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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화 〉탐식마(貪食魔) (165/429)



〈 165화 〉탐식마(貪食魔)

“아,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류 현을 보고 화련은 손을 내저었다. 한   보는 사이도 아닌데 매번 저렇게 반겨주는 것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침대에 시선이 닿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능숙하게 표정관리를 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승하는 그녀들이 오든 말든 거들떠도  보고 생각에 빠져있는 듯 했다.

“휴가라고 말씀 드렸었는데 중간에 이렇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워낙...”
“아니 뭐, 이 상황에서 휴가기간 칼같이 지킬 거라고는 저희도 생각 안했어요.  입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따로 휴식기가 필요할 정도로 소모가 크지도 않았으니까 신경 쓰실 거 없어요. 그런데...그거 진짜에요?”

 현은 씁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화련은 류 현의 반응을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뭘 정리할 시간조차 안 주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화련은  현의 옆에 앉으면서 다시금 침대 위에 앉아있는 승하에게 눈을 흘겼지만, 승하는 반응하지 않았다. 화련은 따라온 희란이 자리를 잡는 것까지 기다린 후 말했다.

“어떻게 하실 지 뻔한데...어쩌실 거에요?”
“글쎄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좀...일이 하나만 터졌으면 모르겠는데...”


화련은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슬쩍 기울이고 류 현을 올려다봤다. 살피는 눈짓에 류 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대신 혼자만의 세상에 틀어박힌 승하를 일깨웠다.

“그래서 이렇게 모인 거잖습니까. 승하 씨,  분 오셨습니다.”
“응? 어어, 언제 왔어? 간만에 보내, 희란아.”
“아, 네에...”
“뭐,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판단하기가  어려워서요.”
“마스터가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어색한 거 알아요?”


승하마저 킥킥거리며 화련에게 동조하자 류 현은 두 손을 들어보였다. 해놓은 짓이 있으니,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거기에 대해선 제가 드릴 말이 없군요.”
“...이제 와서 그런 걸 꼬치꼬치 따질 생각은 없네요. 마스터가 순순히 다 대답해 줄 거 같지도 않고. 혹시 저번 석비 때 얻은 정보 중에서 이런 상황에 대한 거 없었어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없습니다. X던전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정보는  들어 있었거든요. 알았다면 저도 뉴욕을 오가진 않았겠죠.”
“하기야 그건 그러네요. 뭐, 아셨다고 해도 개마고원에서 러시아까지 날아갈 줄은 예측 못했겠죠. 러시아에서는 난리 났겠네요?”
“예, 그렇게 대형 비행형 괴수는 처음인데다가, 격추는커녕 대응화망도  짰으니까요. 거기다가 바이칼 호에 잠수까지 탔으니 해결 못하면 정권의 정치생명도 끝장  겁니다.”


혼란스러웠던 2차 ‘대소환’ 초기를 견딘 각국의 정부는 던전을 감지하는 레이더 망 구축 외에도 국제적인 합의를 통해서 우선순위를 만들었다. 던전으로 튀어나온 괴수 토벌 우선순위를 말이다.

서로 등급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토벌 1순위는 비행형, 혹은 비행가능할 것 같은 형태를 지닌 괴수고 2순위가 해양성 괴수인데, 사람이 접근할  있는 던전 내에서 이런 것들이 발견된 적은 없다. 태평양 곳곳에 있는 무인섬에 등장한 던전들에서 튀어나와서 무역선을 덮치는 것이라고 유추할 뿐.


결국 비행형 괴수만이 이 토벌 순위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디오피아의 던전에서 튀어나온  드래곤이 예멘까지 날아갔다가 찢겨죽었던 사건 말고는 비행능력이 있는 괴수가 현실에서 분탕질  적은 없다. 그나마  드래곤이 튀어나온 발원지가 괴수억제력이 형편없기로 소문난 아프리카였으니, 충격도 덜 했다.

그런데 지금, 일 년 전만해도 던전을 정복했다고 여유를 부리던 인류에게 불의의 일격이 날아온 것이다. 예멘까지 아무런 견제도 없이 날아간 샌 드래곤과 비교도 할  없을 정도로 커다란 놈이, 괴수 억제력이 사실상 없다고 평가 받는 아프리카도 아니고 한국, 중국, 러시아 상공을 가로질러서 바이칼 호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처음 본 드래곤을 목격한 한국은 어째서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냐고 까이고 있고, 중국은 국방비를 대체 어디다가 퍼주고 있냐며 까이고 있다.  드래곤이 황산에 스치고 지나갈 만큼 가까이 날아가는데, 요격시도를 안하고 뭐했냐는 것이다. 민간에서 본 드래곤의 이동을 목격해서 영상까지 터뜨린 게 아이러니 하게도,  드래곤과 연관된 삼국 중에 가장 통제가 심한 중국이었다.


러시아는 거기에 뜬금없이 바이칼 호에 잠수한 놈을 어떻게 할 거냐는 여론 포화까지 더해져서, 혼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뉴욕의 환영성 때문에  코가 석자인 미국조차 관심을 보일 정도의 대사건이니, 자국민들의 이런 반응도 당연한 것이었다.


“일단 끼어들 생각인 거죠?”
“글쎄요...”

화련이  알고 있다는 투로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상정외의 것이었다. 류 현은 정말로 고심하는 중이었다.

‘본 드래곤 대책은...있긴 하지만, 엘더 리치쪽은 준비고 뭐고 없어. 그 때 같다면 준비할 것도 딱히 없겠지만...네임드 몹이 둘씩이나 튀어나온 마당에 그런 요행을 바라는 건 바보짓이지. 분명히 두  다 이전 생보다는 수준이 높다고 봐야해. 일단 둘이 튀어나온 것 자체가 난이도가 확 뛰는 느낌이긴 하다만.’


최종적으로야 싫어도 끼어들어야 하긴 하겠지만, 우선순위 문제도 있고 뭣보다 정보가 없었다. 엘더 리치는 정황상 존재를 확신하고 있을 뿐, 전과 같은 7성리치인지도 알 수 없고 본 드래곤의 경우에는 목격자 중에 플레이어가 없어서 어떤 게 진짜 네임드 몹인지 조차 모른다.

무엇보다 네임드 몹들이 동시에 둘씩이나 튀어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한 변수였다. 류 현 이외에는 아무도 그 끔찍함을 모르게 되었지만 말이다.


‘퍼플 이하 던전들이 다 터지기 전에 네임드 몹이 튀어나올 줄이야...전력 유지 면에서는 이쪽이 낫긴 하지만...X던전이 있었던 곳에 생긴 이상현상도 해결 못했는데 벌써...쯧.’
‘이렇게 고민할 여유도 이 인간 덕이긴 하다만...’


류 현은 어느 새 다시 자기만의 생각 속에 빠져들어서 멍해진 승하를 바라봤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자기 기술을 시험해보겠다고 나서서 내상까지 입은 그녀 덕에  현은 어느 정도 여유를 찾았다. 네임드 몹이 동시에 둘씩이나 출현한 초유의 사태에도 말이다.

‘가끔씩 던전 안에서 묘한 행동을 한다고 화련 씨가 말하긴 했지만, 그게 기술개발의 일환이었을 줄이야. 그런 짓한 것도 오래 되지도 않았다던데...이게 천재라는 건가?’


이전 생에서 전성기의 그조차 마지막 싸움에서 편린만 보았던 경지로 구현된 에너지 드레인 마저,  칼에 꿰뚫어버린 것이다.  현 쪽에서 제대로 된 준비가 없었다지만, 그건 승하 또한 다르지 않다. 실제로 그녀는 제 기술의 반동 때문에 내상까지 입었으니까.


그런 부분을 감안해도 경이로울 정도의 무위.

‘강림’에 다시 도달한 이후 검성을, 회귀 이후 본 플레이어 중에서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한 그녀를 제쳤다고 생각한 류 현에게 있어서 완벽한 예상 착오였다.

그녀가 제자리걸음을 한  아니었지만, 화련과 희란의 성장세보다 조금  미치는 듯한 속도였기에 내심 격차가 좁혀질 일은 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그저 뒤처지지 않고 따라와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를 자청하는  여자는 뒤처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맹추격 중이었던 거다. 아직 기술이라고 명명하기도 힘든 제 몸을 갉아먹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류 현은 친구의 말도  되는 성장속도에 두려움이나, 경이로움 보다는 희망을 보았다.

‘최악의 경우라도...안 될  같으면 나 혼자 엘더 리치에 매달리고, 팀원들과 승하는 본 드래곤 쪽으로 돌리면 돼. 청뢰가  드래곤 대책의 반이니까. 승하 정도면 송곳도 잘 써줄 거 같고.’
‘문제는 어느 쪽이 네임드냐는 건데...설마  마리 다 네임드는 아니겠지? 작은 쪽이 아마 일반 본 드래곤 같은데, 우리  인원으로는 떼놓는 것도 힘들어. 다 같이 덤빌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엘더 리치 쪽도 무시하긴 힘들다. 그나마 서로 가까운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일 리가 없지. 류 현은 제 생각을 웃어넘겼다. 개마고원의 이름 모를 산봉우리에서 튀어나왔다던 본 드래곤이 기수를 반대 방향으로 잡고 평양까지만 날아왔어도, 류 현은 다른 일 다 집어치우고 본 드래곤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아마 류 현은 괴수가, 그것도 네임드 몹이 세아가 있는 병원 근처로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눈이 뒤집혀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류 현은 그런 미래를 어렵잖게 그려볼 수 있었다. 네임드 몹에게 거리 개념은  쓸모없는 거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도 비행형 네임드 몹이 던전 게이트를 이용한 적은 없으니까. 엘더 리치만 잘 견제하면...’
“마스터?”

승하와 똑같이  생각 속에 빠져있던  현은 화련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봤다. 세 번 넘게 그를 불렀지만 반응을 얻지 못했던 화련은 화련대로  현의 반응에 놀랐다.

“까, 깜짝이야. 이야기 하다말고 왜 그러는 거에요? 뭔가 떠오른 거라도 있어요?”
“아, 아뇨. 그냥 슬슬 웨인 씨한테서 연락이 올 때가 되었다 싶어서요.”
“그건 또 무슨...”

부우웅! 류 현을 구원하는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현은 잽싸게 수신자가 웨인 크로이츠라는 것을 확인했고, 화련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봤다. 류 현은 통화를 핑계삼아  시선을 슬쩍 외면했다.


“예, 웨인 씨. 류 현입니다. 러시아가  보내달라고 난리 칩니까?”
-예? 아,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긴 한데 듣고 넘길 만한 수준입니다. 류 현님께서 신경 쓰실만한 일은 아니고,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서 연락드렸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보다 기꺼운 반응에 어리둥절한 웨인이었으나, 잠깐일 뿐이었다.


-개마고원에 나타난  드래곤에 대해서는 이미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녀석들에 대한 겁니다.-
‘벌써 본 드래곤으로 부르기로 입을 모았나. 아니면 그 놈 이름을  플레이어가 있는 건가?’


네임드 몹은 명칭 그대로 이름이 붙어있다. 그것도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세상에 튀어나올 때부터 머리 위에 박힌 이름이 떠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값에 걸 맞는, 여타 괴수와 차원이 다른 괴력을 뿜어내었다. 류 현이 모를 수가 없는 정보였다. 그 괴물들이 미쳐 날뛴 덕에 류 현은, 인간 측의 방해 없이 3차 ‘대소환’시기를 보낼 수 있었으니까. 적극적인 협조 또한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류 현은 조금 심드렁하게 웨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웨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본 드래곤 두 마리의 머리통 위에 이름이 떠있었습니다.  놈이 타쿨란, 작은 놈이 타칼란. 본 드래곤이라는 명칭도 그 이름 옆에 떠있던 겁니다. 바이칼 호 깊숙이 잠수했다가 몇 시간 전에 다시 떠올랐는데...-
“예? 두 마리 다요?”


류 현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일이 꼬이다 못해 어딘가에서 터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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