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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화 〉탐식마(貪食魔) (156/429)



〈 156화 〉탐식마(貪食魔)

“아, 진짜! 좀좀! 들어가라고!”

제 몸만 한 캐리어 위에 올라타서 낑낑거리고 있는 화련의 소리치는 걸 애써 흘려들으며  현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나름대로 각오는 했지만...내 예상보다 훨씬 빨라.’

고민의 원인은, 영국의 더블린을 비롯해서 각지에서 발견되었다는 블랙 던전이었다.

검성, 나승하가 X던전을 보여준 후로 류 현은 줄곧 오해하고 있었다. X던전이 블랙 던전이라는 오해. 그는 X던전이 5년 이상 빠르게 등장한 블랙던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오해는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내어준 정보와 직접 들어가 보는 것으로 해소됐다. X던전은 자신이 알던 블랙 던전과 전혀 별개의 존재이며, 3차 ‘대소환’이 시작되었다는 전조 현상이 아니다!


그 사실에 X던전이라는 이전 생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커다란 변수가 있었음에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3차 ‘대소환’이 취소되었다는 통보가 들어온 것도 아니었지만, 이전 같이 어느 정도 유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혼자서 네임드 몹을 씹어 먹었니 어쩌니 해도, 3차 ‘대소환’은 네임드 몹만 때려잡는다고 어떻게 되는 재앙이 아니었기에. 이전 생의 ‘예거즈’와 ‘산군’같이 엄한 곳에 전력을 때려박지만 않으면 플레이어들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강해지니까.

‘대체 뭐 때문이지? 칼리프 그 여자는 ‘문’이 나타나는  정상궤도로 돌아온 거라는 투로 말했었어. 설마 3차 ‘대소환’이 이렇게 빨리 터지는  정상이라는 건가?’


그리 생각하고 있던 류 현에게 웨인이 계측 결과가 검정으로 나오는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현은 당황하거나 절망하기보다는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 오지 않으면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말 그대로 마음의 준비일 뿐이었지만. 막상 3차 ‘대소환’의 전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튀어나오자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지금 플레이어들 수준으로 블랙 던전은...잡긴 할 거다. 문제는 던전들이 본격적으로 터져나가는 시기인데...’

류 현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제 기억을 더듬었다.


‘그 때는...그래, 일 년이 조금 안 됐을 거야. 어디가 처음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오차 자체가 그리 크진 않을 거야. 터지기 전에 발견해서 클리어 했다면 소문이 흘러나왔을 거고, 그게 아니라면 블랙 던전에서 튀어나온 괴수 때문에 난리가 났을 테니 모를 수가 없지.’


캐리어를 붙잡고 낑낑거리던 화련이 어느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류 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거기에 자다가 두들겨 깨워진 희란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그를 향한 시선은 두 배가 되었다.  현이 눈치 챌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여자는 서로  번 마주 봤다가 슬쩍 방으로 들어갔다. 류 현은 그녀들에게 추론거리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다. 그저 생각에 늪에 빠져들어 가듯이 거듭 고민할 뿐.

‘유예기간이 그것보다 길더라도 그렇게 예상하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더 짧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준비해야한다. 하지만...네임드 몹 대비는 어떻게 한다고 쳐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전 생의 싸움들이 떠올랐다. 압도적으로 적을 찍어 누르는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한 그런 장면이 아니라, 네임드 몹을 호위하듯이 뭉쳐있던 괴수군단 때문에 분함을 삼키며 퇴각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싸움은 얼마든지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계속해서 졌던, 자신의 한계가.

‘이전 생처럼 하위 몹들이 고기 벽이 되어준다고 해도 뚫을 수는 있어. 하지만 그래서는 이전보다 조금 덜 죽는 수준 밖에 안 돼.’

류 현은 대단한 휴머니스트나 전략가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천만 단위로 갈려나가는 일을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윤리나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는 아지다하카와 같이 공멸한 자신의 최후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리 강해도 3차 ‘대소환’이후에 터진 던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수 전체를 감당할 수는 없다. 물론, 거의 무한정 시간을 쏟아 부으면 때려잡기야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진 능력 덕택에 식량은  자리에서 조달 가능하고, 어지간한 괴수는  현에게 까진 상처 하나 못 낼 테니까. 그러나 그건 이미 인류가 참패를 당했음을 의미한다.

이미 경험했던 실패를 같은 방법으로 두  반복하는 취미는  현에게는 없었다.

‘덕분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X던전  때문에 내 이름을 알만한 작자들은  알아. 하지만...이 인지도로 국가단위 작전을 주도하는 건 무리야. 웨인이나 협회는 지금 유럽 내의 견제 때문에 정신이 없을 거고, 승하는...되기야 하겠지만 조건 없이 하려고  리가 없지. 요즘 너무 조용해서 불안할 정도고.’

류 현이 이미 꽤 엉망이 된  머리를 다시 헤집으려던 그 때였다.

부우웅! 휴대폰이 세차게 몸을 떨며 발신자의 이름을 띄웠다. 화면에 떠오른 세 글자를 읽은 류 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인간이 왜 이 시간에?

“...?”

썩 내키진 않았지만 류 현은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귓가에 들려온 건 헐떡거리는 숨소리였다.

“예,  현입니다.”
-류, 류 현님...-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류 현은 플레이어인 문민호가 이렇게 헐떡거리는 일이 뭐가 있을까 하는 의문보다는 전화를 끊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픈 데  작자는 대체 무슨 일거리를 물어서 이리 다급한 것일까.

“예, 말씀하시죠.”
-파, 파주에...-

전력질주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류 현의 귀에는 문민호의 목소리보다 바람소리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 자주 들렸다. 류 현은 참을성을 가지고 물었다.


“파주? 파주에 뭐가 떴습니까?”
-골렘과 늑대형상의 괴수가 나타났습니다. 늑대 쪽은 완전 신종입니다!-

빠득! 그의 입에서 치아 건강이 우려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현은 되묻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현은 짧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곧 그리로 가지요. 가면서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류 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거실을 한  둘러보고는 자리에 없는 두 여자를 불렀다.


“희란 씨! 화련 씨!”

근처 방문에서  하고 있었던 건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 제대로 쉴 틈을 안 주는군.’

***


거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희미한 달빛만이 앞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노상을 내달렸다. 작은 풀뿌리마저 아직 내려앉지 못한 벌거숭이 땅은 ‘그것들’에게는 아주 좋은 이정표였다. 그 질주도 오래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컹컹!][크르르르]

‘그것들’이 멈춰선 것은 구름 뒤편에서 비추어 오는 달빛보다 수십 배는 더 밝은 임시 가로등 앞이었다. 임시가로등이 세워진 벽 앞에서 ‘그것들’은 제 모습을 더 이상 어둠에 감출 수 없었다.

야생이라는 느낌보다는 철과  냄새가 풍길 것 같은 겉가죽은 가로등 불빛을 아주 잘 반사했다. 마치 철기마처럼 철갑을 두른 듯한 모양새의 늑대, 칼날늑대들은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을 눈앞에 두고 짖어대며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그러더니 최선두에 있던 세 마리중 하나가 불쑥 앞으로 튀어나왔다. 콘크리트 벽을 빤히 쳐다보던 그  마리는 갑자기 뒤로 달려가더니,

[크르렁!]


뒤로 달려가던 것과 비교도  될 속도로 콘크리트 벽에 몸을 들이받았다.

퍼엉! 콰르르!


그 결과는 놀라웠다. 콘크리트 벽이 마치 찰흙이라도 되는 양 밑 부분이 반구형으로 도려내진 것이다.


칼날늑대. 이 괴수를 최초로 발견한 한국에서 붙인 이름보다, 불릿울프나 실버불릿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괴수가 그 이름값에 걸 맞는 공격방식을 내보인 것이다. 가속을 위한 여유 거리가 필요하지만, 일단 가속이 붙었다하면 장갑차마저 뚫고 나가는 무시무시한 돌진능력. 그 돌진 능력을 꾸며주는 단단하면서 항마력 마저 훌륭한 갑옷 같은 가죽.


마법사와 탱커가 가장 싫어하는 괴수로 꼽힐만한 능력을 지닌 이 괴수들은, X던전 클리어 이후 ‘터주’에서 만약을 대비해서 세워놓은 벽마저 우습게 돌파하고 파주 시내로 돌입하려 했으나,

뻐어엉! [크에엑!]

선두에 선 놈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뻗어 나온 주먹에 나가떨어지자 멈칫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가떨어진 놈이  번 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지자, 칼날늑대들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덩치가 작아 동급의 괴수들보다 맷집이 떨어지는 편이라곤 하나, 칼날늑대는 엄연히 퍼플 던전에서 볼  있는 상위 괴수다.

“아주 기가 살아서 주변은 살피지도 않는구만. 개새끼들이.”

주먹의 주인은 뚜벅뚜벅 걸어서 가로등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피칠갑을 한 채 모습을 드러낸 류 현의 모습에 칼날늑대들은 뒷걸음질 쳤다. 피칠갑한 모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의 몸 위로 일렁거리고 있는 검은 안개 때문이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려도 차마 덤비지는 못하는 그 모습에  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갈 때까지 구경만 하려고? 여기 니네 대장 있는데.”

류 현은 첫 공격을 얻어맞고 이미 시체가 된 칼날늑대를 발끝으로 툭툭 차보였다. 칼날늑대들이 호응하듯이 으르렁거렸다. 개중에는,


[크르락!] “어이쿠.”

뻐어억! 콰직! 찌지직!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서 달려드는 놈도 있었지만, 류 현의 발밑에 있는 대장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니킥을 얻어맞고 몸이 붕뜬 뒤에, 그대로 턱을 잡혀 입이 찢어져 죽었다는 것 정도였다. 류 현은 칼날늑대의 턱을 내던지고는 주변을 휘돌아봤다. 변변치 못한 가로등 불빛 말고는 빛이라곤 없었지만 그의 눈은 주변의 칼날늑대를 모두 잡아내었다.


“안 오면 내가 가지 뭐.”

류 현은 산책이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발을 살짝 굴러서 칼날늑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 다음 순간부터는 일방적인 살육뿐이었다. 칼날늑대의 이빨도, 반격을 위해서 바짝 세운 꼬리칼날도 류 현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못했다.


[케에엥!][크르락!][케에엥!]


칼날늑대의 꼬리를 잡아서 철퇴마냥 휘둘러대는 류 현의 모습에 질린 것인지 칼날늑대 몇 마리가 그의 이목이 쏠린 것을 틈타 벽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고자 했지만,

꾸웅! [크엥?!]

허리를 부러뜨릴 기세로 내리누르는 무형의 압력에 붙들리고 말았다. 칼날늑대는 보이지 않는 흉수를 찾기 위해서 땅에 쳐 박힌 고개를 겨우 들고 좌우를 살폈지만, 밤에도 대낮같이 볼 수 있는 칼날늑대의 눈에도 걸리는 것이라곤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흉수는 콘크리트 벽 위에 앉아서 느긋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와 진짜로 얘들한테는 잘 먹히네. 항마력이 미치는 범위가 이렇게 좁을 줄은 몰랐는데.”


화련은 류 현의 요청대로 칼날늑대들의 발을 묶어놓지만은 않았다. 칼날늑대를 눌러놓은 상태에서 송곳같이 벼린 마력으로 가죽을 뚫어보려고 하거나, 안구라도 파괴시키려고 하는 등 꽤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중이었다.  현이 말한 대로 상위 괴수답지 않게 항마력이 표면 위로만 아주 두텁게 형성되어 있어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지만, 눌러놓는 것만큼은 상위괴수가 상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쉬웠다.


“흠...요 세 마리만 넘겨달라고 해서 실험해볼까? 어때 희란아?”

화련의 물음에 콘크리트  끄트머리에 서서  현의 일방적인 학살극을 바라보고 있던 희란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류 현이 화련의 요청을 듣고 대놓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화련이 따지고 드는 장면이 절로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음, 일단 일이 마무리 되면 물어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언니도 아시지만 마스터가...”
“하긴, 마스터가 이런 일에는 좀 깐깐해야지. 그래도 마스터가 무력화 시켜주는  제일 편한데...”


아래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명은 들리지도 않는지, 무덤덤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 문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보다 피만  묻었지 훨씬 더 험악한 꼴을 하고 있는 문민호는 끔찍하다는 듯이  현이 단매에 때려죽인 대장 칼날늑대를 바라봤다. 단매가 맞아죽은 게 믿기지 않는지 부릅뜬 눈이 자신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진짜 괴물이군.’
‘괴물들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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