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탐식마(貪食魔)
‘대소환’은 인류가 가진 세계관을 공격하는 초유의 사태였지만, 그 나름대로의 규칙은 존재했다.
포화기간이 차기 전에는 괴수는 던전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던전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동안 카운트다운은 멈춘다, 던전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포화기간이 길다. 같이, 사람들이 적응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눈에 띄는 규칙들이 존재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괴수들이 가진 인간에 대한 적의일 것이다.
괴수는 인간을 공격한다. 무조건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이야기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나쁘기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괴수는 인간과 조우할 경우에 야성적 판단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일단 덤비고 보는 편이니까. 그렇게 눈이 뒤집어진 상대를 맞이하는 건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리저리 잴 수 있는 상대와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플레이어를 ‘사냥’할 줄 아는 괴수로 평가받는 오우거 조차 어지간한 부상에는 돌격을 감행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상식에 가까운 지식은, 이 시점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3차 ‘대소환’이라는 재앙을 겪어본 류 현에게도 유효했다. 아니, 3차 ‘대소환’을 겪어봤던 그였기에 더욱 믿는 편이었다. 그는 괴수의 틀마저 벗어던질 것 같던 괴물들과 숱하게 싸워봤고, 괴수의 그 특성 덕을 꽤나 봤었으니까 말이다.
괴수는 인지한 모든 인간을 공격한다. 네임드 몹들은 어느 정도 약간이나마 이 충동을 제어하는 듯했지만, 벗어나진 못했다. 그와 싸우면서 궁지에 몰리면 도망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인간을 죽이는 걸 포기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었다. 결국 그것들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돌아왔다. 그와 서로 죽이는 꼴이 된 아지다하카 또한.
그 때문에 류 현은 자기도 모르게 그 사실을 믿고 있었다. 회귀 이후 아무리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도, 그 대전제만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알게 모르게 그 속에 존재했다.
[괴수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맞춰서 힘을 기른 내가 나서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말이다.
그 믿음이, 대전제가 무너지는 전조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류 현은 노트북 화면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핏발선 눈이 그의 심경을 대변해주는 듯 했다.
“......”
영상 속의 라가들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걷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라가들이 배경삼아 걷고 있는 곳이 이젠 몇 남지도 않은 소규모 원주민 부락이었다. 화면상으로 보이진 않지만, 움막 같은 집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카메라의 시점도 움막 안에서 찍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이 얌전한 이동의 근거가 되진 못한다. 상위종이 아닌 보통 라가의 신체능력은 특별할 게 없지만, 아무리 약해빠진 괴수라도 인간 냄새는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플레이어가 아닌 보통 사람이 괴수의 이목을 피할만한 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부분을 감안하면 영상속의 라가들은 움막 안의 사람들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고서도 무시했다고 추측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세간에 퍼진 괴수에 대한 상식을 깨부수는 광경이라 할만 했다.
‘미치겠군...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어떻게 구했는지는 몰라도 웨인이 보내온 추가영상이었다.
류 현은 영상을 구해다준 웨인에게 두통거리 감사하다고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알아도 문제...몰라도 문제인건가.’
그는 귀한 정보를 보내온 웨인에게 터무니없는 불평을 늘어놓는 것 말고 주변을 돌아봤다. 일행은 하나같이 퀭한 얼굴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상 속 광경이 믿기지 않는지, 카메라 코앞을 스쳐지나가는 라가챔피언이 나오는 부분을 반복해서 돌려는 중이었다. 류 현은 그 모습에 고개를 내저으며 제 머릿속에 드리운 그림자를 밀어냈다.
‘알아도 문제라니 그딴 개소리가 어디 있어? 찾자. 분명히 해결책이 있을 거다.’
그리 애써도 드리운 불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지만.
***
“아라비아 반도까지요?”
-네, 아프리카 쪽의 이동 규모를 생각하면 정말 미미하지만 움직임이 포착됐다고 합니다. 칼리프 클랜 측은 접경지대에 깔린 괴수부대 때문에 접근조차 여의치 않아서 손 놓고 있는 실정이고요. 접경지대에 대피령을 내리고 네이팜 폭격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손 쓸 방법이 없다고 봐야합니다. -
“아프리카 측 반응은 어떻습니까? 어찌됐든 간에 괴수가 국경선을 넘어오는 걸 그냥 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반응하고 말고 할 여력이 없습니다. 국경선은커녕 지금 자국 내에서 움직이고 있는 라가 무리조차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지금 아프리카 대륙은 아수라장 그 자체입니다...괴수만 없었다면 진작 다들 들고 일어났겠죠.-
괴수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데, 괴수 때문에 나라가 유지되고 있다니 헛웃음마저 안 나오는 이야기였다. 류 현에게는 낯선 일도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 인류가 말 그대로 갈려나가던 그 시절, 국가가 국가 노릇조차 못하던 때가 이랬으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국가가 괴수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구멍투성이 우산 아래에 있기를 원했다. 그조차도 없으면 하루조차 버틸 수 없으니까. 투표고 뭐고 없이 군벌과 뒤섞인 괴뢰정부들이 난립했지만, 반발은 지극히 미미했다.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전부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위스프’는 어떻습니까?”
-그게...이상할 정도로 조용합니다. 움직였어도 옛저녁에 움직였어야 정상인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어서, 난리 통에 ‘위스프’본부가 괴멸됐다는 추측까지 나돌 정돕니다.-
“협회 측 의견은 다른 것 같군요.”
-행동 요원 급은 몰라도 수뇌부는 그 정도로 당할 실력이 아니니까요. 지벡 건터에게 부상을 입히고 탈출할 정도의 실력자들이 기껏해야 라가 무리에 당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죠.-
“...골치 아프군요.”
-예, 바로 쏟아져 나와서 행렬을 막을 거라곤 생각은 안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외면할 줄은...그래도 내건 기치가 있는데...-
“그건 그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그래서, 아직 별다른 변화는 없는 겁니까? 카이로에만 모여 있다고요?”
-정확히는 모여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라고 해야 합니다. 카이로로 진입한 라가들이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야 그렇지요.”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웨인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바로 덧붙였다.
-협회 측에서 탐사대를 보내려고 팀을 짜긴 했습니다만...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상황인지라...-
“예, 그건 잘 말리셨습니다. 들어갔는데 X던전 같은 꼴을 볼 수도 있으니까요.”
류 현의 무덤덤한 대꾸에 웨인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웨인이 카이로에 탐사팀을 꾸려서 들여보내려던 협회 수뇌부를 설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협회에서 꾸린 팀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X던전이라는 신세계를 본 웨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는데, 무턱대고 카이로에 팀을 집어넣었다가 팀이 통째로 증발하면 손해라는 표현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류 현님.-
“네, 말씀하시죠.”
류 현의 허락에도 웨인은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류 현은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나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마침내 웨인의 입이 떨어졌다.
-혹시 이번 일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없나 해서...-
“......”
류 현은 화면 너머에서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웨인을 멀뚱히 바라봤다.
아프리카 대륙에 퍼져있던 라가들이 단체로 미친 것처럼 인간들의 마을과 도시를 무시하고 카이로로 향하는 기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서 출발한 라가무리들은 아직 이집트 근처에도 당도하지 못했지만, 주변국에서 출발한 라가들 상당수가 카이로에 도달했으며 그것들의 영향인지 몰라도 카이로는 현재-
“저도 아는 게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럼 손 놓고 답답해 할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아뇨,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렇게 묻고 싶었을 겁니다.”
사흘째에 갑자기 나타난 시커먼 장벽에 둘러싸여서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상태였다. 위성전화도, 아직 철거되지 않은 유선 통신선을 통한 연락도 전혀 먹히질 않고 있다. 그 안에서 나온 카이로 주민은 당연히 없다. 그 와중에 뭔가에 홀린 것처럼 라가 무리만이 꾸역꾸역 카이로로 진입하고 있다. 카이로에 가족이 있던 민간인 몇 명인가가 장벽 안으로 뛰어들고자 했지만 시커먼 장벽은 장식은 아니라는 듯, 튕겨져 나와 부상자만 생겼다.
전 세계로부터 고립된 도시가 전 세계 관심의 중심이 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나라의 정부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추론을 내놓았다. X던전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장벽도 플레이어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하고. 공교롭게도 등장 시기마저 카이로의 X던전이 공략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으니 말이다.
‘저게 뭔지 알면 여기 안 있고 당장 날아가서 때려 부쉈겠지.’
답답하긴 류 현도 마찬가지였다. X던전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의 기억과 계획 속에서 없던 존재인데 불쑥 나타난 걸로 모자라서, 이제 그 뒤처리까지 그 수준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웨인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X던전이라는 갑작스레 등장한 변수에 류 현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차분하게 대처했으니까. 웨인의 눈에는 류 현이 말한 것 이외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을 터.
‘문제는 진짜 아는 게 없다는 거지. 젠장, 칼리프 그 여자한테 뭔가 좀 더 들어놨으면...’
웨인의 소망과 다르게 아는 게 없어서 뉴욕에 뭉개고 있을 뿐이니, 달력이 넘어갈 때마다 속만 타들어갈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털고 일어나서 아프리카로 떠나자니, 뉴욕 상공에 떠있는 커다란 성이 마음에 걸렸다. 그 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류 현의 최근 두통거리 중 하나였다.
‘...지금이라도 카이로로 가는 게 맞나? 아프리카는 지금 괴수 억제력은커녕 자국민들 대피시킬 힘도 없어. 차라리 국경이라도 틀어막고 있으면 아라비아 반도까지 혼란해지지는 않겠지만...그렇게 될 리가 없지. 지금 아프리카가 무너지는 건 곤란해. 하지만 저걸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보장이...’
류 현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앓는 소리를 삼켰다.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물리적으로 가볍게 왔다 갔다 할 거리가 아닌 건 덤이었다. 저 환영성을 내버려두기에는 미국이 걸리고, 카이로를 외면하자니 아프리카가 무너지고 난 뒤의 전개가 너무 뻔했다. 가장 큰 문제는 둘 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었고.
-류 현님.-
이마를 짚고 앓는 소리를 삼키던 류 현을 살피던 웨인이 그를 불렀다. 류 현은 시선만 맞춘 채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웨인은 지체 없이 말했다.
-류 현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현 상황에서는 소규모 팀으로 뭔가를 시도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가 종류만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다곤 해도 카이로에는 이미 만 단위를 엿볼 정도의 라가가 모여 있을 것이다. 웨인이 협회의 탐사팀 진입을 반대한 것도 X던전 같은 상황을 우려한 것도 있지만 라가의 숫자가 일개 팀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진입한다면 적어도 협회 탐사팀과 UN군과 연합해야만 할 터.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뉴욕에 떠있는 환영성은 간섭자체가 불가능 하고요.-
“예...뭐, 여태 수차례 시도해봤습니다만...그렇더군요.”
성의 크기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성에 간섭하려고 접촉을 시도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류 현이 행선지를 정하지 못하고 뭉개고 앉아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에 X던전을 완벽하게 틀어막았음에도 며칠 전에 6성리치가 나타났다가 잡힌 한국발 소식도 그의 고민에 일조했다.
사실, 고민자체가 어떻게 돌아갈 수 없을까 하는 궁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귀국하셔서 휴식에 힘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예?”
-주제 넘는 이야기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휴식기 도중에 미국으로 출국하셨지 않습니까. 게다가 한국 내의 여론도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여론이라는 말에 류 현은 뚱한 표정이 되었다. 보나마나 6성리치가 떴었다는 소식에 나라의 중요 전력인 검성이나 류 현이 밖에 나가 있는 게 말이 되냐는 식의 이야기 일 것이다. 류 현의 입장에서는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지들이 괴수 때려잡는 데 무슨 보탬이나 되긴 했나?’
류 현이 어떻게 생각하든 웨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흘러가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변화가 끝나고 나면, X던전에 버금가는 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예방할 수 있으면 더 없이 좋겠습니다만...불가능하니 차라리 휴식기를 가지시고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낫지 않을런지요. 미국 측에는 저희가 잘 말해놓을 테니 휴식기를 제대로 보내시는 게...-
하지만 그렇다고 원하던 말을 대신 해준 이의 제안을 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