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탐식마(貪食魔)
“그래, 장비도 같이 딸려 보냈으니까 나서지 말고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 잊지 말고 무전은 오 분 간격으로 넣고. 아무 일 없어도!”
문민호는 무전연락을 거듭 강조하다가 상대가 끊어버리자 그제서야 무전기를 손에서 놓았다. 답답한 기분에 앞섶을 풀어헤치려던 그는 텐트로 만든 임시 통제실 안에 자신 말고 손님이 셋이나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손을 거두었다. 그 손님들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려던 문민호는 손님 중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찔끔했다. 접객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실수였지만, 문민호는 제 실수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정계인물들과 계속 부딪히면서 커리어를 연장시키느라 닳고 닳은 그조차 동요를 감추기 힘든 괴물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정치인이라도 쇠사슬 목줄조차 걸리지 않은 사자를 눈앞에 두고 여유로울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더군다나 그 맹수가 접객대상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범아가리에 머리를 디밀고 있는 일반인의 심경을 통감하며 문민호는 스리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 쪽으로 쳐다본 적도 없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저희 눈치 보실 것 없습니다. 편히 쉬시죠. 저희도 좋을 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형태를 한 맹수가 휴식을 종용해오자 문민호는 고마움 보다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격렬한 자기부정에 부딪혔다. 저 괴물이 그냥 맹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일반인이 돼서 목창 하나 들고 호랑이 사냥에 나서는 게 훨씬 낫다!
휴식을 권유받은 것치고는 굉장히 격렬한 반응이었지만, 엄격한 표정통제 속에 류 현은 문민호의 그런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문민호는 다음날 경련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표정을 굳힌 채, 통제실 안에 있는 손님들을 살폈다.
거의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멀끔하게 큰 여자는 앉은 채로 아주 숙면을 취하고 있었고, 가지고 있는 주민등록증이 위조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여자는 칼날늑대의 시체를 붙잡고 이리저리 찔러보는 중이었다.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문민호는 마지막 손님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며 처음으로 그 나이 대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던 마지막 손님과 눈을 마주치자,
“하하, 그럼 말씀 하신대로 좀 편히 있어야겠습니다.”
애써 딴청을 부리며 앞섶 단추만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이 텐트 밖으로 튀어나가서, 팀원들과 수색이라도 나서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번 사태에 튀어나온 칼날늑대가 당해낼 도리가 없는 수준의 괴수라는 것보다, 눈앞의 남자와 같은 텐트 안에 있는 게 더 버거웠다. 몇 번이고 대면한 사이였음에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흠칫흠칫하게 될 정도로 오늘의 류 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나름대로 피도 묻혀보고, 상위권 플레이어라고 칭할 만한 문민호조차 움츠러들게 하는 위압감! 그것이 그의 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괴물이라는 건 알고는 있었지만...사냥 직후는 완전 다른 사람이군...’
사실 플레이어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극도의 집중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운동선수에게서는 주변이 다가가기 힘든 오라 같은 게 느껴진다고들 한다. 플레이어들은 언제든 제 숨통을 물어뜯을 수 있는 괴수와 치고받는데, 그 직후에 평소와 다름없다면 그게 더 놀랄만한 일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류 현은 새로 발견된 등급의 던전에서 튀어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괴수들을 혼자 찢어발겼다. 어떻게 봐도 퍼플급은 되어 보이는 늑대형 괴수 열 둘을 혼자서 찢어발겼다. 그것도 맨 손으로.
던전 사냥을 막 끝내고 나온 플레이어를 며칠 씩 방치에 가깝게 내버려두는 관행도, 사냥이 끝난 직후에 이런 식으로 민감한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건 생각보다 마음먹은 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 것이니까. 상대가 흥분을 제어 못해서 맹수로 보이는 상태에서 협상이 잘 굴러갈 리도 없고, 거기에 그 상대의 기분까지 나쁘면 파탄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 점까지 고려해도 류 현의 몸 주변에 어린 위압감은 도무지 어떻게 극복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접객도 몇 번 해본 문민호가 동요를 감추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 비해 류 현은,
‘한 동안 쉬어서 몸이 굳었나. 주먹을 두 번 먹여야하는 경우가 두 마리 씩이나 될 줄이야...음, 승하랑 대련하는 거 다시 시작해야하나. 백혜라가 뜯어말리려나...?’
흥분은커녕 평온함 그 자체였다. 흡수되지 않아서 찔끔찔끔 새어나가는 칼날늑대의 마력을 그대로 내버려두었기에 문민호가 오해한 것이었다. 평소라면 흡수 못할 것들도 모아서 주변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처리했겠지만, 류 현은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평소처럼 하면 문민호가 귀찮게 굴게 뻔히 보였으니까.
류 현의 귀찮음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만큼 수명이 깎여나가고 있는 문민호를 구해준 건,
-팀장...님! 치직 팀장...-
“어어, 그래. 늑대 새끼들 찾았어?”
-던전!-
“뭐...?”
-던전이요! 던전 찾았어요! 계측기 돌려보니까 검정!-
류 현은 그 소리가 튀어나오자마자, 문민호가 전해주기도 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전기를 받으면서도 류 현에게 신경이 가있던 문민호가 눈에 띄게 흠칫했지만, 류 현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그의 옆에 섰다.
“위, 위치는...?”
-그러니까, b3...어, 이거 어떻게 읽더라?-
“그냥 섬광탄 터뜨리라고 하시죠.”
옆에 서있던 류 현이 불쑥 말하자 문민호는 그의 요청을 정확하게 들었음에도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있던 무슨 등급 던전에서 괴수가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섬광탄을 터뜨려 달라니? 시말서 사유를 늘려주겠다는 것과 다름 없는 요청이었다.
“예...?”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문민호의 ‘예...?’는 다시 생각해라는 뜻에서 주는 유예의 예? 였다. 하지만 류 현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거 보고 몰려드는 놈들 족치고 나서 던전에 들어갈 겁니다.”
“예...?”
문민호의 예? 가 생각해보길 바라는 권유에서 순수 의문부호로 바뀌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때려죽이긴 했지만, 퍼플급 괴수를 상대하고 나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도 없는 괴수들을 끌어 모을 섬광탄을 터뜨리라고 하더니 이젠 그것들을 정리하고 던전에 들어간다고? 문민호는 자신이 평소에 일 못한다고 갈궜던 부관이 그리워졌다. 그놈이 이 자리에 있으면 눈치고 뭐고 집어치우고 이 괴물 같은 남자에게 그게 무슨 의미냐고 당당하게 물었을 텐데.
“아, 그리고 좀 있으면 검성이 올 겁니다. 쫓아오지 말라고 좀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섬광탄 보고도 반응 안하고 인간냄새 따라서 이리로 오는 괴수들도 있을 테니까요. 그 팀으로 퍼플급 괴수 다수는 상대 못하지 않습니까?”
“...예?”
기관총 마냥 말을 쏟아내고 텐트 밖으로 향하는 류 현의 등을 보며 문민호가 낼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
“...지루해.”
그 한마디에 텐트 전체의 공기가 동요하는 듯 했다. 정확히는 텐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이 모두 움찔했다. 승하는 양반다리 자세를 풀고 야전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런다고 지루함이 가시진 않았지만, 안도하는 듯한 한숨소리가 등 뒤편에서 터져 나왔다.
‘저래서 무슨 퍼플몹을 잡는다고.’
승하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면서도 이 사태의 원흉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다.
‘좀 늦긴 했지만 나만 빼놓고 들어가는 게 어디 있어! 거기다가 집지키는 개 역할을 시켜? 류...현...!’
승하가 야전침대 위에서 궁상을 떨게 된 원인은 그녀의 친구 류 현이었다.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때문에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아보니, 파주에 신종몹이 떠서 나간다고 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통화내용은 그게 다였다. 부리나케 씻고 뛰어와 보니 이 상황이었다. 부른 류 현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자신을 무슨 보듯이 잔뜩 쫄아서 훔쳐보기는 열심히인 맹탕들만 가득한 임시 통제실에 남아달라는 친구의 요청을 이곳 책임자라는 자가 전해줬다.
류 현이 용잡이 팀을 데리고 그 계측결과가 검정으로 나온 신종 던전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쫓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친구 얼굴을 봐서 파수견 역할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시작한지 오 분도 안 돼서 질려버리고, 그 뒤로 계속 지루해 라고 노래를 불러댔지만 말이다. 그것도 벌써 세 시간째다. 인내심 문제가 아니라, 지루하다고 중얼거리는 것도 질려버린 것.
‘어, 근데 여기 올 때까진 던전 있는 줄 몰랐을 거 아냐? 걔가 준비도 없이 그냥 처음 보는 던전에 들이받았다고?’
가장 최근에 같이 들어갔던 X던전들은 준비는커녕 휴식기조차 무시하고, 강행군을 넘어서 거의 자살시도에 가까운 원정을 시도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이리저리 꽤 많이 재는 편이었다. 그랬기에 용잡이 팀원들을 그렇게 굴리고도 아직 사고가 안 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화련은 똥 씹은 표정이 되곤 하지만, 그녀의 기준에서는 사람 굴리는 기량만큼은 훌륭한 대장이었다. 팀원들에게 대놓고 뭔가를 숨기고 있지만 않으면 평가가 훨씬 높았겠지만.
‘진짜 뭐지? 안에서 쓸 무기야 그렇게 타는 타입이 아니니 그렇다고 쳐도, 혼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둘을 끌고 들어갔잖아. 설마 이것도 정보가 있는 거야...?’
가칭 블랙 던전-이전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계측색이 그대로 이름 붙을 가능성이 크다.-에 대한 정보라도 있는 것일까? X던전 같이 말도 안 되는 난이도를 가진 게 아니라, 이쪽이 진짜 퍼플의 상위 던전이라는 정보가? 그래서 둘을 데리고 들어간 걸까?
‘그게 가능해...? 검정색은 아예 없었잖아. X던전도 그렇긴 하지만 그건 석비가...어?’
승하가 제 나름대로의 추측을 완성시키려던 그 때였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아무렇게나 펼쳐둔 감지영역에 불쑥 셋이나 되는 인원이 비집고 들어왔다.
승하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텐트 입구가 들춰지더니 남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승하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빽 소리쳤다.
“야, 류 현!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래!”
“아니 제가 뭘 잘 못했다고 또 난립니까. 난리가.”
승하의 외침에도 류 현은 시큰둥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그 시큰둥한 반응을 보고, 승하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구석에 몰려있던 문민호와 그 팀원들의 눈이 퉁방울 만해 졌다. 저 작자는 대체 검성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너만 재미보고 난 여길 지키게 해?”
“...재미 보긴 무슨 재미를 봅니까. 던전 들어가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승하 씨 뿐입니다. 제가 좋아서 들어간 줄 아십니까?”
“그럼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줄 수도 있잖아!”
“이미 주변 던전들이 터져나갔습니다. 그거까지 터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들어갔습니다. 겸사겸사 무방비 상태인 여기도 지키고요.”
“...큭.”
말문이 막힌 승하가 류 현을 노려봤지만, 류 현은 신경 안 쓴다는 듯이 컵과 주전자를 찾아서 물을 따랐다. 뒤따라 들어온 화련과 희란에게 잔을 다 돌린 류 현은 자리 잡고 앉았다.
“그 던전이 그렇게 궁금하시면 실컷 가시죠. 전 당분간 쉴 테니까.”
그리 말하곤 류 현은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승하에게 휙 던졌다. 그의 휴대폰을 받아든 승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뭔 소리야?”
“웨인 씨가 그러던데, 그 던전 여기만 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다 떴습니다. 계측 결과도 다 검정이랍디다. 어지간한 국가 수도에는 하나씩 다 뜬 거 같은데. 한국만 다른 건지, 아니면 서울에 있는 걸 못 찾는 건지.”
마지막 말을 하며 류 현은 슬쩍 문민호를 쳐다봤다. 문민호는 그 시선에 데인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류 현님, 전...”
“예, 빨리 소식을 전하셔야죠.”
문민호가 부리나케 텐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까지 본 류 현은 의자의 한계를 시험이라도 하듯 뒤로 몸을 젖히며 생각했다.
‘한 곳도 아니고 이렇게 동시발생이라...아주 대놓고 액셀을 밟아제끼는데. 여태까지 진행속도를 생각하면...네임드 몹도 곧 뜨겠군. 아무리 길어도 반년은 안 넘겠지. 젠장, 어떻게 된 게 좋은 소식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