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탐식마(貪食魔)
“그래서 냅다 튀었다고?”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을 마주한 류 현은, 8시간 전에 느꼈던 고마움이 급속도로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참기를 포기하고 히죽거리고 있는 승하를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다는 욕구마저 느꼈다. 상체만 일으켜 반쯤 누워있는 환자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짜악! 류 현의 소망을 이루어 준 건 다름 아닌,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있던 백혜라였다. 불시에 등짝을 얻어맞은 승하는 몸을 동그랗게 말며 바로 격한 리액션을 선보였다. 엄살이 아니라 정말로 아픈 지, 얻어맞은 등짝을 더듬던 그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튀어나온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아으으...야! 혜라 너, 환자를 이렇게 막 쳐도 되는 거야?”
“환자면 환자답게 얌전히 누워계시죠? 언니 때문에 내가 류 현 씨 앞에서 고개를 못 들고 살아요! 어떻게 언니 오빠들 있을 때랑 달라진 게 없어요? 나이 앞자리 수도 달라졌는데.”
“하, 아픈 사람 이렇게 구박하네. 서러워서 살겠나...”
어울리지도 않게 신세한탄을 하는 승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류 현은, 옷깃을 당기는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화련이었다.
“안에 있던 게 7성 리치라고요?”
“예, 봤을 때 좀 놀라긴 했는데...6성 리치도 이미 던전 밖으로 튀어나온 케이스도 있는 마당에 이상할 것도 없겠다 싶긴 하군요.”
“...진짜 용케 도망치셨네요.”
“너 얘기 제대로 듣긴 한 거야? 6성이하 리치가 쏘는 마법은 그냥 씹었다 잖아. 마음만 먹었으면 그 리치성 내려앉히고 올 수 있었을 걸?”
아직도 등을 매만지고 있는 승하가 조금 불퉁하게 말했다. 화련은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납득할 뻔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뭐 그거야 제가 구덩이 안에 있었던 건 10분도 안 되니까요. 시간이 지나서 집중력이 떨어지면 어찌될지는 모르죠.”
류 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진지하게 그럴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희란은 류 현이 마법에 얻어맞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실패했는지, 떨떠름하게 고개를 떨었다.
“일단 제가 확인한 리치의 공격 마법은 다섯 가지입니다. 번개, 빙결, 불꽃, 그리고 칼날 형태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마법 하나랑, 저주 같은 걸로 보이는 마법까지. 나머지 두 개는 보고 싶긴 했는데 더 뭉개고 있을 수가 없어서요.”
대부분 뻥이었다.
류 현의 혓바닥은 주인이 놀랄 정도로 매끄럽게 돌아가며 거짓말을 내뱉었다. 3차 ‘대소환’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7성 리치와 엘더 리치까지 소멸시킨 류 현이 7성급 리치의 반지 구성을 모른다는 게 더 말이 안 될 것이다. 다섯 개를 봤으면 나머지 두 개는 추측하는 건 일도 아니다.
‘나머지 두 개는 하나는 텔레포트고, 다른 하나는 기상 조작마법이겠지.’
5성 이하는 개체에 따라서 겁 많은 놈이 반지의 과반을 텔레포트에 투자하고, 나머지 한두 개를 눈속임 마법에 배당하는 경우도 많지만, 6성이상은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지 하나하나가 갖는 화력이 월등하게 높기 때문에 공방밸런스를 신경 쓴 기색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6성 리치의 표준형을 잡자면, 최소 반지 둘 정도는 번개나 화염 같은 속성마법을 넣고 텔레포트에 하나, 저주하나, 방어막 계열 하나같은 식으로 배분한다. 남은 하나는 개체 취향에 따라 갈린다.
여기에, 7성 리치는 흔하진 않지만 기상조작이라는 정말 초월적인 마법이 끼게 된다.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미친 화력을 자랑하는 마법을 가지게 되거나.
이전 생에서 7성 리치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군단 한 가운데에 떨어져서, 군단을 갈아 마시고 그대로 근처 소국까지 시체 군단에 편입시킬 수 있던 이유가 이것이다. 기상조작 마법을 가진 7성 리치는 재앙 그 자체지만, 기상조작 마법이 없는 7성 리치도 괴물이긴 마찬가지다. 대규모 전투에 좀 더 유리 하고 말고의 차이 뿐.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안 쓴 걸 보면 기상조작 마법이 맞을 거야. 텔레포트는 딜레이가 긴 타입이라서 못 쓴 거라고 치고.’
류 현은 중국에서 본 7성리치가 기상조작 마법을 가지고 있다고 거의 확신했다. 라이프 배슬이 직접 타격을 입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패를 숨긴 채 그의 도주까지 손 놓고 지켜보는 건 괴수답지 않은 일이니까. 천지를 뒤엎을 수 있는 위력이 담긴 만큼, 발동 딜레이가 굉장히 긴 기상조작 마법이라서 쓰지 못했으리라.
‘그러고 보니 그놈 공방 밸런스고 뭐고 없는 놈이었네. 반지 다섯 개를 전부 공격 몰빵이라...텔레포트도 못 쓴걸 봐서는 싸움 도중에 거리 벌리기 용으로는 못 쓴다는 건데. 뼈다귀 주제에 깡은 좋군. 아니면 엘더 리치의 의향이 들어갔거나.’
그 생각을 했더니 없던 두통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네임드 몹, 엘더 리치. 그놈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중국행이었는데, 결국 헛걸음이 된 것이다. 류 현의 추측이 엉터리고, 정말로 아직 현실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7성 리치가 그런 성을 지어서 단체 버프 넣을 수 있는 거라면 그거대로 엘더 리치급 문제지. 아니, 그 이상이지. 젠장...네임드 몹이 나와 있기를 바라야하는 처지라니.’
“근데 너 용케 중국에서 나왔네?”
승하가 그 현장에 있던 것처럼 묻자 류 현은 픽 웃고 말았다.
구덩이에 진입하겠다는 류 현을 자살지원자 같이 보던 중국 관료들은, 류 현이 멀쩡하게 구덩이 밖으로 나와서 본진까지 돌아오자 죽은 사람이 살아온 것처럼 기겁을 했다. 그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류 현이 귀국을 선언하자, 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류 현은 다시 와 보겠다고 언약이나마 맺은 후에 칭얼거림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제가 뭐 중국에 빚을 져서 채무 상환하려고 들어간 것도 아닌데, 못 나올 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말이야 쉽지. 걔네 질척거리는 거 진짜 장난 아닌데. 나 북한 원정 때만 생각해도...으으, 난 걔네랑은 연계작전도 껄끄러워.”
“뭐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가면서 매달리긴 하더군요. 다시 한 번 오겠다고 약속해주고 왔죠.”
“하긴, 거기 있는 병력으로는 네 발도 못 묶을 텐데, 괜히 성질 긁어서 중국은 죽어도 안 갑니다! 해버리면 답도 없으니까. 걔네가 막무가내 같아 보여도 계산은 빠릿빠릿해. 그래서, 핵배낭 아니면 답도 안 나오는 요새 보고 온 소감은?”
“핵은 좀 오버 같은데...”
화련이 지나가듯이 내뱉은 말에 승하가 반응했다.
“전에 이디오피아에서 샌 드래곤이 튀어나왔을 때, 샌 드래곤이 내려앉은 예멘의 모카항이 불바다가 됐었지. 지금도 복구가 덜 됐다고 했지 아마? 그 때 퍼부은 화력이 서울을 두세 번은 태우고 남을 정도고. 그런데도 샌 드래곤 가죽에 기스도 못 냈어. 쉴드야 좀 긁었겠지만 그걸 성과라고 내세우면 그놈이 미친놈이지.”
“윽...”
화련이 잘 알 수가 없는 시절의 일이다. 그 때의 그녀는 헬퍼로 전향하기도 전이었으니까. 예멘의 어디가 샌 드래곤 때문에 난리가 났다는 뉴스는 봤어도, 자세한 피해현황 같은 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그녀가 처음 본 리치는 류 현의 연장질 몇 번이 작살이 났고, 그 뒤로는 주먹질 몇 번이 뼛가루가 되었다. 지금은 화련 혼자서도 5성 리치는 손쉽게 상대 가능할 정도다. 그런 화련에게 있어서 리치 부대의 지랄 같음 보다는, 핵배낭 같은 게 훨씬 별세계 얘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고비 사막에 있는 그 구덩이에는 5성은 깔렸고, 6성도 두 자리 수에 육박하고, 7성까지 있지. 거기다가 지들 라이프 배슬 짱 박아놓은 성에 무슨 짓을 한 건지 수복까지 빠르다고 하고. 맞지?”
“예, 에너지 드레인을 안 쓰면 정말로 빠르게 수복하더군요.”
“이것 봐, 쟤가 저런 소리할 정도면 그냥 플레이어들 갈아 넣어서 밀어붙인다는 전략도 쓰기 힘들어. 침투조가 라이프 배슬을 부술 때까지 버틴다고? 리치가 성안으로 들어가는 걸 그냥 보고 있을 리도 없고, 중국이라도 그만한 수준의 인원을 그런 엉터리 작전에 쓸 수는 없을 걸. 뭐, 중국이니까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냅다 질러버릴 수도 있겠지만...그런 게 아닌 이상 중국 혼자서는 해결 못해. 쟤 아니면 핵배낭이지.”
쟤라고 하며 턱짓으로 류 현을 가리키는 행동에 백혜라가 미간을 확 구겼지만, 류 현이 고개를 내젖자 들어 올린 손을 슬쩍 거둬들였다.
“저 그렇게 비행기 태우셔도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거기다가 그건 중국이 고민해야할 부분이고요. 리치들 반응 보니까 어지간한 일로는 밖으로 안 나올 것 같던데.”
류 현이 엘더 리치의 존재를 확신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리치가 성을 짓고 틀어박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하나의 성에 저렇게 많이 그것도 모두의 라이프 배슬을 한 성안에 숨겨두는 건 리치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리고 성이 공격당했음에도 자신을 쫓지 않은 것도.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중국 측에서 해결해보려고 시도라도 할 수 있겠지만 나오질 않으니까. 뭐, 그렇게 되더라도 주요 도시들이 갈려나갈 테니, 오히려 지금 같은 대기 상태가 낫겠지. 지들끼리 힘겨루기 같은 엄한 짓에 병력 낭비는 안 할 테니까. 엘더 리치의 위치를 파악해야 이 상황을 이용해 먹든가 말든가 할 텐데...’
“제가 중국 가있는 동안 이름 달려있다던 본 드래곤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없었습니까? 화련 씨한테 연락 주라고 얘기해놓고 갔었는데요.”
“있긴 한데...”
“...? 무슨 일 이길래?”
화련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떼지 못하자, 옆에 딱 붙어있던 희란이 대신 말했다.
“바이칼 호 주변의 얼음이랑 눈을 먹고 있데요.”
“눈이요?”
“네에...눈이랑 얼음이요. 그거 말고는...”
류 현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겨났다. 그 반응을 오해한 희란이 움찔했지만, 류 현은 전혀 다른 의미로 골이 난 것이었다.
‘엘더 리치가 나와 있는 건 확실해. 그것도 네임드 몹 둘을 지 부하로 둘만한 놈으로 말이야. 냉기 소모도 안 한 놈들이, 인간 싸그리 무시하고 그 짓을 한다는 건 지휘개체가 있다는 소리지. 젠장, 나온 지도 얼마 안 된 놈이 7성 리치 만들어 놓은 거 볼 때부터 촉이 안 좋더라니...대체 어디 짱 박혀 있는 거야?’
천천히 썩어 들어가는 류 현의 표정을 보고 희란이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을 타이밍을 재던 그 때,
부우웅! 류 현의 휴대폰이 진동음을 토해내었다. 류 현은 휴대폰 화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의 전화인지 알 것 같았다. 너무나도 절묘한 타이밍에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 와서, 용잡이 팀 내에서는 불운 메신저 같은 이미지로 통하는 웨인. 발신자는 그였다.
마른 침만 삼키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팀원들에게 화면에 떠오른 이름들을 확인시켜주자, 여기저기서 맥 빠진 한숨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류 현은 그 모습을 보고 픽 웃고는 전화를 받았다.
“예, 류 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