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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화 〉탐식마(貪食魔) (136/429)



〈 136화 〉탐식마(貪食魔)

[---!] 골렘의 소리 없는 포효가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여전히 저릿저릿한 감각을 선사하는 마력의 파동에 나승하는 입술을 핥으며 골렘의 등판을 향해서 뛰어올랐다.

스칵! 오늘만 해도 수십 번 내려친 참격이 골렘의 등을 갈라놓았지만, 손끝에 걸리는 맛이 시원찮았다. 칼끝만 살짝 들어가는 것에 그친 것이다. 승하는 혀를 차면서도 미련 없이 골렘의 등판을 박차며 뒤로 뛰었다. 곧바로 골렘의 관절기동한계 따윈 없는 것 같인 팔이 그녀가 디뎠던 등 부분을 후려쳤다.

“쯧...”


쿵! 꾸웅! 콰앙!

승하가 골렘의 시선을 잡아끄는 동안 나머지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는지, 골렘의 몸이 뒤로 기우뚱 기울었다.

체고가 거의 6미터에 달하는 흙거인이 뒤로 넘어가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라고 할만 했으나, 승하의 시선은 제 칼에 머문 채였다. 흙거인의 팔을 세 번이나 베어낸 그녀의 칼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날이 다 나간 건 물론이요. 휘두를 때마다 자루에서 삐걱거리는 것이, 이미 수명이 다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나름 한 자루에 아홉 자리  가격은 되는 놈인데...’

안정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던전 급수가 높아질수록 플레이어의 몸값도 치솟지만, 그 플레이어가 요구하는 장비 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귀하신 몸인 상위 플레이어의 목숨 줄이기도 했지만, 국가나 길드 입장에서는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상위 던전에서 얻은 부산물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경우에 플레이어가 가지고 나온 부산물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지불하기 때문에 정작 생산자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어 본인조차  장비에 갈아 넣을 부산물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자연스럽게 거품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뒷배경을 고려했을 때, 승하의 손에 쥐여진 1억 5천만원 상당의 장검은 검성의 손에 쥐여진 것치고는  많이 저렴한 편이기는 했다. 퍼플 던전에서 나온 재료로 만들긴 했지만, 같은 급에서 나온 다른 장비들에 비하면 찌꺼기를 긁어모아서 짜낸 느낌? 퍼플 던전을 넘어서는 최상위 던전에 이런  차고 들어왔다는 걸 알았다면, 알 라시드나 웨인이라면 제 장비를 빌려주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승하는 이 저렴한 칼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고, 오히려 이런 칼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칼마저 부러진다면  던전에 들어와서 부러뜨려먹은 칼이 벌써 일곱 자루 째가 되니까. 골렘에게 부러진 칼만 벌써  자루가 넘었다. 칼의 가격을 떠나서, 명백하게 장비 소모율이 높았다.


마력검만 발동시킬 수 있으면 나뭇가지로 바위도 뭉개버릴  있는 승하에게는 낯선 상황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해당 던전을 출입하는 원정대 평균 장비 수준보다  단계 낮은 수준으로 무장하고 다녔지만, 장비 문제로 곤란에 빠진 적은 단  번도 없었다.


이 던전에서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퍼플 던전의 주인 노릇할만한 괴수들이 줄줄이 나타나서 예상보다 더 소모가 되긴 했지만, 만난 괴수 라인업을 생각하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의 칼을  자루를 삼키고도 모자라서, 네 자루 째까지 작살내놓은 이 던전의 보스로 보이는 골렘이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특수능력 때문에 칼끝도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블루 던전 첫 트라이 때 같네.’

오죽하면 믿을 건 마력검 밖에 없었던 시절이 떠오를 정도였다. 마력검으로 괴수의 방어는 뚫을 수 있는데, 검이 못 버텨내던 시절.

그 때 당시 그녀의 마력검 컨트롤이 미숙하기도 했지만, 검 자체가 너무 물러서 제대로 휘둘려보려고 하면 부러져나가곤 했다. 마력검은 무적이 아니니까. 마력검을 발동하기 위한 마력을 버티고, 마력검을 뚫고 검을 부식시키는 괴수의 마력도 버텨야만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있는 것이다. 마력투과율을 높이기는커녕, 무기 사용자의 마력작용을 제대로 버틸 수 있는 무기조차 만들지 못하던 시절의 일이다.

‘아무리 별 다른 내부정보 없이 들어왔다지만, 진짜 못 해도 2단계는 더 높은 거 같은데...왜 갑자기 이렇게 난이도 널뛰기를 하는 거지?’

승하는 그 원인을 저 미친 듯이 단단한 보스몹에게서 구했다. 보스몹의 단단함이 이제까지 봤던 어떤 괴수와도 비교가 안 됐다.  방으로 넘어오기 전에 원정대를 하루 동안 돈좌시킨 트윈 헤드 라미아도 5성리치보다 한 수 위처럼 느껴졌는데,  골렘은  했다. 이제까지의 난이도 상승률을 생각하면 못해도 2단계는 높은 급. 그녀의 마력검이 아무리 완성도 높아도, 2단계 이상 차이는 메우기는 어렵다.

그 근거로 단순 가격으로만 따지자면 승하가 들여온 칼 열다섯 자루를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비싼 무기를 세 번이나 갈아치운  라시드가 있으니까. 마람은 아예 무기를 내버리고 맨손으로 날뛰는 중이었다. 맨주먹을 마력검의 응용으로 보호하느라 체력소모가 심한지, 공격빈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꽈앙! 주춤하는 마람에게로 달려들려던 골렘의 오른팔이 재차 터져나가며, 골렘이 물러섰다. 승하는 허공을 향해서 주먹을 내뻗고 있는  현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아예 검은 안개에 파묻히다시피  류 현은, 지치기는 하는 건지 뒤로 빠져서 다시 사슬의 조정에 힘쓰기 시작했다.


수정은 힘찬 공명음과 함께 내뱉은 사슬을 끌어당기기 시작했고, 류 현처럼 뒤로 쭉 빠지려던 골렘의 발걸음이 강제로 멎었다. 콰르릉! 수정에서 튀어나온 사슬에 옮아 메인 골렘을 벽력이 후려쳤다.

‘...이렇게 딴 생각 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 있으니까 가능한 거지만.’

승하는 자신의 친구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 골렘으로 이 던전의 공략이 완료된다면, 일등공신은 수정도, ‘열쇠’도 아닌 류 현의 존재다.


골렘의 심장부로 보이는 저 시커먼 볼링공 같은 물체가 드러나고서, 수정에서 사슬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사슬에 맞은 골렘은 움직임이 둔해지고, 재생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팔이 하나 증발했는데 10초도 안 돼서 재생하고  팔로 주먹을 날리는 짓을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승하는 그런 것으로 류 현의 공로를 상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수정이 골렘을 구속하기 전까지 혼자서 골렘을 막아서는 걸 넘어서 두들겨 팬 건,  현이었으니까. 칼자국  번 내고 나면 칼이 거덜 나는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을, 탱킹하고 딜까지 쑤셔 박았으니 혼자서 다했다고 해도 대놓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터.


‘저번에 보긴 했지만...진짜 ‘강림’켜면 장난 아니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훈련을 돕고 있었기에 더 놀라웠다.  때까지의 류 현은 저렇게 대놓고 몸을 버리는 식으로 싸우지 못했으니까. 너무  상처를 입어서 재생으로 마력 소모가 심해지면 제어할 수 없게 된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골렘과 타격전을 벌여서 혼자서 묶어두고, 또 다른 능력으로 골렘의 방어력까지 갉아 놨다. 그가 휙휙 가볍게 던지는 파쇄권은 골렘의 사지중 하나를 여지없이 뭉갰다.

‘실전에 강한 타입이라는 건가? 평소 하는 짓만 보면 연습한 만큼만 나오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냉정히 평가해도 그가 이 던전 내에서 보여주는 위력은 검성,  이상이었다. 승하는 멀찍이 떨어져서 골렘의 틈을 노리는 척,  현의 원맨쇼를 관찰 중인 원정대원들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봐도 동경 같은 부류의 긍정적인 시선이 아니었다.


‘살살 할 수 없는 괴물이 상대이긴 했지만...나가면 좀 골치 아파지겠는데.’


***

까드득! 파창! 쿠웅! 있는 힘껏 내리꽂은 송곳이 검은 구체의 단단하기 그지없는 표면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자 볼링공 크기의 구체는 금이 하나 쩍 가더니, 손쓸 새도 없이 금이   세 개 늘어나다가 안에서 작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깨져나갔다.

구체가 골렘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었는지는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팔다리가 수십  터져나가고, 머리도 수차례 터져나갔지만 굳건하게 버티던 골렘이 실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무너졌다. 류 현은 그 위에 드러누운 채로 골렘과 함께 같이 뒤로 넘어갔다.

‘죽겠다...어설프게 제어 안하고 그냥 개방했으면 차라리 이렇게 피곤하지는....젠장,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칼리프 그 여자가 바람 넣었다고 바로 납득해버리는 거냐? 정신 차려라 류 현.’

그런 생각이  정도로 피곤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슬아슬하게 ‘강림’을 유지하면서 충동을 억누르라 정신적으로는 이미 탈진 상태고, 어설픈 ‘강림’ 때문에 마력까지 거덜난 상태였다.

타닥타닥 나무가 타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오른 주먹이 그 결과였다. 안으로는 파쇄권을 위한 자신의 마력을 견디고, 밖으로는 골렘의 물리력을 견디다가 결국 깨져버린 주먹의 재생에 할당할 여유조차 없었다.

화련과 희란이 기겁해서 그를 부르며 달려왔기에 류 현은 그대로 털고 일어나야만 했다.


“저 멀쩡하니까 그렇게 안 뛰어오셔도 됩니다. 좀 피곤해서 그럽니다. 피곤해서.”

입으로 하는 소리와는 달리  현은 끙 앓는 소리와 함께 골렘의 잔해에서 뛰어내렸다.


‘구속구까지는 알겠는데 대체 ‘열쇠’기능은 언제 발휘되는 거야? 설마 저거 말고 또 뭐가 있는 건가?’


골렘의 잔해를 돌아보며 류 현은 몸서리쳤다. 지금은 4성 리치가 튀어나와도 항복을 외쳐야할 판이다.


‘젠장, 그리고 구속구 발동도 너무 늦었잖아. 이 정도면 거의 화이트  이상인데. 차라리 6성 리치 두세 마리 상대하는 게 낫지...’

‘열쇠’가 제 기능을 하기 전까지 못해도 화이트 급의 괴물과 치고받은 게 결정적이었다. 차리라 혼자서 들어왔다면 일이 편했을 것이다. 원정대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격을 몸으로 받아낼 필요도 없었을 테고,  이전에 그냥 ‘강림’발동 시키고 정신줄 놨다가 정신 차리면 모든 게 정리 되어있었을 테니까.


‘마력이, 던전이 부족해...젠장, 그렇다고 3차 ‘대소환’ 빨리 터지라고 빌 수도 없고.’

류 현은 왼손으로는 제 이마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골렘의 잔해에 가져다대었다. 정말 별 생각 없이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순하지 않았다.


우우웅! 빠직! 키이잉!


“어...?”
‘씨발, 설마 또 야?’

깨져버린 골렘의 코어에서 재차 파열음이 터져 나오더니, 그 속에서 한줌도 안 되는 크기의 작은 구슬하나가 튀어나왔다. 코어와 마찬가지로 검은빛의 구슬은 맹렬하게 회전을 시작함과 동시에 황금빛으로 백열하기 시작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황금빛에도 류 현은 구슬을 똑바로 노려보며 남은 마력을 박박 긁어모았다.

‘씨발, 파쇄권 한 방 이상은...’

류 현이 ‘강림’을 다시금 고려하던  때였다.

“마스터! 그거 부수면 안 돼요!”
“.....?”

그에가 다가오던 화련의 다급한 외침이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류 현은 반사적으로 화련을 돌아보며 시선으로 물었다. 그러면서도 긁어모은 마력에 박차를 가하며 쥐어짜낸 파쇄권을 준비했다. ‘저게 뭔 줄 아십니까? 아니 아까 전에는 게이트라면서. 뭔가 넘어온다는 거잖아? 그럼 막아야 하는데?’ 4주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쌓인 피로감이 그의 사고에 끼어들며 자꾸 속도를 늦췄다. 그 머뭇거림이 화련에게는 기회였다.

“게이트! 그거 게이트 폐쇄식이에요!”
“...뭐?”

화련의 외침에 류 현이 한계까지 긁어모은 집중력과 마력이 잠깐이지만 흐트러졌다. 그 틈을 타 구슬이 발하는 빛이 한계에 도달했고,


쑤웅! 쩌엉! 구슬은 사방으로, 정확히는 공동테두리를 따라 솟아오른 여섯 개의 탑을 향해서 빛을 내쏘아냈다. 빛을 받은 탑들은 구슬과 공명하듯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탑과 구슬은 서로 빛을 주고받으며 복잡한 육망성 형상을 이루었다.

중앙의 탑에 마지막으로 불이 들어오자,


키이이!

“큭?!”

류 현의 오른손에 잠들어 있던 ‘열쇠’가 빛을 토해냈다. 그의 오른 손이 토해낸 빛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허공에 글자를 수놓았고, 화련은 홀린 것처럼 그 글자들을 눈으로 쫓았다.

“악룡의 둥지...연결 폐쇄. 남은 통로...두 곳...왕의 영지, 천공성. 왕의 영지...연결 50프로...”

더듬더듬 글자를 읽어가는 화련의 말을 제대로 모두 이해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읽어나가는 화련 본인조차 그랬다. 그저 폐쇄라는 단어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을 뿐. 던전이 끝났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모두가 폐쇄라는 단어에서 직감했다.


끝났다!

류 현은 폐쇄라는 단어를 인지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류 현의 뒤를 희란과 화련이 따랐고, 다른 이들도 오래지 않아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들은  주저앉은 자세에서 드러눕게 되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갑자기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끝이다! 드디어 끝을 봤다는 기쁨이 순식간에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


황금빛으로 일렁거리는 거대한 마법진은 원정대를 치하하는 것처럼 따스한 빛을 흩뿌리며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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