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탐식마(貪食魔)
“후우우...”
뒤로 넘어갈 것처럼 몸을 젖힌 웨인 크로이츠는 한 숨과 함께 손아귀에 쥐고 있던 서류 뭉치를 흘려보냈다. 커튼이 요란하게 펄럭거릴 정도로 세차게 불어 젖히는 바람에 서류가 방안을 헤집고 다녔지만 웨인은 수습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 빨라...’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때 아닌 에어쇼를 벌이고 있는 서류들을 보고 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 위에 적혀있던, 만성 편두통과 불면증을 악화시키는 사건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벌써 라가들의 대이동은 끝물이고, 뉴욕에 뜬 환영성은 당장이라도 실체화해도 이상하지 않아.’
웨인은 미간을 주물렀다. 그의 입으로 틀어막을 방법이 없는 한숨이 다시금 새어나왔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식의 한탄도 쓸데없는 낭비라며 경계했겠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어. 그에 비해서 일의 진행이 너무 빨라.’
책상에 쌓아놓는 걸로 모자라서 방 곳곳에 쌓아놓은 서류더미들은 하나같이 사후보고에 대한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이란에서 출발한 소규모 라가 무리가 어제 저녁 카이로에 도착함. 이런 식이었다. 이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예측의 근거로 삼을만한 정보가 전멸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에게 필요한 건 라가 무리 얼마가 카이로의 시커먼 장벽너머로 넘어갔는지가 아니라, 아무리 작아도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추측할만한 근거였으니까.
저 장벽이 생긴 지도 벌써 세 달 가까이가 되었다. 이미 카이로 내에 거주하던 이집트 수뇌부는 몰살당했을 거라는 추측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그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집트 전체가 무법상태에 들어가지 않은 건, 우습게도 라가 이외의 존재에게는 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장벽 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 국민들은 저 초자연적 현상에 어찌 반응해야할지 세 달이 지난 지금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수도가 폭격이든 괴수의 난동이든 간에 파괴 되었다면 부질없든 어쩌든 분노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이로는 잿더미가 된 게 아니라 ‘격리’되었다. 대놓고 물리학을 엿 먹이는 것 같은 거대하고 검은 장벽으로 인해서. 이집트 국민들은 이 기괴한 상황에 당황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전 세계로부터 격리되다니, 어느 누가 그런 경험을 해봤겠는가?
그 와중에도 약삭빠른 작자들은 슬며시 군벌에 한 발 걸치거나 음모론을 떠들며 선동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협회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상임이사국들을 설득. 재빨리 UN군을 파견한 덕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은 면했다.
‘그것도 슬슬 한계지. 대놓고 티는 안 내고 있지만 미국은 슬슬 속이 타들어갈 테니 어떻게든 손을 빼려고 들 거야. 그 쪽도 안고 있는 폭탄이 만만치는 않으니까. 거기다 이 타이밍에 방한일정을 잡은 건...용잡이 팀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 리가 없지. 문제는 용잡이 팀이 가더라도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웨인은 자세를 바로 잡더니 보고서 하나를 집어서 뒤집은 후에 만년필로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 환영성 뭐가 튀어나오든 간에 미국은 버텨내겠지. 환영성 안에 백악관과 펜타곤을 동시 증발시킬 수 있는 화력이 있지 않는 한 피해는 입어도 무너지진 않을 거다. 지체 시키는 것 정도는 해낼 수 있어. 문제가 되는 건 아프리카다. 장벽 너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카이로를 통째로 태워버릴 게 아니면 그 안에 있는 라가들만 해도 UN군 단독으로는 감당불가야. 그런 대규모 폭격을 하려면 주변부터 다 치워야할 텐데, 이집트 수뇌부가 통째로 날아갔으니...’
협회가 이곳저곳에서 끌어 모은 대이동에 참가한 라가 추정수를 끼적거리던 웨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라가들이 이동 중에 국경을 넘으면서 인접국군이 꽤 많은 숫자를 사살했음에도, 카이로에 모였을 거라고 추정되는 숫자가 5만이 넘는다. 정말 희망적인 관측을 전부 적용한 최소치가 5만이고 협회 측에서는 10만을 넘길 것이라고 보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 1/200 비율로 주술사나 챔피언이 섞여있다고 생각해도 이미 세계 어느 나라든 간에 단독으로는 막을 수 없는 숫자다. 그마저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그 정도 숫자면 이집트는 이미 끝장났다고 봐야하고, 진격방향이 재수 없으면 아라비아 반도까지...젠장.’
웨인이 저도 모르게 손을 머리카락으로 향하던 그 때였다.
똑똑-
“예, 들어오셔도 됩니다.”
웨인은 오후에 잡혀있던 만남을 떠올리기도 전에 반응했다. 그가 그 약속을 떠올리기도 전에 문이 열렸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고나자 웨인의 머릿속에 약속이 떠올랐다.
방문자는 희끗희끗한 백금발이 인상적인 노신사였다. 클라우드 윈스턴이라는 이름보다 협회장이라는 호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노신사는 서류가 다발이 에어쇼를 벌이고 있는 방을 한 번 쓱 둘러보더니 당황한 기색도 없이 웨인의 정면에 자리 잡았다. 웨인은 재빨리 떠다니는 서류다발을 낚아채서 눌러놓고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못 볼꼴을 보여드렸군요.”
클라우드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이 휘갈긴 종이 위에 잠깐 머물렀다는 것을 웨인은 놓치지 않았다. 뒷덜미까지 열이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닐세, 그렇게 바쁜데 방이 깨끗한 것도 좀 무서운 일이지. 오히려 내가 미안하네. 자네가 아무 말 않고 참아준다고 너무 막 돌렸군.”
“제가 자청한 일이니 더 굴리셔도 됩니다.”
클라우드는 웨인의 당찬 대꾸에 허허 웃다가 책상 위의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렇지 않아도 이 이야기를 하려고 왔었는데 내가 한 발 늦은 꼴이 되었군. 그래, 웨인 군.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아프리카가 우선인가, 아님 미국인가?”
“제 짧은 식견으로는...”
“부담가질 것 없네. 위원회 앞도 아니고, 우리 둘끼리의 이야기일 뿐일세. 뭐 내일 회의에서도 자네에게 묻긴 하겠지만. 세 곳의 X던전 모두 클리어 하는데 일조한 이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 그 연습이라고 생각해주게.”
일조라니 하며 웨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 파주의 X던전이라면 일조했다라고 표현해도 될지 몰라도, 그 뒤의 두 곳은 그야말로 들러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머지 두 곳의 X던전 클리어는 류 현이라는 이름만 써도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문제없을 정도다.
웨인은 그 일에 대해서 보태는 것도 빼는 것도 없이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렸지만, 위원회에서는 웨인이 겸양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했다. 웨인이 없는 소리를 지어내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눈앞의 클라우드 윈스턴마저 어느 정도는 그 의견이 동의할 정도였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해봐야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았기에 웨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프리카 쪽에 전력을 집중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흐음...계속 해주게.”
웨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쌓여있는 보고서의 산에서 한 장을 끄집어내서 뒤집어 놓고는 말을 이어갔다.
“뉴욕에 떠있는 환영성은 현재까지 보이는 것 말고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플레이어들이나 볼 수 있으며, 최근에야 블루급 플레이어들에게 보이기 시작했지요.”
“내 눈에는 도통 보이질 않으니 믿기는 힘들지만...입을 모아서 그렇게들 말하고 있으니 맞겠지. 그리고 크기도 계속 커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예, 제가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는 항공모함 두 세척은 수용하고도 남을 것 같은 크기였습니다. 거기서 더 커졌다면...”
“거기다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지. 자네가 X던전에서 봤다던 그...”
“골렘을 말씀입니까?”
“그래, 그런 것들이 쏟아져 나오진 않더라도 한두 마리라도 들어앉아 있으면 뉴욕은 괴멸 아닌가. 그 성이 실체화해서 떨어진다고만 생각해도 끔찍하군. 던컨이 대피령을 내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야.”
미국 대통령을 친구 부르듯이 하는 클라우드의 태도에 웨인은 속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예, 그 안에 X던전에서 봤던 급의 골렘이 하나만 있어도, 군과 연계한다 선 쳐도 해도 플레이어 피해가 엄청나겠지요. 그래도 미국이 무너질 정도는 아닙니다.”
“그야 그렇긴 하네만.”
“하지만 아프리카는 다르지요. 이집트는 이미 수도와 같이 수뇌부를 잃고 내전이 터지기 일보직전입니다. 막말로 무너지는 게 이집트에 그치면 모르겠습니다만...카이로에 진입한 라가 숫자를 생각하면 리비아, 수단, 차드도 위험해집니다. 서로 국경선 유지도 겨우겨우 하는 판국에 만에 하나라도 라가들이 대규모로 뭉쳐 다니기 시작하면, 막을 방법이 없을 겁니다. 이집트를 아예 포기하고, 전 국토에 폭격을 때리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거기다가 아프리카 대륙 내에 괴수가 라가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최근에는 작은 규모나마 주거지 확보를 위한 토벌이 이루어지곤 있다지만, 정말 소규모에 불과했다. 이따금씩 갑자기 국경지대에 머리를 쑥 디밀고 분탕질 쳐대는 상위괴수 때문에라도 대규모 인원을 동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카이로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UN군으로 지체시키고 카이로에 정밀폭격을 때리는 건 어떻겠나? 카이로는 아예 포기하고 말일세.”
“군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 안에 있는 건 라가 챔피언뿐만 아니라 주술사도 있으니까요. 라가로드는 관찰되진 않았습니다만, 주술사만 해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합니다. 운 좋게 저지하는데 성공하더라도 카이로뿐만 아니라 인접도시에 자리 잡고 있는 괴수 무리를 같이 쓸어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이 폭격에 반응해서 군의 후미를 덮치면 괴멸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전정리 작업도 군 단독으로는 힘들고요. 최선은 플레이어 연합팀을 구성해서 연계하는 겁니다만...”
“...아무리 열심히 소집령을 내려 봐야 아프리카 행에 동참할 리가 없지. 혹여 소집령에 응하려는 친구들이 있어도 국가에서 내보내 줄 리도 없고 말일세. 눈과 귀가 있으면 지금 이집트가 어떤 꼴인지 뻔히 알 테고.”
말을 마친 클라우드는 침음성을 내며 턱을 매만졌다.
“...예, 아프리카에 인원파견이 급하지만 그래서 더 거부할 게 뻔하지요.”
“골치 아프구먼. 그렇다고 미국에 보내자니 저대로 두면 이집트 한 곳으로는 안 끝날 거 같다고 하니...”
클라우드가 심각하게 고려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이자 웨인을 손을 내저었다. 만전을 기해서 나쁠 건 없다지만, 변변한 근거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추측뿐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근거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요. 실제로는 장벽이 걷힌 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내뱉고도 바보 같다고 느낄 정도로 희망적인 관측이었지만, 웨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소집령을 내려 봐야 공연한 힘 빼기가 될게 뻔한 상황인데, 무슨 참사가 터질지 뻔히 알면서 손 놓고 있는 되는 꼴이 되니까. 이런 식으로 현실도피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턱수염을 매만지며 침음성을 삼키던 클라우드는 무릎을 몇 번 두드리는 듯하다가 혼자서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고는 말을 돌렸다.
“그 류 현이라는 친구라도 이번 사태에서 못 건졌으면 정말 끔찍할 뻔했군. 이쪽으로 가담해주어서 정말 다행이야...그러고 보니, 미국이 그 친구 때문에 아주 몸이 달아있다지.”
“부통령이 다시 방한 예정이라더군요.”
“불안한 게 당연하겠지. 던컨 성격상 직접 나서려고 들었을 텐데 잘도 자제시키고 있군.”
대꾸하면서도 웨인은 입안에 영 꺼끌한 느낌이었다. 그가 가담했다. 그게 정말 맞는 말일까?
‘가담해준 게 아니라 그가 만든 흐름에 올라탔다가 더 맞을 것 같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기에, 그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려고 했다.
“크, 크로이츠님 더, 더블린에...!”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인영 때문에 웨인은 저도 모르게 경계태세로 들어갔다가 얼굴을 확인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난입자가 자신의 비서를 자청하는 캘리 우드라는 걸 확인한 웨인은, 뒤늦게 클라우드 윈스턴을 발견하고 버벅거리는 캘리 우드를 도와주기로 했다.
“우드 씨,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하게 오신 겁니까? 한 쪽 구두는 또 어쩌셨고요.”
“예? 아, 맞다! 제 구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방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외친 우드는 제 상의와 하의 주머니를 다 까뒤집으며 뭔가를 찾는 듯하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접힌 사진 한 장을 찾아내었다.
“더블린에 신종 던전이 발견 됐습니다.”
“...네?”
“계측 결과는 검정! 더블린 이외에도 홍콩, 모스크바, 빈, 사라예보 등에 같은 계측 색이 나타난 던전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웨인의 고개가 클라우드 쪽으로 획 돌아갔다.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는 영국신사의 전형인 그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을 감상할 새도 없이 웨인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위원회를 소집해 주십시오. 저는 일단 더블린으로 가보겠습니다.”
“이보게, 웨인 군 혼자서는...”
“혼자서 그 안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확인만 할 생각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후 웨인은 튕겨져나가듯이 방안을 빠져나갔다. 내달리면서 웨인은 휴대폰을 조작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일 텐데도 상대는 수신음이 한 번 돌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예, 류 현입니다. 웨인 씨?-
“류 현님 한밤중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하게 전할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말씀하시죠.-
“신종 던전이 나타났습니다. 계측 결과는 검정이라고 합니다.”
-......-
류 현이 오래 침묵한 것이 아님에도 웨인은 조바심을 느꼈다. 웨인이 그의 짧은 침묵을 견디다 못해 말을 걸려던 때 류 현이 다시 입을 떼었다.
-제가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저는 일단 더블린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제가 가서 살펴보고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기다리지요.-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전화가 끊어짐과 동시에 웨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됐다!’ 웨인은 방금 전보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주차장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