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탐식마(貪食魔)
세간에 널리 퍼진 인식과 달리 류 현은 플레이어 치고는 특이하게 미국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었다. 이전 생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해온 준비와 태도를 눈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이득 때문에 다가올 파멸에 대해서 외면하거나, 정말 극단적인 무능함을 보여주며 무너진 각국 정부와 조국의 모습을 직접 본 탓도 꽤 컸다.
주인의식이나 애국심 같은 건 가져본 적도 없는 그이지만, 남의 일도 아니고 한반도를 진격로에 둔 네임드 몹을 애써 외면하는 당시 한 국 정부의 태도는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 정부는 난리 통에 투표고 뭐고 전부 생략하고 집권한 날치기 정부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긴 했지만, 충격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 때 손을 뻗어온 것이 미국이었다. 숭고한 인류애 같은 이유가 아니라, 지극히 계산적인 행동이었지만 류 현은 기껍게 받아 들였고, 그 결과 네임드 몹 ‘화룡’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거의 단독으로 네임드 몹을 떨어뜨리는 무위를 직접 확인한 미국은 일개 개인에게 군사 동맹제의를 하는 초강수를 던졌고, 그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동맹은 류 현이 죽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그리고 그 동맹의 여파는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동맹을 제의했던 미국도 생각하지 못한 효과였지만, 류 현은 원정이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결정된 미국행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협회가 미국과 처음으로 합의 했던 한 달이라는 휴식기를 기다리다 못해, 부통령이 원정대를 모셔오겠다고 한국까지 날아온 건 그야말로 상정외의 상황이었지만 별 문제될 건 없었다.
협회 측에서는 제대로 된 휴식기도 갖지 못한 원정대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걸 우려했지만, 그가 볼 때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 혼자 들어가도 된다고.’
파주의 X던전을 공략하면서 견적을 확실히 냈으니까. 혼자 들어가더라도 무사히 공략을 마칠 수 있다는 확신이 선 상태.
오히려 보스 몹으로 또다시 골렘 같은 게 등장한다면 혼자가 나을지도 모른다. 다시 팀을 이끌고 들어가서 그런 괴물을 상대하면서 아무도 안 다칠 거라고 확신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정 안 되면 승하 씨랑 같이 들어가면 되는데...쯧, 해줄 리가 없지.’
그의 표정이 떫은 감씹은 표정인 이유는 짧은 휴식기가 아니라, 입국 후 추가로 보장 받은 3주간의 휴식기였다. 3주 후에 무조건 들어가는 조건은 아니고, 추가로 2주 가량은 더 늘릴 수 있는 조건이었는데 류 현의 불만사항은 이 부분이었다.
소파와 하나가 되었던 이 주간 동안 그는 회복을 끝마쳤으니까. 원정대원들도 마찬가지다. 육체적 컨디션은 모두가 회복한 상태다. 던전이라는 폐쇄되었고, 안에는 살인 괴물들이 득시글한 공간에 갇혀 있다가 나온 정신적 피로감이 회복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류 현은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가장 걱정했던 희란이 아무런 문제없이 화련과 함께 카지노를 돌아다니며 한껏 관광객 기분을 내는 중이다. 어제 저녁, 3만 달러를 땄다며 좋아라 하던 모습에서 이상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데리고 들어가긴 좀 그렇지...’
거기에 원정대 전체를 끌고 오긴 했지만, 류 현은 원정대 전원을 다시 던전으로 데리고 들어간 생각은 없었다.
정확히는 화련과 희란을 말이다. 정신이든 육체든 회복이 끝났어도 좀 더 쉬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사람은 두드린다고 계속 강해지지 않으니까.
‘너무 잘 따라와 줘서 자꾸 까먹지...’
그녀들의 경력은 짧다. 화련은 류 현과 만나기 전에 2년 남짓한 경력이 있긴 하지만, 하위 던전의 헬퍼로 활동했으니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그 기간 동안에도 더러운 꼴은 제법 많이 본 것 같지만, 위험도나 압박감은 그 기간 전체를 합쳐도 이번 원정보다 못할 것이다.
화련이 듣는 다면 요 일 년간 사람을 죽어라 굴려댄 인간이 할 소리냐고 따질 테지만, 그도 나름대로 변명거리가 있었다. [어디 가서 끔살 안 당하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입 밖으로 그 소리를 낼 일은 없겠지만.
‘이 인간들도 문제고.’
류 현은 탁자 위에 올려둔 프로필 두 개를 톡톡 두드렸다.
알 라시드와 마람 압둘아지드. 칼리프 클랜에서 파견한 두 괴물은 볼일이 끝났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미국까지 그를 따라왔다.
류 현은 그 둘이 자신을 따라왔다고 확신했다. 아쉬울 거 하나도 없는 인간들이 미국까지 따라와서, 협상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대놓고 자신을 관찰만 하는 데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 둘은 류 현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보였다.
‘그 때 ‘강림’을 깐 거 때문이겠지? 이거 참...덕분에 사고 안 터지고 조용히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그 외에는 집히는 부분이 없었다. 공략 중반부부터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던 인간들이 트러블 한 번 안 일으키고 얌전하게 밖으로 나와서는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도 괴물이라고 불리기 손색없는 실력자들이다. ‘강림’이 뭔지 정확히 파악하진 못해도 기존의 플레이어 능력과 궤를 달리 한다는 것 정도는 느꼈을 터.
‘차라리 돌아가서 암살 모의나 해주는 게 속 편한데 말이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푸념이었다.
***
“뭐?”
승하는 어이가 가출해 버린 표정으로 물고 있던 빨대를 내뱉었다.
“그러니까, 데리고 들어갈 생각으로 같이 온 게 아니란 말이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제가 이런 걸로 농담하는 거 보셨습니까.”
“아니,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농담이 아니면 곤란하니까. 미국까지 다 데리고 와서 이럴 생각이었어?”
“원정대 몇 명만 한국에 떼놓고 오면 원정대 내분이니 어쩌니 시끄럽게 굴면서 작업 들어갈 게 뻔 하니까요.”
“여기서 떼놓고 들어가면 안 그럴 거 같아? 더 심할 걸. 지금이야 네가 밖에 있으니까, 영웅이니 어쩌니 열심히 빨아줘도 그 둘 떼놓고 던전 들어가고 나면 귀화하라고 꼬셔댈텐데.”
“...솔직히 여기 도착할 때까지 좀 고민 했었습니다. 미국이 기존 원정대 인원 줄이는 걸 그냥 보고 있을지도 의문이었고요.”
“그래서?”
“미국 측에서는 클리어만 할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고, 될 수 있으면 미국 측 인원도 원정대에 포함시켜달라는 상황 아닙니까. 조율만 잘 하면 될 거 같아서요. 두 분한테 휴식기가 더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 칼리프 클랜 커플은 어쩌고?”
승하마저 그렇게 부르고 있나 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류 현은 대꾸했다.
“희란 씨랑 화련 씨도 떼놓고 갈까 하는데 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겠습니까. 애초에 그 둘이 여기까지 따라올 거라고는 저도 생각 못했습니다. 미국행 결정 나자마자 귀국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널 감시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나 보지. 나라도 그러겠다. 아예 귀국 안 한 건 조금 의외지만. 마람이라고 했던가? 여자 쪽이라도 귀국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류 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을 감시한다고 무슨 이득이 나올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걸 알려줄 의무는 없다.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게 신경 쓰이긴 해도, 심각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고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칼리프 클랜 커플 때문이라도 그 둘을 떼놓고 들어가는 건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걸. 어지간해선 그런 짓은 안 하겠지만, 네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잖아? 휴식기고 뭐고 안전이 보장 되야 의미가 있는 거지. 그 둘이 약한 건 아니지만, 그 커플이랑은 상성이 최악이지.”
자신이 따라 들어가는 건 확정 사실인 양 말하는 승하를 보고 류 현은 픽 웃으며 물었다.
“전 승하 씨랑 들어간다고 말한 적도 는데 어째 결정은 다하신 투입니다? 제가 두 분 호위 역으로 남겨둘 거라는 생각도 안하십니까?”
“그런 기미가 보이면 내가 널 따돌리고 먼저 들어가겠어!”
류 현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들어가도 충분히 공략을 마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정말로 혼자 공략 시도를 하는 걸 미국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혹, 미국 정부가 그럴 의향이 있어도 세계 여론이 미국이 그러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최상위 던전과 첫 원정대 둘이 괴멸 당하는 바람에, X던전이 생성되지 않은 국가들도 그의 원정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까. 자살시도와 같은 원정을 보낼 수는 없을 터. 승하의 원정 참가는 필수다.
“그럼 두 분을 어떻게 설득할지 같이 고민이나 해주십쇼.”
“...어떻게 해도 안 될 거 같은데. 좋아, 같이 고민하는 것 정도야. 음, 난 아무 말도 안 한 거다?”
답지 않게 꽤나 위축된 태도를 보이는 승하였다.
***
류 현은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앞에는 제 작은 체구를 뽐내기라도 하듯이 가슴을 편 화련이 서있었다. 그의 뒤로 사열해 있는 미군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류 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진짜로 찍어 올 줄이야.’
류 현에게 두통을 일으키고 있는 속사정은 이랬다. 승하와의 의논 끝에도 시원찮은 대안이 나오지 않자 류 현은 화련과 희란에게 가감 없이 제 의사를 전달했고, 화련은 당연하다는 듯이 격렬하게 반대 했다.
그녀는 X던전 공략 내내 가장 최선두에서, 가장 많은 부상을 입어가면서 많은 일을 해낸 류 현이 자신들보다 휴식기가 더 필요하다고 주장해서 류 현의 입을 막아버렸다. 표면상으로는 류 현의 경력은 화련보다 짧은 게 사실이니, 경험을 바탕으로 뭐라고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 뒤로 대화는 지지부진 했다. 합리성을 따져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설득할 결론을 내놓고 대화를 지속하니 도저히 답이 안 나왔다.
대화에 지치다 못한 류 현이, 원정대에서 실력이 가장 쳐지는 두 사람을 짧은 휴식기를 갖게 한 후에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자, 화련은 부정할 수 없는 분노하면서도 실속을 챙겼다. 류 현에게 헌팅 레벨을 맞추면 되지 않냐고 주장해서 기어코 허락을 얻어낸 것이다.
그리고 지난 한 달간 두 사람은 정말로 미친 듯이 던전을 들락거렸다. 애초에 류 현이 그녀들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댄 이유가 휴식기 문제라는 걸 잊은 듯한 페이스였다. 마치 우리는 그렇게 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중간에 류 현이 말리려고 했지만, 토라진 화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실적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청뢰가 포함된 파티긴 했지만, 화련과 희란 이인조 파티는 퍼플블루 던전 세 곳, 블루 던전 네 곳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리며 헌팅 레벨을 100대 후반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던전 피로도나 이동 거리 문제가 아니었다면 그 이상도 가능했을 것이다.
류 현이 경솔했던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지만, 그녀들은 기어코 협회 테스트 없이 찍을 수 있는 헌팅레벨 최대치를 찍고 만 것이다. 실제로 협회에서는 테스트 제의서한이 보내왔다. 한 달 동안 그녀들을 서포트 해준 미국 관료의 눈빛이 달라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원정 나흘 전까지 던전에 들어갔다 나올 줄이야...’
처음으로 류 현의 조언을 무시하긴 했어도, 던전 공략을 끝내고 나서 꼭 그에게 마력을 보충 받았기에 육체적 피로감은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일곱 곳의 던전을 공략하는 동안 공략기간이 만 하루를 채웠던 적이 없으니, 정신적 피로감도 우려할 정도는 아닐 가능성이 높겠지만...아니, 저 이겼다는 표정을 보면 분명히 없어 보였다.
‘...지금 이런 거 생각해봐야 뭐하겠어. 그 얘기는 들어갔다 나와서 다시 해보자. 던전에 집중하자고. 집중. 류 현, 이 멍청한 놈아. 여유부릴 때가 아니야. 저 안에는 뭐가 있을지 모른다고.’
류 현은 화련에게서 시선을 떼고, 뒤편에 사열해 있는 열두 명의 미군. 아니, 군인 차림의 플레이어들을 돌아봤다. 공식적으로는 이들은 정부 소속이 아니라, 사설 길드 소속이었다. 그들의 차림새가 보여주듯 실제로는 군인에 가깝다. 세상이 안다면 인권 유린이니, 세계 플레이어 협약 위반이니 난리가 났겠지만, 류 현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알 라시드랑 그 여자를 빼고 군인 열두 명이라. 나쁘지 않은데?’
어디로 튈지 상상이 안가서 머리가 아픈 인간들을 대신해서 들어온 아주 편리한 패에 만족할 뿐. 자체 대련까지 해보고 선별한 이들이었다.
큰 전력이 되진 않아도, 화련과 희란의 방패막이로 써먹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 하에 원정대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와중에 미국으로부터 부산물 거래에 대해서 배려받기로 약속도 받아내었다.
‘음, 이정도면 강 찬 그 양반도 즐겁게 갈려주겠지.’
지금쯤 엘릭서 연구에 스스로를 갈아 넣고 있을 강 찬에게 쥐여 줄 선물이었다.
‘아오, 또 딴 생각. 젠장, 이러면 꼭 험한 꼴을 보던데. 집중하자.’
류 현은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가, 사열해 있는 무리를 향해서 짧게 말했다.
“출발합시다.”
그리고 그대로 뚜벅뚜벅 던전 입구로 몸을 묻어 들어갔다.
[어?]
사기를 고취시키는 연설도, 조국을 위해서 몸 던질 각오를 하고 온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비장함도 없는 진입 선언에 미국 측 인원들은 잠깐 얼이 빠졌다.
류 현의 뒤를 이어 나들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경쾌하게 통통 발을 구르며 검성이 던전 안으로 사라지자, 그들은 서로를 얼빠진 얼굴로 마주 보곤 헛웃음을 한 번 터뜨렸다가 그의 뒤를 따라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2038년 2월 17일. 뉴욕의 가칭 X던전에 2차 원정대가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