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탐식마(貪食魔)
쿠구구구!
“이런 젠장! 이번에는 또 뭐야? 어떻게 된 게 이 던전은...”
“모두 이 쪽으로! 류 현님! 류 현님!”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흔들리는 공동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웨인은 공동 중앙의 탑 앞에 있다가 먼지구름에 삼켜진 세 사람을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돌격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뛰어들었다가 자신까지 변을 당하면, 원정대 전력은 반 토막 아니, 그 이상 전력이 급감할 테고 생존율은 더 떨어질 것이다.
어찌 보면 야속한 처사였지만,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류 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웨인이 대장역할을 승계하는 게 사전에 약속되어 있다. 앞뒤 생각 안하고 먼지구름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희란을 붙잡아서 말리는 게 웨인의 역할인 것이다.
쾅!
웨인이 몸부림치는 희란을 돌려세워서 설득을 위해서 입을 떼려던 그 때, 먼지구름 속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웨인은 반사적으로 ‘가방’을 열어젖히고, 자신의 염동력으로 띄울 수 있는 무기 전부를 어깨 높이로 띄웠다.
‘대체 저 안에서 뭐가...?’
쿵! 쿠웅! 콰앙!
웨인의 의문은 곧 바로 풀렸다. 공동 중앙에 자욱하던 먼지구름이 흔들릴 정도로 묵직한 충돌음이 연달아 터져 나오더니, 먼지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뒤에 보인 것은,
“로봇...? 아니, 골렘?”
누가 봐도 비생명체로 보이는, 거대한 골렘이었다. 체고가 못해도 5미터는 넘어 보이는 흙으로 이루어진 거인은 오른 주먹을 바닥을 향해 내려 뻗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골렘의 주먹 끝을 시선으로 쫓은 웨인은 불가해한 것을 본 기분에 휩싸였다.
꾸드득! 콰드득! 공성추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안 될 것 같은 거대한 골렘의 주먹을 막아서고 있는 건 류 현이었다. 둘레 50cm도 되지 않을 주먹이 골렘의 거대한 주먹을 틀어막는 걸 넘어서, 천천히 주먹을 부수고 파고드는 중이었다. 류 현의 몸 위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이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꺼림칙한 감각에 웨인은 몸서리쳤다.
뻐엉! 꽈르릉! 류 현과 맞닿아있던 골렘의 주먹이 폭발하며 골렘이 뒤로 나자빠졌다. 에너지 드레인으로 항마력과 외장갑을 갉아내고, 파쇄권을 있는 힘껏 연달아 터뜨린 결과물이다. 하지만 웨인은 그런 속사정을 알 방법이 없었고, 마법사도 아니고 스트라이커가 괴수를 ‘터뜨리고’ 있는 상황에 황당해할 뿐이었다.
플레이어의 힘이 아무리 체급을 무시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 간의 얘기다. 괴수와 플레이어 간의 문제가 되면 플레이어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보다 강력한 스펙을 자랑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 체급까지 차이가 난다면? 스트라이커는 파리 목숨 그 자체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류 현이 하고 있는 짓은 파리가 코끼리와 힘겨루기 하고 있는 짝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웨인은 헛웃음 흘릴 틈도 없었다.
“자, 여기. 잘 지키고 있어. 잘 못 되면 류 현이 물어뜯을지..”
“아 쫌! 그냥 가요!”
승하가 화련을 옆구리에 끼고 펄쩍펄쩍 뛰어 오더니, 웨인의 앞에 내려놓고는 다시 훌쩍 뛰어올라서 골렘과 치고받고 있는 류 현에게로 날아갔다. 화련은 곧바로 손을 펼치고 승하를 보조하기 시작했다.
쾅! 쾅! 꽈릉!
어이없을 정도의 재생력으로 터져나간 오른손을 수복한 골렘이 다시금 류 현에게 달려들었지만, 몸을 돌보지 않는 무차별 타격전은 영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검은 아지랑이에 휩싸인 류 현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골렘의 몸뚱이는 크래커처럼 부서져나가는 반면, 류 현은 딛고 있는 땅바닥이 내려앉고 있을 뿐 별다른 타격이 없어보였다. 발을 붙이고 있는 땅이 점점 내려앉고 있어 곧 몰릴 것 같아보였으나,
쉭! 골렘의 뒤를 덮쳐든 승하에게 재차 오른팔이 날아가면서, 류 현은 움푹 팬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승하는 칼에 이상이 생겼는지 쥐고 있던 걸 내버리고 허공에서-‘가방’에서- 새 칼을 끄집어냈다.
“구경만 할 건가요?”
넋 놓고 거인과 남자의 격투를 지켜보던 웨인은 화련의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넋 놓고 보고 있으려고 온 게 아니지.’
웨인은 멀찍이 떨어져서 손 놓고 구경 중인 칼리프 클랜 커플을 불렀다.
***
쾅! 꽈릉!
장난처럼 내뻗은 왼손은 골렘의 몸에 기다란 상처를 남겼다. 탐욕의 안개는 그대로 들러붙은 채, 골렘의 몸을 갉아대었다.
‘시끄러.’
투수가 전력투구하는 것처럼 있는 힘껏 내던진 오른 주먹은 골렘의 덜 재생된 오른 주먹은 물론, 어깻죽지까지 날려버렸다.
콰지직! 쩌쩍!
‘시끄럽다고.’
눈에 보이는 위력이 다가 아니었다. 있는 힘껏 펼친 파쇄권의 속에는 탐욕의 안개가, 생물 비생물 가리지 않고 갉아먹는 탐욕스러운 그 힘이 담겨있었다. 탐욕의 안개는 주인의 몸을 떠나서도 그 탐욕스러움을 버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검은 안개는 골렘의 체내까지 스며들어, 직접 타격이 닿지 않은 곳까지 영향을 끼쳤다. 승하가 다 부러져가던 칼로 골렘의 오른팔을 단 칼에 베어낼 수 있었던 건 이 덕이었다.
쿠웅! 순식간에 재생된 골렘의 왼팔이 류 현을 후려쳤다. 류 현은 피하지 않고 이마로 그 타격을 받아냈다. 골렘의 왼 주먹에 쩌적하고 큰 금이 내달렸다. 효과는 제쳐두고 무모한 것을 넘어서, 제 몸을 불사르는 행동이었지만 류 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좀 닥쳐!’
차라리 머리가 터져서 짜증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쉭! 소리라도 잘라낼 것처럼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일격이 골렘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골렘의 허리를 양단하기에는 부족했지만, 1/3지점까지는 깎아내는 데 성공했다. 동물로 치면 척추가 끊어진 것과 다름없는 타격이었다. 동물과 다르게 골렘은 절명하지 않았지만.
일순간, 골렘의 움직임이 멎자 류 현은 이마와 주먹간의 힘겨루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승하도 숨고르기를 위해서 뒤로 빠지자, 웨인과 알 라시드가 골렘의 등 뒤를 덮쳐들었다. 둘은 류 현처럼 골렘의 사지중 하나를 박살내놓진 못했지만, 약해진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골렘의 신경을 끌었다. 에너지 드레인에 노출되었던 부위에 공격이 꽂힐 때마다 골렘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몸이 푹푹 파여 나갔기에, 시간 끌기 정도는 충분했다.
‘젠장, 잘 한 건지 모르겠군.’
류 현은 딱히 숨이 차진 않았지만, 심호흡을 하며 고민했다. 자신이 너무 무리한 것은 아닐까 하고.
체감 상으로는 흙이 아니라 강철로 되어있는 것 같은 골렘을 과자처럼 부서 버릴 수 있었던 건, 혼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던 류 현이 ‘강림’이라는 으뜸패를 일치감치 꺼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발동시킨 건 아니었다.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뇌혈관이 끊어질 것 같은 지독한 집중을 유지해가면서 주먹을 날리고 외장갑을 긁어내었다. 틈틈이 승하의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럼에도 회피탱커 노릇은 아예 내다버려야 했다. 파쇄권을 한 번 날릴 때마다 충동질에 휩싸여만 했으니까. 눈앞의 적을 뜯어먹고 싶다는 충동 말이다.
류 현은 당장이라도 정신줄을 놓고 저 골렘을 뜯어먹고 싶었다. 골렘을 움직이는 코어. 리치의 라이프 배슬 이상의 마력 덩어리다. 거기에 6성 리치 이상, 7성 이하의 스펙을 가진 놈이라면 코어의 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
‘진짜 환장하겠군. 3차 ‘대소환’도 아닌데 저런 괴물이 벌써 튀어나오다니.’
류 현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충동을 떨치곤, 던전에 진입한 후에 계속 가지고 있던 걱정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강림’이라는 강력한 패 덕에 골렘과 타격전 우세라는 위업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류 현은 골렘을 완전히 찍어 누를 수는 없었다. 온전하게 펼친 ‘강림’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골렘의 재생력과 항마력이 비 네임드 몹 수준이 아니었다.
골렘이 아무리 비생물 괴수라도 에너지 드레인을 이렇게 견디는 건 말이 안 됐다. 그가 이전 생에서 파괴했던 가장 강력한 골렘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비생물이라도 심장과 뇌역할을 하는 코어가 에너지 드레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젠장, 뭐가 열쇠야? 이래선 그냥 좀 편리한 정도잖아.”
제 등 뒤에 둥실둥실 떠있는 수정을 돌아보며 불평을 입에 담긴 했지만, 류 현은 앞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래, 내가 다 그렇지. 뭣 좀 꿀 빨려고 하면 꼭 이렇게...”
파캉! 류 현이 뛰어오르려던 그 때였다. 승하가 연속 베기로 흠집을 잔뜩 내놓은 골렘의 흉부에 마람의 주먹이 작렬하면서 흉부장갑이 터져나갔다. 흉부 장갑이 사라지자, 골렘의 가슴 안에 있던 볼링공만한 시커먼 구슬 같은 것이 드러났다.
‘코어다. 근데 왜 저렇게 커? 보통 주먹만한...설마...’
류 현이 골렘 코어의 끔찍한 내구성을 떠올리고 치를 떨며 저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코어의 내구성에 대해서 의심하려던 그 때,
키이잉!
류 현의 등 뒤에 떠있던 수정들이 빛을 폭사하더니,
촤르륵! 촤락!
그의 팔뚝만한 쇠사슬을 쏘아내었다. 쇠사슬 끝에 달린 쐐기는 정확하게 골렘의 흉부에 직격했다. 코어를 말 그대로 포위하는 것처럼!
“어?”
키이잉! [---!] 골렘이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쇠사슬을 떨쳐내기 위해서 몸부림쳤지만, 쇠사슬은 굳건했다. 류 현은 수정과 연결되어있어서 인지 몰라도, 골렘이 괴로워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변화를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뭐야? 저게 갑자기 왜...? 이거 6성 리치급도 안 되겠는데?”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류 현은 땅을 박차 올랐다.
***
엔틱풍 가구로 가득한 방은 조명마저 그에 맞춘 것처럼 어둑어둑했다. 업무를 보는 방에는 맞지 않은 밝기였지만, 책상 위에 엎드린 채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중년의 남성에게는 고려대상이 아닌 듯 했다. 그 옆을 지키고 서있는 청년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상 각하. 곧 기자회견 시간입니다.”
“......”
청년의 부름에도 책상에 엎드린 중년 남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잠이 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청년은 한 나라의 총리대신이, 센터시험을 망친 수험생처럼 엎어져 있을 때의 대응 매뉴얼은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떠올리고는 그를 다시 한 번 불러야하나 고민했다. 자신이 말한 것처럼 기자회견은 코앞이고, 총리대신이라는 자는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켄 군, 말해보게. 내가 잘못 판단한 건가? 그들을 전부 보냈어야 했나?”
청년, 마에다 켄은 총리대신이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엎드려 있던 총리대신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피로감과 좌절감이 적절하게 뒤섞여서 음울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전멸이라니...전멸이라니. ‘인형사’와 스사노오 클랜을 포함시키진 않았다고는 하나, 최선의 라인업이었어.”
중년의 남자는 책상을 부술 기세로 두 주먹을 쾅쾅 내리치더니, 다시 책상 위로 엎어졌다.
“대체, 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우리 일본의 자랑스러운 대 상위 던전 플레이어 전력 반절 이상이 날아갔다고? 우리 땅에 나타난 것도 아니고 이만 리 타향의 던전 안에서? 유골도 찾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그러니 그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이라도 갖자고?”
청년, 마에다 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는 총리대신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정치적 실패가 아닌, 죽어나간 젊은이들을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도저히 섣부른 위로의 말은 건넬 수 없었다.
“...그래, 슬픔에 빠져있는 건 유가족의 권리이지.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정치가가 할 소리는 아니지. 가세, 켄 군.”
5분여 정도 침묵으로 보내던 총리대신은 엎어져 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벌떡 일어나서 문밖으로 향했다. 그의 젊은 보좌관 마에다 켄은, 총리대신의 임기 마지막 될지 모르는 기자회견 장소로 그를 안내하기 위해서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