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탐식마(貪食魔)
개마고원의 겨울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다. 10월 말쯤 되면 날이 흐렸다하면 눈발이 휘날리고, 11월쯤 되면 맨바닥이 보이는 게 신기할 정도가 된다. 한반도에 속한 것이 신기할 정도인 이 혹한의 땅은, 장진호 전투라는 혹한의 무서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끔찍한 전투를 제 명함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전투가 있은 지 90년가량이 지난 지금,
“어흐으- 죽겠다. 죽겠어.”
제 몸집만한 부피의 방한복을 겹겹이 껴입은 채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장계급을 달고 있는 사내는 몸서리를 치면서 중얼거렸다.
“이 동네는 도통 정이 안 간단 말이야. 이게 무슨 11월 초야? 씨발 눈 안 내리면 더 불안하다니까. 또 왕창 몰아서 내리겠지. 진짜 좃같은 동네야.”
“그래도 진뱀은 곧 나가시잖습니까. 진뱀 나가고 나서 제설작업할 거 생각하면 진짜...”
사내 보다 약간 뒤편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우는 소리와 함께 궁시렁 거렸다. 그 사내 또한 먼저 입을 연 사내처럼 병장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야, 3년 내내 좃 빠지게 제설했으면 됐지. 그럼 뭘 더 하냐? 그리고 너도 곧 나가는 새끼가 우는 소리는...”
“전 봄이나 돼서 나가잖슴까. 진뱀 몫까지 제설 좃 빠지게 하다가 나가야할 판인데. 씨발, 차라리 여름에 들어올 걸.”
“그럴 돈은 있었고?”
“...그럴 돈이 있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검다. 씨발 없는 놈들만 더 죽어나가지. 좃같은 나라.”
부사수의 두서없는 불평에 사수는 픽 웃었다. 병장 둘이 붙어서 근무를 나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역하기 전에, 비슷한 사정으로 이곳으로 오게 된 맞후임과 마지막 근무를 서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뱀.”
“어, 왜.”
“나가서 뭐하실 겁니까?”
“...글쎄.”
사수, 진용운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가 이런 오지로 자원해서 입대하게 된 건 열악한 가정환경 탓이었다. ‘대소환’ 통에 폭삭 망해버린 집안을,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가 지탱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극단적인 방법 밖에 없었다. 4년 동안 이곳에 쳐 박혀서 열심히 뺑뺑이 돈 덕에, 각종 지원도 받고 좁게나마 정부에서 지은 아파트 방도 얻었다.
하지만 그 대신 20대 중반의,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육군 병장이 남게 된 것이다. 남들이 대학이다 스펙이다 하는 시기를 그는 기관총, 삽과 함께 보냈다.
“그 뭐더라 괴수 시체 째고 하는 그 기업체 가면 군 가산점 빵빵하게 준다던데. 거기나 가볼까 하고. 거기 공기업이라면서? 그럼 잘 안 짤릴 거 아냐. 나같은 일자무식이 별 거 있냐, 안 짤리고 월급 따박따박 나오면 절이라도 해야지.”
“에이, 거긴 절대 아니지 말입니다. 소문도 계속 별로였고, 이번에 대대적으로 감사 들어간다던데. 그 뭐라고 하더라, 근무하던 사람들이 무슨 희귀병 걸려서 다 죽어간다고.”
“엥? 난 처음 듣는데.”
“그러니까, 뉴스도 좀 보고 하십쇼. 걸그룹 엉덩이는 그만보고.”
“야이 씨, 넌 안 봤냐? 너도 같이 봤잖아?”
“전 그래도 진뱀이랑 다르게 절제할 줄 압니다.”
“어쭈, 이제 나 간다고 막 나가냐?”
“저만큼 말년 대우 잘 해주는 후임도 없지 말입니다.”
그에 동의한 다는 듯이 진용운은 낄낄 웃어젖혔다. 조금 지나자,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부사수도 같이 낄낄거렸다.
“하아, 진짜 앞이 깜깜하긴 하다. 우리 어쩌냐. 진우야.”
“진뱀은 머리 좋잖슴까. 수능공부해서 대학가면 되지 말임다.”
“야, 내 나이에 무슨 수능이냐. 머리 다 굳어서 뭘 배웠는지 기억도 안 난다. 고등학교는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고. 너도 똑같으면서 무슨 공부 타령이냐?”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교대 시간이 되자, 부사수가 손목부근을 더듬으며 말했다.
“슬슬 교대 시간이지 말임다. 음, 슬슬 올 때 됐는데 불빛이 안 보이네.”
“보나마나 김윤기 그 새끼 자빠져 자느라 후번 제 시간에 못 깨운 거지. 존나 빠져가지고, 씨발. 가기 전에 그 새끼 한 번 제대로 족치고 나가?”
“에이, 진뱀이 뭐 하러 그럽니까. 진뱀 가시고 나서 제가 할 테니까 나갈 준비나 하십쇼.”
“야 넌 몇 달 더 봐야하는데 차라리 내가...어? 발소리 난다.”
“근데 불빛이 안 보이지 말임다. 발소리도 좀 이상한데...뭐지?”
두 사람이 이동로 방향을 유심히 노려봐도 보이는 건 없었다.
“...진우야.”
“예, 진뱀.”
“왠지 발밑이 떨리는 거 같지 않냐?”
“그거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이지 말임다.”
“...씨발.”
쿠구구구! 산이 뒤집힐 것 같은 진동에 초소 지붕이 장난감처럼 들썩거렸다. 진용운은 초소 밖으로 뛰쳐나갈까 하다가, 부사수의 어깨를 잡고 기둥으로 바싹 붙었다. 초소 말고는 엄폐물이라고는 없는 열린 장소에서 기둥에 의지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것 외에는 기댈 곳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진동은 더욱더 강해졌다.
‘씨발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하필이면...!’
콰르르릉! 투콰콰! 굉음과 함께 돌풍이 불어왔다. 바람에 날려 온 돌이라도 맞은 것인지 초소의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진용우와 그의 부사수 이진우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면서도,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크르르] 쿠구구구!
곧 그들은 창밖을 바라본 자신들을 원망하게 되었다.
건너편 봉우리는 아직도 흙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일어나 있었지만, 그 거대한 동체를 감출 수는 없었다. 못해도 20미터 정도는 낮아진 건너편 산봉우리에는 거대한, 뼈만 남아있는 샌 드래곤이 앉아있었다. 그 크기나, 골격구조가 조금 샌 드래곤과 달랐지만 그걸 알아볼 지식이 있는 자는 자리에 없었다.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 부르르 떨리며 펼쳐지고 있는 뼈만 남은 날개는, 근육도 피막도 없었지만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된 원리인지, 뼈만 남은 날개의 움직임에 뼈 밖에 없는 동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진용운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저 괴물이 그냥 가는구나!
콰콰! 콰드륵! 콰르르!
하지만 그의 기대는 날아오른 본 드래곤은 바로 옆에 있던 산봉우리에 주둥이를 쳐 박으며, 온 몸으로 산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진용운은 저 산에 있던 초소와 그 안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을 군인들의 안위에 대해서 떠올릴 수 없었다. 산이 깎여나가면서, 그 안에 있던 또 다른 본 드래곤이 대가리를 드러냈으니까.
[---!] 쇠로 꼰 밧줄을 잡아 뜯으면 이런 소리가 날까? 고막을 긁어내는 굉음과 함께 산봉우리 안에 있다가 해방된 또 다른 본 드래곤이 대가리를 쳐들며 포효했다. 뼈 밖에 없는 그것들에게 발성기관은커녕, 공기를 밀어 넣어줄 폐조차 없지만 그런 부분을 인지할만한 여유가 그들에겐 없었다.
두 마리째의 본 드래곤마저 해방되고, 슬슬 홰를 치기 시작하자 진용운은 어깨에 매달고 있었던 무전기를 붙잡고 외쳤다. 본 드래곤이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자신이 근무 투입할 당시 늘어져서 자고 있던 당직 사관을 향해서,
“나윤석, 일어나! 이 씹새야!”
***
“예, 아뇨. 괜찮습니다. 방금 막 끝나서 자고 있네요. 하하, 이제 익숙해져서 민폐랄 것도 없습니다. 저 혼자 지내서 방이 모자랄 일도 없고요. 예, 내일 뵙죠.”
류 현은 전화를 끊으면 한 숨도 함께 삼켰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보모노릇까지 하게 된 것인지. 이전 생에서 그의 팀이 정말 독특한 인간들로 구성되었다지만, 이런 연락을 대신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아군이 없어서 빌빌 거리는 것보다야 보모짓이 낫긴 하지.’
류 현은 그리 자신을 납득시키며 제 침대에 누워있는 승하를 내려다봤다. 삼켰던 한숨이 다시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특히 히히 웃으면서 자신을 눈치를 살피는 게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게 만들었다.
“자기보다 어린 동생한테 이렇게 걱정 끼치고 다니는 게 좋습니까?”
“아니- 걔가 너무 걱정이 많은 것뿐이거든? 자기도 새 마법 시험해보다가 내상입거나 어디 한 곳 부러져서 앓아누울 때도 있으면서, 너도 붙어 다녀보면 이런 애늙은이가 없구나 생각할 걸?”
류 현은 방금 전 통화의 상대인 백혜라에게 존경심마저 느낄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별 분란 없이 이 철딱서니 없는 여자를 제어한 것인가.
“이런 식으로 거짓말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은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알았어. 알았어. 나도 내 몸이 위험해지는 짓을 그냥 재미로 하진 않거든?”
“그런 분이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그러고 다닙니까?”
“에이 진짜!”
참지 못하고 승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면서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류 현은 모른 채했다. 내상을 진정시켜놨는데 저리 격하게 움직였으니 통증이 없을 수가 없다.
“으으...흥분했더니 가슴 쓰려. 야, 류 현 너 계속 그럴 거야?”
“흥분할 게 뭐가 있습니까. 사실인데. 작년에 대련하다가 다리 부러졌을 때도 그렇게 넘어가셨잖습니까. 제 말이 틀립니까?”
“이씨...”
씨근덕거리면서도 정말로 가슴이 쓰린지 승하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류 현은 잠자코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이번에는 한 숨을 참지 않고 내뱉었다.
“하아...얼른 눕기나 하십쇼. 화내다가 진정시킨 내상을 도지게 한다니 다섯 살짜리 애도 안 이럴 겁니다. 애들도 아픈 건 피할 줄 아니까.”
“으으...두고 봐, 꼭 그 말 되돌려...”
“예, 예. 제가 그렇게 굴면 그 때가서 마음껏 놀리십쇼. 지금은 일단 내상부터 다시 진정시킵시다. 내일 혜라 씨랑 만나는 데, 계속 이 상태면 제가 거짓말쟁이가 되잖습니까.”
류 현의 말에 승하는 얌전히 도로 누웠다. 토라진 게 사라지진 않는지, 고개를 돌리고 류 현을 외면한 모양새였지만 류 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녀의 배꼽 부위로 손을 옮겼다.
“아까처럼 하시면 됩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예, 천천히 계속.”
승하에게 심호흡을 지시하면서 류 현은 천천히 제 마력을 그녀 내부로 침투시켰다. 승하가 저항하지 않고 길을 내주었기에, 침투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내부로 침입해가는 데 성공한 류 현은 그녀의 장기 주변에 있는, 잘못한 붓질로 튄 것처럼 흩어져있는 그녀의 마력을 발견하고는 탐욕의 안개를 끌어올렸다. 승하의 몸이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약하게.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류 현은 오 분여가 더 지난 후, 승하의 배꼽 위에서 손을 떼면서 목을 뒤틀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긴장한 탓인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여지없이 터져 나왔다.
“근데...”
“그냥 주무시죠. 말을 하면 안 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감정이 격해지면 다시 도질 수도 있습니다.”
“야, 난 너 생각해서 묻는 거거든?”
“네, 네. 그렇게 믿어드리죠.”
“확 그냥 모른 척 해버릴까 보다...너 대체 무슨 말 하려고 대련으로 나 꼬신 거야?”
류 현은 허를 찔린 얼굴이 돼서 승하와 마주봤다. 그랬다, 애초에 류 현은 승하에게 엘더 리치의 존재를 알리고 도움을 청하려고 부른 것이었다. 그녀가 대련에서 보여준 것이 너무 황당무계한 것이라, 거기에 신경이 쏠려서 본 목적을 잊고 있었다. 승하가 그 직후에 토혈을 하면서 뻗어버린 것도 꽤 크게 한몫했고 말이다.
“...지금 말씀 드리는 건 좀 그런데요.”
“대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너 ‘예거즈’라도 들어가?”
“제가 거길 왜 들어갑니까. 아니, 기껏 다시 진정시킨 내상 다시 도질까봐 그럽니다.”
“...네가 말 안하고 그대로 나가면 나 복장 터져서 내상 더 커질지도 몰라.”
“제가 그 소리 듣고 꼭 알려드려야겠구나! 할 것 같습니까. 꿈 깨시죠.”
“너 갈수록 막 대해. 존댓말만 붙이고.”
“그럼, 예전처럼 대해 드립니까?”
말은 그렇게 해놓고 그건 싫은지 승하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류 현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얌전히 자고 있으려는 당부를 내뱉으려는 찰나,
부우웅! 류 현의 바지 주머니의 휴대폰이 몸을 떨어대었다. 화면에 떠오른 문민호 라는 이름을 보고 류 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블랙 던전 건수 이후에 문민호는 류 현과 높으신 분들과의 식사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류 현이 신경질을 내지 못하는 선에서 계속 귀찮게 굴고 있었다.
‘덮어놓고 무시하긴 좀 그렇지...아무리 저쪽이 나를 무시할 수 없어도, 감정 문제 때문에 정보 순위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도 있는 거니까.’
류 현은 어떤 말로 거절할까 고민하며 전화를 받았다.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은 류 현의 표정이 굳어지는 데는 십 여초도 걸리지 않았다.
“예, 지금은...러시아요? 방향이...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당장 움직일 필요는 없겠군요. 아, 영상이 있다고요? 네, 보내 주시죠. 예, 보고 나서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지요. 예, 마침 모일 일이 있어서 내일까지 어떻게 대략적인 의견정도는...네, 내일 연락드리죠.”
통화를 마친 류 현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승하를 향해서, 한 숨과 함께 말했다.
“내상 좀 도질지도 모르지만...들으실 겁니까?”
승하는 자신이 환자라는 사실조차 잊었는지,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류 현은,
‘네임드 몹이 한 번에 둘...아니, 숫자로 따지면 셋인가...이젠 놀랄 기운도 없다...’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민호가 알려온 소식은 엘더 리치가 현실에 나타난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황에서, 두 번째 네임드 몹인 본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것이었으니까!
‘칼리프 그 망할 여자, 이걸 그냥 정상궤도에 돌아간다고 표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