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탐식마(貪食魔)
발자국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뛰어올랐지만, 그 높이는 범상치 않았다. 마력과 마력을 제하더라도 초인의 영역마저 벗어난 육체가 만들어낸 장관.
류 현은 최고점인 5미터 높이까지 올라가자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는, 발밑의 마력을 집중시켜 투명한 발판을 만들어내었다. 비슷한 식으로 기동훈련을 하곤 하는 화련이 봤다면 기겁을 했을 비효율의 극치였다. 효율을 따지지 않고 되는 것과, 안 되는 것만 나누는 류 현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마력은 썩어날 정도로 많으니까.
허공에서 몸을 빙글 돌린 류 현은 발판에 발이 닿자마자, 있는 힘껏 밀어내며 자신의 몸을 내쏘았다.
뻐어억! 퍼서석!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한 시대를 풍미한 한 복서의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온몸을 내던지는 주먹질에 리치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성인 남자보다 1.5배는 더 되어 보이는 그 큼직한 두개골이 반파된 채로.
“왕관 쓴 새끼 어디 있어?”
류 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리치들은 류 현의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을뿐더러, 알아들어도 대답해줄 의향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류 현도 리치들에게 굳이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젠장, 대체 뭐야. 성까지 저렇게 번듯하게 차려놓고 엘더 리치 이 새끼 대체 어디 간 거야?’
자신의 상식 내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을 두고 계속해서 고민할 뿐. 류 현이 아는 한, 이런 성을 짓고 그 안에 버프까지 거는 미친 짓은 엘더 리치만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가 아는 리치의 종류 중에는 번듯한 성을 지어놓고, 밖으로 나도는 놈은 없었다.
전생에 그가 엘더 리치와 극지에서 술래잡기를 하게 된 것은, 그가 엘더 리치의 성을 정면에서 박살을 냈기 때문이다. 그런 류 현의 관점에서 이 성의 주인일 엘더 리치는, 리치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심될 정도로 이상한 놈이다.
‘’
빠각! 파스스
대신 화풀이 하듯이 손 뻗으면 잡히는 거리에 있는 리치들을 하나 둘 씩 족치고 다녔다. 찢어지는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리 류 현이라도 라이프 배슬이 다른 곳에 있는데, 리치를 소멸 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뼛가루가 돼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뿐.
‘젠장, 진짜 제대로 꼬였군. 본 드래곤은 두 마리다 이름표 달고 나타났고, 엘더 리치 이 새끼는 이런 성 차려놓고 나돌아 다니고 있다고? 대체 뭐야? 이 새끼들 나 엿 먹이려고 교육 받고 온 건가?’
자신이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류 현은 한 가지 이상점을 발견했다.
‘이것 봐라? 생각보다 수복이 느리네?’
리치답게 겁도 없이 다가오는 것들을 주먹질 한 방에 쓰러뜨리면서, 류 현은 자신이 넘어뜨린 7성 리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럴만한 괴력을 가진 놈이니까.
다른 리치들보다 명백하게 크고, 어딘지 모르게 떼깔도 좋아 보이는 그놈은 좀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계속 허우적거리고 있다. 구덩이 초입에서 맞닥뜨린 리치들을 그냥 주먹질로 깨부쉈을 때 오 분도 안 돼서 완전 부활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리 에너지 드레인을 섞었다고는 하나, 라이프 배슬에 직접 타격을 가한 것도 아닌데 7성 리치가 저렇게 허우적거리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7성급이면 류 현이 이전 생에 만났던 네임드 몹과 왕관 하나만 차이 나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화력은 물론이고, 재생력도 끔찍한 수준. 거기에 네임드 몹인 엘더 리치가 지은, 휘하 리치들에게 각종 이로운 효과를 주는 성안에 라이프 배슬을 모셔놨다면? 진정한 불사가 뭔지 보여주는 수준이 된다.
그 이름값을 하겠다는 것처럼 리치가 기어코 일어섰지만, 류 현은 흥미로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제 몸 주변으로 다른 리치들의 폭격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구덩이 안의 작은 하늘을 수놓는 화염과 얼음, 전격의 향연은 류 현의 몸 주변에 일어난 검은 안개 앞에서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검은 안개는 아직 배가 고프다고 혀를 날름거리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그럴 리가 없건만, 마법을 퍼붓고 있는 리치들의 눈구멍에 어린 붉은 빛이 흔들리는 듯 했다.
‘거 더럽게 시끄럽게 구네. 좀 가만히들 있어라.’
어차피 6성 리치들이 연계마법이라도 때려 붓지 않는 이상, 반나절을 두들겨야 뚫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 연계마법의 주축이 되어야할 6성 리치들은, 류 현의 주먹질 몇 번에 이미 두개골이 가루가 돼서 수복상태에 들어섰다. 물론, 에너지 드레인을 끼얹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진득하게 기다려야할 것이다.
방해가 될 요소는 없다. 류 현은 손놓고 7성리치가 꿈지럭거리는 것을 그냥 구경했다.
그런 류 현의 자비에 힘입어, 7성 리치는 비틀거리던 몸을 추슬렀다. 반쯤 날아간 두개골은 여전했지만, 리치에게 있어서 큰 지장은 없는 상처였다.
7성 리치의 뼈밖에 없는 손가락이 류 현을 조준했다. 명치를, 단순 타격에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급소를 말이다. 그 급소를 향한 손가락의 지시를 따라, 리치가 가진 일곱 개의 반지 중 두 개가 반응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반지알이 진동하며 빛을 내뿜었다.
짜자작! 파스스! 발동된 마법은 두 가지. 하나는 방금 전 방비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류 현의 항마력을 뚫고 저릿한 맛을 보여준 전격 마법!
다른 하나는 아직까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이전 생에서는 플레이어를 상대로는 즉사마법이라고 평가를 받은 고사마법이었다. 실제로는 고사가 아니라, 전자레인지의 원리를 더 닮은 그런 마법이었지만, 완전히 말라 비틀어서 분석할 가루마저 거의 남지 않게 하는 마법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별 다를 건 없었다.
동료가 리치의 손가락질 한 방에 가루가 돼서 흩날리는 꼴이나 피탄면을 최대한 줄였음에도 장기가 말라비틀어져서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꼴을 본 플레이어들이 고사마법 대비책만큼은 확실하게 갖추고 다니기 시작했기에 연구할 케이스도 부족했다.
리치가 내쏘아낸 고사마법은 그런 내력을, 지금은 사라진 내력을 가진 마법이었다. 명치부근이라면 항마력에 막혀서 바늘만큼만 작용하더라도 상대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마법!
마법이 제대로 발동된 것까지 확인한 리치의 눈구멍에 어린 붉은 빛에 만족의 빛이 섞여들었다. 하나만 제대로 적중해도 죽음을 피하기 힘든 마법을 둘, 그것도 하나는 저 괴물 같은 놈의 항마력을 뚫은 것으로 먹여줬다. 고사마법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전격마법만 보고 대비할 테니 고사마법을 어찌하진 못할 터. 리치는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파삭- 리치가 확신을 가지고 내민 패는 류 현에게 닿지 못했다. 검은 안개가, 이전보다 훨씬 더 확고한 존재감을 가지고 현현 검은 안개가 침범을 허락하지 않았다. 탐욕스러운 검은 안개는 흔적도 없이 두 개의 마법을 삼켜버렸다. 리치의 눈구멍에 어린 빛이 흔들렸다.
‘흠...전보다 마력 소모는 훨씬 덜한데 마법은 기가 막히게 잡아먹는군. 7성급 리치 마법이면 전성기라도 ‘강림’ 없이는 조금 저릿한 느낌은 받았었는데... 일이 끝나면 승하한테 한 턱 쏴야겠네.’
승하가 이런 걸 의도하고 그 괴상망측한 검격을 보여준 것은 아닐 테지만, 류 현은 그녀의 공로를 순순히 인정했다. 그냥 있었어도 닿았을 지도 모르는 경지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그녀 덕이다.
류 현은 있지도 않는 눈으로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리치를 무시하고, ‘가방’을 조작해서 망치 하나를 꺼냈다. 공성병기에 가까워 보이는 것으로.
망치 머리는 류 현의 상체만 했고, 자루는 이전에 X던전에서 쓴 것보다 훨씬 길어서, 류 현의 키를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자루의 굵기는 그의 손가락 세 개 굵기였다.
“어, 이거 무게중심이 심각하게 별로네. 끙...강 찬이 한 번 휘둘러보라고 할 때 말대로 할 걸 그랬나. 돌아가면 자루를 더 굵게 하든지 해야겠군.”
류 현이 뜬금없는 무기 품평회를 벌이는 동안, 7성 리치도 당황을 수습했다. 7성 리치의 눈구멍에 어린 빛에 분노의 빛이 어리며, 주변의 마력이 끓어올랐다. 다른 하위 리치들은 그 분노에 호응하듯이 열심히 마법을 던져대었지만, 류 현은 무기품평을 바로 그만두진 않았다.
“뭐, 어차피 여러 번 휘두를 물건도 아닌데 상관없나.”
류 현이 두어 번 더 망치를 휘둘러보고, 무기품평을 그만뒀을 때는 7성리치가 다시금 류 현을 향해서 조준을 끝마쳤을 때였다. 반지를 통해 발동시키는 마법답지 않게, 리치의 몸 주변 마력이 끓어올라 아지랑이 같은 것이 보일 정도였다.
하얗게 백열한, 아까와는 또 다른 세 개의 반지가 마법을 쏘아내려는 찰나,
“엇...”
부웅! 빠가각!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딴짓 삼매경이었던, 류 현이 망치를 뒤로 당기는 준비 자세조차 없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망치를 냅다 휘둘렀다. 7성 리치의 눈에는 류 현이 텔레포트라도 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상은 그 튼튼한 다리 근육이 조금 찢어질 정도로 무리한 것뿐이었지만.
뻐엉! 화르르! 파창! 뒤늦게 류 현을 겨냥했던 마법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불꽃과 얼음과 공간을 찢어버릴 것처럼 휘몰아치는 무형의 칼날의 연무는, 류 현의 스치지도 못하고 한참 위의 허공을 찢어발겼다.
“...차.”
콰르르! 7성 리치가 성에 쳐 박히는 것을 보며, 류 현은 홈런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가방’을 다시 조작해서 망치를 집어넣었다. 한 번이지만 전력으로 휘둘렀던 탓에 자루가 휘어졌지만, 류 현이 강 찬에게 계속 수정 발주를 하는 ‘송곳’과 달리 녹여서 재활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자,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고.”
자신이 날려 보낸 홈런타구-리치-가 성을 부수는 것까지 확인한 류 현은 뒤돌아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덩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십 마리가 동시에 마법을 던져도 류 현을 저지할 수 없었던, 하위 리치들은 류 현의 뒷모습만 빤히 바라봤다.
언데드로 분류되는 괴수답게, 감정의 기색을 읽을 수 없는 그 눈구멍의 불빛들은 드물게도 하나 같이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똑같은 빛을 띄었다.
저 새끼 대체 뭐하러 왔어?
***
“그래서 냅다 튀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