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탐식마(貪食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것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그 새로운 것이 위해를 끼칠 능력이 있고, 그 상태로 자신의 옆집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그 거부감은 이성으로 해결 불가능한 수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플레이어라는 존재가 큰 유혈사태 없이 받아들여진 건, 우연들이 겹쳐서 이루어진 기적이라고 할 만 했다.
정부가 꼭꼭 감추고 있던 플레이어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사람들에게 플레이어를 동정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각국 정부에서 플레이어들을 감금, 인체실험, 고문, 협박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플레이어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전에 비인간적인 작태를 보인 정부에 분노했다.
그 직후 괴수들의 분탕질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플레이어가 좋든 싫든 그들의 활약에 기대야만 했다.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포격에 날아가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뒤에 출범한 플레이어 협회는 각국 정부를 견제하는 한 편, 플레이어의 이미지 개선에 힘썼다. 협회의 견제를 받고 있던 각국 정부도 이 흐름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어에 대한 사회적 거부반응이 일어나면 가장 곤란해지는 건 그들이었으니까.
그 외에도 협회와 정부의 이런저런 노력과 검성의 등장 같은 우연들이 겹친 끝에, 플레이어들은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조금 불안한 시선을 받지만, 어엿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건 또 아니었다. 협회가 일괄적으로 배포하는 팔찌 이외에도 정부에서도 티나지 않게 수작질을 부렸다. 언론이라는 감시자를 붙인 것이다. 노골적이지 않게, 은근하게. 언론을 대놓고 밀어주진 않지만, 플레이어들이 이 문제로 항의할 경우 그들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결정을 유보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방법은 정부 측에서 예상한 것보다 더 극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검성이라는 어린 영웅의 등장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는 플레이어가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고,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의식하게 된 것이다. 완벽한 억제책은 아니었지만, 플레이어 이미지 개선 정책이 의미가 있을 정도는 되었다.
류 현이 마주하고 있는 이 플래시 세례는 그 결과물이었다. 정부에서 밀어주지 않았더라도, 언론에서 검성의 명맥을 이어가는 이 슈퍼 루키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리가 없지만, 이렇게 민첩하게 반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원정을 마친 원정대가 당일에 출국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예거즈’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칼리프 클랜 측 인물을 원정대에 포함시키셨는데요. 칼리프 클랜과 사전 거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길리언 대통령이 만찬회에 초청했는데 곧바로 아프리카로 출국하신 이유가 뭡니까!”
‘...이놈들 피하려고 좀 무리해서 일찍 왔더니. 정부에서 흘린 건가?’
아프리카의 X던전을 공략하고 나온 게 어제 일이다. 이토록 이른 귀국을 결정한 건, 귀찮아지기 전에 어딘가 틀어박혀서 푹 쉬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아무리 그의 아프리카행이 갑작스러웠고, X던전 입장은 말도 안 되는 페이스였다지만 사나흘 쉬고 귀국하면 기자들이 붙들고 늘어질게 뻔했다. 서해란이 커버해줄 만한 범위를 넘어섰으니까.
‘젠장, 이렇게 안 해도 이 나라에 깽판칠 일 없다고.’
류 현은 이전 생에 유명세를 탄 시기가 늦은 탓에, 유명세에 비해 매스컴에 시달리는 정도가 덜한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기자들이 반가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 자체가 별로였다. 시끄럽게 빽빽 목청 높이는 인간들이면 아주 질색이었고.
‘서해란이라도 불러야하나? 아니, 여기로 부르면 더 난리 나려나?’
류 현은 체념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 때였다.
“어?”
“이, 이게 왜 이래?”
“억?”
카메라를 들이밀고 아우성을 치던 기자 무리가 갑자기 우르르 무너졌다. 류 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제 손에 일렁거리고 있는 검은 안개를 봤다.
“...어?”
“야, 너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일반인한테...”
승하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내왔지만, 반박할 정신도 없었다. 류 현은 급히 열려있던 뚜껑을 닫아걸었다. 평소보다 옅기는 해도 검은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미친...요 근래에 너무 막 썼나?’
저도 모르게 능력을 발동한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 몇 번 있긴 했었으니까. 3차 ‘대소환’이 터지고, 연이은 네임드 몹의 등장으로 정말 눈 한번 붙일 시간이 없던 그 때 그랬었다. 깨어있는 시간 내내 능력을 발동시키고, 서있는 것보다 괴수를 물어뜯는 시간이 더 길었었던 때에 말이다.
‘정말로 쉬긴 해야겠어...정말로 탈나겠군.’
류 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기자무리를 훑어봤다. 다들 순간적으로 다리 힘이 풀린 것뿐인지,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수준이라서, 일반인에게도 큰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
류 현은 조용히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죠.”
***
“이보게, 문민호군. 우리가 어려운 요구를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 친구를 ‘터주’에 들이라는 얘기도 아닌데. 그저, 자리만 마련해달라는 걸세. 서로서로 좋은 이야기를 하자는 건데, 곤란할 게 뭐가 있는가?”
“죄송합니다. 의원님, 지금은 곤란합니다. 그 친구 이번 달 들어서 겨우 휴식기를 갖기 시작해서, 지금 건드리면 연결자체가 끊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 벌써 3월 둘째 주일세. 내일 모레면 셋째 주고. 이정도면 충분히 쉰 것 아닌가?”
문민호는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게 애쓰면서 대꾸했다.
“그 친구가 들어간 던전은 퍼플급, 그 이상입니다. 검성과 웨펀마스터가 솔로 플레이를 시도해서 성공시킨 후에 가졌던 휴식기를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 X던전인가 뭔가에 혼자 들어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칼리프 클랜의 랭커와 웨펀마스터도 동행했다고 들었는데?”
문민호는 제 입가가 굳어지는 걸 느끼면서 속을 다스렸다. ‘목록 확인할 시간에 휴식기에 대해서도 찾아보지 그랬냐. 이 머저리야!’
“아무런 정보도 없는 최상위 던전에 들어가는 건 그 이상의 부담을 진다는 소리죠. 더군다나, 그 친구는 플레이어가 된 이후로 한 달 이상 활동을 쉰 적이 없습니다. 꾸준히 던전을 들락거려왔었습니다. 거기에 X던전까지 연속으로 공략했으니, 이제부터 그 친구가 한 반년 간 아무런 활동 없이 틀어박혀 있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설마 반년씩이나 쉬려고?”
“이제까지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무슨 행동을 하든 간에 이상할 게 없습니다. 갑자기 은퇴를 선언 할지도 모를 일이지요.”
문민호는 그리 말하면서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류 현이라는 남자는 이 정도로 멈출만한 자가 아니라고 봤다. ‘주변에서 억지로 밀어 넣어야 들어갈까 말까한 사지에 자청해서 들어간 자다. 목적하는 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여기가 종착지는 아닌 건 확실해.’
하지만 입 밖으로 나가는 소리는 정반대였다.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은퇴할 여건은 충분히 마련되어있지 않습니까? 미국 측에서 지불할 공식적인 사례금만 해도 빌딩을 세울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으음...”
의원님이라고 불린 중년의 대머리 남자는 몸을 빼며 침음성을 내었다. 자신의 말을 외면하는 듯한 그 행동에 문민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중간에서 수작질 부릴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돈에 미쳤다지만...’
뭐라고 에둘러서 물어야할까 고민하던 문민호는 금세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미국이 이번 원정에 아무런 역할도 안 했던 한국정부를 거쳐서 사례금을 전달할 만한 이유가 없기도 했고,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수작질을 부릴 리가 없다고 여겼다.
‘미국이 바보도 아니고, 수작질 못하게 전달하겠지. 어지간히 그 인간을 갖고 싶어서 몸이 달은 모양이던데.’
미국에서는 뉴욕의 X던전을 클로징에 성공한 일로 아직까지 시끌시끌했다. 거래를 성사시킨 부통령과 그를 정치권으로 데리고 온 대통령의 주가는 상한선을 치고 있고, 지벡 건터의 망명 이후 수차례 나왔던 최상위 플레이어의 필요성이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그 동양인 플레이어를 미국인으로 만들어야한다는 이야기까지 매스컴을 공공연하게 탈 정도다.
가장 먼저 X던전이 닫힌 한국이 환호를 보낼만한 대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대상을 찾지 못해서 어정쩡하게 열기가 식어버린 것과는 상반된 광경이었다. 검성에 대해서는 활발하게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자세한 정보가 없다시피 한 류 현에 대해서는 언론마저 이야깃거리가 없어서 곤란해 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귀국할 때, 공항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무리가 단체로 빈혈증세를 보였다는 썰이 가끔 회자되곤 했지만.
“의원님, 아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지금은 시기가 좋지가 않습니다. 그 친구는 이제야 정상적인 플레이어의 행동패턴으로 들어서려고 하고 있고, 지금 접촉을 시도하면 신경질적인 반응 이외에는 뭔가를 얻어내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태양그룹 측에서도 자제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태양그룹이라는 말에 대머리 남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문민호는 대머리 남자의 처가가 태양그룹과 경쟁관계에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찾아와서 닦달하는 이유도 뻔히 보였다.
“그, 그래도 휴식기가 끝나고 난 이후는 너무 늦지 않나. 분명히 여기저기서 그 친구한테 손을 뻗쳐올텐데...”
‘정말 사람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 작자야. 던전이 무슨 놀이동산인 줄 아나? 던전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플레이어한테 비즈니스 제의를 하겠다고? 진짜 미치겠군. 검성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나?’
“성질 급한 작자들은 아마 그가 휴식기를 끝내기 전에, 비즈니스니 뭐니 하면서 치근대다가 떨어져 나갈 겁니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졸부들이 다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 친구가 생각이 있다면 4선 의원분의 제의를 마냥 거절하진 않을 테니 걱정은 내려놓으시지요.”
문민호는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머리 남자를 안심시켰다.
‘문제는 아무도 그 인간 의향을 모른다는 거지...’
원치 않게 두 남자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 류 현은,
“자,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그래, 계속 그렇게...”
세아와 마주 보고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다 큰 남매가 취하기에는 퍽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류 현은 세아의 심호흡 박자에 집중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류 현은 세아의 심호흡 박자에 맞춰서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제 안의 마력을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탐욕의 안개가 움직이려고 했지만, 류 현은 단호하게 그것을 제지했다. 정말 쥐어짜내듯이 순수마력을 뽑아낸 류 현은 맞잡은 손을 통해서, 마력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거부반응이 보이면, 이제까지 밀어 넣은 거리를 합친 것만큼 물러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마력이 세아의 가슴께에 도달했을 때였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