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탐식마(貪食魔)
2차 ‘대소환’ 이 터지고 2년여가 흘렀을 때, 그러니까 괴수와 던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호기심이 이기기 시작했을 때 한국의 한 TV프로그램에서 이런 주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플레이어의 던전 개척은 어느 정도의 경제적 가치는 가지는가?
가십거리나 다루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진지한 논의는 오가지 않았지만, 프로그램의 목적대로 가십거리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대 던전 인프라가 구축되고 정보가 축적되기 시작하자 매체들은 플레이어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1차 ‘대소환’ 때 일어난 플레이어에 대한 인권 유린과 그 이후 플레이어들의 보복범죄에 대해서 묻고 싶어 하는 정부의 의사도 다분히 반영된 편성이었지만, 대중들은 열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스컴에서는 플레이어와 던전을 아무 소모 값도, 리스크도 없이 돌아가는 유전처럼 묘사했었으니까. 물론 사람들이 멍청해서 플레이어가 겪는 위험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제 주변일이 아니면 당연하게 발휘되는 무신경함이 작용한 결과일 뿐이었다.
플레이어들은 목숨 걸고 던전에 들어간다고? 그게 어쨌다고! 우리가 그놈들을 억지로 밀어 넣었나? 다 저 좋으려고 들어간 거지!
이런 저런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왔지만 전부 겉다리에 불과했고, 사람들은 매스컴에서 제시하는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만 집중했다.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홍보가 잘 먹힌다는 걸 확인한 정부와 매스컴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영 허튼 소리는 아닌 것이, 한국 내의 플레이어 질이 높아지고 검성이라는 괴물이 등장하고, 그를 중심으로 ‘예거즈’가 출범하자 요동치던 코스피가 안정세로 돌아섰다.
플레이어가 던전에 도전하는 것은 국가 경제와 국방에 기여하는 애국이다! 검성의 ‘예거즈’의 북한 안정화 프로젝트와 맞물려 이런 식의 애국프레임은 꽤나 잘 먹혀들어갔다. 아니, 잘 먹혀들어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한국이라는 여러모로 폐쇄적인 국가가 플레이어라는 기존의 인종 차이보다 더 극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신인류에 대한 큰 거부반응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한국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경제적 효과 쪽은 아니지만 일본은 플레이어를 새 시대의 무장취급하며 국가의 혼이니 어쩌니 하며 떠들어댔고, 유럽은 미국을 탈출한 플레이어들을 흡수하며 그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각 대륙마다 컨셉이 달랐을 뿐, 플레이어에 대한 영웅화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몇 년의 세월이 지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국 정부와 매스컴이 인류가 던전을 정복했다고 떠들어대었던 최근에 와서는 사람들은 새로운 도전을 은근히 바라고 있을 정도였다. 한 달 전에 터진 퍼플 던전 동시 포화사태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류 현이 던전을 나오자마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건 그 때문이었다. 원정대의 X던전 진입 일자는 극비 사항이었고, 중증 관심종자인 알 라시드마저 전용기가 아니라 조용히 한국으로 들어올 정도로 기밀유지에 신경 썼었다.
하지만 그 뒤의 통제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부에서 진입 전처럼 철통보안을 지켜줄 것 같지도 않았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것도 이미 한계에 부딪혔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는 알 라시드처럼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진 않아도, 제대로 된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유명세는 감수할 생각이었다.
반쯤 억지로 등 떠밀려서 들어가긴 했지만, 마침 적당한 이야깃거리도 생기지 않았는가. 승하가 그를 한 번 말리기 위해서 X던전의 존재를 까발린 덕에 다른 양념을 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면 알아서 유명인사가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 만한 자랑거리도 없을 테니까.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웃기지도 않는 허가증 한 장 내주고, 요청하지도 않은 군부대를 파견해준 게 전부였지만 언제는 해준 게 많아서 플레이어들이 목숨 걸고 얻어낸 공적으로 뻐겼겠는가?
그런데 던전 밖을 나와 보니 반겨주는 건 꼬장꼬장한 대령 아저씨와 서해란 뿐이었다. 기자들의 무례한 플래시 세례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류 현은 뭔가 잘 못 돌아가고 있다고 직감했다.
‘정부놈들이 갑자기 해탈이라도 했나?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동네방네 다 떠들었을 줄 알았는데?’
류 현은 구둣솔같이 뻣뻣한 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했다. 4주 가량 쌓여온 피로에,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뻗어버리기에는 너무 찝찝했다.
류 현의 찝찝한 기분과 별개로 서해란은 밝은 얼굴로 류 현에게 다가왔다. 대령 계급장을 단 중년 남자는 네 다섯걸음 거리에서 멈춘 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무사한 모습으로 다시 봬서 기쁘네요. 무사 클리어 축하드려요.”
거지 왕초꼴을 하고 있는 류 현의 더러움을 신경도 쓰지 않는지 서해란은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류 현은 대충 팔만 몇 번 흔들어준 후에 물었다.
“제가 저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류 현은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원정대를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용도를 다한 던전 입구가 점점 쪼그라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해란은 조금 아쉬운 듯한 눈으로 던전 입구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들어가 계시는 동안 꽤 많은 일이 있었죠. 솔직히 전 이렇게 모두 무사귀환 할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묘하게 이전보다 정중해진 것 같은 해란의 대꾸에 류 현은 고개를 기울이며 재차 물었다. 자꾸 감기려는 눈을 비비적거리는 건 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말씀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류 현은 물으면서도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모두 상상해봤다. 칼리프 그 여자는 X던전을 ‘문’, 석비를 ‘열쇠’라고 표현했었다. 화련 또한 던전 안에서 본 기괴한 마법진을 보고 게이트가 닫히고 있다고 했으니, 재수가 없을 경우 그가 다른 곳을 도전할 시간도 없이 ‘문’이란 게 열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문’ 너머에는 뭐가 있다는 것일까? 악룡의 둥지나 왕의 영지 같은 두루뭉술한 표현은 별 쓸모가 없다. 악룡의 둥지 같은 경우에는 던전 안에서 언급을 되는 걸 두 번이나 봤지만, 그게 뭔지 구경도 못 했으니까.
류 현조차 이전 생에서 겪어보지 못한 일이니, 뭐든지 정보가 필요했다.
“저도 말씀드리고는 싶은데...일단은 숙소로 가셔서 쉬셔야 할 거 같네요.”
이야기를 들을 여력정도는 남아있다고 주장하려던 류 현은 해란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희란과 화련은 서로 뒤엉킨 채로 이미 꿈나라로 떠난 상태였다. 저런 자세로 어떻게 저런 행복한 표정으로 잘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다른 이들의 상태도 그리 다르진 않았다. 칼리프 클랜의 커플도 서로 딱 붙은 채 곧 그렇게 될 것 같았고, 웨인은 창으로 몸을 지탱하고는 있지만, 고개는 이미 땅으로 향한 상태였다.
연신 눈가를 비비며 하품을 연발하고 있는 승하가 그나마 가장 멀쩡한 편이었다. 류 현은 미궁 안의 조명 때문에 암습당할 일도 없었지만, 깊게 잘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플레이를 끝낸 플레이어에게 가장 필요한 걸 잊고 원정대를 붙들어뒀다니, 아무래도 자신도 수면 부족인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건 좀 자고 일어난 뒤로 미뤄야겠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게 뭐가 있겠어요. 숙소를 준비시켜놨으니 따라오시길.”
***
이전 생에서 류 현은 살인마라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였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먼저 친 적은 없고, 대부분 상대의 웃기지도 않은 사정에 휘말려서 싸우게 되었던 거지만 류 현은 그 싸움들을 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맺었어야하는 상대였으니까.
그러나 상대를 죽이고 후련하거나, 유쾌했던 적은 없었다. 누나를 노렸던 ‘터주’를 괴멸시켰을 때도 통쾌함은커녕, 찝찝함만이 그의 가슴 속에 남았었다.
그렇다고 해서 류 현이 얼굴도 잘 모르는 인간에게 죄책감이나 살인의 부도덕함을 따질 정도의 공감능력이나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류 현은 기나긴 경력을 가진 플레이어고, 플레이어의 경력이 길어질수록 남는 건 심리치료로도 어찌할 수 없는 파괴적 성향뿐이다.
리치의 손짓 하나에 수 천구의 시체가 일어나고, 드래곤 브레스 한 방에 도시가 괴멸되는 꼴을 보고 나면 사람 목숨이 사람 목숨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플레이어 경력이 길어질수록 그런 생지옥을 보게 되는 시대에 류 현은 최전선을 전전했다.
서해란이 가져다준 일간 신문과 인터넷 기사, 동영상들을 보고 다른 두 곳의 X던전에 진입한 원정대의 피해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류 현의 뇌리에 가장 먼저 스친 건 아깝다는 생각이었다.
국적이 어떻든 간에 인류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소중한 전력이었으니까. 류 현에게 협조할 가능성이 낮은 이들이라도 말이다. 3차 ‘대소환’이 터지고 나면 비협조적인 인원의 손실조차 아쉽게 될 테니까. 어찌됐든 간에 살아있는 한 그들도 괴수와 싸워야 하고 그것만으로도 꽤 힘이 된다.
서해란이 가져다준 신문과 동영상에는 그런 소중한 전력들이 무가치하게 죽어나갔다는 이야기가 아주 짧게 적혀있었다. 그들의 죽음 자체를 보도하는 기사는 이튿날까지만 보였고, 그 뒤로는 죽은 플레이어들이 낼 수 있는 경제적 효용을 바탕으로, 이번 원정으로 입은 경제적 타격이나 이후 괴수 치안 불안에 대해서 추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류 현은 더 이상 볼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태블릿 피시를 내려놨다.
“러시아가 의외로 저력 있는 모습을 보여줬군요. 아프리카 원정대 증에서 일본 측 인원은 전멸인데 러시아는 1/3이 살아나오고 중국 측 인원까지 보호해서 나왔다라...미국은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라인업을 들여보냈었고...”
삼분의 일. 통상 전쟁에서는 저 수치에 해당하는 사상자가 나오면 부대 전투 불능상태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번 원정에서는 저 수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괴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전력손실이다. 부외자 마저 경악할만한 수치.
류 현의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해란은 덤덤한 류 현의 반응에 소름 돋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이제 2년을 채워가는 루키가 맞단 말인가?
던전을 들락거리다보면 온갖 더러운 꼴은 다 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람 목숨이 사람 목숨 같지 않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필요하다. 보통은 정서적 불안증세를 보이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거나, 주저앉게 되는데 이 남자는 그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서해란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우려의 말들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일본 측에서 보낸 인원이 스사노오 클랜이 빠져있긴 해도, 중국 측 인원과 비교하면 질적으로 우월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버렸죠.”
“총리의 자진사퇴라...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보네요.”
“스사노오 클랜을 제외하면 상위 플레이어 전력 대부분이 전멸당한 거랑 마찬가지니까요. 거기다가 던전은 클리어하지도 못했고...”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빠르게 사퇴할 줄은...”
입으로 하는 말과 달리 생각은 영 딴판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열쇠’도 없는데 어쩌겠어?’
류 현은 말끔하게 면도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미 흥미를 잃은 신문을 읽어 내려가는 척했다.
‘1/3이라도 나온 게 신기한데. 미국도...별 다를 건 없군. 그래도 미국은 미국이야. 지벡 건터 같이 눈에 띄는 실력자도 없는데 이 정도로 살려서 나오다니. 중국은...뭘 믿고 이런 라인업으로 밀어 넣은 거야? 진짜 살아나온 게 용하네. 러시아에 뭐라도 먹여놨나? 일본은 뭐 때문에 파견한 거지? 이전에는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하던 인간들이?’
‘그래도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 거 같은데...제의 시기가 문제네. 저쪽에서 어떻게 깨달라고 요청하면 그게 최고긴 한데...포화기간 표시도 안 되는데 선뜻 지원 요청을 하려나?’
류 현이 느끼기에 X던전의 난이도는 블랙정도가 아니라 이전 생에 존재했던 최고 난이도 던전인 화이트, 그 이상이었다. ‘열쇠’가 없다는 가정 하에.
‘‘열쇠’가 없으면 그 이상이지. 젠장, 무슨 던전 난이도가 이렇게 무식하게 올라가? 이러다가 진짜 던전에서 본 드래곤 같은 거 튀어나오는 거 아냐?’
절로 진저리 쳐지는 상상이었다. 류 현은 애써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내며 말했다.
“어찌됐거나, 당분간은 쥐 죽은 듯이 지내야겠군요. 우린 그냥 열심히 던전 깨고 나온 것 밖에 없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있을 줄이야. 아까 그 대령 아저씨 태도로 봐선 정부도 그러길 바라는 것 같고.”
“네, 불편하시더라도 당분간은...”
“어쩔 수 없지요. 몸 값 높이기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요. 덤으로 의심도 좀 털어내고요. 팀원들은 쉰다고 좋아라 할 테니 문제될 건 없죠. 해란 씨가 대신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쉬는 동안 정부 인사랑 말꼬리 잡고 빙빙 돌고 싶진 않거든요. 곤란하시면 제가...”
“아니에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류 현을 보며 서해란은 어색하게나마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