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0화 〉탐식마(貪食魔) (150/429)



〈 150화 〉탐식마(貪食魔)

류 현이 이전 생과 현생에서 구르면서 얻은 교훈은 아무리 준비해도 마음먹은 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류 현은 회귀 이후 계속해서 이전에는 없었던 변수와 마주 해야만 했다. 긍정적인 쪽이었지만 각성과 동시에 어느 정도 돌아온 마력도 변수였고, 찾아 나서기도 전에 나타난 오희란의 합류도 변수였다. 그는 ‘링커’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거의 없으니, 너무 일찍 만나서 성장이 저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예정에도 없었던 검성이라는 괴물과의 만남은 채  년이 안 돼서, ‘광대들’이라는 위협으로 돌아왔다. ‘광대들’이 그에게 치명적인 수준의 위협이 될 수는 없었지만, 변수는 변수였다.

가장 결정적인 건 X던전이라는 존재였다. 그것과 엮이면서 자칭 [용사] 칼리프 드 오르시아와도 만났다. 정말 실존하는 존재인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힐 정도지만.

X던전 발견 당시에는 이전 생보다 빨리 나타난 블랙던전이라고 생각했지만, 류 현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파주, 뉴욕, 카이로에 등장했던 X던전은 칼리프 드 오르시아의 말대로 기존의 던전이 아닌 ‘문’이었다.

뭘 위한 ‘문’인지는 클리어한 지금도 알 수 없었지만, 던전의 수준이 올라가는 속도가 비정상적인  분명했다. ‘열쇠’라는 조건이 없더라도 X던전은 이전 생의 최대 난이도를 가진 화이트, 그 이상도 넘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최상위 플레이어들로만 드림팀을 꾸려도 클리어를 확신할  없을 정도다. 일단 널뛰기한 난이도 때문에 무장수준부터가 던전 난이도와 차이가 있었으니까.

계속 되는 변수의 향연에 류 현은 반쯤 체념하게 되었다. 아무리 호들갑 떨면서 예상하고, 준비해도 견적을 넘어서는 변수가 터져 나오는 데 어쩌겠는가? 멘탈이라도 잘 잡고 관망하는 수밖에.


류 현이 세아의 상태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호지슨 버넷을 보고 당황하지 않은 건  때문이었다. 거의 2미터에 달하는 신장을 가진 대머리 흑인을, 그것도 상위권이라고 할 만한 기세를 풍기는 플레이어가 불쑥 나타난 상황에서 횡설수설하는  잠자코 듣고 있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덕이었다.

반쯤 혼이 나가서 횡설수설하는 덩치 큰 남자를 구경만 하고 있는 취미는 없었기에,  현은 호지슨의 말을 끊고 물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누구 입니까?”
“대통령 각하와 부통령각하, 그 보좌진들 그리고 우리 부대원들 정도 일겁니다. 지금쯤이면 국방부에도...”
“그 정도면 됐습니다. 일단 정보통제는 가능한 수준이라는 거군요?”
“예...뭐. 현재는 그렇습니다만.”


류 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뭘 알아보기도 전에 터질 줄은 몰랐는데. 아니, 아직은 실체가 없다고 하니...유예가 있는 건가? 칼리프 그 여자한테 유예에 대해서 들은 게 없으니...결국 직접 가봐야 하나.’


잠깐의 침묵이었지만 호지슨은 안절부절 못하며  현의 기색을 살폈다. 류 현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뼘 조금 안되게 더  남자가 안절부절 못하는 광경은 퍽 인상적이었다. 류 현은 호지슨을 위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원정대를 다시 불러 모아야겠군요. 그동안 호지슨 씨는 한  붙이시죠. 팀원들에게 설명하고 의향을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보통일은 아닌 것 같으니 저도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고요.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호지슨은 간절한 눈빛으로 류 현을 바라보다가 마지막 말에 수긍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까, 뉴욕에 있던 X던전이 다시 터졌다고? 그거 우리가 닫았잖아. 클로징 되는 거 까지 보고 왔잖아? 완전히 닫히는  못 봤지만.”
“예, 그랬었죠. 미국에서 클로징 되는 순간을 찍어서 보내주기까지 했으니까요. 근데  닦으시죠.”


류 현은 반쯤 헤벌린 승하의 입술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맥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다 못한 화련이 티슈를 뽑아서 닦아주었다.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백혜라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어, 그런 것도 보내줬었어?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삼 주전에 저희 집에 오셨을 때 말했었습니다. 뭐 그 때도 보드카 병에 더 집중하고 계셨으니 기억 못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죠.”

 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승하는 뒤통수에 뜨거운 시선이 닿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백혜라 쪽으로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계속해서 물었다.


“닫혔는데 다시 터졌다고?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거 가능한 일이긴 해? 모르고 있던 새 던전이 터진 거 아냐?”
“저도 처음에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
“뉴욕 원정  미국 측 인원 인솔자인 호지슨 버넷 씨가 그러더군요. X던전 안에서 본 환영성이랑 똑같은  비춰지고 있었다고요. 혼자 잘못 본  아닐까하고 원정에 참여한 소대원들 전부 불러서 재차 확인했답니다.”
“그래? 그럼 찍어서 왔겠네?”
“아뇨. 찍지 못 했다고 합니다.”
“응?”
“어, 마스터를 탓하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영상  찍어오는 게 무슨 큰일...”

류 현은 괜스레 한 번 턱을 긁적거렸다. 자신도 이전 생에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라, 무턱대고 믿고 말하기가 입안이 영 꺼끌했다.


“성이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뉴욕의 X던전에서  것처럼 환영성이 그 상태 그대로 나타났고,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는군요. 플레이어들에게만 보인다고 합니다. 그것도 나름대로의 커트라인이 있는지, 모든 플레이어가  수 있는 것도 아니라더군요. 마찬가지로 촬영을 해도 환영성이 보이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현은 그리 말하며 호지슨에게 전달 받은 테블릿 피시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영상하나를 재생시켰다. 영상은 어느 도시의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어딘지는 몰라도 한국이 아닌 걸로 보이는 영상 속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현이 설명이 없었다면 그들은 아마 다큐멘터리 영상을 편집해서 들고 왔다고 여겼을 것이다. 영상 후반부에 갑자기 대머리 흑인 사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더니,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점이라고 말했다. 사내가 가리키는 하늘은 변함없이 맑았다.


“이렇게 나오는 게 없습니다. 그 분들이 단체로 환각증세를 보이는  아니라면, 문제가 생긴  분명하죠. 그것도 X던전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승하는 태블릿 피시를 받아들더니 코를 박을 기세로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화련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뒤에 앉아있던 희란에게 몸을 기대었다. 백혜라는 승하가 들여다보고 있는 태블릿 피시를 한 번 흘끔보고는 말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나요? 던전 내에서 보이는 건축물 구조가 비슷한 건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요? 던전 안에 있는 건물이 튀어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긴 하지만...”
“그게 말입니다...”

류 현은 난처하다는 듯이 애꿎은 뒷머리만 들쑤셨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류 현은 자신이 말주변이 별로라는 걸 다시  번 실감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X던전은 여타 던전과 많이 달랐습니다.”
“네? 그거야 최상위 던전이니까...밑의 것과는 다르겠죠.”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야. 혜라야...솔직히  그걸 던전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뭐 그렇다고 치자고. 그렇게 보더라도 그 던전은 명백하게 이상했어.”
“던전 안이 엉망이었다는 건 말해줘서 알고 있어요.”
“그..뭐라고 해야 할지. 그것과 별개로 뉴욕의 X던전은 좀 많이 달랐습니다. 파주의 X던전도 이상했지만, 뉴욕 쪽은 그 이상이었죠. 입장할 때부터 느껴지는 압박감 하며...”
“맞아, 아프리카도 별로 정상은 아니었지만 뉴욕 수준은 아니었어. 이걸 말로 표현하려고 해봐야 헛소리 밖에 안 되고...난 1차 원정대가 그렇게 살아 돌아온 것도 신기해.”
뜬구름 잡는 듯한 소리에 혜라는 고개를 기울였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이들 모두 어색하게 웃어넘길 뿐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마법진을 읽어냈다는 화련마저 그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때 마법진 구조를 파악한 건  머리로  게 아니거든요. 그냥 파박! 하고 느낌이 왔다고 해야 하나? 그  수식 막히다가 술술 풀리는 기분 있잖아요? 그걸 누가 답을 알려준 그런 느낌?”


더 아리송해지는 설명에 혜라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원정대에 참가했던 인원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걸, 말로 풀어보라고 해봐야 시간낭비만 될 거 같았다.


“언니는  생각이에요?”
“응? 어, 뭐 가지 말아야할 이유도 없어 보이고. 쉬기도 충분히 쉬었고.”

혜라는 그게 변수 확인도 안 되는 사지로 걸어가는 이유가 되냐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다른 원정대원들의 눈도 있었기에 말을 삼켰다. 혜라의 속이 타들어가든 말든 승하는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가서 봐야 알겠지만, 당장 뭐가 터질 거 같진 않은데 적당히 쉬면서 기다리다 보면 뭐가 튀어나와도 나오겠지.”
“...던전 안에 그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하긴 그 쪽은 칼만 맞는 거 쥐여 주면 골렘도 신나게 썰어버릴  같으니까  상관없겠네요.”
“에이, 합류 늦게  걸로 아직도 삐쳤어? 아무 일도 안 터졌으니까 좋게좋게 넘어가자고.”“하, 내가 말을 말아야지. 마스터는 어쩌실 거에요?”

네 여자의 시선이 류 현에게로 쏠렸다. 류 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말했다.

“여기서 머리 굴려봐야 두통 유발하는 꼴 밖에 안 되니 일단 미국에 가보긴 해야 할 거 같군요.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주기로 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그냥 두기도 찝찝하잖습니까. 파주 쪽에 이상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딱히 이상이 있지도 않고요.”

류 현은 호지슨에게 사정을 듣자마자 문민호에게 연락해서 파주로 플레이어들을 보냈다.  결과 파주 하늘에 전투기 구름이 떠있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호지슨이 말했던 커트라인 안쪽, 블루 퍼플 이상의 던전을 출입하는 실력자들마저 아무런 이상을 감지해내지 못했다.


‘아프리카는 단순히 늦는 건지, 아니면 아무런 관리를  해서 모르는 건지 모르겠군. 아, 카이로 X던전 마법진 위치를 생각하면 뉴욕이랑 다른 형태라서 못 알아채고 있는 걸 수도 있겠네. 어쨌거나 칼리프 그 여자말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 같고, 그 여자 말대로 라면 아프리카 쪽도 분명히 뭔가 터질 거야. 이미 터졌거나.’

화련의 억지를 들어주지 않았다면 찾아내고 파괴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을,  속에 가라앉아 있던 마법진을 떠올린 그는  추측을 기억의  구석에 밀어 넣어 놨다. 아프리카에 가는 건 썩 내키진 않지만, 이 정도는 생각해놓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나을 것이다.

“워커홀릭이라니까. 진짜.”

화련이 혀를 내두르며 내뱉은 말에 류 현은 쓰게 웃었다. 그라고 좋아서 이렇게 일을 찾아다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푸념을 늘어놓을 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나까지 워커홀릭 신세네. 아, 이번에는 좀 제대로 백조짓하나 했는데.”
“일단 조사차 가는 거니까. 굳이 따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지금 장난해요? 떼놓고 가면 서해란 씨한테 전용기 대절해서라도 따라갈 줄 알아요. 그리고 대절비는 마스터 이름으로 달아놓을 거에요.”


 현은  손을 들어 보이며 졌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바가지 안 쓰려면 모시고 가야겠군요. 그럼 호지슨 씨께 연락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부통령이라는 분 이랑도 바로 통화해야 할 거 같으니, 네 시간 후에 여기로 다시 모이도록 하죠. 아, 마침 웨인 씨가 전화도 거셨네요. 그럼  시간 후에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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