 지체 없이 벌떡 일어났다. 머리를 맞대고 모의 중이던 세 여자는 물론이고, 그 그룹에서 떨어져서 류 현을 지켜보던 백혜라까지 움찔할 정도로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마스터...?”

그런 류 현을 화련이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류 현은 그대로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대체 뭐에요? 지금...?”

대답해줄 이 없는 화련의 물음이 공허하게 방안을 울렸다.


***


“예, 저도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요.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

통화를 끝마친 류 현은 옥상 난간에 기대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봤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못 무를 정도는 아니지만...괜히 미적거리다간 이전이랑 별 다를  없어질 테지...움직일 수밖에 없어.’


방금 전까지 계속 했던 통화 대상은 제럴드 던컨. 현 미대통령이다. 리어던 부통령의 개인 번호까지 알고 있는  현이 던컨 대통령과 통화하는 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통화 내용을 들었다면 팀원들은 아마 더 듣지 않고 기절하고 싶어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던컨 대통령과 통화를 하기 전에는 웨인을 통해서 플레이어 협회장, 클라우드 윈스턴과 통화했었다. 본 드래곤 비상 대책팀의 직함을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말이다. 던컨 대통령과 통화한 것은 그 연장선상의 일이었다. 협회뿐만 아니라, UN소속의 직함을 던컨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솔직히 이야기가 너무 잘 풀려서  불안하지만...UN쪽 직함은  달더라도 협회 쪽은 확정이니까 활동하는  자체는  문제가 없어.’

제대로 된 일면식도 없는 상대가, 다른 상임이사국을 설득해서 직함을 달라는 요구에 던컨 대통령은 아주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미국은 어려울  손을 내밀어준 친구를 잊지 않습니다. 사흘 내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너무 쉽게 승낙해서 다른 상임이사국을 제대로 설득할지 조금 의심될 정도.

그 뒤의 통화내용은 제럴드 던컨이라는 사내가 얼마나 유쾌한 자인지 알게 해주는 것들이었다. 던컨 대통령은 절대 미국 재방문 일시를 묻지 않고,  현과 그의 팀이 해준 일을 언급하면서 열심히 비행기만 태웠다. 그리고 그 분위기만으로 기어코 류 현이 미국을 친구라고 지칭하게 만들었다.

‘리어던 부통령 같은 쪽이 상대하기가 훨씬 편한데...처음으로 이야기 나눠본 거지만 이 아저씨 상대로는 뭔가 말려들어가는 기분이란 말이지.’


이전 생에서 3차 ‘대소환’이 터지고,  현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을 때 제럴드 던컨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리어던을 줄곧 상대했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대소환’이 시작된 이후로 이전보다는 평가가 떨어졌다지만, 세계정치계의 복마전으로 평가받는 백악관의 주인이 닳고 닳은 정치인으로 안 보일 정도였다. 그마저도 정치인으로서의 수완이겠지만,  현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지금 유일한 위안거리는  드래곤들이 굼뜨게 움직인다는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지랄하기 전에 때려잡거나 이쪽을 당겨서 엘더 리치를 끌어내는  최선이야. 지휘개체가 있는 건 확실해보이니...만에 하나 엘더 리치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로 잡으면 그만.’
‘뭐, 요청한 것만 잘 들어주면 어떻게든 되겠지...잘 해주겠지? 그 아저씨.’

그 때문에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

“너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승하는 잠깐이지만 말을 내뱉은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말을 들은 화련이 그녀조차 흠칫할 정도로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저 작은 몸에 어떻게 저런 독기가 들어있는지, 봐도봐도 적응이 안 되었다. 어지간하면 특유의 능청스러움을 발휘해서 농담이라도 걸어볼 텐데, 저런 상태의 화련에게는 씨알도  먹힌다는  그녀도 경험으로 이제는 안다.

결국 눈치만 살피던 희란이 나섰다.


“어, 언니 그러지 마시고 일단...”
“...나 화  났어.”

마지못해 불퉁하게 대답하는 화련은 명백히 골이 난 표정이었다. 희란은 더는 말하지 않고 팔을 잡아끌어서, 거실로 향하는 복도 중앙에 앉아있던 화련을 다시 거실로 데리고 왔다. 화련은 자리에 앉자마자 장탄식을 시작했다.

“이해가 안 가.”
“류 현이 저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그래?”


상대가 한 번 살벌하게 째려봤다고 주눅들 승하가 아니었다. 승하의 대꾸에 화련의 고개가  건강이 우려될 정도로 휙 돌아갔다.

“진짜 아는 거 없어요?”
“유감스럽게도 말이지.”
“......”


의심스럽다는 듯이 살피는 눈길이 방금 전의 살벌한 기운을 풍기던 것과 대비돼서 퍽 우스웠다. 승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낄낄거리면서 말했다.


“류 현 저 녀석 하는  봐. 나한테 말한 걸 너네한테 말을 안 할 녀석이야? 난 회계장부 작성해서 팀원한테 공개하는 팀장은  적 있어도, 그 장부 회계사랑 변호사한테 재검토 하는 거까지 보여주는  처음 봤는데. 지금도 그 짓을 매 달하는  안 믿기지만.”
“그러니까  이러는 거죠.”


승하는 부정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만 으쓱했다. 화련의 호소 아닌 호소대로, 류 현은 곧이 공개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자질구레한 부분에 있어서 정보를 공개하고 신경 써서 그 사실을 친절하게 팀원들에게 알려주곤 했지만, 던전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던전에 관한 일도 대부분의 것들은 팀원들과 정보를 공유했지만, 기묘한 부분에서 슬쩍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들도 그것이 정확히 뭐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그렇게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몰라...”

한탄하듯이 말하는 화련의 말 속에는 숨길  없는 우울감이 섞여있었다.

승하는 어깨를 보듬는 역할은 희란에게 맡기고 말상대나 해주기로 했다. 이미  번이나 반복한 일이기도 했다. X던전을 클로징한 이후로 승하 본인도 의구심이 더 커진 상태였기에, 동감하는 바도 적지 않아서 그녀는 언제나 화련의 이런 말 상대를 자처해왔다.


‘사서 고생이지.’

화련의 어깨가 축 쳐지는 것을 보고 승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친구가 그냥 아무 말도 안하는 독불장군이었다면, 이렇진 않았을 텐데.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웃긴 가정이었다.


그랬다면 그와 친구가 되기도 힘들었을 거고, 화련은 독불장군에다가 미친 듯이 던전을 들락거리는 팀장 때문에 희란의 손을 잡고 팀을 나갔을 가능성이 크니까. 하지만 사람 마음은 그렇게 이성적인 가정을 하고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승하는 화련이 바라고 있을 말을 해주기로 했다.


“하긴, 그냥 너희는 몰라도 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랬으면 이렇진 않았겠지.”
“그게 더 좋았을 거 같지는 않지만...그렇겠죠.”
“그렇다고 독불장군을 바라는 건 아니잖아?”
“......”


고개를 숙이는 화련을 바라보며 승하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현의 태도가 잘 못 되었다고 보진 않지만, 화련이 고민하는 이유는 류 현이 보여준 친절 때문이다.

전우라고 지칭해도 될 같은 팀원이 이거저거 챙겨주면서 친절하게 구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싫어할 리가 없다. 애초에 화련과 희란이 팀에 들어오게  것도 류 현이 베푼 호의 때문이었다.

그런 류 현이 뭔가를 혼자 끌어안고 끙끙 앓는 모습을 보고 같이 끙끙 앓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금전 같은 걸로 관련해서 뭔가를 숨기는 기미가 보였다면, 배신감을 느꼈을지언정 이렇진 않았을 터. 같이 활동한 기간이 늘어나면서 처음의, 탐정놀이 하는 듯한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사이가 좋아서 생긴 문제라...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 같네.’

불과 3,4년전 만 해도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 중 하나였다. 절로 쓴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미 입 닫는 걸로는 어떻게 해결은 불가능해 졌고, 확실하게 입을 열어야 해결이  텐데...완전히 입 다물지 않는 걸 보면 이야기  생각이 아주 없는  같진 않은데. 대체 뭘 기다리는 거지?’


승하라고 아주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화련보다 조금  상한선이 높을 뿐이다. 친구가 손을 뻗어오거나, 도움을 필요로 하기 전까지는 어지간하면 그냥 두고 보기로 했을 뿐.


화련과 승하의 입에서 동시에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현관문이 열렸다. 류 현이 한 시간전에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부르는 소리도 무시하고 뛰쳐나간 현관문이.

“...마스터?”

거실로 들어선 류 현은 뛰쳐나갈 때와 달리 평상시의 류 현이었다. 어찌 보면 무감정 해보이고, 또 어찌 보면 뚱한  같은 평상시의 그였다. 네 여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실로 들어선 류 현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본 드래곤을 추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협회에 추적활동을 위한 직함을 요청해서 받아냈고, 미국 측에도 UN을 통한 직함도 요청했습니다.”

잠깐 멍해져있었던 화련은 눈동자를 굴려서 승하에게 물었다. ‘진짜 몰랐어요?’‘진짜 몰랐다니까!’  여자가 텔레파시 능력을 개발하든 말든  현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내었다.

“물론 이건  개인 활동에 대한 결정이며, 여러분은 시간을 드릴 테니 참여 여부를 결정하시면 됩니다. 언제나 처럼 불참한다고 불이익을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일부러 이렇게 말하곤 있지만, 스스로 연설하는 정치인 같다는 생각을 하며 류 현은 말을 잠깐 멈췄다. 그러지 않아도 네 여자의 시선은 그의 입에 쏠려있었지만, 류 현은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했다.


“이번 일에 한 해서 저는 여러분의 참여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 혼자 감당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크기도 하고,”


결심을 했음에도 말이 턱까지 올라오다가 목구멍에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류 현은 의도치 않게 다시 한 번 멈춰야했다. 가까스로 볼썽사납게 켁켁 거리는 꼴은 면한 류 현은 떨이처리라도 하는 것처럼 재빨리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이번일이 끝나고 나면 궁금해 하셨던 것들에 대해서, 제 비밀에 대해서 알게 되실 테니까요. 이번 추적행에 참여하지 않아도 말씀드릴 생각입니다만, 참여하시는 게 훨씬 납득하기 쉬우실 겁니다.”

마지막 두 문장을 청중을 보지 않고 내뱉은  현은, 말을 다 내뱉고 나서야 곁눈질로 그녀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동공지진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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