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은 멍하니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탁자 위의 깍지 낀 제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은 수틀리면 괴수를 맨손으로 쥐어뜯는 플레이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끔했다. 잦은 골절로 뒤틀린 손가락도, 뜨거운 열기에 노출돼서 살가죽이 오그라든 자국도 없다. 생길 당시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게 신기한 깊은 흉터도, 부러지길 반복하다가 기괴하게 변형된 손톱도 없다.
‘하긴 왜 흉터가 남았는지도 모르면서 손이 깨끗한 게 낯설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지...’
공기 중에 노출된 플레이어의 피는 증발한다. 플레이어는 질병과 독에 대한 강력한 내성을 지닌다. 여기에 잘린 다리를 물고 달아났다가 붙여서 돌아오는 괴수 정도는 아니지만,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재생력이 있는 편이다.
이러한 플레이어를 인류와 동떨어진 존재로 보이게 만들던 요소들은 플레이어의 성장과 함께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잘린 팔이 돋아나는 정도는 아니지만, 잘린 팔을 찾아서 절단면에 갖다 대면 어떻게든 붙는다. 그 뒤에 완전회복까지 걸리는 시간과 재활기간을 어떻게든 견딘다면 그럭저럭 전력을 회복해서 복귀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는 것이다.
류 현은 그런 최상위 플레이어 중에서도 독보적인 재생력을 가진 이였다. 팔이 잘리면 절단면에서 꾸물꾸물 팔이 돋아나고, 분쇄골절은 하루는커녕 반나절이면 회복하고도 남는다. 협력했었던 미군들이 그가 싸우는 꼴을 보고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사람의 팔이 세 갈래로 찢어졌는데 순식간에 회복회서 그쪽팔로 주먹을 내리꽂는 모습은 어떻게 봐도 인간보다는 괴수에 가까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류 현도 회귀 전에는 이런 저런 흉터를 달고 있었다. 팔이 잘려도 사흘이면 완전 회복 가능한 괴물 같은 재생력을 가진 그가 말이다. 정확한 이유는 류 현도 몰랐다. 상위 플레이어들의 사례를 연구한 학자가 남긴 이론에 따르면 플레이어 본인이 인지에 따른 환상통 같은 증상이라고 하지만, 류 현에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사라진 흉터들. 류 현은 상처 하나 없는 제 손을 뚫어져라보면서, 그리움과 후회사이에 끼인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제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했다.
‘그래, 그 인간이랑 싸웠다는 증거라고 할 만한 건 내 기억뿐인데 이렇게 난리칠 건 없지.’
류 현은 픽 웃음을 흘렸다. 이번 생에서 서해란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과민반응도 그런 과민반응이 없었다. 세아가 죽던 날을 꿈으로 봤고,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지만 그렇게 신경질을 부릴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전 생에서의 서해란은 깨끗하게 끝을 맺은 상대였으니까.
첫인상은 별로였던 그 인연이 계속돼서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 그녀로서는 고민의 여지도 없는 당연한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류 현에게는 지금도 실감이 안 가는 일이었다. [‘애기살’의 파도잡이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미래를 바꾸고자 했던 그가 바랐던 일이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 했다.
‘터주’의 문민호도 그렇고, 알 라시드도 그렇고 류 현은 이전 생의 그들과 떼놓고 볼 수가 없었다.
‘후우우, 그래 초장부터 신경 곤두세우고 지랄할 필요는 없어.’
오늘 만나기로 한 리커창 또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이전 생에서 류 현과 좋지 못한 쪽으로 엮였던 자.
리커창. ‘대소환’ 이후에는 별 의미는 없지만 한국에서 한자 읽는 방식으로 읽으면 이극강李克强. 그의 부모가 아들의 미래를 알고 지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행보에 들어맞는 이름이었다. ‘대소환’을 거치며 부모를 잃고, 능력을 각성한 1세대 플레이어인 그는 33세의 나이에 중국에서 무신이라고 추앙받게 된다.
그는 무신이라는 별칭은 몰라도 제 이름에 걸 맞는 용력을 가진 자였다. 그 용력이 플레이어를 상대로 더 빛났지만, 그 때문에 그는 무신이라고 추앙받을 수 있었다. 그 혼란기에 괴수 때려잡는데 능력이 치우쳐졌다면 아마 그도 부려 먹히다가 치워지는 사냥개 신세를 피하지 못했을 테니까.
경쟁자들을 관으로 인도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리커창은, 그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와 자국의 군벌인 ‘터주’마저 괴멸시킨 류 현과 맞붙게 되었다. 정말 시답잖은 자존심 싸움이었지만, 리커창은 그 일로 불패신화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불꽃같던 그의 인생도 함께.
그 뒤로 류 현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적과 신경전을 벌여야했다. 리커창과의 싸움은 구린 술수가 오고갈 수도 없게 순식간에 끝났지만, 그 뒤처리 과정 때문에 좋은 감정이 남기 힘들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
‘과거의 일이야. 신경 써봐야 괜한 감정낭비야...’
동시에 그건 류 현이 떨쳐내야만 하는 과거의 그림자이기도 했다. 자신의 행보자체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고, 그에 발이라도 맞춘 것처럼 주변마저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기억에 매달려서 쓸데없이 적을 늘릴 만한 태도를 보이는 건, 미래를 바꾸겠다고 날뛰는 자신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과 별 다를 것이 없다.
돌아와서 다시 시작했다고 리커창을 믿으려고 애쓸 것까진 없지만, 필요이상으로 경계하거나 으르렁거릴 필요는 없다.
‘진짜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게 됐구만, 젠장.’
또한 그것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는 있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리커창과의 싸움이 싸움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시시하게 결판났다지만, 어디까지나 서로를 죽이려고 들었던 관계 아닌가?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류 현이 저도 모르게 기세를 끌어올린 건 그래서였다.
가장 먼저 방안으로 들어선 건 키가 작은 남자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거의 강 찬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 외에는 남자에게는 이렇다 할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냥 적당히 나이를 잘 먹은 것 같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아저씨.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키 작은 중년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거한은 확연히 달랐다.
앞선 작은 중년 남자 어깨의 배는 되어 보이는 떡 벌어진 어깨, 과장 좀 보태서 어깨사이에 기둥을 박아놓은 것 같은 굵은 목, 가장 앞자리 수가 2로 시작할 것 같은 커다란 키와 그 키에 비해서 조금 긴 팔까지. 신이 있다면 이 남자를 빚어 보낼 때, 무장의 운명을 같이 엮어서 보낸 것 같은 남자였다. 화룡점정으로 그 사내는 그 덩치에 위압감을 더 해줄 험악한 얼굴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 사내는 류 현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무신, 리커창李克强 이었다.
‘뭔가 좀 너저분한 느낌이군. 진짜 소문대로 플레이어들 잡아 족치면서 포텐을 터뜨린 모양이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류 현과 붙었을 때와는 달리 리커창의 기세가 조금 산만한 느낌이라는 점. ‘뭐,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류 현은 거기까지 감상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님들을 맞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들 많으셨지요? 반갑습니다. 류 현이라고 합니다.”
“장이셴이라고 하오.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어서 감사드리오. 이쪽은 우리 중국의 플레이어 협회 간부 리커창이라고 하오. 원체 과묵한 친구라, 좀 양해 부탁드리오.”
“...리커창 입니다.”
중국 측이 먼저 만남을 요청했다는 걸 생각하면 불성실한 태도라고 볼만 했으나, 류 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지 상사말은 듣기는 하네.’
리커창의 성격의 밑바닥까지 봤었으니까. 류 현과 붙었던 당시 리커창은 장이셴을 비롯한 유력자들의 후원을 받아 칠현회라는 군벌조직을 결성해, 그 조직의 에이스 카드로 날뛰고 있었다.
상사라고 할 만한 존재가 없었던 당시의 리커창은 정말 개 같은 성질머리를 마음껏 뽐내고 다녔었다. 류 현과 부딪히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아를 걸고넘어지지 않았다면 목숨은 부지했겠지만...당시의 리커창에게는 그런 분별력이 없었다. 참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긴, 같은 게 이상한 거지.’
류 현은 쭈뼛쭈뼛 자리에 앉는 리커창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리커창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만나달라고 요청해놓고 할 소리는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 데, 그리 해도 괜찮겠소?”
“예, 뭐 얼마든지.”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협상은커녕 대화조차 길게 끌고 가는 취미도, 능력도 없는 류 현이 먼저 그렇게 제의할 생각이었으니까. 장이셴은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지 가슴을 몇 번 쓸어내렸다.
“...거듭 말하게 되는군. 이렇게 찾아온 주제에 할 말이 아니라고는 알고 있지만...하지만, 확언을 받고 싶소. 이 일에 대해서 거절하더라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실 수 있소?”
“...제 양심이 허용하는 범위 내의 일이라면 그렇게 해드리지요.”
그건 약속도 뭣도 아니었다. 장이셴이 약속 비슷한 말을 원하는 눈치였기에, 그냥 해준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 장이셴은 그런 립 서비스에도 만족하는 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프리카까지 날아가서 X던전을 해결해준 분이 그리 말한다면 믿어야겠지.”
류 현은 뿜을 뻔했다. 아마도 이 중년 남자의 머릿속의 류 현은 대의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정의맨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중앙위원이면 닳고 닳은 정치꾼 아닌가? 하긴, 연기인지 아닌지 구분도 못하는 데 생각해봐야 뭔 소용이야.’
류 현이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동안 장이셴은 서류가방에서 테블릿pc를 꺼냈다. 어떤 영상을 재생시킨 장이셴은 류 현에게 테블릿pc를 내밀었다.
투다다다! 콰앙! 빠지직! 화르륵!
화면이 비추고 있는 모습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방불케 하는 폭발과 비명의 합창이 한창이었다. 배경마저 완벽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과 모래의 땅 위에 세워진 성! 파괴될 환경도 없으니 거칠 것 없다는 듯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폭발음이 터져나왔다.
문제는 블록버스터 영화와 달리 전부 실제 상황이라는 것! 거기에 마법이 어우러지니,
[끄아악! 내 다리! 내 다리가!][아, 아버...][빌어쳐먹을, 위생병! 통신병!]
병사들의 비참함은 어느 전장과 비교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어느 세계 전장에서도 병사가 선채로 썩어 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니까. 저주에 눈이 먼 자들은 아군병사를 다섯이나 죽인 후에야 쓰러졌다.
몸 전체가 통째로 얼어붙었다가 화염구에 깨져죽은 자, 제 몸이 만참당하는 환상에 먹혀 상처 하나 없이 죽은 자, 하반신이 날아갔음에도 기절조차 하지 못하고 반시간을 헐떡거리다가 숨이 끊어진 자. 모두 리치의 마법이 일으킨 짓이었다.
절명할 만한 상처를 입은 자에게는 최대한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연명에 도움을, 앞서서 병사를 이끌던 자에게는 병사의 시체로 만든 구울을, 선두에 선 용감한 병사에게는 절망을 보여주는 저주를.
산 자를 조롱하는 듯한 리치의 마법 분배에 인간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갔다. 리치의 대적자로 작전에 참가한 플레이어들까지도. 그도 그럴 것이,
‘...4성짜리가 스물 둘. 5성은 열.’
화면에 비춰졌던 리치의 숫자가 플레이어 전력이 약한 나라라면 멸망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리치 군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영상은 그렇게 병사들과 플레이어들의 비명소리가 오 분여 정도 더 지속되다가, 비명이 끊기자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면이 블랙아웃 되었다. 류 현은 테플릿PC를 손에서 놓았고, 장이셴은 곧바로 말을 늘어놓았다.
“이 주전, 국경지대의 고비사막에서 이 성을 발견했었소. 무인정찰기를 보내서 정찰한 결과 리치에게 격추되었고, 무인정찰기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토벌대를 꾸렸었지. 그리고 그 결과가 아까 보신 그 영상이오. 사단 하나와 플레이어 백 명이 몰살당하는 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지.”
“......”
장이셴의 마지막 말은 숫제 자조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류 현은 전혀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젠장, 씨발. 씨발! 대체 어디서...?’
그의 머릿속도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였으니까! 딱딱하게 굳은 류 현의 얼굴을 한 번 곁눈질한 장이셴은 신세한탄 같은 말을 계속해나갔다.
“외부에서 농담처럼 우리 중국이 인명을 경시한다고들 조롱하지만, 나는 이렇게 사람의 목숨이 허망하게 지는 걸 본 적이 없소.”
‘그렇겠지. 3차 ‘대소환’이 터지고 나서 인류는 진짜로 망했으니까. 오 년도 못 버티고.’
속으로 이죽거려 봐도 복잡한 심사는 여전했다. 그와 별개로 그의 머리는 제 주인의 가혹한 평가에 도전하는 것처럼 맹렬하게 돌아가 답을 내놓았다. 이 참극의 원인을 제공한 존재의 정체를. 류 현이 전혀 원하지 않는 답을 말이다.
비정상적인 리치의 숫자, 바글거리는 인간들의 존재에도 미쳐 날뛰지 않고 차분히 학살을 실행하는 모습. 거기에 손상을 입어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는 모습까지. 3차 ‘대소환’을 경험해 본 그에게는 차고 넘칠 정도의 단서들이었다.
류 현이 아는 한 이런 괴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괴수는 하나 밖에 없다.
‘....엘더 리치.’
엘더 리치. 기존의 리치 구분 방법으로 구분한다면 7성 리치로 분류할 수 있다. 가진 반지가 일곱 개니까. 7성 리치는 아무 준비도 없이 혼자서 군단을 갈아 마신 전설을 남긴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플레이어를 포함해서 개편된 군단을 말이다. 만약 준비할 시간과 시체가 있다면? 그 끔찍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엘더 리치는 그런 7성 리치조차 초월한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엘더 리치는 일곱 개의 반지 외에 왕관이라는 유일무이한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었다. 리치를 찍어낼 수 있는, 엘더 리치를 쿨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네임드 몹으로 만들어 준 왕관이!
리치라는 상위 괴수를 찍어낼 수 있는, 상위 괴수보다 지능이 높은 네임드 몹. 그 두 가지 요소가 얼마나 끔찍한 시너지를 내는지 알고 있는 건 류 현 뿐이었다.
‘어떻게...어떻게 두 번째 네임드 몹이 지금 나와 있는 거지?’
그리고 엘더 리치 쿨란이 순서를 무시하고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또한 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