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제 머리 위에서 빛을 내리쬐고 있는 전등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슬쩍 뛰어오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임에도, 왠지 모르게 멀게만 느껴지는 기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무슨 수를 써도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 가만히 있으면 멀어져서 이내 보이지 않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멀군.’
어제, 장이셴과 리커창을 만나고 나서 느낀 것들이었다. 장이셴이 가지고 온 영상에서 리치 군단을 목격한 류 현은 상황이 점점 그의 손을 떠나서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주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한 적이 없지만, 이런 식으로 굴러갈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아니, 생각하기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멍청하긴. 상황이 그렇게 내 좋을 대로만 흘러갈 리가 없는데...’
류 현이 어젯밤 내내 그랬던 것처럼 자책을 곱씹으려던 그 때였다. 체육관 출입문이 드르륵 하고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내가 먼저 제안해 놓고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네가 먼저 말을 꺼낼 줄 몰랐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상담정도는 대련 횟수 같은 거 안 따지고 해줄 수 있는데.”
말하는 것과 달리 칼까지 차고, 만전 상태로 들어온 승하는 사뿐사뿐 류 현이 서있는 중앙부로 다가왔다. 류 현은 보고 있지 않는다면 움직이는 지조차 모를 정도로 기척 없이 다가오는 친구를 뚱한 얼굴로 대했다.
“말은 그리 하시면서 아주 만전상태로 오셨군요.”
“아하하, 너무 속 보였나? 하지만 네가 이렇게 먼저 말 꺼낸 것도 처음이잖아? 매번 내가 매달려야 마지못해서 허락해주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진짜 나쁜 놈 같이 들리네요.”
실제로 승하는 류 현이 ‘강림’을 쓰는 건 본 이후, 그의 시간이 빌 때마다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대련하자고 꼬셔대었다. 매번 류 현의 정중한 거절내지,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들어서는 대가성 대련이나마 간간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류 현이 먼저 운을 뗀 것이다. ‘강림’ 개발 초기 때처럼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아님에도 말이다. 승하가 어젯밤에 류 현에게 연락을 받고, 컨디션 조절할 겨를도 없이 오늘로 날짜를 잡은 건 혹여 류 현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지금 태도를 봐선 그럴 거 같진 않지만, 어쨌든 승하는 만족했다. 마침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도 있었으니까.
“그럼 좋은 놈 소리 들을 줄 알았어? 이런 여자가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몸을 배배 꼬면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승하는 류 현의 시선에도 멈출 생각이 별로 없었다. 류 현은 먹히지도 않을 제지 대신에 승하의 차림새를 살폈다.
기껏 도와준 보답으로 대련해준다고 하면 다 늘어난 츄리닝에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타나던 승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전거 경주에 참가하는 선수 같은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눈곱만 대충 떼고 나온 게 아니라, 머리까지 틀어 올려서 인상이 평소와는 딴판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장비까지 다 차고 나온 거지. 저런 장비는 처음 보는데. 끽해야 레인코트 계열 같은 거나 입던 사람이.’
류 현은 그냥 보이는 그대로 일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제 옷도 고르기 귀찮아서 백혜라와 같은 걸로 사이즈만 키워서 산다는 인간이 이런 식으로 번거로움을 자처할 것 같진 않았다. 분명 총구를 갖다 대고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찌그러지는 그런 물건이겠지. 류 현의 궁금증은 대련에 왜 그런 걸 입고 왔냐는 거였다. 둘은 대련 중에 꽤 상처를 주고받는 편이었지만, 저런 본격적인 장비를 갖추고 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있다한들 그렇게 할 승하도 아니었고.
류 현은 놀리듯이 슬쩍 말을 건넸다.
“그냥 대련일 뿐인데 그렇게 저를 때려눕히고 싶으십니까? 아주 풀세팅을 해서 오셨네.”
“아, 이거? 이건 그냥 보험이야. 보험.”
승하가 가슴께를 늘어뜨려 보이며 너스레를 떨자, 류 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보험? 아무 보호 장치 없이 대련하다가 골절돼도 히히 웃던 인간이 이제 와서?
“너한테 맞는 거 말고, 내가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거든.”
듣기에 따라서 범죄성이 다분한 발언이었지만 류 현은 뚱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기울였다. 대체 뭘 하려고 하기에 안 하던 준비까지 해온 거란 말인가?
“대체 뭘 하시려고...”
“에이, 그걸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걱정 마, 네가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아니 제가 부상 입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승하 씨는 며칠로 안 끝나잖습니까.”
용잡이 팀원이나 세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길길이 뛸 발언이었지만 류 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칼에 눈을 찔리거나, 검상에 내장을 쏟아 내거나, 상 하반신이 분리되는 건 말로 다할 수 없는 불쾌한 경험이지만, 이기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대련도 그 연장선상 안의 일이었다. 승하와 대련하면 강도조절이 불가능해지니 어지간히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피하는 편이었지만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끽해야 오른팔 며칠 못 쓰고 끝일 텐데 뭐. 혹시나 해서 이렇게 장비까지 차려입고 왔는걸.”
“아니 그게 어떻게...”
“그러고 보니, 너 나한테 말 안 해도 괜찮아?”
류 현은 승하의 물음에 잠깐 멈칫했다. 승하는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제 안에서 모든 추측을 끝내고 앞뒤 전부 뗀 질문을 던지곤 했다. 옆에서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눈치를 줘도 계속 이러는 걸 보면 천성인 모양이다. 다행스럽게도 류 현은 그녀의 이 이상한 버릇에 맞춰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제가 볼 일이 있어서 대련 핑계로 불렀다는 거군요.”
“아니야?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세상 고민은 다 끌어안고 있던 표정이던데.”
그게 그렇게 보였나. 류 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중국에 나타난 엘더 리치의 수하로 보이는 리치 군단을 본 뒤로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저도 모르게 그런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고 류 현은 혼자 납득했다.
대련 운운하며 그녀를 찾은 것도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틀린 건 아닙니다만...대련 끝나고 하면 됩니다. 그 쪽이 나을 것 같군요. 듣고 나면 집중 못하실 거 같아서.”
“응? 대체 뭐 길래 이렇게 기대감 팍팍 늘리는 거야? 진짜 무슨 일 난거야?”
류 현은 그저 쓰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련 핑계로 불러내서 부탁하는 것도 그런데, 이야기부터 듣고 나서 승하가 대련 의욕이 떨어지는 걸 원치는 않았다. 승하는 류 현을 이리저리 뜯어보다가 팔을 걷어 부치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길게 끌 일도 아니니까 후딱 끝내고 무슨 일인지 들어야겠어.”
몸을 푸려는 듯 제자리에서 통통 뛰고 있는 승하를 보며 류 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대련하자고 쫓아다녀 놓고는 빨리 끝내서 뭘 어쩌자는 건지...제가 먼저 들어갑니까?”
“따로 몸 풀 필요 같은 거 없어. 너 ‘강림’쓸 때 예열 같은 거 안 필요하잖아?”
“그건 그렇죠. 근데 승하 씨는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니, 이번에는 그럴 필요 없어. 이 정도 덜 풀린 게 적당해.”
‘덜 풀리는 게 맞다고? 대체 뭘 하려고?’
승하가 그 순간 통통 뛰던 걸 멈추고 자세를 잡았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왼발은 뒤로 빼고 오른쪽 어깨를 벽으로 삼듯이 내민 자세. 검을 쓸 줄은 알지만 검술에 소양은 없는 류 현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실전보다는 영화나 만화 같은 곳에서 더 많이 나온 자세였으니까.
‘거합...? 아니 그게 의미가 있나?’
“‘강림’준비 해둬.”
승하는 류 현이 원하던 대답대신 짧게 경고하듯이 말했다. 류 현은 더욱 떨떠름한 기분이 되어 그녀를 바라봤다. 승하의 자세는 그대로였다.
검술에 소양이랄 게 없는 류 현도 검집에 검을 꽂아둔 상태에서 뽑으면서 베는 것보다, 뽑은 상태에서 그냥 베는 게 낫다는 걸 안다. 실제로 승하는 저런 거합 비슷한 짓도 한 적이 없다. 대련을 하다가 힘겨루기 와중에 일부러 검을 부러뜨려서 빈틈을 만든 적은 있어도 말이다.
‘또 무슨 이상한 짓을...’
류 현이 승하의 기행을 지적하려 입을 떼려던 때였다.
“...!”
류 현은 제 이성보다 훨씬 신뢰하는 감이, 그것이 미친 듯이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을 느꼈다. 승하는 검과 검집을 움켜쥔 채 미동조차 없음에도, 그의 감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위의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달라진 건 없는데? 평소 대련 때랑 다르게 적의도...!’
제 감이 보내오는 위험신호 때문에 접근할 엄두도 못 내고 승하의 상태를 살피던 류 현은, 어째서 자신이 눈치 채지 못했나 싶은 이상점을 발견해내었다.
‘깨끗하다...적의도, 마력도...’
아주 깨끗했다. 당장이라도 거합을 행할 것 같은 자세의 승하에게서는 마력검의 전조도, 검을 쥐고 상대와 마주 섰을 때 흘러나오는 적의도 한 점 느껴지지 않고 깨끗했다.
‘미친...이거 설마...’
류 현이 슬쩍 발을 뒤로 빼려고 할 때였다. 영원히 그대로 서있을 것만 같았던 승하의 몸이, 그 낌새에 반응하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오른쪽 어깨가 움찔했다. 류 현은 그 뒤를 보지 못했다.
끼이이이! 뻐벙! 류 현이 본 것은 몇 가지 안 되었다. 승하의 몸이 움직였던 순간, 그의 본능과 호응해서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괴물이 뛰쳐나왔고, 전에 없을 정도로 대규모로 ‘강림’이 펼쳐졌다. 그의 몸에 국한된 게 아니라, 그의 몸의 갑절을 되는 크기의 검은 안개로서!
순간이지만 검은 안개가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구현되었다. 그건 류 현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경지의 영역이었다. 최근에 류 현이 내딛을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던 그 영역. 기존의 에너지 드레인을 넘어선, 훨씬 불길한 무언가!
하지만 그렇게 고밀도로 구현된 검은 안개조차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검은 안개는 ‘그것’의 궤도를 비껴나가게 하는 것에 그치고 그대로 깎여나가 소멸했다. 그 결과, 체육관 천장에는 대포알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원래 류 현을 스치지도 못하는 각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로 ‘강림’이 강하게 발동된 것 자체가 큰 손해였지만 류 현은 그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니, 여유가 있었다 한들 손해를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격이었으니까.
‘미친...방금 그게 대체 뭐야...?’
류 현은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승하가 한 짓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칼을 휘둘러서 한 짓인 것은 분명했는데, 도무지 거합이니, 검술이니 하는 것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승하 씨...방금 그게...”
류 현이 체육관 천장의 구멍에서 승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승하는,
“커읍...우웩...”
저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헐떡거리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하고는 그대로 고꾸라졌으니까. 류 현은 날듯이 뛰어서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곧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니, 내상입어 놓고 뭐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사람 골려먹는 게 취밉니까?”
“헤헤, 성공했다...솔직히 10프로 미만이었는데...”
류 현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이렇게 해치워버리니 뭐라고 할 말도 없군. 그래, 덕택에 나도 다음 단계 엿봤으니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다고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진 않았다.
“다음 대련부터는 백혜라 씨를 참석시켜야겠습니다.”
“야아, 그런 게 어디...우윽...가슴 쓰려...”
“신소리 말고 입 꾹 다물고 계시죠. 일단 응급처치부터 합시다.”
승하가 정말 그럴 거냐고 묻는 것처럼 샐쭉 노려봤지만, 류 현은 본 채도 안하고 그녀의 배꼽자리에 손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