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탐식마(貪食魔)
인류는 퍼플 던전을 공략한지 얼마 안 되어 던전을 정복했다며, 떠들어대며 들떴지만 실질적으로 알고 있는 건 매우 적었다. 그 중에서 플레이어들이 가장 실감하는 부분은 피로도다.
던전 플레이를 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나 육체적 고단함이 아니라, 던전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마력과 신체능력이 떨어지는 피로도.
피로도의 존재 덕에 무분별한 던전 도전을 방지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플레이어들의 성장이 저해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사람에 따라서 그린 던전을 하루 만에 들어갔다 나와도 일주일 이상 피로도가 해소되지 않았으니까. 평균 정도의 회복력을 가지고 있어도 던전 안에서 일주일 이상 체류할 경우, 한 달 가까이를 휴식기로 보내야만 했다.
화련이 거의 토할 것 같은 얼굴로 소파 위에 늘어져 있는 이유는 그 피로도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회복력이 뛰어난 편이라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파주의 X던전을 공략하고 40일이 조금 넘는 휴식기 동안 그녀는 제대로 쉬지도 않았으니까. 희란과 화련이 미친 듯이 던전을 들락거리는 걸 보조해준 미국 관료는 보고서를 올렸다가, 되려 의심 받을 정도였다.
그런 상태로 최상위 던전에 또 들어가서, 손가락만 빨고 나온 것도 아니니 이런 상태가 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토할 거 같아...”
“으으...”
널따란 소파를 점령하고 있는 화련과 희란은 노랗게 죽어가는 얼굴로 신음소리만 웅얼거릴 뿐이었다. 류 현은 그녀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길래, 거기서 쉬고 계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괜히 따라와서 무슨 생고생 입니까?”
“그럼 거기서...우욱...”
류 현의 핀잔 아닌 핀잔에, 화련이 발끈하며 상체를 일으켰지만 곧 다시 고개를 쳐 박게 되었다. 반대편 소파에 앉아있던 승하가 급하게 그녀를 들쳐 업고 화장실로 뛰었다. 화련은 한참이나 헛구역질을 웩웩 한 후에 거실로 돌아왔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라고 손이라도 흔들어줬어야 했다는 말이에요?”
화련이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동안 캔맥주를 두 캔이나 해치운 류 현은, 세 캔째를 따다 말고 한참 전에 끊긴 말을 이어서 하고 있는 화련을 돌아봤다. 대꾸하는 류 현의 얼굴에는 어찌 할 길이 없는 피로감이 엿보였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습니까. 이미 무리하셨으니, 더 무리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건 마스터도 마찬가지잖아요. 아, 이제 괜찮아요.”
화련은 부축해주고 있던 승하의 어깨에서 벗어나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희란은 그 사이에 이미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전 할 수 있는 거니까, 하는 겁니다. 지금 이 방안에서도 제가 제일 멀쩡하지 않습니까.”
화련은 덤덤한 류 현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웨인의 직함을 들이밀어서 거의 기습점령하다시피 한 숙소에는 멀쩡한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웨인은 진작 자기 방에서 자고 있을 것이고, 소파 위에서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희란은 말할 것도 없고, 방금 전에 화련을 들쳐 업고 화장실까지 뛴 승하도 어느 새 꾸벅꾸벅 졸고 있다. 가장 멀쩡하다고 주장하는 류 현마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상태.
그들이 한나절 전에 이루어낸 위업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지금 상태의 원정대의 실력에 신뢰를 보내긴 어려울 것이다. 플레이어는 기계가 아닐뿐더러, 던전 피로도라는 치명적인 패널티가 있으니까.
“저도 바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취미 같은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화련 씨는 지금 사흘 쉰다고 다 회복할 만한 상태도 아니지 않습니까. 솔직히 뉴욕의 X던전에 데리고 들어간 것도 무모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화련은 고개를 떨구고 침묵했다. 류 현은 몸을 돌려 맥주 캔을 따려다가, 침묵이 주는 불편함을 못 이긴 듯 완전히 돌아앉더니 말했다.
“제 억지에 계속 어울려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안전을 보장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톡 까놓고 말해서, 제 상태도 만전이라고 하긴 힘들어서, 그 골렘 같은 게 한 마리보다 더 많이 들어앉아있으면 그냥 고전하는 정도로는...”
“...그럼 더 도와줄 손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
마주 보는 화련의 눈빛은 피로감이 보일지언정, 더 없이 진지해보였다. 류 현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꺼려진다는 듯이 더듬더듬 말했다.
“그, 왜 있잖습니까. 제가...”
“...?”
“그, 시커멓게 변하는 기술을 쓸 거라서 말입니다.”
“시커멓게...? 그거 아까도 쓰지 않았어요?”
“그건 에너지 드레인의 응용이고요. 그 왜, 석비 보기 전에 보여드렸던 거 있잖습니까. 승하 씨랑 같이...”
“그건 또 무슨...아!”
미간을 찌푸린 채로 기억의 산을 뒤적거리던 화련은, 여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흉흉한 기세를 흘리던 류 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탄성을 터뜨렸다. 불과 세 달도 안 된 일인데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그것도 그렇게 화난 직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화련은 새삼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고 느꼈다.
“어, 근데 그거 그 때 미완성이라고 안 했어요? 실전에 써먹기 힘들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렇지요. 그동안 틈틈이 수련한다고 했는데, 아직까지는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수준에는 도달 못했거든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페이스 배분이나, 주변에 신경 써야할 요소가 있을 경우에는 쓸 수 없다는 겁니다. 마력이고 체력이고 엄청나게 잡아먹거든요. 완전히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니지만?”
류 현은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딴청 피우는 것으로 표했지만, 화련의 태도는 강경했다. 금방이라도 눈꺼풀의 무게에 져버릴 것 같은 상태의 그녀가 어떻게 이런 기력을 내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류 현은 결국 화련의 기세에 져주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내보일만한 상태가 아니라서요.”
“그렇지만 승하 씨랑은 같이 훈련하셨잖아요?”
“그 때는...제 나름대로 억누른 겁니다. 이번 X던전 원정 내내 그랬고요.”
“흠...그 내보일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에요?”
류 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숨길 것도 아니고...숨긴다고 해결되지도 않지만...’
자신이 제3자라면 하고 가정하고, 반응을 예상해보면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는 게 사실이다. 아무리 그라도 동료가 질색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아니니까. 그렇지 않아도 묘한 눈빛을 받는 횟수가 잦아졌는데, 반쪽짜리라도 ‘강림’을 내보이는 건 의심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될 터.
“음...여기서는 좀 그런데...그리고 지금 이 상태로는 좀 곤란합니다.”
“...?”
“저도 피곤하기도 하고, 그 상태로 보고 나면 아마 화련 씨가 내일 내내 식사를 못 하실 거 같거든요.”
“알았어요. 근데 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겁주는 거에요? 이러고 안 놀라면 마스터만 민망해 지실 텐데.”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을 건네는 화련에게 류 현은 씁쓸하게 웃는 것으로 답했다.
***
눈앞에는 시커먼 장벽이 세상 끝까지 이어질 것 같은 기세로 서있었다. 굳건한 장벽은 그냥 서있는 게 아니라, 벽 너머에 갇힌 기운을 조금씩 스며내고 있었다. 그 편린만으로도 도전자의 의지를 꺾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벽 위로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는 탁한 기운은 닿는 것만으로도 삼켜질 것 같은 배고픔이었다. 장벽마저 삼켜버리고 말 것 같은 어찌할 길 없는 배고픔이, 장벽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장벽을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한참 동안 대지에 붙이고 있던 발을 떼었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장벽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변변한 등반도구는커녕, 옷가지조차 없는 남자는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검은 기운을 향해서 걸었다. 그런 건 보지 못했다는 태도였다.
그그극! 남자의 무모한 행보의 한계로 보였던 장벽에 도달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뭘 하기도 전에 장벽이 밀려나며 그에게 길을 터준 것이다. 장벽이 틀어막고 있던 검은 기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닿는 것만으로도 강물을 마르게 하고, 대지를 황폐화 시킬 수 있는 형상화된 배고픔이 양옆으로 물러났다. 남자의 앞을 막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남자는 한참이나 뚜벅뚜벅 걸어서 장벽 안쪽 영역의 중심에 도달했다. 정중앙 지점에는 우물같이 생긴 구조물이 있었다. 남자는 우물을 보고 픽 헛웃음 짓고는 우물을 향해 걸었다.
남자 앞에 제 안쪽을 내보이게 된 우물은, 우물이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것은 우물보다는 원형의 관처럼 보였다. 그 관 안에는 남자의 머리통만한 검은 구체가 놓여 있었다. 검은 구체에서는 검은 기운이, 배고픔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그 구체를 들여다보다가 뜬금없이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체념의 기색이 엿보이는 한숨을 내쉰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구체를 덥썩 움켜쥐었다.
후왁! 구체에서 지금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주변에 깔린 기운들이 비교적 회색에 가까웠다면, 지금 것은 검다는 것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어 보였다.
주변의 ‘배고픔’을 갉아먹을 정도로 강맹한 검은 기운은, 남자를 통째로 삼키려는 것처럼 둘러쌌다.
남자, 류 현은 입가를 비틀며 쓰게 웃었다.
***
“콜록, 콜록!”
“으웁...!”
류 현은 곧 바닥에 엎어질 것처럼 바닥을 짚고 있는 두 여자를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을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여기까진 예상한 대로네.’
류 현은 시선을 올려 다른 두 사람을 쫓았다. 보지 않아도 대강 짐작은 가능했지만,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웨인은 믿기지 않는 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류 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조금 더 다가가면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여기까진 자신의 예상대로라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류 현은, 승하를 찾아내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저런 눈을 하고 있는 걸 언제 한 번 봤었는데...언제더라?’
‘아, 처음 ‘강림’을 보여줬을 때...미친, 저 여자 지금...’
기억을 더듬는 데 성공한 류 현은 기겁했다. 승하가 저런 눈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번 생에서 ‘강림’을 처음으로 시험발동 해봤다가, 집에 못 들어간 그 날. 기운 빼기 겸 훈련으로 가볍게 손을 섞어봤을 때에 그녀는 저런 눈을 했었다.
‘아니 이런 걸 보고 의욕을 불태운다고? 진짜 어디 이상 있는 거 아냐?’
류 현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강림’은 힘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인 이상, 꺼릴 수밖에 없는 힘이었다. 그 전 단계인 ‘에너지 드레인’부터가 그런 성격을 가진 힘이니까. 실제로 그 대단한 네임드 몹들도 류 현이 ‘강림’을 발동하고 들러붙으면 정말 죽을힘을 다해서 그를 떼어내려고 애썼다. 하나같이 애쓰는 것에 그쳤지만.
류 현이 아프리카에 도착한지 이틀째 되는 오늘, ‘강림’ 시연회를 보인 건 팀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현존하는 던전 중 최상위 던전에서 나온 지 만 사흘이 되기 전에, 또 같은 급의 던전에 들어가겠다는 미친 짓을 말리지 못하게 설득하기 위한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언제까지 숨길 수 없다는 생각도 있긴 했지만, 뉴욕의 X던전에서 그 환영성을 본 이후 류 현의 머릿속은 일단 저걸 어떻게든 멈추고 봐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른 건 모두 나중의 일이다. 자신조차 던전 피로도가 꽤 쌓여있다는 사실은 고려사항 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다급했기에, 이 패를 꺼내든 것이다.
그랬을텐데...
‘진짜 돌겠네. 설마 따라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
류 현은 불길한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입을 떼었다.
“완전히 발동시키고 나면 저도 멈춰 세우기가 쉽진 않습니다. 괴수를 잡고 나서야 겨우겨우 멈출 수 있을 정도죠. 주변을 의식해서 움직일 여유 따윈 없다는 소리입니다. 거기에 다른 분들은 피로도 문제도 있고 하니 저 혼자...”
류 현은 그리 말하며 승하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녀도 사람이라면 위축되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대답은 그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갈...거 에요. 마스터가 안 데려가면 난입이라도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
언제 헛구역질을 멈춘 것인지 비틀비틀 일어선 화련은 말을 채 다 내뱉기도 전에 앞으로 넘어졌다. 그녀가 지면과 키스하기 전에 받아낸 승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물었다.
“그렇다는 데. 얘 보호자 안 필요해?”
류 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