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탐식마(貪食魔)
꾸웅!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대한 충돌음에 웨인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뒤로 시선을 보냈다. 체고가 1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골렘이 다시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웨인의 시선은 거대 골렘을 망치 하나로 거꾸러뜨린 남자에게 가있었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위업을 이루어낸 남자가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흉흉한 기세의 검은 안개를 흩뿌리며 골렘의 몸에 달라붙는 모습이 보였다. 웨인은 확인한 후, 시선을 앞으로 되돌렸다.
‘정말 괴물은 괴물이군.’
시선을 떼었어도 품평을 포기하진 않았지만.
절로 혀가 내둘러지는 무위다.
크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상대하는 입장에 놓인 자를 곤혹스럽게 하기 충분한 요인 중 하나다. 그 진리는 플레이어 대 괴수의 싸움에서도 아주 잘 작동되는 걸 넘어서, 사람들의 상상이상으로 플레이어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웨인 크로이츠는 그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체고가 보통 2~2.5미터 가량에서 노는 오우거는 그 크기에서 나오는 물리력 때문에 최전선에서 싸우는 스트라이커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오우거가 작정하고 닥치고 돌격을 시전하면, 스트라이커들 입장에서는 피하면서 칼이나 창을 슬쩍 꽂아 넣는 게 전부다. 그마저도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오우거의 몸무게는 200키로를 오락가락 한다. 이런저런 플러스 요소를 고려하면 달리는 트럭에 창을 꽂아 넣는 셈인데, 그 트럭에 사람의 허리를 움켜쥐어서 끊어버리는 팔까지 달려있다고 가정하면 트럭 앞에 창을 들고 선 남자가 정신병자로 밖에 안 보일 것이다. 심지어 그 트럭이 나무나 바위에 부딪혀도 멀쩡하게 재 돌진 가능한 놈이라면, 누구라도 남자의 명복을 빌게 될 터.
커도 3미터가 될까 말까한 오우거만 해도 그 정도다.
체고가 10미터를 넘어서 거의 12미터 정도로 보이는 저 골렘은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마법사를 트럭 단위로 데리고 와야 저지가 가능할 수준이다. 그렇게 끌고 와도 손발이 맞지 않으면, 저지는 꿈도 못 꿀 정도.
마력과 이능력이라는, 물리법칙을 뉘집 개 이름 정도로 취급할 수 있는 비상식에 발을 걸치고 있는 플레이어의 상식으로도 저 괴물은 정면으로 대항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서슴없이 해 보이는 남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신경을 안 쓸 수 있을까.
‘평생 중병기만 다뤘다고 해도 믿겠군...하, 웨펀 마스터라...칭호 반납이라도 해야 하나?’
더 어처구니없는 건 저게 이제 2년차 플레이어의 솜씨라는 거다. 플레이어라는 존재는 각성과 동시에, 알지도 못하던 염동력을 깨우치거나 현실에서는 큰 실용성이 없다는 거합술의 달인이 되거나 하는 황당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웨인 본인부터가 쥐는 무기에 대한 사용법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괴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웨인에게 붙은 웨펀 마스터라는 칭호는 그렇게 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웨인이 보기에 저 남자가 각성한 능력은 그런 게 아니었다.
웨인은 남자의 몸 주변에서 미친 듯이 꿈틀거리는 저 검은 안개, 저 검은 안개가 진짜 그의 능력이라고 봤다. 보기만 해도 사람을 위축시키는 저 불길한 안개. 그것 외에도 근거가 하나 더 있다.
‘군더더기가 없어. 각성과 동시에 기억을 받은 경우에도 완전히 자기 걸로 만들기 전에는 부자연스러움이 눈에 보이기 마련인데...무슨 백전노장 같다.’
자신의 능력에 맞춰 여러 무기를 쥐여본 웨인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저 믿기지 않는 무위는 단순히 재능이라고 짚어 넘길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위원회는 마람 압둘아지드를 주시해달라고 했지만...’
마람 압둘아지드. 이번 사태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괴물이다. 웨인마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말에 협회는 뒤집어졌다. 웨인에게 잠깐이라도 검성에 대한 우선순위를 낮추고, 칼리프 클랜에서 드러낸 새로운 칼날에 집중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여자도 괴물이지만...저 남자가 훨씬 위험하다.’
웨인 크로이츠는 장담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던 첫 등장보다 더 임펙트 있는 무위를 보여준 마람 압둘아지드 보다, 저 류 현이라는 남자가 더 위험하다고!
이제까지의 협회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칼리프 클랜에 적을 두고 있는 마람 압둘아지드가 위험인물 소리를 들어야 마땅하겠지만, 웨인은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순위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원하는 바를 모르겠어...대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거지?’
협회조차 모르고 있던 송장목 해독 레시피를 제공하고, 살살이풀이라는 식물의 존재를 알린 저 남자가, 협회조차 파악하지 못한 정보력을 가진 자가 뭘 바라보고 있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니까. 조직에 속한 자 이면서, 누군가를 이끄는 자 입장에서는 행동을 예상할 수 없는 자만큼 두려운 존재는 없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그 또라이가 힘까지 세다면 말 그대로 견적이 안 나오는 것이다.
웨인의 머릿속에 실타래가 엉키든 말든, 그의 다리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유적보다는 폭발사고 현장 같은 성 잔해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쿠루루!][캭캭!] 둥둥둥!
성 잔해 안쪽에서 전고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와 함께 웨인보다 머리통 두어 개는 더 큰 그림자가 다섯이 튀어나왔다. 그림자의 주인은, 던전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 같은 라가 챔피언들이었다.
파주의 X던전에서 이미 겪은 일이어서 웨인은 당황하는 대신, 염동력으로 ‘가방’에서 원뿔 두 개를 붙여놓은 형태의 쇳덩이들을 꺼냈다.
그리고,
쉭! 뻐엉! 와인드 업도 거치지 않고 있는 힘껏 던져대었다. 몸통을 따라 나선형으로 홈이 파인 날렵한 모양새와 달리 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퍼걱! 쉭! 뻐엉! 첫 번째 탄이 라가 챔피언의 뇌를 뭉개놓고, 그 라가 챔피언이 고꾸라지기도 전에 두 번째 탄이 날았다. 곧 세 번째, 네 번째 탄이 연거푸 내쏘아졌다. 웨인의 뒤쪽에 바짝 따라붙어 오고 있던 희란은 전방을 겨냥했던 청뢰를 거둬들이며 생각했다.
‘응? 저번보다 좀 거친 느낌이네...? 컨디션이 안 좋은걸까?’
다 망가지긴 했어도 유적 입구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희란은 자신이 품었던 의문을 잊었다.
***
[오오옹!] 푸확! [끄르륵...]쿠웅!
서글픈 단말마와 함께 샌 드래곤이 추락했다. 추락한 샌 드래곤은 더 이상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몸에서 피를 토해내듯이 흘리고는 숨이 끊어졌다.
“끄으읏-. 이래서 날개 달린 것들 상대하기 싫다니까.”
대지 위에 몸을 뉘인 샌 드래곤의 사체에서 불쑥 솟아오른 건, 피투성이의 승하였다. 귀에 피가 들어간 것인지, 연신 귀를 후비적거리면서 사체에서 내려오는 그녀의 몸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플레이어 기준으로 치사성까지는 아니어도 독성을 가진 용혈을 뒤집어 쓴 탓이었다.
제 몸에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어깨를 돌리는 승하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쭉 펴고는,
떠엉! 쿠우우! 아직도 괴수 대전이 한창인 곳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대중으로 체고가 14미터 급의 골렘이 제 반의반도 안 되는 남자에게 자꾸자꾸 밀려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골렘은 류 현에게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유적과의 거리를 좁히려고 했지만, 거리는 500미터 안쪽으로 좁혀질 생각을 안했다.
처음 전투가 벌어진 곳이 유적에서 200미터가 채 안 되는 곳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유적과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난 셈이었다. 신장이 2미터가 채 안 되는 남자가 이루어냈다기에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위업.
“진짜 괴물이라니까. 지치지도 않나?”
승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번 원정에서 처음으로 골렘을 봤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저런 식으로 휘몰아쳐서 잡을만한 게 아니었다. 고통도 못 느끼고, 리치도 그렇지만 비 생명체 괴수 특유의 압도적인 재생능력 때문에 결국 플레이어 측이 먼저 지친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무리하지 않고 대형을 짜서 천천히 돌려 깎기를 하다가 심장이 되는 부위를 노출시켜서 마무리 하는 게 정석. 일 텐데. 류 현은 골렘을 혼자 맡고 나머지 인원을 유적으로 들이는 초강수를 뒀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음, 아무래도 들어올 때 그 느낌 때문에 저러는 거겠지?’
평소의 그라면 별 도움이 안 되더라도, 골렘을 처리하고 나서 원정대가 다 같이 유적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이곳 뉴욕의 X던전이 파주와 같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파주와 괴수 배치가 다르고 골렘이 두 마리가 튀어나왔어도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던전 진입 때 느꼈던 이상현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파주에서 느꼈던 그 압박감이랑은 달랐어. 마치...공간채로 찌그러드는 느낌...이었지.’
예전의, 그러니까 류 현과 만나지 않았던 승하였다면 이렇게 단정짓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류 현과 알게 됨으로서 연결된 화련과의 훈련 경험 때문이니까.
공간마법.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의 사용자와 맞붙어볼 기회가 있었으니까. 맞붙었다고 해도 승하가 일방적으로 화련의 방어를 두들기고, 잘 못 맞은 화련이 그날 점심을 굶는 그런 식이었지만.
어쨌든, 승하에게는 보통 던전 플레이로는 경험할 수 없는 기괴한 공격에 당해본 경험이 있었다. 화련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만, 느낌 자체는 비슷했다.
‘이 놈 상태도 좀 많이 이상했었고.’
화련은 자신의 발치에 깔린 샌 드래곤을 내려다봤다. 샌 드래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야생미 넘치는 흙빛 외피는, 그냥 흙빛이 아니라 저 앞의 폐허의 벽돌들을 그대로 갖다 붙인 것으로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샌 드래곤의 몸에 잘 들어붙어있지만, 군데군데 벽돌의 형상이 남아있는 부분이 보였다.
실제로 화련은 샌 드래곤의 몸에 매달려서 칼침을 놓는 내내, 잡을 곳이 부족해서 곤란을 겪진 않았다. 보통 샌 드래곤의 매끈한 동체와 동떨어진 곳곳에 튀어나온 덜 깎인 벽돌들 덕에 한결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었다. 이 샌 드래곤이 보여준 체력과 방어력에 비해선 말이다.
‘이런 거 두 마리만 있어도 파주 던전에 그 골렘 찜 쪄 먹을 거 같은데.’
그 부분을 감안해도, 그녀가 고꾸라뜨린 샌 드래곤의 강함은 비정상적이었다. 퍼플급 괴수면서 그 보다 최소 두 단계는 높아보이던 골렘을 떠오르게 할 정도였으니까.
‘중세 성이라고 했었는데...정작 성은 저 꼴이고. 아무래도 제일 쎈 놈 둘이 탈출해서 날뛰고 있었던 상황 같단 말이지..’
승하는 골렘의 몸 곳곳에 박혀있던 괴수들의 모습을 한 번 떠올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내가 머리 굴려봐야 뭐해. 설마 저 안에 뭐 별일이야 있겠어? 기껏 해봐야 둘 합쳐놓은 보스몹이나 있겠지.’
의구심을 떨쳐낸 승하는 괴수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향해서 내달렸다. 아무래도 원정 끝나고 화련한테 합류가 늦었다고 잔소리를 들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것도 무시했다.
***
퍼걱! 빠직! 빠악! 우지직!
“후웁!”
뻐엉! 파창! 콰르르!
있는 힘껏 내지른 주먹이 골렘의 핵 표면을 과자처럼 부수고 들어갔다. 류 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먹을 박아 넣은 상태로,
꾸웅! 파쇄권을 터뜨렸다. 류 현의 몸통만한 구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갔고, 골렘의 동체도 그 충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처럼 부서져나갔다.
쿠웅! 카캉! 류 현은 무너져 내리는 골렘의 동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손안에는 볼링공만한 검은 구체가 들려있었다.
“저번이랑 똑같은 걸까요?”
땀으로 흠뻑 젖은 화련이 다가오며 물었다. 류 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죠. 그 때는 골렘이 수문장이었고, 최심부에 있었는데 이 녀석은 밖에서 난리치고 있었잖습니까. 거기다가 상태도...”
류 현이 말끝을 흐리자 화련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꾸라뜨리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이번에 맞닥뜨린 골렘은 파주의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일단 체급부터가 현격하게 차이가 났고, 보는 사람 기분 나쁘라고 달아놓은 오브제 같은 괴수들도 살아서 움직였다. 산 괴수답게 최선을 다해서 인간인 그들을 공격했다는 뜻이다.
류 현이 시종일관 골렘을 몰아붙이면서도 승하가 합류하기 전에는 끝장을 못 낸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 몰라도 골렘이 파묻혀 있는 괴수들은, 골렘과 함께 손상되면 재생해서 다시 멀쩡하게 불을 뿜었다.
거의 마지막이 돼서야 어디 파묻혀 있는지 알게 된 리치는 그의 주의를 돌릴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연사했고, 샌 드래곤은 먹힌 게 정말 맞기는 한 건지 위기에 몰리자 골렘의 날개 노릇까지 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충분히 거슬리는 공격들이 힘겨루기 중간 중간 들어오자 류 현은 체급차이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 건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가 들어오면 휙휙 날아가기 일쑤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골렘에 할애한 30분 중 절반은 그 때문에 날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류 현도 생전 처음 겪어보는 패턴에 당황한 것도 꽤 컸다.
‘...괜히 먼저 들여보냈나? 아직 링크가 유지되는 걸로 봐선 희란 씨는 괜찮은 거 같긴 한데.’
류 현은 애써 불안함을 떨쳐내고 말했다.
“...빨리 앞서간 분들을 쫓아가죠.”
***
“맙소사...주여...”
“젠장, 1차 원정대놈들 대체 뭘 만지고 나온 거야?”
“마법사들 어서 모여! 저 빌어먹을 마법진은 대체 뭐야?”
“젠장, 저건 룬어가 아니라고! 어떻게 해석하라는 거야?”
“...내가 나가면 1차 원정대 새끼들부터 두들겨 팬다. 꼭.”
단체로 패닉에 빠져서 횡설수설하는 무리 사이에서, 희란만이 하늘에 떠오른 붉은빛의 마법진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게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