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탐식마(貪食魔)
“...더럽게 엮여버렸군.”
“예...?”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중얼거린 혼잣말에 반응이 돌아오자 류 현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이니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류 현의 대꾸에 중사계급장을 달고 있는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류 현은 남자가 뒤돌 때 소리 없는 한 숨을 내쉬었다.
‘부관이라니 오버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겉으로 보기에 류 현보다 열댓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는 현장 지휘관이 류 현에게 붙여준 부관이었다. 실제로는 나이 차이가 열 살 나기는커녕, 같은 이십대였지만 류 현이 알바는 아니었다. 현장 지휘관으로 급파된 대령 아저씨가 붙여준 귀찮은 짐 덩어리일 뿐.
실제로 부관이 류 현에게 해 줄만한 일은 없다. 류 현은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에게 인스턴트커피를 타라고 하는 취미 따윈 없으니까. 오히려 문제가 터지면 그가 저 부관이라는 남자의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할 판이다.
군복무 기간이 얼마나 되던 간에 일반인이 괴수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이곳에 나타난 블랙 던전에서 나온 괴수가 상대라면, 비명 지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봐야할 정도다.
‘어지간히 날 붙잡아두고 싶은 모양이지.’
다시 무전 대기를 시작한지 오 분도 되지 않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류 현은 생각했다.
‘하긴 머리가 있으면 지금 상황 돌아가는 게 일시적으로 안 끝날 거라고 눈치 깠겠지.’
이틀 전인 2038년 7월 31일. 전 세계에 블랙 던전이 동시 출현했다. 그것도 대 던전 레이더망이 쫙 깔려있는 수도나 대도시에!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X던전이라는 기존의 계측 방법조차 먹히지 않는 던전이, 한 팀을 빼고 도전자 대부분을 집어삼켰음이 밝혀졌을 때보다 훨씬 더!
사람들은 예전에 눈뜨고 꾸었던 악몽을 떠올렸다. 오늘은 길 건너편의 친절한 젠킨스 씨가, 어제는 일주일 전에 이사를 온 캐시가. 시내에 난입에 들어온 괴수의 손에 죽어나가던 그 악몽 같은 시절을 말이다. 이제 던전을 정복했니 어쩌니 하며 TV토크쇼와 정부에서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지만, 사람들이 집에 대한 안정감을 되찾은 지는 십 년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자국의 플레이어 전력 수치 같은 것들이 일회성 술안주 같은 것인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얼굴도 모르고 계속 몰랐으면 하는 상위 플레이어들의 떼죽음보다 블랙 던전의 출현이 피부로 와 닿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기존의 던전 레이더망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던전. 그 던전이 저 멀리 떨어진 사하라사막 같은 곳도 아니고 자국의 수도에 나타난 것이다. 블랙 던전의 존재감에 X던전이라는 끔찍한 난이도를 자랑하던 던전의 존재는 순식간에 시민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사람들은 2차 ‘대소환’ 초기 때처럼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진짜 더럽게 걸렸군...귀찮게 됐어.’
류 현이 현생에서 일체의 인연이 없었던 한국군 군용 텐트 안에서 죽치고 있게 된 원인은 그것이었다. 코스피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세계증시가 파형을 그릴 정도로 혼란한 시국에 자청해서 머리를 디밀고 들어온 그를 정부에서 붙잡은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사무실에 쳐 박혀 있었다면 도움을 청하기 껄끄러웠겠지만, 류 현은 누가 도움을 청한 것도 아님에도 이미 발을 들인 상태였으니까.
‘젠장, 승하가 그렇게 빨리 행동할 줄이야.’
그 외에도 류 현보다 빨리 분위기를 파악한 승하가 재빨리 출국해버린 것도 꽤 크게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검성이 출국한 것만으로도 승하에 대한 비난은 둘째치고,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나고도 남을 상황이다. 거기다 X던전 원정으로 인지도가 확 오른 슈퍼 루키까지 영국으로 향한다면 괴수 수습은 둘째 치고 비난 여론이 감당이 안 될 테니까.
결국 류 현은 그까지 해외로 달아날까 싶어서 달려온 아버지뻘과 할아버지뻘 되는 군, 정계 인사들의 사정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직접 나설 일을 만들지 않을 테니, 몇 시간만이라도 텐트에서 대기해달라는 사정을 뿌리치긴 힘들었다. 직접 가서 더블린의 블랙 던전을 확인하려던 그의 계획은 어쩔 수 없이 승하에게 인계했다.
빠져나가려고 하면 못 빠져 나갈 건 없지만, 이전 생처럼 독불장군처럼 할 것도 아닌데 자청해서 욕먹을 일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가올 3차 ‘대소환’이라는 재앙 앞에서 한국 정부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자리에 뭉개고 앉아 있기만 해도 이미지 개선을 할 수 있는데 그걸 마다할 정도는 아니었다. 류 현은 승하에게 블랙 던전에 대한 조사를 당부하고, 희란과 화련에게 다시 휴식기를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거기에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도 꽤 크게 작용했다.
‘평양에 떴던 6성 리치를 생각하면 파주가 끝이 아닐 가능성이 더 커. 젠장, 그 때부터 블랙 던전이 나타났던 걸까? 너무 안일했어...’
류 현은 제 뒷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부관이라는 존재는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포화 기간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지만...3차 ‘대소환’이 코앞이라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젠장...’
현실에 추측을 끼워 맞출수록 생각하고 싶지 않은 쪽으로 결론이 나왔다. 3차 ‘대소환’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보고도 부정하고 싶은 결론이.
‘후우우, 진정하자. 그래, 내 나름대로 준비는 해뒀어. 네임드 몹 라인업에 변동이 없는 이상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어. 초기 몇 마리는 안 붙어봤지만...전투 기록들을 생각하면 못 잡을 정도는 아니야. 본 드래곤은 두 마리가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당장이라도 혼자서 감당 가능해. 제발 그 때 라인업대로만 나와라...’
애써 스스로를 달래 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불안한 느낌에 류 현은 저도 모르게 불길한 예상을 떠올렸다.
‘설마 두 마리씩 튀어나오진 않겠지...?’
***
쉭! 소리마저 잘라낼 것 같은 날카로운 검격은,
쉬칵! 카각!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우상단에서 직각으로, 내려쳤던 검격은 다시 솟구쳐 오르며 두 번이나 방향을 바꾸었고,
빠직! 짜자작! 단단한 리치의 두개골이라고 한들 그런 급격한 변화에는 배겨내기에는 무리였다. 수박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터져나가는 리치의 두개골조각 사이로 물빛을 띄는 액체가 반짝거렸다.
리치의 생명줄. 라이프 배슬이 담아놓고 있던 리치의 정수이며 혼이었다.
라이프 배슬을 잃은 리치는 단말마조차 없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갔다. 리치가 공들여 모아놓은, 마법이 새겨진 보석만이 남아 리치가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검성, 나승하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한 태도로 검을 갈무리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만족감 어린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직 힘 조절이 안 되긴 하지만 꽤 괜찮은 걸. 음, 대련하자고 꼬셔서 깜짝 놀래켜줘야지.’
“고생하셨습니다.”
뒤쪽에서 들려온 부르는 소리에 승하는 곧바로 얇은 미소를 지웠다. 웨인과 함께 열댓 명가량의 무리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승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일행 중 두 사람이 잰걸음으로 튀어나오더니 리치가 남긴 보석들을 갈무리했다. 두 사람 모두 도중에 승하의 눈치를 살폈지만 승하는 보석 개수를 확인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나야 뭐 원하던 것만 쏙 빼먹었으니 불평하고 자시고 할 건 없지. 삼일 내내 그냥 따라다니기만 했고.”
“하하, 검성님이 아니라면 아무도 6성 리치를 혼자 상대해놓고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겁니다. 무사히 작전을 완수할 수 있게 협조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웨인의 인사에도 승하는 삐딱하게 그를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그게 아닌 거 알잖아? 하고 웨인에게 묻는 듯했다. 웨인은 팀원들이 의문을 품기 전에 승하에게 등을 돌리며 화제를 돌렸다.
“자, 빨리 정리해서 돌아가도록 하지요. 총무과에 말해서 그 때 그 호텔 예약 잡아놨습니다.”
그 호텔 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팀원들이 덮어놓고 환호를 보내왔다. 승하는 환호성에 휩싸여서 언덕을 내려가던 웨인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돌아섰다. 그녀는 자신이 베어 넘긴 리치가 있었던 자리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해. 더블린에서부터 여기까지 도망쳐 나온 놈치고는 너무 얼이 빠져 있었단 말이지...마치 방금 던전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녀의 중얼거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추측의 근거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진 근거라고는 자신의 칼에 두개골이 썰리기 전까지 어딘가 얼빠져있고, 당황한 듯한 리치의 행동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녀의 감으로 구분해낸 것이다. 뼈다귀 밖에 없는 괴수의 감정 상태를 표정을 보고 알 수는 없으니까.
“끙...에이, 내 착각이겠지.”
그리 말하곤 승하는 휙 뒤돌아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내뱉은 말과 달리 승하는 몇 걸음 내딛지 않아서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를 돌아봤다. 바람만이 휘돌고 있음을 확인한 승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의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승하가 떠나간 지 10분 여 후,
[흐아아-] 팔뚝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귀곡성과 함께 인영 하나가 언덕 중턱의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3미터를 훌쩍 넘겨서 4미터에 근접한 인영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라 리치였다. 불그스름한 천을 바탕으로 금실로 장식한 로브를 두른 리치!
더블린에서부터 롱퍼드부터 뱅골에 이르는, 아일랜드를 종단한 추적행이 실패한 것일까? 리치는 그런 것에 관심 없다는 듯이 승하가 리치를 베어 넘긴 장소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괴수를 연구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학자들이 본다면, 리치의 동료애에 대한 가능성을 봤다고 흥분했을지도 모를 일이나, 리치의 눈구멍에 어린 빛은 연민이나 분노의 기색이라곤 없었다.
한참이나 서있던 리치는 뭔가에 만족한 것인지 뒤돌아섰다. 그런 리치의 정면으로,
휘잉- 갑작스럽게 바람이 불어 닥쳤다. 리치의 몸에 뭔가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지만, 로브의 후드 부분이 젖혀졌다.
그리고 머리 부분이 드러난 리치의 머리에는 보통의 리치들과 확연히 다른, 못 알아볼 수가 없는 황금으로 짜인 왕관에 씌워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