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이 이전 생과 현생에서 구르면서 얻은 교훈은 아무리 준비해도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류 현은 회귀 이후 계속해서 이전에는 없었던 변수와 마주 해야만 했다. 긍정적인 쪽이었지만 각성과 동시에 어느 정도 돌아온 마력도 변수였고, 찾아 나서기도 전에 나타난 오희란의 합류도 변수였다. 그는 ‘링커’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으니, 너무 일찍 만나서 성장이 저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예정에도 없었던 검성이라는 괴물과의 만남은 채 일 년이 안 돼서, ‘광대들’이라는 위협으로 돌아왔다. ‘광대들’이 그에게 치명적인 수준의 위협이 될 수는 없었지만, 변수는 변수였다.
가장 결정적인 건 X던전이라는 존재였다. 그것과 엮이면서 자칭 [용사] 칼리프 드 오르시아와도 만났다. 정말 실존하는 존재인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힐 정도지만.
X던전 발견 당시에는 이전 생보다 빨리 나타난 블랙던전이라고 생각했지만, 류 현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파주, 뉴욕, 카이로에 등장했던 X던전은 칼리프 드 오르시아의 말대로 기존의 던전이 아닌 ‘문’이었다.
뭘 위한 ‘문’인지는 클리어한 지금도 알 수 없었지만, 던전의 수준이 올라가는 속도가 비정상적인 건 분명했다. ‘열쇠’라는 조건이 없더라도 X던전은 이전 생의 최대 난이도를 가진 화이트, 그 이상도 넘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최상위 플레이어들로만 드림팀을 꾸려도 클리어를 확신할 수 없을 정도다. 일단 널뛰기한 난이도 때문에 무장수준부터가 던전 난이도와 차이가 있었으니까.
계속 되는 변수의 향연에 류 현은 반쯤 체념하게 되었다. 아무리 호들갑 떨면서 예상하고, 준비해도 견적을 넘어서는 변수가 터져 나오는 데 어쩌겠는가? 멘탈이라도 잘 잡고 관망하는 수밖에.
류 현이 세아의 상태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호지슨 버넷을 보고 당황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었다. 거의 2미터에 달하는 신장을 가진 대머리 흑인을, 그것도 상위권이라고 할 만한 기세를 풍기는 플레이어가 불쑥 나타난 상황에서 횡설수설하는 걸 잠자코 듣고 있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덕이었다.
반쯤 혼이 나가서 횡설수설하는 덩치 큰 남자를 구경만 하고 있는 취미는 없었기에, 류 현은 호지슨의 말을 끊고 물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누구 입니까?”
“대통령 각하와 부통령각하, 그 보좌진들 그리고 우리 부대원들 정도 일겁니다. 지금쯤이면 국방부에도...”
“그 정도면 됐습니다. 일단 정보통제는 가능한 수준이라는 거군요?”
“예...뭐. 현재는 그렇습니다만.”
류 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뭘 알아보기도 전에 터질 줄은 몰랐는데. 아니, 아직은 실체가 없다고 하니...유예가 있는 건가? 칼리프 그 여자한테 유예에 대해서 들은 게 없으니...결국 직접 가봐야 하나.’
잠깐의 침묵이었지만 호지슨은 안절부절 못하며 류 현의 기색을 살폈다. 류 현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한 뼘 조금 안되게 더 큰 남자가 안절부절 못하는 광경은 퍽 인상적이었다. 류 현은 호지슨을 위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원정대를 다시 불러 모아야겠군요. 그동안 호지슨 씨는 한 숨 붙이시죠. 팀원들에게 설명하고 의향을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보통일은 아닌 것 같으니 저도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고요.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호지슨은 간절한 눈빛으로 류 현을 바라보다가 마지막 말에 수긍한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까, 뉴욕에 있던 X던전이 다시 터졌다고? 그거 우리가 닫았잖아. 클로징 되는 거 까지 보고 왔잖아? 완전히 닫히는 건 못 봤지만.”
“예, 그랬었죠. 미국에서 클로징 되는 순간을 찍어서 보내주기까지 했으니까요. 근데 좀 닦으시죠.”
류 현은 반쯤 헤벌린 승하의 입술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맥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다 못한 화련이 티슈를 뽑아서 닦아주었다.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백혜라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어, 그런 것도 보내줬었어?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삼 주전에 저희 집에 오셨을 때 말했었습니다. 뭐 그 때도 보드카 병에 더 집중하고 계셨으니 기억 못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죠.”
류 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승하는 뒤통수에 뜨거운 시선이 닿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백혜라 쪽으로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계속해서 물었다.
“닫혔는데 다시 터졌다고?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거 가능한 일이긴 해? 모르고 있던 새 던전이 터진 거 아냐?”
“저도 처음에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
“뉴욕 원정 때 미국 측 인원 인솔자인 호지슨 버넷 씨가 그러더군요. X던전 안에서 본 환영성이랑 똑같은 게 비춰지고 있었다고요. 혼자 잘못 본 게 아닐까하고 원정에 참여한 소대원들 전부 불러서 재차 확인했답니다.”
“그래? 그럼 찍어서 왔겠네?”
“아뇨. 찍지 못 했다고 합니다.”
“응?”
“어, 마스터를 탓하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영상 좀 찍어오는 게 무슨 큰일...”
류 현은 괜스레 한 번 턱을 긁적거렸다. 자신도 이전 생에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 무턱대고 믿고 말하기가 입안이 영 꺼끌했다.
“성이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뉴욕의 X던전에서 본 것처럼 환영성이 그 상태 그대로 나타났고,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는군요. 플레이어들에게만 보인다고 합니다. 그것도 나름대로의 커트라인이 있는지, 모든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더군요. 마찬가지로 촬영을 해도 환영성이 보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류 현은 그리 말하며 호지슨에게 전달 받은 테블릿 피시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영상하나를 재생시켰다. 영상은 어느 도시의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어딘지는 몰라도 한국이 아닌 걸로 보이는 영상 속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류 현이 설명이 없었다면 그들은 아마 다큐멘터리 영상을 편집해서 들고 왔다고 여겼을 것이다. 영상 후반부에 갑자기 대머리 흑인 사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더니,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지점이라고 말했다. 사내가 가리키는 하늘은 변함없이 맑았다.
“이렇게 나오는 게 없습니다. 그 분들이 단체로 환각증세를 보이는 게 아니라면,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하죠. 그것도 X던전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승하는 태블릿 피시를 받아들더니 코를 박을 기세로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화련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뒤에 앉아있던 희란에게 몸을 기대었다. 백혜라는 승하가 들여다보고 있는 태블릿 피시를 한 번 흘끔보고는 말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나요? 던전 내에서 보이는 건축물 구조가 비슷한 건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요? 던전 안에 있는 건물이 튀어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긴 하지만...”
“그게 말입니다...”
류 현은 난처하다는 듯이 애꿎은 뒷머리만 들쑤셨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류 현은 자신이 말주변이 별로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X던전은 여타 던전과 많이 달랐습니다.”
“네? 그거야 최상위 던전이니까...밑의 것과는 다르겠죠.”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야. 혜라야...솔직히 난 그걸 던전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뭐 그렇다고 치자고. 그렇게 보더라도 그 던전은 명백하게 이상했어.”
“던전 안이 엉망이었다는 건 말해줘서 알고 있어요.”
“그..뭐라고 해야 할지. 그것과 별개로 뉴욕의 X던전은 좀 많이 달랐습니다. 파주의 X던전도 이상했지만, 뉴욕 쪽은 그 이상이었죠. 입장할 때부터 느껴지는 압박감 하며...”
“맞아, 아프리카도 별로 정상은 아니었지만 뉴욕 수준은 아니었어. 이걸 말로 표현하려고 해봐야 헛소리 밖에 안 되고...난 1차 원정대가 그렇게 살아 돌아온 것도 신기해.”
뜬구름 잡는 듯한 소리에 혜라는 고개를 기울였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이들 모두 어색하게 웃어넘길 뿐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마법진을 읽어냈다는 화련마저 그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때 마법진 구조를 파악한 건 내 머리로 한 게 아니거든요. 그냥 파박! 하고 느낌이 왔다고 해야 하나? 그 왜 수식 막히다가 술술 풀리는 기분 있잖아요? 그걸 누가 답을 알려준 그런 느낌?”
더 아리송해지는 설명에 혜라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원정대에 참가했던 인원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걸, 말로 풀어보라고 해봐야 시간낭비만 될 거 같았다.
“언니는 갈 생각이에요?”
“응? 어, 뭐 가지 말아야할 이유도 없어 보이고. 쉬기도 충분히 쉬었고.”
혜라는 그게 변수 확인도 안 되는 사지로 걸어가는 이유가 되냐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다른 원정대원들의 눈도 있었기에 말을 삼켰다. 혜라의 속이 타들어가든 말든 승하는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가서 봐야 알겠지만, 당장 뭐가 터질 거 같진 않은데 적당히 쉬면서 기다리다 보면 뭐가 튀어나와도 나오겠지.”
“...던전 안에 그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하긴 그 쪽은 칼만 맞는 거 쥐여 주면 골렘도 신나게 썰어버릴 거 같으니까 별 상관없겠네요.”
“에이, 합류 늦게 한 걸로 아직도 삐쳤어? 아무 일도 안 터졌으니까 좋게좋게 넘어가자고.”“하, 내가 말을 말아야지. 마스터는 어쩌실 거에요?”
네 여자의 시선이 류 현에게로 쏠렸다. 류 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말했다.
“여기서 머리 굴려봐야 두통 유발하는 꼴 밖에 안 되니 일단 미국에 가보긴 해야 할 거 같군요.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주기로 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그냥 두기도 찝찝하잖습니까. 파주 쪽에 이상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딱히 이상이 있지도 않고요.”
류 현은 호지슨에게 사정을 듣자마자 문민호에게 연락해서 파주로 플레이어들을 보냈다. 그 결과 파주 하늘에 전투기 구름이 떠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호지슨이 말했던 커트라인 안쪽, 블루 퍼플 이상의 던전을 출입하는 실력자들마저 아무런 이상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아프리카는 단순히 늦는 건지, 아니면 아무런 관리를 안 해서 모르는 건지 모르겠군. 아, 카이로 X던전 마법진 위치를 생각하면 뉴욕이랑 다른 형태라서 못 알아채고 있는 걸 수도 있겠네. 어쨌거나 칼리프 그 여자말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 같고, 그 여자 말대로 라면 아프리카 쪽도 분명히 뭔가 터질 거야. 이미 터졌거나.’
화련의 억지를 들어주지 않았다면 찾아내고 파괴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을, 땅 속에 가라앉아 있던 마법진을 떠올린 그는 그 추측을 기억의 한 구석에 밀어 넣어 놨다. 아프리카에 가는 건 썩 내키진 않지만, 이 정도는 생각해놓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나을 것이다.
“워커홀릭이라니까. 진짜.”
화련이 혀를 내두르며 내뱉은 말에 류 현은 쓰게 웃었다. 그라고 좋아서 이렇게 일을 찾아다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푸념을 늘어놓을 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나까지 워커홀릭 신세네. 아, 이번에는 좀 제대로 백조짓하나 했는데.”
“일단 조사차 가는 거니까. 굳이 따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지금 장난해요? 떼놓고 가면 서해란 씨한테 전용기 대절해서라도 따라갈 줄 알아요. 그리고 대절비는 마스터 이름으로 달아놓을 거에요.”
류 현은 양 손을 들어 보이며 졌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바가지 안 쓰려면 모시고 가야겠군요. 그럼 호지슨 씨께 연락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부통령이라는 분 이랑도 바로 통화해야 할 거 같으니, 네 시간 후에 여기로 다시 모이도록 하죠. 아, 마침 웨인 씨가 전화도 거셨네요. 그럼 네 시간 후에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