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8화 〉탐식마(貪食魔) (138/429)



〈 138화 〉탐식마(貪食魔)

그런 경우가 있다.

소문은 무성한데 아무도 그 소문의 주인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목격담만 계속해서 늘어나는 경우가.


소문의 근원을 거슬러 쫓아올라갔는데, 소문의 중심이 아니라 사건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30대 주부가 튀어나오는 황당한 경우가 종종 아니, 꽤 자주 있다.
 현이 보고 있는 티비 프로그램이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화면을  얼굴에 가득 채울 기세로 카메라에 가까이 다가와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남자는, 그의 말로는 류 현과 승하를 연결하는 다리였다는 전 브로커였지만 류 현도, 승하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옐로우 던전 한  가보겠다고 밤 외출을 나섰다가 검성과 마주치는 우연이 없었다면, 그런 브로커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남자는 브로커로서 비밀엄수를 지키기에는 지나치게 말이 많아 보였다. 아무리 흥분했어도 그렇지 생방송 중에 탁자 위로 올라가려는 남자한테 일을 맡길 일은 없다.


‘브로커는 개뿔. 저런 식으로 일하면 고객한테 목 날아가지.’


거기에 저런 주장을 하는 전직 브로커는 한 둘이 아니었다. 파주에 소재하던 X던전이 클리어 됐다는 소식과 함께 원정대 명단이 밝혀지자 한국인들은 검성과 함께 원정에 나선 한국인 슈퍼 루키의 존재에 열광했고, 그와 관련된 온갖 루머를 쏟아내었다. 검성과 그가 비밀연애를 지속해온 관계라는 설은 아주 양반인 편이었다.


그런 식으로 헛소리를 늘어놓는 인간들이 하루에 네 명씩 티비에 얼굴을 비쳤다.

거기다가 원정대, 특히 용잡이 팀 소속의 팀원들의 신상 털기가 시작되자 류 현은 고교동창과 평소에 얼굴도 잘 모르고 지내던 아파트 한층 아래의 이웃의 얼굴까지 티비를 통해서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정보는 아무것도 안 나왔다.


MC가 과도하게 흥분한 남자를 진정시키고 진행이 계속 되었다. 류 현은 티비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탁자 위에 올려둔 맥주캔 더미로 손을 뻗었다.

“아주 종일 저런 것만 하네. 사람들이 지겨워하지도 않나?”


류 현이 다섯 캔째 캔을 따려는 순간, 그의 손에서 맥주캔을 쏙 빼내가는 손이 있었다. 류 현은  크기만 보고도 주인이 누군지 확신했지만, 고개를 돌려 약탈자를 돌아봤다. 약탈자, 화련은 한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로 류 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류 현은 기억도 안 나지만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상황에서 저런 표정을 지으셨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홉 캔 째 에요. 마스터, 그만 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다섯 캔입니다만.”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네 캔 마시고 숨겨놓은  모를 줄 알아요?”
“......”

류 현은 끙 소리를 내며 반쯤 드러누웠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쩌다 상황에 떠밀려서 맞이한 휴식동안,  현은 어째 화련의 엄마스러운 면모만 재발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하 씨도 그렇고, 대체 쌍으로 왜들 이러나 몰라. 아무리 잘 안 취해도 타격이 제로는 아니잖아요? 쉴 때는 좀 제대로 쉬시죠? 마스터.”


‘진탕 마시고 자면 더러운 꿈을 덜 꾸게 되거든요.’ 류 현은 그리 대꾸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화련이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어찌해 줄 수도 없는 문제이니 말해봐야 괜한 심통에 불과하다.

누나가 죽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는 꿈은 하루 종일 기분을 더럽게 만들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진 못한다. 플레이어들이 브레스 한 방에 천 단위로 녹아내리는 모습도, 그가 죽였던 이들이 꿈에 나타나서 복수의 말을 웅얼거리는 것도 조금 기분이 더러울   타격을 주진 못한다. 그런 것에 일일이 울고불고 하기에는 그는 너무 더러운 걸 많이 묻혔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모르긴 몰라도 승하가 화련의 금주령에 귀를 틀어막고 겨울잠으로 응대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할 일이 없었다.

X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온 지 일주일. 원정대는 협회와 칼리프 클랜, 그리고 태양그룹에서 제공하는 숙소를 이틀 간격으로 옮겨 다니면서, 은둔 아닌 은둔생활을 영위 중이었다. 칼리프 클랜에서 파견해 준 알 라시드 마람 커플마저 클랜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한국에 머무는 중이었다.

다른 두 곳의 X던전 공략 시도가 파멸적인 실패를 맞이했기 때문에 반 강제로 갖게  휴식기였다.   앞에서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해란이었지만, 주도자는 협회였다. 협회는 원정대에 대한 정보를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차단한 채 욕받이 역할을 수행 하면서 사태를 파악 중이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공략 성공 확률이 33프로 가량 밖에 안 되는 던전을 뚫고 나온 원정대는 일단 싸고 들고 보는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전원이 잔부상조차 없이 무사히 돌아왔다면 더더욱.


협회가 신경질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신변보호였다. 어려운 원정을 성공시킨 원정대의 일부라도 갖기 위해서 달콤한 제안을 해오는 이들이 있을 거고,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협회는 후자 쪽의 위협으로부터 전도유망한 플레이어들을 지키기 위해서 애써왔고, 수차례 실패도 겪어왔다. 전자와 후자가 별도의 존재가 아니라는  또한 협회가 얻은 교훈  하나였기에, 협회 측에서는 원정대에 대한 접촉을 아예 차단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사태를 파악을 완벽하게 끝내고 상황을 주도할 판을 짤 때까지는 말이다.


‘그럴 필요 딱히 없는 데 말이지.’


류 현의 입장에서는 과도한 친절이었지만,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숨어있는 동안 미국과 아프리카는 애가 닳아 없어질 지경이 될 테고, 그리되면 원정대의 몸값도 저절로 오를 테니까. 정확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류 현의 몸값이 말이다.


몸값 자체에는 별 관심은 없지만, 높은 몸값이 클리어 이후 해당 정부의 땡깡 방지와 자유로운 활동범위를 보장해  테니 대가 없는 기다림은 아니었다.


‘할 게 없다는 게 문제지.’


문제는 화이트 급을 넘어선 골렘마저 혼자서 대적한 류 현조차 어찌할 길이 없는 무료함!

류 현은 이 남아도는 시간을 때울만한 수단이 없었다. 아무리 은둔생활을 빙자한 스위트룸에서 호사를 부리는 휴가라지만, 활동에 제한이 따른다.


던전에는 당연히 갈 수 없다. 가부좌 틀고 앉아서 능력 제어 훈련을 하자니, 최근에 억누르긴 했어도 ‘강림’을 발동시킨 여파가 아직 남아있어서 곤란했다.

마지막 보루인 병문안도 불가능했다. 그의 누나는 지금 안전을 위해서 입원장소를 옮긴 터라, 보기 힘든 상태였다. 보려고 들면 못할  없지만, 적어도 협회가 사태파악을 끝내고 협상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냥 있는  세아의 안전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던전에 들어가서 괴수를 씹어 먹는 것과  괴수를 씹어 먹기 위해서 훈련하는 걸 빼고 나니  게 없었다. 화련이 보다 못해 뜯어말릴 정도로 술을 들이붓는 것 이외에는.

“마스터는 취미 같은 거 없어요?”
“취미요?”
“그  영화감상이라든지, 아니면 차나 야구 같은 거. 보통 남자들은 그런 거에 환장하잖아요?”


류 현은 다시금 끙 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키운 적은 없다.


 현이 잘하는 건 괴수를 때려죽이는 거고, 괴수를 때려죽이기 위해서 준비하는 걸로 20대 중후반을 보냈다.

괴수를 때려죽이고, 또 죽이다가  되면 물러나서 철저히 준비한 뒤에 때려죽인다. 그의 삶은 그런 식이었다. 싸워온 기간 같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에 앉아서 멍하니 수업 듣는 것보다 괴수와 서로 물어뜯던 시간이   배는 더 강렬하게 남았으니까.

 하면서 살까하고 늘어져 있는 시기보다 살기 위해서 피 흘리며 울부짖으며 적을 찢고, 자신도 찢기던 시기가 더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혈기 과잉의 20대 감성 같은 건 옛날 옛적에 고사했다.


괴수와의 싸움은 지긋지긋한 것과 동시에 그의 삶이 되었다. 그것을 제외하고 의미 있는 걸 찾는다면, 누나의 회복을 위해서 뛰어다니는  정도가 있을 것이다.

그 이외에는?

모른다. 그런 걸 해본 적도 없고, 찾아본 적도 없다. 찾아봤었을 지도 모르는 학창시절 기억은 그에게는 너무 머나먼 일이 되었다. 회귀한 이후에도 그런 걸 찾아보려고 한 적은 없다. 괴수 때려잡을 계획 세우기도 바쁜 데 그런 거에 할당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나한테는 이런 생각도 사치지.’

생각할 의지도 없었다.

‘아지다하카. 그 새끼도 못 잡았는데 무슨 취미야.’


아지다하카. 생을 초월해서 다시 만나게  그의 대적을 고꾸라뜨리기 전에는 그 뒤를 논하는 건 농담거리조차 못 될 테니까.  전에는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으니까.

 현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등 돌려 누웠다. 유일한 시간 때우기 방법인 음주가 막혔으니, 승하의 선례를 본받아서 잠이나 늘어지게 잘 생각이었다.

등을 돌려 누운 류 현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화련의 시선에 애틋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

“글쎄요. 조사해보셨을 테니 아시겠지만, 제가 고졸 무지렁이라서. 학교 다닐  공부도 지지리 못해서 말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는 던전을 공략해주는 게 왜 애국인지  모르겠군요. 그걸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능글거리는 류 현의 말에 화련은 웃음을 참기 위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류 현이 앉아있는 소파가 꽤 높은 편이고, 그녀가 여자기준으로도 작은 편이었기에 재경부 차관이라는 자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하, 하지만 류 현님 이는...”
“그리고 톡 까놓고 말해서, 전 이미 국가에 충분히 봉사한  같은데 말입니다. 거의 무보수로 X던전 공략해드렸잖습니까? 아, 국가에서 요청한 일이 아니라서 무효로 치시려나? 음, 그럼  서운해질 거 같은데...”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정부에서도 그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 검토 중이니 노기를 가라앉...”
“화난 건 아닙니다. 던전 클리어 하고 나와서 부산물에 내놓으라고 징징거렸으면 좀 많이 났을지 모르겠지만, 딱히 서운할 일은 없었으니까요.”

재경부 차관은 그 말에 속이 뜨끔했다. 아프리카와 미국에 있는 X던전에 들어간 원정대가 처참한 꼴로 귀환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얘기가 오고 갔었다. 그 일로 아직 일이 성사된 것도 아닌데도 기업체에 로비를 받은 작자들도 꽤 있었다. 그걸 류 현이 알리는 없겠지만...도둑놈이 제  저린 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설마...아니겠지?’
“감사한 말씀입니다. 상부에서도 그 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더 지원을 못 해드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현은 차관의 말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서해란에게 다른 두 곳의 원정대 귀환 이전에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들었다. 자기들이 던전을 공략한 것 마냥, 원정대가 나오기도 전에 접대 받고 나눠먹을 논의를 했던 작자들이 적극적인 지원을 해줬다면 더한 진상을 봤을 것이다. 그 전에 류 현이 사양하고 나섰겠지만.

‘웃기고 있네. 차라리 칼리프 클랜한테 장비 대여 요청을 하지 너네한테 뭘 받아? ‘터주’도 제대로 컨트롤 못하는 것들이 퍽이나. 정부 소유의 아티펙트 현황이나 파악하고 있나 몰라.’

속마음과 반대로 류 현은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어떤 확답도 드리기가 곤란하군요. 협회가 미국과 협상을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검토 해보도록 하죠. 아, 제 뒤에 있는 팀원이 말입니다. 머리 굴리는  이 친구 담당이거든요. 전 외교적 우위니 군사적 연계니 하는 말들은 어려워서 영...”

알맹이 없는 말들이  번  오고갔지만, 결국 차관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연신 이마를 손수건으로 훔치며 굽실거리던 차관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화련이 빵 터졌다. 소파를 팡팡 두드리며 끅끅 거리던 화련은 조금 진정되자 벌게진 얼굴로 류 현에게 말했다.

“머, 머리를 쓰는 게 내 담당이라고요? 진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하시네. 독재자 마스터.”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릴까요?”
“아뇨. 절대 싫어요.”

방금 전까지 헐떡거리던 게 거짓말처럼, 정색하고 딱 잘라 말하는 화련의 태도에 류 현도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독재자면 정권탈환을 노려야하는  아닙니까?”
“독재자가 미래예지 같은 초능력을 가진 철인이면 어쩔 수 없죠. 내 힘으로는 몰아낼 수가 없으니, 옆에서 2인자 꿀이라도 빨아야죠. 민주주의는 저보다 용기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 세워주겠죠.”


농담인 게 분명했지만 의외의 시점에서 찔린 류 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 눈치 까고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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