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5화 〉탐식마(貪食魔) (145/429)



〈 145화 〉탐식마(貪食魔)

검성, 나승하를 가리키는 칭호는 무수히 많다. 그녀의 이름보다  자주 불리는 ‘검성’이라는 칭호부터가 그렇다.  외에도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고 볼만한 것부터, 떨떠름하게 슬쩍 외면할만한 성질을 가진 것까지. 그녀는 나승하라는 이름 세 글자보다 별칭이 더 널리 알려진 사람인 것이다.


이름이나 다름없어진 검성 이라는 칭호 다음으로 자주 불리는 이름은 솔로 플레이어.

그녀 이전에 던전에 홀로 도전하는 플레이어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경외와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퍼플 던전이라는 당시 최상위 던전을 혼자 도전해서 이겨낸 그녀를 말이다.


하지만 그건 승하가 바랐던 일은 아니었다. 솔로 플레이에 흥미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잡은 적은 없었다. 가족이나 다름없던 ‘예거즈’ 창립 멤버들이 연달아 사고사를 당하기 전에는 말이다.

그들의 죽음은 승하를 칩거를 결심하게 만들었고, 퍼플 던전 솔로 플레이는 그 사전 작업에 불과했다. 죽은 멤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검성이라는 존재감을 한반도에 제대로 새겨 넣고 ‘예거즈’를 확고부동의 1위 길드로 만들기 위해서, 그녀가 ‘예거즈’에 마지막으로 해준 일.


 이후에도 ‘예거즈’에서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서 반쯤 억지로 활동을 하긴 했지만, 그녀의  솔로 플레이는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던 건 분명했다. 나중에는 나름대로 재미를 붙이긴 했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 자체가 기꺼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등을 맡길만한 동료가 없어서 모든 걸 혼자 해결한다니, 그녀는 그런 비참한 상황을 상상한 적조차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창립 멤버들이 모두 죽고, 남은 ‘예거즈’ 동료들이 자신을 괴물 보듯이 하는 눈빛을 마주하기 전에는 말이다. 그녀를 동경해서 ‘예거즈’로 들어온 몇몇은 그녀를 따라잡겠다고 눈을 빛내며 노력했으나, 벌어지기만 하는 거리에 나가떨어졌다. 모두가 포기해버린 건 아니었지만, 거리감이 생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대놓고 그녀를 꺼리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나란히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과 마냥 우러러보는 대상을 대할 때의 미묘한 차이점은 승하의 눈에도 아주 잘 들어왔다. 거의 티를 내진 않았지만, 가족 같은 이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우울감에 젖어있던 승하에게 그건 마무리 타격이나 다름없었다.


백혜라 라는 여동생 같은 존재가 남아있긴 했지만, 당시 중학생도 안 되었던 아이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할 정도로 상식이 없진 않았다.

백혜라가 성장하면서 보이는 재능은 그녀를 기대하게 만들 정도였지만, 조바심을 내던 혜라가 던전 플레이 도중 중상을 입으면서 승하는 그 기대감을 접었다. 백혜라를 포기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처음 겪어보는 위기에 위축된 그녀에게 기대감을 표현하는 걸 그만두었다는 의미다.


그런 이력을 가지고 있는 승하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조금 장난기가 섞여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누구는 참 좋겠어. 곧 죽어도 따라가겠다고 하는 여자가 둘씩이나 되고.”
“......”

대꾸로  대신 노려보는 시선이 돌아오자, 승하는 기겁하는 채하며 뒤로 슬쩍 물러나다가 소파에 안착했다.  현은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아무리 그라도 계속 헛구역질 하는 제 팀원을 방까지 날라준 승하에게 뭐라고 하긴 힘들었다.

 보다는 다른 문제로 골치가 아픈 비중이 좀 더 컸지만 말이다.


“그렇게 부러우시면 한 며칠 데리고 여행이나 갔다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경비는 제가 부담하죠.”
“아프리카에서 관광? 서바이벌 훈련이 아니라? 그리고 걔들이 날 따라오긴 하겠어? 둘이 붙어있으면 이제 텔레포트도 쓸 수 있잖아. 와,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걔네 진짜 빨리 큰다.”

말만한 처녀들에게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현은 작게 끄덕거렸다. 그녀들의 성장력은 류 현의 예상조차 넘어섰다. 너무 성장 페이스가 좋아서 저도 모르게 무리를 시킬 정도로.


‘...꾸역꾸역 따라와 준다고 무리를 시키긴 했지.’

이전 생에는 없었거나, 한참 이른 상황을 대면하면서 페이스 배분에 신경 쓰기 어려웠다.  현의 자신의 페이스조차 관리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자신을 드러내는 순서를 말이다.

‘강림’은 3차 ‘대소환’ 이전에 내보일 예정이 없던 힘이었다. 그런 이질적인 힘을, 제어조차 못하는 힘을 수련할 필요성을 어필할 만한 일이 3차 ‘대소환’이 터지기 전에는 없을 거라고 봤었으니까.


‘그게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이야.’
“뒤쳐지고 싶지 않은 거야.”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을 대신 말해준 승하를  현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나 장난기라는 여유가 남아있던 승하가 어쩐지 좀 서글퍼 보였다.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류 현은 의문을 입에 담는 대신 다른 말을 뱉었다.


“좀 쳐진다고 해서 두고 갈 생각은 없는 데 말이죠.”


없는 정도가 아니라, 억지로라도 수준을 끌어올릴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의 성장플랜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예상외의 사건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는데, 시간만 지나면 강력한 패가 되어줄 이들을 왜 포기한단 말인가?


“당사자가 느끼기에는 그렇지 않은가 보지. 항상 그렇더라고. 혼자서 조바심 내고, 화내고, 무리하고, 그러다가 재수 없으면...”
“생생한 경험담도 좋지만 지금은 대책을 강구했으면 하는데요.”

화련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미안, 난 그 둘을 응원하는 쪽이라서.”
“아니 무슨 던전 한두 번 돌아본 초보도 아니고...미국 때는 그래도  의견에 동조해주셨잖습니까?”
“초보가 아니니까 이런다는  알잖아? 그리고 미국 때랑은 상황이 다르고. 나도 그 때는 걔네 둘이서 한 달 만에 헌팅레벨 100대 후반 찍을 줄 몰랐거든. 다 죽어가는 상태면서 저렇게 고집 부릴 줄도 몰랐고.”


이번에는 승하가 류 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가라앉은 듯한 눈을 계속 쳐다보고 있기 곤란했기에, 류 현은 슬쩍 외면하며 대꾸했다.


“전우니 어쩌니 하는 감정론은 던전 안에서  도움이  됩니다.  분의 의지는 저도 높이 사지만...이번에는 말 그대로 헛짓거리가 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경험 삼기도 힘들다고요.”
“뻥치시네, 제일 집착하고 있으면서. 파주의 X던전 데리고 들어간 시점에서 그 소리는 아무런 설득력도 없거든? 성장 포텐이 기대 되서 데리고 있는 거라고 하고 싶으면, 혜라랑 묶어서 퍼플 던전에 들여보냈어야지. 결과적으로 그 둘이 그 안에서 잘 해준 건 맞지만, 그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네가   맞는데, 솔직히 너 그 안에 그런 게 들어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잖아? 블랙 라미아만 해도  수정 없었으면 개고생이 아니라, 전력이탈자 꽤 나왔을 걸. 경험 타령도 뉴욕 던전 데리고 들어간 시점에서 쫑이야, 쫑.”
“...이럴 때는 알아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는  예의입니다.”

승하는 코만 흥하고 울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류 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인정하죠,  분의 활약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데리고 들어간 거 맞습니다. 뭐가 나오든 커버 할 수 있다는 자만심도 좀 있었고요.”
“그럼 아무 문제없네. 련이랑 희란이도 같은 심정일 텐데.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던전까지 너만 믿고 따라갔던 애들한테 뭐가 더 있겠어?”
“그러니까 문제라는 겁니다. 제가 그런 결정을 했을 때는  상태가 멀쩡했었습니다. 두 분의 상태도 멀쩡까지는 아니어도, 공략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고요.”

류 현은 숙소로 돌아올 때 담배를 살 것을 그랬나 하고 생각했다. 공업용 알코올을 들이부어도 아무런 이상도 생기지 않는 몸뚱이에, 니코틴이 조금 들어간다고 극적인 변화가 생길 것 같진 않지만 위안거리라도 되지 않겠나 싶었다.

“승하 씨도 아직 피로도 해소가 덜 되셨잖습니까. 지금 상태로 던전 들어가면 라가로드 급만 만나도 답이 안 나올 텐데...”
“해결 방법이 없진 않잖아. 그치?”
“......”

류 현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승하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를 쫓았지만, 류 현은 못 거듭  본채 했다. 5분여 가량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한 뒤 류 현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 번들을 하나 꺼내 와서 들이킨 뒤 말했다.

“그렇게 티 납니까?”
“티 난다기 보다도 그냥 감이야. 너, 석비에 대해서 접한 이후로 거의 신경질적으로 대비책 세워두고 움직였잖아? 막상 아프리카 왔는데 위스프가 우리 잡겠다고 설치고 있으면, 맘 편하게 혼자 던전 들어가진 못할 거 아냐? 미국이 유혹하든 말든, 차라리 거기에 두고 오는  낫지. 미국도 체면이 있으니 유혹 이상은 못할 거고.”
“아니, 무슨 그런 억측을...승하 씨만 붙어있어도 그 놈들이 근처에  수나 있습니까? 저라면 지쳤든 어쩌든 근처에도 안  거 같은데요. 서열 1,2,3위 다 집합 시킬 수 있는 거 아니라면 말이죠.”
“그래서, 있어 없어?”


류 현은 재차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쩌면 그녀들을 아프리카까지 데리고 온 것부터가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있습니다. 이걸 방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거 보라니까. 네 성격상 방법이 없으면 이렇게 데려올 일도 없었겠지. 련이가 뒤집어지든 말든.  저번에 잠수  때도 그랬잖아?”
“...이미 지나간 일은 후벼 파지 말죠.”
“그럼 잘 하지 그랬어. 련이가 고집 부리는  그 일 지분도 꽤 된다? 걔 아닌 척 하면서 이거저거 다 기억하고 있거든.”
“끙...”

류 현은 앓는 소리와 함께 두 캔 째를 땄다. 승하가 손을  내밀자  현은 불퉁한 표정으로 손 안의 것을 넘겨주고, 다른 캔을 꺼냈다.

“무리한 일정인 건 맞지. 맞는데, 걔네 입장에서는 쳐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법 하잖아? 자기들은 이제 헌팅레벨 퍼플 바로 아래 급으로 맞췄는데, 넌 톱을 노리고 있으니까. 아, 이미 톱이라고 생각하려나?”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가 그런 거에 관심 있는 없든, 걔네 입장에서는 소외감 느낄 법 하다는 거지. 서로 동료라고 생각하면 그게 당연한 일이고. 이런 감정을 느낄 정도가 아니면 누가  강행군에 따라와줬겠어? 또, X던전에 아예 데리고  갔으면 몰라.”
“두 분은 제 예상보다 훨씬  해주고 있습니다. 그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걔네가 그렇게 생각할  있으면 저랬겠어? 애초에 이성적으로 판단 내렸으면 팀에서 이탈했겠지. 안 그래?”

류 현은 말없이 텅 빈 맥주캔 안을 바라봤다.   캔 안은 할 말이 떨어진 그의 머릿속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진짜 뭘 하려고 아프리카로 데리고 온 거야?’ 류 현은 자문해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머리로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들이 고집을 부리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싸움으로 인한 피로감과 던전 안의 광경으로 촉발된 다급함이 겹친 결과, 이성이 작동하기도 전에 감성이 결정을 내렸다. 동료인데 일단 데리고 가야지.


‘멍청하긴, 이럴 거면 데리고 오질 말았어야지.’

“...악덕팀장은 물러가라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럴 리가, 그런 악덕팀장을 꿋꿋하게 따라올 정도로 의지가 굳건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한 쪽은 동기가 좀 불순해 보이긴 하지만.”
“...?”
“그런 게 있어. 어찌됐든 간에, 아예 안 된다고 못부터 박지 말고 좀 생각해봐. 아직 하루 정도  남았잖아? 뉴욕에 있던 X던전 꼴 생각해보면 급한 마음이 드는 건 이해가 가지만, 이건 조급증 낸다고 해결할 만한 것도 아니잖아. 나보고 지금 던전 들어가면 라가 로드도 감당 못한다고 했지만, 그건 너도 해당되는 이야기도 하잖아? 뭐 그래도 그 골렘이랑 붙어서 질 것 같지는 않다만.”


어떻게 되먹은 괴물인건지. 승하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연한 척 하긴 했지만, 그녀도 피로도를 어떻게   없는 건지 발걸음이 불안불안 했다.

“그거 팀원들 사지로 밀어 넣으라고 권하는 말로 들리는 데요.”
“뭐든지  아는 우리  현 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아, 맞다. 피로도 해결 할 수 있다는 거 정확히 어떤 거야?”


류 현은 볼을 긁적거리면서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마 겪고 나면 한 한 달은 김이나 검은 옷은 근처에도 두기 싫으실 겁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늦어도 저녁까지는 결정할 테니까. 마음에 준비나 해두시죠. 나중에 저 원망하지 마시고.”
“대체 뭐 길래 그래? 사람 궁금하게스리.”
“잘 설명할 자신도 없고, 설명 드려도 이해 못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  저녁 승하는, 완전히 뻗어버린 화련과 희란 몫까지 해서 3인분의 원망을 토해냈다. 승하는 하얗게 질린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너, 내가 얘들 편들었다고 지금 복수한 거지!”
“제가 무슨 애입니까. 두 분이나 방까지 부탁드립니다. 저도 영 피곤해서. 내일 아침에 뵙죠.”
“야,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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