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탐식마(貪食魔)
‘대체 언제? 왜 중국에 있지? 휘하의 리치는 저게 전부인가? 성까지 다 지어놓고 왜 이렇게 잠잠했던 거지? 본 드래곤은? 설마 벌써 침투가 진행 중인 건가? 아니야, 그럼 사막이라도 티가 안 날 수가...’
류 현의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생각들에 실체가 있었다면 공사판을 방불케 하는 소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류 현의 머릿속은 온갖 추측으로 복잡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장이셴이라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그러고 보면 엘더 리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지...정말로 침투 진행 중인가...? 이번에는 티 안 나게 침투 가능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수록 끔찍한 가정만 튀어나왔다. 가정이 끔찍해질수록 류 현은 그것을 부정하듯이 자문자답에 더욱 집중했다. 표정으로 그걸 다 드러내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만약 그랬다면 그에게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고 있는 장이셴, 리커창에게 단순히 리치 숫자에 놀란 게 아니라는 걸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장이셴은 턱 주변에 힘줄이 두드러질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는 류 현으로부터 다른 정보를 캐내진 못했다. 리치라는 괴수를 밥 먹듯이 사냥할 정도로 자주 던전을 들락거리는 작자라고 하니, 그저 저 정도 수의 리치가 낼 수 있는 파괴력을 가늠해 보고 있는 것인가 했다. 그렇다고 타들어가는 속이 편해지진 않았지만.
‘씽크 탱크는 단순히 대가를 지불하는 걸로는 이 사내를 움직이기 힘들 것이라고 했었지.’
류 현이라는 괴물 플레이어가 세계에 자신을 드러낸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았다. 그 짧은 동안에 그는 자신이라는 인재를 바로 보지 못한 세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최초 타이틀을 먹어 치워갔다. 최초로 X던전을 정복한 자. 거기에 만족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머지 두 곳도 반년은커녕 세 달을 채우기도 전에 클로즈해 버렸다. 던전에 대한 세간의 상식은 자신에게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은 행보였다.
이후에 임펙트는 한참 모자라지만, 블랙 던전 또한 최초 정복자의 타이틀을 가져가 버렸다. 최단 시간 클리어라는 보고도 믿기 힘든 기록 또한 함께.
‘아프리카의 X던전을 교섭조차 없이 클리어 해준 것도 그렇고...미국이 매달리는 걸 보면 미국 측에도 그리 큰 걸 요구하진 않았다. 돈에 흔들리는 타입이 아니라는 거겠지.’
때문에 나름 난다 긴다 하는 작자들의 씽크 탱크들은 골머리를 앓아야만 했다. 비슷한 예시조차 없는 괴물을 어떤 카테고리 안에 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그 괴물에게 어떻게 접근해야하는 지 묻는 고용주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으니까.
류 현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괴물에게는, 그들이 납득할 만한 강렬한 욕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건 당혹스러운 걸 넘어서서,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보통 사람도 식물마냥 살아가는 걸 보면, 저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목숨을 거의 내놓다시피 한 생활을 하는 최상위 플레이어는? 소속 길드나 스폰서가 아무리 손을 써도 던전에 다녀온 달에는 반드시 신문지 일면을 장식할 만한 사고를 터뜨린다. 어지간한 나라는 그런 뒤처리를 담당하는 부서까지 비밀리에 만들어서 돌리고 있을 정도다. 그 정도로 목숨 내놓고 일하는, 잘 나가는 인간들의 욕구는 대단하다.
원하는 것도 그들의 머릿수만큼이나 다양하다. 돈, 차, 여자, 술, 도박 이런 것들은 매우 건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걸로 사람만 안 죽였다면.
미국에서 유럽으로 온 망명 영웅으로 유명한 지벡 건터의 경우에는 협회에서 현실로 들여오는 걸 금지한 식물을 대놓고 말아 피우고 다니고, 독일 국적의 어떤 미치광이는 현실에 나와 있는 동안 팔이 녹슨다며 멸종 위기의 맹수들을 연습 상대랍시고 썰고 다닌다. 던전 안에서 한 살육을 회개한답시고 피 칠갑한 상태로 교황청 건물 안에서 자는 자도 있다. 맹수 대신에 사람을 썰고 다녀서 인터폴의 수배명단에 오른 채, 망명한 나라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던전을 오가는 경우도 숱하게 있다.
장이셴과 동행한 리커창도 나름의 소원이, 욕구가 있다. 장이셴이 리커창을 후원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알고, 어떻게 도와줄 지도 알고 있으며 제어하기도 어렵지 않은 인물이니까. 하지만 눈앞의 괴물에게는 그게 없다.
아니, 사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없다고 장이셴 휘하의 씽크 탱크는 결론을 내놓은 상태였다. 기껏해야 그 괴물이 동정심이나 대의에 같은 것에 따라서 움직여줄 확률이 높으니, 그 쪽으로 어필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는 조언 같지도 않은 조언이 전부였다.
‘그럴 리가 없지. 이 자는 무력뿐만 아니라 정보까지 쥐고 있다. 명확한 목표가 없다면 뒤에서 정보만 풀었어도 충분했겠지. 우리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연합 원정대도 어쩌지 못한 X던전을 이 자는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아무런 부상 없이 해치웠다. 그것도 두 달 사이에 전부. 이 자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정보다. 두 곳의 X던전을 정리해준 것도,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서겠지. 정보의 출처만 알 수 있어도 교섭하는 게 훨씬 수월했을 터인데...쯧.’
속으로 혀를 차보아도 뾰족한 돌파구가 보이질 않았다. 상대는 이전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X던전이라는 이레귤러에 대한 정보마저 가지고 있는 자이니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상대가 어디까지 알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손해를 보더라도 이 일에 대한 정보만이라도 얻어가야 한다. 이 이상 은폐하고 있기도 힘들어.’
장이셴이 나름 큰 결심을 하고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도와주실 수는 없습니까?”
인사를 한 후에 병풍처럼 우두커니 앉아만 있던 리커창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장이셴이 전혀 상정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리커창을 정말로 보디가드 겸 분위기 연출용 병풍으로 데려온 것 이었으니까. 같은 플레이어인 류 현과 겸사겸사 안면도 터줄 겸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리커창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불쑥 발언한 걸로도 모자라서, 저런 언사라니! 장이셴은 저도 모르게 둘만 있을 때처럼 호통을 치려다가 겨우겨우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리커창을 나무라면 일이 더 꼬일 수도 있다. 아랫사람 하나 통제 못한다는 이미지를 얻는 것 정도는 약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단은 반응을 지켜보다가...
“글쎄요. 저 하나 움직이는 거야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하실 필요 없이 가능하긴 합니다만.”
장이셴은 방금 전까지 리커창을 어찌 나무랄지 고민하던 것을 잊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직구가 정답이었구나!
“하지만 제가 가도 딱히 달라질 건 없습니다. 리커창 씨도 아실 거 같습니다만 이건 누구 하나가 낀다고 해서 해결 될 만한 규모가 아니니까요.”
“나도 그건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다른 두 곳이 괴멸할 때 X던전도 유유히 클리어 하고 나왔지 않은가? 아무리 직선적인 리커창이라도 그걸 바로 말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공공연한 비밀 취급이긴 했지만, 직접 말을 내뱉는 건 그것과 비교도 안 되는 리스크를 동반한다. 막말로 눈앞의 상대가 그 소리를 듣고 기분이 틀어져서 박차고 나가면 어쩔 텐가?
‘이거 참...다들 내가 X던전에 대해서 다 알아서 클리어 했다고 생각하나 보군. 이놈이나 저놈이나 무슨 정보든 빼가려고 기웃거리고...현장에 안 가도 좋으니 정보를 달라 이건가? 젠장, 알면 나도 주고 싶다고.’
속이 뻔히 보이는 태도에 속이 욕지기로 부글부글 끓었지만 류 현은 애써 미소를 가장했다. 이미지가 확립할 때까지는 조심해야만 했다. 갑자기 네임드 몹의 존재를 확인한 탓에 준비고 뭐고 때려치우고 술이나 들이 키고 싶은 상황에서도 말이다.
“팀 단위로 움직일 때만 동원할 수 있는 화력도 있고, 팀원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해오면 저 혼자도 움직이기 힘드니 팀원들의 의견을 구해야할 것 같군요. 장이셴 씨, 괜찮겠습니까?”
화력이라는 말에 두 남자의 뺨이 가늘게 경련했다.
‘그 아티펙트를 말하는 건가? 그걸 써주겠다고?’
류 현이라는 괴물의 데뷔와 함께 밝혀진 검성과의 연관관계 같은 이슈 때문에 상대적으로 묻혔지만, 알만한 작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용잡이 팀이 그 자체만으로 퍼플급 괴수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아티펙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X던전에서 처음 목격된 칼날늑대를 청뢰가 구워버리는 걸 본 눈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유일하게 X던전 원정에 자국 인원을 끼워 넣을 수 있었던 미국은, 이 정보를 애써 감추려고 들었지만 입이라는 게 틀어막는다고 다 막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목격한 건 미국 측 인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알 라시드와 마람 압둘아지드라는 미국도 입을 막을 수 없는 자들이 이미 선행해서 원정대에 끼었다가 이탈했었으니까.
알 게 모르게 퍼진 소문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목격담대로 미사일을 넘보는 수준은 아니어도, 그 자체만으로 퍼플급 괴수에게도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아티펙트를 용잡이 팀이 보유하고 있다고!
보유자가 보유자인 만큼 찔러보는 시도조차 제대로 못해보고, 침만 흘리고 있을 뿐.
류 현에게 말은 안 했지만 이미 폭격과 미사일이라는 수단을 써봤다가 격추라는 결과물을 얻은 중국으로서는 눈이 돌아갈 만한 얘기였다. 이제까지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측했을 때, 리치들의 라이프 배슬은 성안에 있는 게 분명했고 그들에게 필요한 건 저지력이었다.
결사대가 성안으로 진입해서 라이프 배슬들을 박살내는 동안 리치들을 묶어둘 저지력! 퍼플급 괴수를 구워버릴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위력을 조정하면 더 많은 숫자를 저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티펙트 하나 생긴다고 전황이 확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괴수에 대한 데이터만 알고 실질적으로는 문외한이나 다름 없는 장이셴이나 현역 플레이어인 리커창 둘 다.
하지만 패는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더군다나 중국 내의 상위 플레이어를 박박 긁어모아야 할 작전을 수행해야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이거 생각지도 못한 조력을 얻게 될 지도 모르겠군. 배려에 감사드리오. 그리고...도움을 청하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나...의견 조율을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리실 것 같소?”
장이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류 현은 턱을 매만지며 고심하는 시늉을 했다. 그는 이 일을 맡는 것에 대해서 미루고 간볼 생각이 조금도 없었지만, 아프리카 때 같은 이미지가 더 커지면 곤란했다. 무료봉사 같은 짓을 못할 건 없지만, 그래선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그는 이미 과거에 경험했었다.
“음...나흘 안에는 확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어떻게 될 거라는 추측도 하기가 어렵군요. 아시다시피 사안이...”
“어찌 우리가 그걸 모르겠소. 그저 이야기가 잘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소. 잘 부탁드리오. 류 현공.”
“벌써부터 공치사를 하시니 이거 욕먹기 싫어서라도 열심히 설득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