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탐식마(貪食魔)
버적버적하고 발아래에서 유적의 파편들이 부스러져 나갔다. 류 현은 거의 남은 게 없는 유적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반파된 열주의 행렬이 그의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파괴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냥 기둥만 세워져있는 건지 아니면 지붕이 있었는데 날아간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오른 손에서 비롯된 빛을 사슬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서. 희란과의 ‘링크’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류 현의 발걸음은 꽤 다급했다.
‘느낌이 별로야. 너무 조용해.’
미간부터 꼬리 끝까지 반으로 갈라진 칼날늑대의 사체를 훌쩍 뛰어넘은 류 현은 그대로 기세를 죽이지 않고 박차를 가했다. 지나온 길도 그랬지만, 몸 전체가 그을리거나 단칼에 끝장난 괴수의 사체가 꽤 있었다. 희란이 차고 있는 청뢰와 웨인의 솜씨인 게 분명했다. 퍼플급 괴수인 칼날늑대 숫자만 따져도 이미 블랙 던전 수준에 달할 정도.
파주에서 겪을 대로 겪어서, 놀랄 것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보스몹으로 보이는 괴물 두 마리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존 던전에 대한 상식을 기반으로 판단할 때 멀쩡한 게 없었으니까!
퍼플 던전부터는 보스몹이 출구가 있는 보스룸에 꼭 갇혀있지는 않지만, 파주의 예를 생각해보면 명백히 이상했다. 애초에 저런 게 밖에 튀어나와 있었다면 1차 원정대는 아무도 살아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골렘의 육탄돌격을 피해서 유적으로 뛰어들면, 화이트 팽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칼날늑대들이 피폐한 도망자들을 사냥할 테니까. 골렘의 반응으로 봐선 성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골렘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 구슬만 봐도 그 골렘이 문지기인게 맞는 거 같은데...젠장, 그 놈이 그 꼴이면 안 쪽은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칼리프 그 여자 이런 얘기는 안 했잖아!’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으며 류 현은 디딤발을 한 번 깊게 밟았다가, 다시금 가속했다. 뒤쪽에서 원성어린 소리들이 튀어나왔지만 그런 걸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설마 이 상태에서 ‘문’이란 게 열리진 않겠지?’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내며 류 현과 두 여자는 반파된 성 안으로 진입했다.
***
“...냄새가 이상해.”
“응? 땀 냄새 많이나? 아님 용혈냄새 때문인가?”
화련은 샐쭉한 얼굴로 위쪽을 향해서 눈을 흘겼다. 반쯤 탈진한 자신을 안고 달리고 있는 승하는 얼굴 곳곳에 말라붙은 핏자국 때문에 좀 험악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천연덕스러움은 여전했다.
“그 쪽 체취 얘기가 아니고, 마력이요. 마력.”
“음? 뭐가 많이 달라?”
“뭐라고 해야 하지...몇 년간 청소 안 한 다락방 먼지 냄새?”
“...뭔가 알 거 같으면서도 아리송한 비유네. 자세히 좀 말 해봐.”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고 감인데, 저번 파주 던전보다 여기가 공기 중에 마력이 상대적으로 적어요. 떠돌던 마력이 다 긁혀가니까 가라앉아 있던 먼지까지 일어난 그런...”
화련은 표현할 말을 찾기 힘든지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마력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가 확인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적당한 단어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마력에 대해서 누구는 촉감으로, 또 누구는 맛이 어떻다고 표현하기도 하니, 본인이 아닌 이상 납득할만한 표현을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응? 딱히 마력의 흐름이 이상한 건 잘 모르겠는데? 던전마다 안에 들어찬 마력이 다른 건 별로 이상할 것도...”
승하가 화련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코를 킁킁거리자, 류 현이 불쑥 내뱉었다.
“저 쪽.”
“뭐라고?”
“저 안쪽에서 더 진한 냄새가 납니다.”
유적을 향해서 내달리기 시작한 후로 쭉 침묵하고 있었던 류 현의 뜬금없는 말에 승하는 고개를 기울였다. 용잡이 팀은 마력 냄새를 맡는 훈련이라도 하는 걸까? 설명이 좀 많이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승하는 잠자코 발을 놀렸다.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곧 몸으로 확인하면 된다.
“...어?”
다 무너져가는 성이긴 했지만, 구획을 나누는 벽은 그럭저럭 남아있었다. 승하는 성 중앙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동요를 화련이 옮은 것처럼 이어받았고, 류 현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빠득! 류 현은 요 두어 달간 몇 번이나 부서졌는지 기억도 안 나는 어금니를 부서져라 사려 물었다. 그의 뇌리에는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늦었다!
천장이 뻥하고 뚫려있는 중앙홀의 하늘에는 붉은빛을 발하고 있는 마법진이 떠 있었다. 마법진은 마치 기계장치처럼, 안의 도형들이 열심히 돌아가면서 작동하는 중이었는데 그 위로는 거대의 성의 환영이 떠올라 있었다. 특이하게도 성은 땅위에 세워지는 걸 전제로 축조된 게 아닌 듯, 바닥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이 나무뿌리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던전에서나 나올 법한 성의 환영을 보는 순간 류 현은 직감했다. 그가 석비를 만지고 의식을 잃었던 시간동안 만났던 여자, 칼리프 드 오르시아가 말한 ‘문’이 열리는 상황이 지금이라고!
기괴한 형태의 성은 마법진으로부터 받아들인 빛을 하늘 끝까지 쏘아올리고 있었다. 류 현은 반을 반쯤 벌린 채 넋 놓고 환영으로 이루어진 성을 보고 있는 화련에게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게이트...벌써 저 성을 전송하고 있는 건가.’
칼리프는 한 곳에 입장하면 다른 두 곳도 같이 열리기 시작한다고 했으니, 들은 대로 된 셈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칼리프의 말대로라면, 보기만 해도 꺼림칙한 저 성이 현실에 나타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거니까.
‘이 던전 수준이라면...다행이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최소 7성리치급...재수 없으면 네임드 급이려나?’
‘열쇠’ 없이는 단독으로 화이트 급 전력을 내뿜어내는 골렘이 있는 던전조차 ‘문’으로 삼는 성. 좋게 생각할 요소라고는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하하, 마력 딸려서 고생할 일은 없겠네. 젠장...알고도 이렇게..’
“언니, 저거...”
먼저 도착한 무리 중에서 희란이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지만, 돌아볼 생각조차 안 들었다. 류 현은 혹시나 하면서도 챙겨온 골렘의 핵에서 얻은 구슬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아니, 정말로 부술 생각으로 마력까지 밀어 넣었다.
그러자,
키이잉! 구슬이 마력에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안에서 회전을 시작했다.
“엇?!”
갑작스러운 반응에 류 현은 구슬이 놓쳐버렸고, 귀를 울릴 정도로 격렬하게 회전하던 구슬은 두둥실 떠올랐다. 류 현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 동안 구슬은 회전을 더하며 하늘로 쑥 솟구쳤고, 마법진 바로 아래에 도달했다.
그리곤,
퓨웅! 퓽! 사방으로 빛을 내쏘아내는 것이 아닌가? 내쏘아진 빛은 마법진을 향해서 휘어져 들어가더니,
치이익! 끼기긱!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마법진의 부속 도형들을 지우거나, 움직임을 멎게 만들었다. 마법진의 움직임에 문제가 생기자, 마법진 위로 떠오른 환영성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마법진에 자체 수복 기능이라도 있는지, 지워졌던 도형들은 느리지만 조금씩 복구되었다. 그 광경을 보고 화련은 뭔가 눈치 챈 게 있는지, 승하에게서 벗어나서 류 현을 향해서 뛰었다. 류 현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했다.
‘...유예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이 소리였나?’
“마스터! ‘열쇠’!”
하지만 달려온 화련이 내뱉은 말은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류 현이 다급한 외침에 얼떨결에 오른 손을 들어보이자, 화련은 그대로 그의 팔을 붙잡고 허공을 겨냥했다. 정확히는 열심히 마법진을 지우고 있는 구슬을 향해서.
“쏴요! 얼른!”
“아니 대체 뭘...”
류 현은 화련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기세에 밀려 ‘열쇠’를 발동시켰고, ‘열쇠’가 토해낸 빛은 구슬에 닿자마자,
그들의 세상을 집어삼켰다.
***
제프 리어던은 미합중국의 부통령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전대 정부가 플레이어 관련 정책으로 정치적으로 파멸을 자초했기 때문에 그가 보좌하는 대통령과 그가 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속된 말로 날먹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가 보좌하는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자들은, 그들이 좋지 못한 시기에 정권을 잡았다고 우려를 표하곤 했다. 전대 정부가 플레이어들을 핍박하고, 그 비밀조차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지워진 부담이 너무 크다고 여겼다. 대 던전의 시대에 플레이어 전력을 끌어 모으기에는 환경이 거의 3세계급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 말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른 강대국들은 협회와 플레이어 권익 문제로 부딪힐 때마다 미국을 들먹거리곤 했으니까. 강한 미국을 그리워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면 세계적인 바보 취급받는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제프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런 시기이기에 자신의 애국심을 발휘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제프는 ‘대소환’이전에 성인이 된 세대답게 강한 미국을 기억하고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 강한 미국은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파주의 X던전 던전 공략을 끝내고, 휴식기를 가진 지 이제 이 주가 된 류 현의 원정대를 찾아간 건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보좌진은 정치적으로 타격이 클 것이라며, 그리고 원정대가 화를 낼 가능성이 높고 체면만 상하고 말 것이라고, 성급한 한국행을 반대했지만 제프는 강행했다.
욕만 먹고 쫓겨날 것을 각오한 돌격은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보답 받았다.
기묘한 이름을 가진 동양인 원정대장은 흔쾌히 원정을 수락한 것이다. 그걸로 모자라, 곧장 미국으로 날아와 주기까지 했다. 그들이 미국으로 와서 한 달간의 추가 휴식기를 가진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제프는 원정대를 대접하는 일에 직접 신경을 써가면서 진입일만 기다렸다.
그리고 어제 저녁, 2월 17일. 미국 측 인원 12명을 포함한 총 17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뉴욕의 X던전으로 진입했다.
미국민들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뉴스 시청률을 올려주었고, 제프 또한 보좌관에게 원정대 관련 정보는 최우선적으로 올릴 것을 주문해놓았다.
오늘, 2월 18 새벽. 자던 도중에 깨워진 제프는 자신이 아직 잠이 덜 깨서 잘 못 들은 게 아닐까 하고 자신의 보좌관에게 다시 물었다. 벌써 세 번째 묻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보좌관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원정대가 무사히 나왔는데...나왔는데...어딜 갔다고?”
“류 현 원정대장이 자신이 끌고 온 네 명을 데리고, 그대로 아프리카로 날아갔습니다. 칼리프 클랜 측 인원은 내버려두고요.”
“아니, 대체 왜? 혹시 그들을 백악관으로 정중하게 초대하라는 말을 안 전했나? 혹시 공략을 제대로 못한 건가? 그래서 아프리카로 도피? 아니, 그런데 거긴 위스프가 있지 않나?”
제프는 자기가 말하고도 뭘 말하는 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마구 내뱉었다. 위스프? 아 그래, 그 테러리스트들이 있는데 아프리카로 도피하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그럼 왜 아프리카지?
“분명하게 전했다고 합니다. 우리 요원들 얘기에 따르면, 던전 공략도 완료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들이 하는 말들이 좀 중구난방인데...결론은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다 뿌리치고 당장 아프리카 편 비행기를 준비해달라고 소리쳤다더군요. 당직사령이던 칼 대령이 명령대로 그의 요청을 들어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대체 왜?”
제프의 물음에도 보좌관은 고개를 내저을 뿐,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