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탐식마(貪食魔)
“...젠장 잠이 안 와.”
류 현은 반쯤 드러누웠던 자세를 고쳐 앉고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돌겠군.”
자연스럽게 새어나오려는 한 숨을 삼키며, 류 현은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는 맥주 번들이 행진이라도 할 것 같은 모습으로 줄지어 있었다. 류 현은 그 중 캔 하나를 꺼내서 단 번에 털어 넣고는, 남은 번들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새 캔을 손에 쥔 류 현은 캔을 따지 않고 손안에 굴리며 고민했다.
반나절 전에 미국의 부통령과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지고, 원만하게 헤어진 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정보원이 아쉬워 질 거라고는 생각 안 했었는데.’
고민의 이유는 낮에 본 광경과 화련의 설명 때문이었다. 류 현은 화련의 설명을 모두 이해한 건 아니지만, 대충 그게 뭘 의미하는 지 정도는 유추해낼 머리는 있었다. 화련은 결론을 내는 것을 거부하고 있지만, 뉴욕 상공에 떠있는 성이 머지않아서 일반인의 눈에도 보이는 진짜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형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때가 되면 지금같이 평화롭게 관찰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될 거라는 건 분명해보였다.
던전은 언제나 인류에게 상상 이상의 적대적인 무언가를 선사해왔다. 1차 ‘대소환’은 인류의 우주관을 공격했고, 2차 ‘대소환’은 인류에게 플레이어라는 이물을 강요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만이 기억하고 있는 3차 ‘대소환’은 플레이어를 받아들인 인류의 씨를 말릴 기세로 공격해 들어왔다. 실제로 그 공격은 유효했고, 류 현이 아지다하카와 목숨을 건 일전을 벌였을 시점에 추산되는 생존자는 6억 이하였다. 이미 인류 문명이라고 말할만한 건 붕괴한 뒤였다. 일 년 후를 보는 농기구를 돌보는 것보다, 당장 내일 한 번 뜰 수 있을지나 의심되는 전투기를 돌보는 데 모든 인력을 쏟아 붓던 시절.
그런 시절에 류 현은 아무도 부탁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인류의 대표자가 되어 최선두에서 괴수를 찢어발겼고, 그 이외의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류 현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정보에 그리 밝지 못한 이유였다. 언제나 일이 터진 뒤에 보고를 받아보는 식이었다.
최고의 정보기관이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서 내놓은 예상안과 그에 따른 일정 같은 건 그에게 별세계 이야기였다. 오늘 백두산에 중국 내륙에서 출발한 7성리치가 도달하면 그는 이틀 후에나 그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단순히 랭커라고 불리는 이들조차 국가의 엄정한 보호와 관리 속에서, 위험도와 피해예상을 거친 뒤에 파견되었던 것에 비하면 주먹구구식 대처법이라고 할만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터주’와 ‘예거즈’에게 플레이어 핵심 전력을 모두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난리통에 행정부가 통째로 날아갔던 그의 조국은 제 앞가림조차 혼자 못할 지경인 것을.
류 현이 정보통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이런 경험이 꽤 크게 작용했다. 중요성을 모르진 않지만, 그걸로 재미를 본 적이 없으니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가장 정력적으로 끌어 모았던, 엘릭서에 대한 정보가 결국에는 아무런 쓸모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도 영향이 없진 않았다.
거기에 류 현은 정보를 걸러낼 자신도 없었다.
‘이전 생에서도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어떤 게 내 영향을 받았는지 어떻게 구분하겠어?’
자신의 회귀로 인해서 변한 것이 뭔지 걸러낼 능력도 없고, 그럴만한 시간도, 자금도 없었다. 지금이야 팀이 궤도에 오르면서 당장 무슨 일이 생겨도 세아의 치료에 댈 비용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모아놨지만, 어디 정보원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겠는가?
‘그냥 무조건 내가 더 세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거기에 류 현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아지다하카와의 일전에 대해서는 그런 확신을 가질 생각은 없지만, 그 앞의 괴수들은 자신이 있었다. 후퇴했다가 재도전하는 과정을 반복하긴 했지만, 결국 그는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그 괴물들을 꺾어 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반쯤 억지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을 납득시켜왔다. 여기저기 다 손을 뻗기에는 제 한계를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고 있는 류 현이었다.
‘젠장, 이렇게 까지 바뀌었는데 날 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이 세상을 지키라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런 푸념까지 나올 정도였다. 류 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푸념은 도저히 뭘 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 해도 늦지 않았다.
‘자, 여태까지 터진 일만 나열해 보자고. 카이로와 뉴욕 ‘문’이 터지는 건 거의 확정이야. 카이로 쪽이 아직 확인된 게 없지만...터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문’이냐는 건데...’
류 현은 관자놀이를 검지로 툭툭 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파주의 ‘문’을 닫을 때 화련이 중얼거렸던 내용을 기억해냈다.
‘그래, 천공성이랑 왕의 영지. 파주의 ‘문’에 악룡의 둥지라는 이름이 붙은 걸로 봐선 나머지 두 곳에도 이름이 붙어있겠지. 화련 씨가 읽은 건 그 내용일 테고. 왕의 영지...라가 로드는 아닐 거고 왕이라고 이름 붙을 만한 게...어, 엘더 리치라도 튀어나오나? ...아니겠지? 설마 네임드 몹이...’
이전 생에서 팔자에도 없던 남극여행을 시켜준 네임드 몹을 떠올린 류 현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남극이라는 환경이 그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진 않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생활도구들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던전 안도 아닌데 던전 플레이 할 때처럼 상거지 꼴을 한 채로, 던전 안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숫자의 리치 군단을 북극에서 상대한 기억은 추억하기에는 좋은 편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엘더 리치의 지휘를 받는 리치군단은 멍청하게 정면으로 덤벼들거나, 덮어놓고 줄행랑만 치는 개개의 리치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었다.
마지막에는 남극해를 맨몸으로 건너야할 뻔 했던 일까지 떠올린 류 현은, 치를 떨면서도 그 기억을 한 켠에 밀어두고 계속 진행해나갔다.
‘아니면 라가 로드처럼 지휘개체가 딸린 채로 군락채로 뭔가가 넘어올 수도 있겠군. 뉴욕의 그 성을 보면 아마 왕의 영지가 아프리카 쪽일 텐데...하필이면 그 쪽이 이런 게 뜨다니 골 아프군. 미국에 떠주면 내가 신경 쓸 필요도 별로 없잖아.’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와 덕담을 주고받은 리어던 부통령이 안다면 기겁할만한 생각이었지만, 미국민도 아닌 류 현으로서는 아프리카에서 더 분탕치기 좋아 보이는 문구가 신경 쓰일 뿐이었다.
‘아프리카가 지금 상태에서 더 무너지면 곤란해.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상태일 텐데...아프리카가 무너지면 다음은 아라비아 반도고 전생을 생각하면...칼리프 클랜도 마냥 버티진 못 해. 네임드 몹이 안 나타나면 모르겠지만...‘문’에서 나오는 게 7성 리치급만 되도 지금 놈들 전력으로는 저지하는 것만으로도 피해가 클 거야. 그럴 거면 차라리 버티는 것보다 빠르게 이탈하는 게 낫지. 터키는 7성리치에 저지력은커녕 아프리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수 무리도 감당 못 해. 그럼 크림 반도까지는 순식간이지. 그렇게 육로가 막히면 유럽은 천천히 고사한다.’
당사자를 제외한 전 세계가 아프리카를 회생가능성이 없는 불모지 취급하고 있었지만, 류 현이 보기에는 최우선 토벌 대상이었다. 이전 생에서 3차 ‘대소환’이 터진 직후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십 년 가까이 아프리카 각지에 퍼진 괴수들은 칼리프 클랜이 네임드 몹 ‘마녀’에 당해서 약화되었을 때 아프리카 대륙을 뛰쳐나와서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괴수 무리는 자체적으로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끼치진 못했지만, 3차 ‘대소환’으로 인해서 현실로 튀어나온 샌 드래곤 같은 상위 괴수들과 뭉치더니 서로를 보호해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수만 많은 저급 괴수들을 폭격으로 쓸어버리자니, 무리 중앙의 샌 드래곤 때문에 폭격기가 편대 단위로 갈려나갔다. 그렇다고 플레이어 부대를 돌진시키자니, 저급괴수가 서있는 것만으로 고기방패가 되어줬다.
전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단순한 협업이었지만, 3차 ‘대소환’으로 약화되고 혼란한 인류에게는 재앙이라고 할만 했다.
류 현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유성우를 직접 삼킨 이유였다. 처음에는 협회와 폭탄 돌리기라도 하듯이 굴릴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볼 때 그럴게 여유 있게 굴릴만한 때가 아니었다.
‘예정보다 훨씬 이르지만...주요 괴수 군락지라도 폭격해 놔야겠어. 계속 때만 가늠하고 있다간 손도 못 대고 ‘문’이든 ‘대소환’이든 터지고 말거야.’
류 현은 결심한 바를 대충 휘갈긴 후에 또 머릿속 한편에 밀어 놨다.
‘천공성. 뉴욕에 떠있는 성 이름 같긴 한데...저런 구조물이 현실에 나타난 건 처음 본단 말이지. 리치가 성을 지은 적은 있어도 어디까지나 지구에 있는 물질로 만든 거였고.’
화련이 회색 노이즈로 윤곽 밖에 볼 수 없다고 했던, 환영성. ‘문’자체가 그랬지만, 류 현조차 생전 처음 보는 구조물이었다. 위는 비정상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가진 중세성처럼 보였지만 아래는 지구의 성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나무뿌리 같은 구조물들이 뻗쳐있었다.
‘봐도 느껴지는 게 없었어.’
류 현의 고뇌가 깊어지는 건 그가 보고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화련의 애매모호한 설명이 없었더라도, 류 현은 그 환영성을 그냥 봐 넘길 생각이 없었다.
‘이런 적은...‘마녀’때나 있었지 다른 놈들은 아니었어...그 성은 분명 거기에 있어. 하지만 느낄 수가 없다.’
류 현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곱씹으며 손안에서 미지근해 져버린 맥주캔을 따서 기울였다. 목울대가 바쁘게 움직였지만 점점 목이 더 타는 기분만 들었다.
‘파주에 잠깐 들러서 보고 올 걸 그랬나...? 아냐, 문민호와 서해란은 그걸로 나한테 거짓말 이유가 없어. 내가 뭘 원해서 거기로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는지도 이제야 추측하기 시작했을 거야. 젠장, 그냥 한 번 보고 오겠다고 당장 카이로까지 날아갔다 올 수도 없고. 아니지, 그냥 한 번 보고와? 가는 김에 겸사겸사 폭격도 몰래 몇 군데 때리고?’
류 현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국제분쟁의 불씨가 영글던 때였다.
탁자위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부르르 떨면서 움직였다. 류 현은 손을 뻗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발신자는 세아가 입원한 병원도, 시간 감각은 엿바꿔 먹은 것 같은 그의 친구 승하도 아닌, 웨인이었다.
“예, 류 현입니다. 웨인 씨, 무슨 일이십니까?”
-류 현님, 오밤중에 죄송하지만 정말 꼭 아셔야 할 일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류 현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웨인은 꽤 심하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뉴욕은 한 두 시간만 있으면 동이 틀 테니, 웨인이 있는 런던도 한밤중일 터였다. 무슨 일이 있기에 한밤중에 어지간한 일에는 지치지도 않는 그가 헐떡거리고 있는 것일까?
“...말씀하시죠.”
-평양에 6성리치가 등장했습니다. 지금 ‘예거즈’측에서 교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류 현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고는 쥐어짤 기세로 움켜쥐었다. 류 현은 당장 방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확실한 겁니까? 혹시 마법을 난사하는 것만 보고...”
-확실합니다. ‘예거즈’ 측에서 몇 번이고 정찰을 반복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6성 리치가 혼자 있지도 않습니다.-
“예?”
-골렘. 저희가 X던전에서 봤던 골렘보다 작지만, 골렘이 붙어있었습니다.-
류 현은 거기까지 듣고 나서 귀가 먹먹해졌다. 흥분한 웨인이 뭐라고 외쳤지만 그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6성리치와 골렘의 등장. 다른 이들에게는 단순히 괴수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류 현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 둘은 블랙 던전 이상에서 등장하는 대표격 괴수이며, ‘문’이라는 특수 케이스를 제외하면 퍼플이 최상위 던전인 현재에는 나타날 수 없는 괴수들이었다.
그것들이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이 일이 뜻하는 바는 하나. 그가 발맞춰 움직이기도 전에 세상이 다시 한 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는 의미.
그가 ‘문’이라는 변수를 해결하려고 뛰어다니는 동안, 세 번째 ‘대소환’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