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3화 〉탐식마(貪食魔) (163/429)



〈 163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제 머리 위에서 빛을 내리쬐고 있는 전등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슬쩍 뛰어오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임에도, 왠지 모르게 멀게만 느껴지는 기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무슨 수를 써도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 가만히 있으면 멀어져서 이내 보이지 않게 될  같은 그런 기분.

‘...멀군.’

어제, 장이셴과 리커창을 만나고 나서 느낀 것들이었다. 장이셴이 가지고 온 영상에서 리치 군단을 목격한  현은 상황이 점점 그의 손을 떠나서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주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한 적이 없지만, 이런 식으로 굴러갈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아니, 생각하기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멍청하긴. 상황이 그렇게  좋을 대로만 흘러갈 리가 없는데...’

 현이 어젯밤 내내 그랬던 것처럼 자책을 곱씹으려던 그 때였다. 체육관 출입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내가 먼저 제안해 놓고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네가 먼저 말을 꺼낼 줄 몰랐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상담정도는 대련 횟수 같은 거 안 따지고 해줄  있는데.”

말하는 것과 달리 칼까지 차고, 만전 상태로 들어온 승하는 사뿐사뿐 류 현이 서있는 중앙부로 다가왔다. 류 현은 보고 있지 않는다면 움직이는 지조차 모를 정도로 기척 없이 다가오는 친구를 뚱한 얼굴로 대했다.

“말은 그리 하시면서 아주 만전상태로 오셨군요.”
“아하하, 너무 속 보였나? 하지만 네가 이렇게 먼저  꺼낸 것도 처음이잖아? 매번 내가 매달려야 마지못해서 허락해주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진짜 나쁜 놈 같이 들리네요.”

실제로 승하는 류 현이 ‘강림’을 쓰는 건 본 이후, 그의 시간이  때마다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대련하자고 꼬셔대었다. 매번 류 현의 정중한 거절내지,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들어서는 대가성 대련이나마 간간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류 현이 먼저 운을 뗀 것이다. ‘강림’ 개발 초기 때처럼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아님에도 말이다. 승하가 어젯밤에 류 현에게 연락을 받고, 컨디션 조절할 겨를도 없이 오늘로 날짜를 잡은 건 혹여 류 현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지금 태도를 봐선 그럴 거 같진 않지만, 어쨌든 승하는 만족했다. 마침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으니까.

“그럼 좋은 놈 소리 들을 줄 알았어? 이런 여자가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몸을 배배 꼬면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승하는 류 현의 시선에도 멈출 생각이 별로 없었다. 류 현은 먹히지도 않을 제지 대신에 승하의 차림새를 살폈다.

기껏 도와준 보답으로 대련해준다고 하면  늘어난 츄리닝에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타나던 승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전거 경주에 참가하는 선수 같은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눈곱만 대충 떼고 나온  아니라, 머리까지 틀어 올려서 인상이 평소와는 딴판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장비까지 다 차고 나온 거지. 저런 장비는 처음 보는데. 끽해야 레인코트 계열 같은 거나 입던 사람이.’

 현은 그냥 보이는 그대로 일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제 옷도 고르기 귀찮아서 백혜라와 같은 걸로 사이즈만 키워서 산다는 인간이 이런 식으로 번거로움을 자처할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총구를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찌그러지는 그런 물건이겠지. 류 현의 궁금증은 대련에 왜 그런 걸 입고 왔냐는 거였다. 둘은 대련 중에  상처를 주고받는 편이었지만, 저런 본격적인 장비를 갖추고 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있다한들 그렇게 할 승하도 아니었고.

류 현은 놀리듯이 슬쩍 말을 건넸다.


“그냥 대련일 뿐인데 그렇게 저를 때려눕히고 싶으십니까? 아주 풀세팅을 해서 오셨네.”
“아, 이거? 이건 그냥 보험이야. 보험.”


승하가 가슴께를 늘어뜨려 보이며 너스레를 떨자, 류 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보험? 아무 보호 장치 없이 대련하다가 골절돼도 히히 웃던 인간이 이제 와서?


“너한테 맞는  말고, 내가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거든.”

듣기에 따라서 범죄성이 다분한 발언이었지만 류 현은 뚱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기울였다. 대체  하려고 하기에 안 하던 준비까지 해온 거란 말인가?

“대체 뭘 하시려고...”
“에이, 그걸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걱정 마, 네가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 제가 부상 입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승하 씨는 며칠로 안 끝나잖습니까.”


용잡이 팀원이나 세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길길이 뛸 발언이었지만  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칼에 눈을 찔리거나, 검상에 내장을 쏟아 내거나, 상 하반신이 분리되는 건 말로 다할 수 없는 불쾌한 경험이지만, 이기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대련도  연장선상 안의 일이었다. 승하와 대련하면 강도조절이 불가능해지니 어지간히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피하는 편이었지만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끽해야 오른팔 며칠 못 쓰고 끝일 텐데 뭐. 혹시나 해서 이렇게 장비까지 차려입고 왔는걸.”
“아니 그게 어떻게...”
“그러고 보니,  나한테 말 안 해도 괜찮아?”

류 현은 승하의 물음에 잠깐 멈칫했다. 승하는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제 안에서 모든 추측을 끝내고 앞뒤 전부 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옆에서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눈치를 줘도 계속 이러는 걸 보면 천성인 모양이다. 다행스럽게도 류 현은 그녀의 이 이상한 버릇에 맞춰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제가  일이 있어서 대련 핑계로 불렀다는 거군요.”
“아니야?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세상 고민은 다 끌어안고 있던 표정이던데.”


그게 그렇게 보였나. 류 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중국에 나타난 엘더 리치의 수하로 보이는 리치 군단을 본 뒤로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저도 모르게 그런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고  현은 혼자 납득했다.


대련 운운하며 그녀를 찾은 것도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틀린 건 아닙니다만...대련 끝나고 하면 됩니다.  쪽이 나을  같군요. 듣고 나면 집중 못하실 거 같아서.”
“응? 대체 뭐 길래 이렇게 기대감 팍팍 늘리는 거야? 진짜 무슨 일 난거야?”

류 현은 그저 쓰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련 핑계로 불러내서 부탁하는 것도 그런데, 이야기부터 듣고 나서 승하가 대련 의욕이 떨어지는 걸 원치는 않았다. 승하는 류 현을 이리저리 뜯어보다가 팔을 걷어 부치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길게 끌 일도 아니니까 후딱 끝내고 무슨 일인지 들어야겠어.”


몸을 푸려는 듯 제자리에서 통통 뛰고 있는 승하를 보며 류 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대련하자고 쫓아다녀 놓고는 빨리 끝내서  어쩌자는 건지...제가 먼저 들어갑니까?”
“따로 몸 풀 필요 같은 거 없어.  ‘강림’쓸 때 예열 같은 거 안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죠. 근데 승하 씨는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니, 이번에는 그럴 필요 없어.  정도 덜 풀린 게 적당해.”
‘덜 풀리는 게 맞다고? 대체 뭘 하려고?’

승하가 그 순간 통통 뛰던  멈추고 자세를 잡았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왼발은 뒤로 빼고 오른쪽 어깨를 벽으로 삼듯이 내민 자세. 검을 쓸 줄은 알지만 검술에 소양은 없는 류 현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실전보다는 영화나 만화 같은 곳에서 더 많이 나온 자세였으니까.

‘거합...? 아니 그게 의미가 있나?’
“‘강림’준비 해둬.”


승하는 류 현이 원하던 대답대신 짧게 경고하듯이 말했다. 류 현은 더욱 떨떠름한 기분이 되어 그녀를 바라봤다. 승하의 자세는 그대로였다.


검술에 소양이랄 게 없는 류 현도 검집에 검을 꽂아둔 상태에서 뽑으면서 베는 것보다, 뽑은 상태에서 그냥 베는 게 낫다는 걸 안다. 실제로 승하는 저런 거합 비슷한 짓도 한 적이 없다. 대련을 하다가 힘겨루기 와중에 일부러 검을 부러뜨려서 빈틈을 만든 적은 있어도 말이다.

‘또 무슨 이상한 짓을...’


류 현이 승하의 기행을 지적하려 입을 떼려던 때였다.

“...!”


류 현은 제 이성보다 훨씬 신뢰하는 감이, 그것이 미친 듯이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을 느꼈다. 승하는 검과 검집을 움켜쥔  미동조차 없음에도, 그의 감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위의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달라진  없는데? 평소 대련 때랑 다르게 적의도...!’


제 감이 보내오는 위험신호 때문에 접근할 엄두도 못 내고 승하의 상태를 살피던  현은, 어째서 자신이 눈치 채지 못했나 싶은 이상점을 발견해내었다.


‘깨끗하다...적의도, 마력도...’


아주 깨끗했다. 당장이라도 거합을 행할 것 같은 자세의 승하에게서는 마력검의 전조도, 검을 쥐고 상대와 마주 섰을  흘러나오는 적의도 한 점 느껴지지 않고 깨끗했다.


‘미친...이거 설마...’

류 현이 슬쩍 발을 뒤로 빼려고 할 때였다. 영원히 그대로 서있을 것만 같았던 승하의 몸이,  낌새에 반응하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오른쪽 어깨가 움찔했다. 류 현은 그 뒤를 보지 못했다.

끼이이이! 뻐벙! 류 현이 본 것은  가지 안 되었다. 승하의 몸이 움직였던 순간, 그의 본능과 호응해서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괴물이 뛰쳐나왔고, 전에 없을 정도로 대규모로 ‘강림’이 펼쳐졌다. 그의 몸에 국한된 게 아니라, 그의 몸의 갑절을 되는 크기의 검은 안개로서!

순간이지만 검은 안개가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구현되었다. 그건  현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경지의 영역이었다. 최근에 류 현이 내딛을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던 그 영역. 기존의 에너지 드레인을 넘어선, 훨씬 불길한 무언가!

하지만 그렇게 고밀도로 구현된 검은 안개조차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검은 안개는 ‘그것’의 궤도를 비껴나가게 하는 것에 그치고 그대로 깎여나가 소멸했다. 그 결과, 체육관 천장에는 대포알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원래  현을 스치지도 못하는 각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로 ‘강림’이 강하게 발동된 것 자체가 큰 손해였지만 류 현은 그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니, 여유가 있었다 한들 손해를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격이었으니까.


‘미친...방금 그게 대체 뭐야...?’

류 현은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승하가 한 짓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칼을 휘둘러서 한 짓인 것은 분명했는데, 도무지 거합이니, 검술이니 하는 것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승하 씨...방금 그게...”


류 현이 체육관 천장의 구멍에서 승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승하는,

“커읍...우웩...”

저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헐떡거리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하고는 그대로 고꾸라졌으니까. 류 현은 날듯이 뛰어서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곧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내상입어 놓고 뭐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사람 골려먹는  취밉니까?”
“헤헤, 성공했다...솔직히 10프로 미만이었는데...”


류 현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이렇게 해치워버리니 뭐라고 할 말도 없군. 그래, 덕택에 나도 다음 단계 엿봤으니 좋은  좋은 거지.’


그렇다고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진 않았다.

“다음 대련부터는 백혜라 씨를 참석시켜야겠습니다.”
“야아, 그런 게 어디...우윽...가슴 쓰려...”
“신소리 말고  꾹 다물고 계시죠. 일단 응급처치부터 합시다.”

승하가 정말 그럴 거냐고 묻는 것처럼 샐쭉 노려봤지만,  현은 본 채도 안하고 그녀의 배꼽자리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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