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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화 〉탐식마(貪食魔) (160/429)



〈 160화 〉탐식마(貪食魔)

“아뇨, 지금 딱히 자금이 급한 것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네, 한 번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지요. 그럼.”


 현은 휴대폰을 집어던지려다가 두 여자의 시선을 눈치 채곤, 탁자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신경질 난다는 표정까진 숨기진 못했지만.

“뭐래요?”
“다른 작자들이랑 똑같습니다. 공급 계약을 맺고 싶다. 그게 힘들면 정보 값을 비싸게 쳐줄 테니 협회에 안 넘긴 정보를 넘겨 달라.”


정보라는 말을 자신이 내뱉고도 흠칫한  현은 조심스럽게 화련의 눈치를 살폈지만, 화련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소파위에 늘어진 채였다.

‘내가 너무 과민 반응 하는 건가. 아니야, 평소 같으면 분명히 반응 했을 텐데...끙, 내가 먼저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한 때,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류 현의 행동을 관찰하던 화련은 자신이 그랬던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화련이 갑자기 찬바람이 분다거나 그러는 것도 아니어서,  현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했다.

‘...그래, 좋은  좋은 거지.’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과 달리 무지막지하게 신경 쓰였지만,  현은 자신의 호기심을 외면했다.


“하긴, 협회가 마스터한테 건네받은 레시피로 재미보고 있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네요. 나 같아도 그냥 찔러보겠다.”

류 현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련은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협회에서  현에게 보내오는 로열티를 그녀도 배분받고 있었기에, 협회가 얼마나 재미를 보고 있는지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달마다 배분받는 돈이, 화련이 헬퍼로 뛸 무렵 모아놓은 금액에 달할 정도였다. 류 현이 송장목 진액 해독 레시피를 넘긴 이후에, 분기마다 새로운 레시피를 제공하면서 금액도 달마다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액수도 액수지만, 로열티에 기여한 바가 없으니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현은 팀 단위 던전 사냥에서 괴수 사체를 자신이 전부 차지하는 대신이라고 반 억지로 쥐여 주었다. 실제로  현은 X던전 원정 이후로 계약서를 재조정하고 괴수 사체를 독점하고 있었다. X던전이라는 규격외의 존재를 접해 봤기에 그녀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류 현이 팀원들과의 이렇게 계약서 내용을 조정하고, 스마트 폰이 과열될 정도로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리는 동안 세 달이라는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블랙 던전이 최초로 발견되고 나서  달가량이 지났다는 뜻이다. 들불 번지듯 전 세계를 휩쓸었던 불안감은 완전히 사그라지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 쪽에는 아직도 라가들의 단체 이동이 목격되고 있지만, 카이로를 틀어막은 검은 장벽은 여전히 굳건했다. 결국 이집트에는 선거를 통한 임시행정부가 수립되었다. 뉴욕의 천공성은 당장이라도 실체화 할  같지만 여전히 플레이어의 눈에만 보이는 환영인 채다.

불안 요소가 사라진  아니지만, 사람들은 피부에 와 닿는 위협이 사라지자 점차 여유를 되찾았고, 류 현은  여유에 시달리고 있었다.

X던전의 정복자, 그 X던전보다 수준이 낮은 것으로 추측되지만 신종 던전인 블랙 던전을 출현 당일에 클리어 해버린 괴물. 거기에 협회를 상대로 정보 거래를 해서 떼돈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자, 욕심 있는 자들이 류 현을 괴롭히지 않는  이상할 정도가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주한 미국 대사는 그렇다고 쳐도, 유럽 국가의 대사들이나 기업체 인사들까지 찾아오는 통에 류 현은   찾아온 이들의 방문을 거절하고 있었다. 발치에서 폭탄 심지가 타들어가는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미국이야 귀찮아도 이해해 줄만 하지만, 찾아와서는 뜬금없이 긴밀한 협력 관계니 비즈니스니 하는 작자들에게 할애할 친절함은 그에겐 없었다.

돈벌이 이야기가 아니라 괴수 방어에 대한 공조라면 진지하게 임할 생각이지만, 긴밀한 협력이니 어쩌니 하는 작자들도 결국 다 돈벌이 이야기로 귀결되니 귀기울일 필요성조차 느낄  없었다.

“한두 곳도 아니고 매일 같이 이렇게 번갈아서 전화질 해대는데 화련 씨가 일일이 다 상대한다고 생각해 보십쇼.”

먼 세상일을 말하는  같은 화련의 태도에  현은 볼멘소리를 내었다. 화련은 태도를 바뀌기는커녕, 어깨만 으쓱 해보였다.


“이럴 거 알고 레시피 넘긴 거잖아요? 거기다가 X던전으로 얼굴도 아주 세계구급으로 팔리셨는데 이 정도면 양반인거죠. 듣자하니 서해란 씨가 제대로 고생 중이라던데.”
“그 쪽은 마나 포션 독점이니 그 정도는 해줘야죠. 그리고 바람막이 역할 해주는 의도도 뻔 하잖습니까. 보나마나 뭐 더 안 떨어지나 하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가 제일 처음 거래한 게 서해란 씨였네요. 혹시 꼬실 생각이에요?”

생수병을 뚜껑을 비틀던 류 현은 병을 통째로 비틀어버릴 뻔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추궁하는 류 현의 눈초리에 화련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그도 그럴게, 마스터. 요즘 찾아오는 기업 인사들 전부 문전박대 중이잖아요? 기업에서  사람들만 그러나? 정부에서 찾아와도 차관 밑으로는 만나주지도 않잖아요. 만나줘도 아주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풀풀 풍기면서.”
“그거야...그 작자들은 뜨고 나니까 뭐 얻어먹을 거 없나 하고 서성거리는 거잖습니까. 초기 투자자랑 동급으로 칠 수는 없죠.”
“그런 거 치고는 다른 후원자 들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시던데. 기업체나 정부가 싫다면 처음부터 협회에 선을 댈 수도 있었잖아요? 승하 언니한테 들어보니까 태양그룹 스폰 받기 전부터 기회가 있었던 거 같던데, 협회에 퍼주는 거 보면 호감도 있으신 거 같고. 플레이어가 협회 좋아하는  특이한  아니지만, 협회랑 거래 터놓고 사는 플레이어는 드물잖아요? 일단 자금 동원하는 절차 단위수가 다르니까 당연한 거지만.”


 현은 승하언니라는 말에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가 뒤로 갈수록 무표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추측할 줄은 몰랐는데. 서해란의 ‘파도’를 알게 되면...’


류 현은 앓는 소리를 가슴 속에 파묻었다. 화련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류 현은 지뢰밭에 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야 괜한 추론거리를 주지 않고 얼버무릴 수 있을까? 류 현의 뇌리에 앳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때문 이라고 하기는  그렇고...동창 덕분입니다.”
“동창?”
“예, 동창 중에 서해란 씨 여동생이 있었거든요. 던전에서 사고 났을 때부터 각성하고 나서 초기에  친구 도움을 꽤 받았었죠. 서해란 씨도 그 때 알게 됐고요. 아예 초면인 상대랑 거래하는 것보다야 이쪽이 나을 거 같아서.”
“어, 진짜요? 근데 그 동네...아, 동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나쁜 의도로 하신 말씀 아닌 거 압니다. 뭐, 솔직하게 말하면 재벌 2세가 정체 숨기고 다닐만한 곳은 아니죠.  그 학교였는지 까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 친구 얼굴본 지  오래 돼서요. 얼굴 본 횟수는 아마 서해란 씨가 더 많을 겁니다.”


화련은 코를 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류 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숨기고 있는  없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하니 의심을 사는 건 감수하더라도 쓸데없는 다른 의심거리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가장 좋은 것은 그 의심거리도 해결하는 것이겠지만...

‘정작 상황이 마련되면 입이  떨어진단 말이지...젠장.’

그 자신도 몰랐던 예상외의 우유부단함이 튀어나와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럼 서해란 씨의 선견지명을 칭찬해야하는 건가? 그런데 서해란 씨 보면 마스터 팀원으로 끌어들이려고 접근했을  같은데, 오히려 아까워하고 있으려나. 잘하면 세계구급 플레이어 날로 먹는 거였는데.”
“하하, 갑자기 비행기 태워주시니   바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거 새로운 휴가 독촉 방식입니까?”
“우리 엄청 굴리는 건 알고 계신가 보네요. 눈치 주기 전에 재깍재깍 쉬라고 해주면 좀 좋아.”


화련은 청뢰 반지를 면봉으로 닦고 있던 희란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희란은 류 현과 화련의 눈치를 번갈아보면서 살피다가, “전 괜찮아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화련은 뒤에서 찔린 사람 같은 표정으로 희란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외면하고 청뢰에 집중할 뿐이었다.


“X던전 때 그렇게 고집 부리시길래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갑작스러운 희란의 배신 아닌 배신에 얼이 빠진 화련에게 류 현은 능글맞게 그리 말했다. 아직도 그 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라, 말문이 막힌 화련은 샐쭉 눈만 흘겼다.

부우웅! 화련이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찰나,  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어대었다. 류 현은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예, 류 현입니다. 서해란 씨, 무슨 일이십니까?”


 몇 달 간 류 현의 개인비서 노릇을 해주고 있는 서해란이었다. 진짜 비서일을 해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팀을 가지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열심히 용잡이 팀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그런 서해란은 조금 흥분한 듯 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류 현씨를 급히 만나봐야 한다는 분이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지금 통화 괜찮으신가요?-


류 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 하나 만난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 못 만나줄 것도 없지만, 썩 내키진 않았다. 사무실 위치나 전화번호가 극비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접촉 시도를 하려는 상대가 영 찝찝했던 탓이다.

하지만 류 현은 속내와 전혀 다른 말을 입 밖에 내었다.

“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대체 어디서 오신 분이시기에...”
‘이런 식으로 거절하면 어떻게든 또 귀찮게 굴겠지. 좀 귀찮아도 확실하게 잘라 말해두자.’


만나서 협상자가 일반인이든, 플레이어든 간에 바지를  갈아입고는 못 돌아가게 해줄 생각이었다.


-중국 중앙위원분이세요. 성함이 장이셴이라고...-
“......”
-류 현씨?-
“아, 예. 듣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오신 분이라고요...?”
-네, 중국 플레이어 협회 간부분이랑 같이 오셨는데 성함이 리커창이라고...혹시 아시는 분인가요?-


그 뒤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잠깐 멍해져 있었던 류 현은 마른침을 한  삼키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약속시간은...예, 예. 괜찮습니다. 예, 그 때 뵙지요.”


전화가 끊어지자 류 현은 오른 손으로 제 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뭔가 골몰하는 듯한  현의 모습에 화련이 눈을 빛냈지만,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과거’의 이름과 맞닥뜨린  현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 양반이랑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중국이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무신’을 밖으로 내돌릴 일이 뭐가 있을까...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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