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1화 〉탐식마(貪食魔) (151/429)



〈 151화 〉탐식마(貪食魔)

화련은 어둠속에 홀로 서있었다. 그녀의 주변 5미터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암흑천지였다. 바닥도, 천장도, 방위도 알  없는 곳. 화련은 그 한가운데 서서 머리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그녀의 눈에는 하얀빛이, 백열하는 것 같은 하얀 빛이 어려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런 상태에서  볼  있을 리가 없지만, 화련은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거대한 회색덩어리가 떠있었다.


정확히는 회색 선으로 덧칠되고 있는 것 같은 상태의 거대한 성이었다. 그녀가 뉴욕의 X던전에서 원정대와 함께 목격하고, 전송을 중단시켰던 그 성 말이다.  때보다 존재감이 더 희미해진 성은 희미해진 존재감과는 반대로,


‘이미 환영단계가 아니야. 그런데 존재감은  희미해졌다니 대체...’


화련이 느끼기에는 반쯤 실체화 한 상태였다. 그녀의 상식 하에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태였지만, 화련은 관찰에 힘썼다. 오래 유지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노이즈가 낀  처음 보는데...음, 다가가보겠다고 하면 반대하려나?’

스스로 생각해도 시답잖은 소리와 함께 화련은 전개했던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기묘한 상실감과 함께 밀어닥친 현기증에 비틀거리던 화련은 제 어깨를 잡아준 희란에게 눈인사 하며 몸을 기대었다.


‘끙...생각보다 더 대단한 거였나 보네.’

현기증이 졸음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화련은 희란을 향해서 웅얼거렸다.

“희란아...미안...”

***

“...혹시 세아 언니한테도 이래요 마스터? 언니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네요.”

화련의 핀잔에 류 현은 과도하게 들이밀었던 상체를 뒤로 빼며 헛기침을 흠흠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승하가 키득거리다가 백혜라에게 옆구리를 꼬집혔지만, 웃음이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침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던 희란이 내민 물 컵을 받아 마시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화련 씨 괜찮으신 겁니까? 갑자기 잠드셔서...”
“문제 있는 건 아니고,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제 수준이 안 맞는 걸 봐서 살짝 과부하가 걸린 것뿐이에요. 이정도면 깔끔하게 넘긴 거죠.”
“예...?”

류 현이 반쯤 얼빠진 얼굴로 다시 물으려하자, 화련은 손을 내저으며 제지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알겠지만, 나중에요. 나중에 엄마 잔소리든 뭐든 다 들을게요. 지금은 생각나는 대로 설명하고 다시 기절하고 싶거든요.”
“...알겠습니다. 경청하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류 현의 표정에 화련은 속으로 픽 웃었다. 플레이어로, 헬퍼로 활동하면서 별의 별 인간들을 다 봐왔지만 이렇게 미묘하게 표정이 풍부한 경우는 처음 봤다.


‘진짜 세아 언니 말 대로네. 평소에는 세상 달관한 것처럼 굴면서 은근히  같단 말이야. 자기는 이거저거 다 숨기고 있으면서.’


킥킥거리고 있는 속마음과 달리 화련은 태연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이건 제 주관적인 느낌이고, 제가 아는  공간마법을 쓸  아는 마법사도 없으니 교차검증도 못하니 정말 참고만 하셨으면 해요. 제가 확인한 바로는 저 성은 이미 환영 상태가 아니에요.”

좌중에 갑작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안에 있는 이들 중에서 심각한 표정이 아닌 이는 없었기에 화련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자꾸 감기려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류 현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류 현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이미 소환된 상태라는 겁니까? 우리가 던전 안에서 봤을 때 시작되던 작업이 끝이 났다?”
“아, 그건 아니에요. 환영이 아니라는 거지. 완전히 실체화 한 건 아니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도 이런 걸 보는 게 처음이라서 딱 잘라서 말하는 건 무리에요. 노이즈가 엄청 껴있어서 제대로 보기도 힘든 상태였고요. 굳이 말하자면 뭐라고 해야 하지...끼어있는 상태에요.”

류 현은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화련은 볼을 긁적거리면서 표현할 만한 말을 찾았지만, 자신이 말한 대로 성치 않은 상태에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다행히 화련에게는 그녀의 설명을 해석할만한 파트너가 있었다.


“텔레포트가 실패했을 때 얘기하는 거에요. 언니?”
“아, 맞아.  때. 그거랑 비슷해. 완전히 같진 않지만.”
“하지만  때는 공간에 끼이는 게 아니라 절단 됐잖아요?”
“그래서 좀 다르다는 거야. 어느 부분은 넘어오고, 어느 부분은 남아있고 그런 상태가 아니거든. 전체적으로 반쯤 넘어온 그런 상태?”
“게이트가 작동 중인 거 아닐까요?”
“그걸 모르겠어. 그 정도로 커다란  넘어올 정도로 큰 게이트면 티가  날수가 없는데... 한 번도 못 본 것도 아니고 이미 한 번  거고.”


희란과 화련이 둘 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같은 기미가 보이자,  현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어, 두 분 말씀 나누시는 데 죄송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아, 그게요. 성의 상태를 딱 잘라서 말하기가  그래요. 희란이야 저랑 연구도 해보고 했으니까 어림짐작으로 대충 알지만...”
“그럼 정확히 말씀해주실  있는 부분만 대답해주시죠. 저 성이 환영 상태가 아니라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지금 성이 떠있는 상공까지 올라가도 만질 수는 없겠지만, 저 성은 이미 실체화  상태에요. 공간을 제대로 차지하고 있거든요.”

류 현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 들어도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실체화 했다는 건 유예를 얻기 위해서 했던 일들이 헛짓거리일 수도 있다는 소리 아닌가?


‘...칼리프 그 여자가 말해준 방법이 엉터리였던 건가? 하지만 파주에서는 그 여자 말대로 됐었어. 젠장, 제대로 된 정보가 뭐라도 있어야 상황판단을 하지...’

류 현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다시 물었다. 유예가 그래도 남아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럼 이미 소환 작업이 끝났다는 겁니까? 의심의 여지없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도 이런  보는 건 처음이고, 다른 사람이랑 교차검증도 해볼 수가 없으니 확정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마스터 눈에는  보이시겠지만, 성 전체에 노이즈가 잔뜩 껴있어요.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이 공간이랑 격리된  같은 상태죠.”
“그럼 완전히 넘어온 건 아니라는...?”
“네. 완전히 넘어왔다면  정도로 그칠 리가 없죠. 저번에 던전에서 같이 보셨잖아요?”

뉴욕의 X던전에서  거대한 부유성을 떠올린 류 현은 침음성을 내었다. 이걸 잡으라고 순서대로 나타나는 건지 모를 네임드 몹들에게서 느낀 불길한 뭔가가 그 성에서 느껴졌었다. 그것도 환영상태에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화련의 말은 틀린 바가 없어 보였다. 저번에 던전 안에서 봤을 때 보다 존재감도 옅었으니까.


“두 분이 말씀하시는 거 듣고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해봤는데...그 때 던전 안에서처럼 소환 중인 상태인 겁니까? 그게 모종의 이유로 중단된 거고요?”
“일단 눈에 보이는 바로는 그런 상태라고 추측할 만한데...아까도 말씀드렸다 시피...”
“겉으로 느껴지는 마력의 유동 같은  없지요. 그 정도로 거대한 흐름이면 화련 씨가 아니어도  느낄 수 있을 테고요.”
“네, 그 모종의 이유가 우리가 던전 안에서 한 일 일 확률이 높고, 그게 맞다면 저 상태는 진행 중인 게 아니라 중단상태일 수도 있겠지만...확신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저런 상태는 정말 처음 보니까요. 방금 희란이랑 말했지만 텔레포트 중간에 전송이 중단되면, 가상의 터널이 붕괴하면서 대상은 절단되거나 통로 안에서 찌그러져서 완전히 가루가 나요. 저렇게 덩치 큰 게 대상이라면...”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작은 변화로는  끝나겠죠. 알겠습니다. 대충 들어야하는 말은 다 들은 것 같으니 나머지는 자고 일어나시면 그 때 다시 듣죠. 저도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할 거 같고요.”

화련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고, 희란은 화련을 잠자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류 현은 승하와 혜라를 이끌고 방을 나섰다.


***


“진짜 난 이런 짓은 못 해먹을 종자인가 봐.”

류 현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입을 일이 별로 없길 기원하며 맞춰놓은 정장은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며, 류 현은 마시다가 탁자에 올려놓은 병맥주를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취하는 느낌은 없지만 기분은 그럭저럭 났다. 특히 부통령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 올라온 이름을 발음하기도 힘든 요리들의 느끼함이 씻어 내주는 게 좋았다. 류 현은  웃었다.


“점잔빼고 잘 차려먹는 것도  배워야 해먹는 거지.”

그는 마치 취한 사람처럼 혼잣말을 계속했다. 방금 전까지 그와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던 리어던 부통령이 본다면 같은 남자가 맞나 의심하겠지만, 류 현의 혼잣말은 점점 정도를 더 해갔다.


“미국 시민놈들은 복도 참 많아. 지들이 아무 관심도 안 가져도 보호하겠다고 죽어라 뛰어다는 윗대가리들도 있고.  덕에 나만 또 귀찮아지겠군.”

미국의 요청으로 뉴욕으로 날아온 류  일행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리어던 부통령의 환영식도 거절하고 수면을 취한 후 현장으로 바로 출발했다. 호지슨의 증언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후, 화련에게 재차 확인을 시킨 것이 바로 오늘 일이다.


화련은 아리송하지만 좋게는 들리지 않는 관찰결과를 내놓은 뒤에 지금 잠들어 있고, 류 현은 화련을 돌보기 위해서 방에 남은 희란, 귀찮은 자리는 딱 질색이라고 내뺀 승하, 승하의 덤으로 끼어 와서 부통령과의 저녁자리에 끼기 곤란한 혜라에게 승하를 부탁해 놓고 혼자서 부통령을 상대하게 되었다. 상대했다곤 해도 별다른 알맹이는 없었다.


리어던 부통령이 저번 X던전 클로징에 대한 감사를 재차 표하고, 류 현은 겸양의 태도를 내보이는 지극히 보통의, 재미없는 자리였다. 정보가 없는 데 뭘 논하겠는가.

‘어지간히 애가 닳은 모양이지. 하긴 나라도 아무런 정보도 없는데 이런 일이 연달아터지면 정신이 반쯤 나갈 거야. 나 같으면 클로징 했다고 주장하는 놈들부터 족쳤을 텐데...보기보다 참을성이 좋구만.’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현은 리어던 부통령의 불안을 읽어낼 수 있었다. 류 현이 대단한 화술이나 심리 분석기술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리어던 부통령이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클로징 되었던 던전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이 현상에 대한 책임소재가 아니라, 해결가능 여부를 걱정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제는 나도 뭐가 뭔지 모른다는 거지.’


문제가 있다면 류 현도 이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는 리어던 부통령보다 크게 나을 게 없다는 거다. 유일한 전문가라고 할 만한 화련은 판단을 유보하고 있고,  현은 칼리프에게 유예기간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었다.

‘설마 아예 닫혔다가 다시 열리는 게 아니라, 찔끔찔끔 새어나오다가  방에 확 터지는 식의 유예인가? 하지만 그러면 ‘문’이라고 따로 표현할 필요가 있나? 전에도 그런 식으로 터지는 던전이 없진 않았는데?’

밤과 함께 류 현의 고민도 깊어갔다.

***


아프리카 카메룬의 마운트 카메룬 국립공원. ‘대소환’과 함께 민간인 접근금지 구역이 되어버린 이곳에는 공식적으로는 무인지대다.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국립공원에 배치되어야 할 관리자 역의 공무원조차 철수한지 오래인 이 땅에는, 사람이 살  없는 땅이 되어버린 곳이라도 찾을 수밖에 없는 도망자들이 작은 부락을 이루고 살았었다.


국립공원이 접근금지 구역이 된 원흉인 괴수가 그들의 부락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크루룩?]

국립공원 내의 마지막 부락을 소멸시킨 괴수, 라가 주술사는 뜯어먹던 여자의 팔을 바닥에 내려놓고, 땅바닥에 두었던 지팡이를 다시 꼬나 쥔 채로 하늘을 바라봤다. 라가 주술사의 머리통만한 굵기를 가진 나무 지팡이는, 둔기로서의 기능에 더 충실해 보였지만 머리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큰 상처 덕에  관록 있는 물건처럼 보였다.


실제로 라가 주술사는 자신이 이끄는 무리가 모두 찢겨죽고 그 자신마저 위험해졌을 때 이 지팡이의 덕을 톡톡히 봐서 국립공원까지 숨어들 수 있었다. 플레이어라는 존재를 완벽하게 이해한  아니었지만, 라가 주술사는 위협이 되는 인간을 구분하는 능력을 얻었고 그 결과 이곳에 있었다.


위협이 되는 특이한 인간들은 도시에 모여 살며, 주로 시커먼 길을 따라서 이동하니 그것들을 피해서 높은 곳으로 이동해왔다. 이곳은 안전했다. 먹을 것도 배를 곪지 않을 정도는 있었고, 뭣보다 조용했다.

그게 라가 주술사에게는 이곳에 머무른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갑자기 다른 세상에 내던졌던 라가 주술사는 이 세상에 나온   년 만에 원래의 판단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라가 주술사가 속해 있던 무리가 플레이어 무리와 부딪힌 것도 그 때 즈음이었다. 생존의 위기에 몰렸던 라가 주술사는 그 순간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이곳으로 도망쳐 들어온 것이다.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마력 농도가 낮아서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뭣보다, 인간의 존재가 라가 주술사를 미치게 만들었다. 어지간하면 피하는 것이 옳다는 걸 알고 있어도, 정작 마주하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라가 주술사는 인간과 마주치는 빈도라도 줄이기 위해서 이 곳으로  것이다.

그런 사연을 가진 라가 주술사는 한동안 돌아보지도 않던 방향을, 자신이  세상에 나왔을 때 처음 있었던 토지 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거리에서는 보일 리가 없지만, 그 방향 끝에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가 있으리라. 라가 주술사를 질색하게 만든 대도시다.

한참이나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가 주술사는 천천히 자신이 바라보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른 손에는 지팡이가, 왼손에는 자신이 내던진 팔의 주인인 여자의 상반신을 쥔 채로 말이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상당한 고통을 감수한 끝에 얻은 교훈을 무시하며 카이로를 향해 걷기 시작한 라가 주술사의 머릿속에는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왕의 땅으로...왕이 계신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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