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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화 〉탐식마(貪食魔) (134/429)



〈 134화 〉탐식마(貪食魔)

훌륭한 사냥꾼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길에 떨어진 나뭇가지로도 사냥감의 목을 꿰뚫을  있는 무력? 돌격해오는 사냥감을 맨몸으로 가로막고, 급소를 찌를 수 있는 담력? 그것도 아니면 발자국 흔적만 봐도 사냥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경험?

이 질문에 대해서 류 현은 단언할 수 있다.

사냥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지킬  있는 평정심이라고.

사냥꾼의 미덕은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최적의 기회가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최적의 기회를 잡아채는 것이고, 굳건한 평정심이야 말로 그 기회를 제대로 후벼 팔 수 있는 최고의 비수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류 현은 지금 그 최고의 비수를 손아귀에서 놓기 직전의 상태였다. 아직 던전 안이고, 심지어 던전의 주인의 얼굴은 보지도 못 했음에도 말이다.


무리도 아니었다.


‘악룡? 악룡의 둥지? 설마...’


화련이 읽어낸 유적의 글자 중에는 그가 무시할  없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으니까.


악룡. 악룡 아지다하카. 그의 누나 류세아와 류 현 본인을 죽인 철천지원수.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아지다하카는 회귀라는 뜻밖의 기회로 얻은 이번 생에서도 그의 앞길을 가로막을 테니까.

이전 생에서 그의 목숨과 맞바꿔서 죽인 원수를 다시 죽이지 않는 이상, 그에게는 미래가 없을 테니까.

뿌드득- 류 현은 어금니가 깨져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를 사려 물었다. 짓씹은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분노를 못 이겨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류 현은  몸에 생채기를 내가면서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평정심이라는 비수를 놓친 사냥꾼은 사냥감 정도가 아니라, 장난감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사실을 몇 번이고 확인했던 류 현은 스스로를 다독거려보려고 노력했다.

‘눈 돌아가서 미쳐 날뛸 때가 아니야. 진정해라,  현. 화련 씨가 읽은 내용이 맞지 않을 수도 있어.’

뿌지직! 류 현이 죽어라 사려 물던 어금니가 결국 깨져나갔다. 너무 선명한 파열음에 뒤따라오던 원정대원들이 눈에 띄게 움찔했지만, 류 현은 그들을 신경써줄 여유가 없었다.


‘일단 아지다하카가 여기 있을 가능성은 낮아. 칼리프  여자가 그렇게 말할 이유도 없고, 던전 안에 얌전히 갇혀 있을만한 놈도 아니니까.’

그 대신 류 현은 정보를 짜깁기하면서 화련이 말했던 내용에 맞춰보려고 노력했다.

이전 생에 접했던 정보 중에서 네임드 몹과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정보를 끄집어냈다. 출저는 이전 생에 만났던 화련이었다.


‘그  화련은 네임드 괴수의 출현에 딜레이가 있는 이유가 게이트가  버텨서 일거라고 했었지. 네임드 괴수가 넘어오는  던전 안에서가 아니라, 던전을 이루던 이세계에서 곧바로 넘어오는  거라고. 그만한 에너지를 가진 존재가 넘어오는 것 자체가 게이트에 부담이라고 했었어. 그만한 에너지를 담고 있을 던전은 없다고. 아지다하카 이후 가장  휴식기를 가졌지만 다음 괴수가  나타난 건 아지다하카가 넘어오면서 게이트가 이전보다 훨씬  망가졌거나, 넘어와 있을 수 있는 네임드 몹 개체 수에 제한이 있을 거라고 말했었지.’

거기에 덧붙여 전생의 화련은 아지다하카가 끝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했다. 그 당시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이었지만, 아지다하카 온 신경이 팔려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현은 그 부분은 대충 넘겨버렸다.

‘악룡, 악룡이라는 타이틀을  네임드 몹은 그 놈 이외에는 없어. 칼리프  여자가 말하는 걸로 봐선 네임드 몹 라인업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만에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지다하카는 아니라는 얘기.’


이렇게 자신의 철학에 따라 사냥꾼에게 가장 필요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둥지...라고 했었지. 둥지라면 설마 아지다하카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 새끼라도 있다는 건가?’

신경이 쏠리는 것은 별 수가 없었다.


 현은 좁은 굴을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벽에 새겨진 글자들의 행렬은 진작 끝이 났고, 원정대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가면서도 아무 말 없이 선도하고 있는 원정대장을 잠자코 따랐다.


굴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백  미터도 걷지 않아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고, 출구를 통해서 굴 안으로 비춰드는 빛이 보였다. 류 현은 마음 같아선 그냥 혼자 뛰쳐나가 알 같은 게 보이면 일단 다 때려 부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류 현은 소리 없이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현은 손짓으로 원정대원들을 출구에서 5미터 거리에 멈춰 세운 후, 발소리까지 죽여 가며 굴 밖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건 또 대체...’

류 현이 굴 밖의 광경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성당건물이었다. 공동은 훨씬 투박한 분위기였지만, 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묵직한 분위기는 다른 것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여기에 파이프 오르간이 놓여있었다면 누구라도 교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류 현은 성당에서 본 것과 다른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보다가, 주변을 면밀히 살핀 후 뒤쪽으로 손짓했다. 여섯 명의 무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오듯이 공동으로 나왔다.


“나도 나름 유적 많이  편인데, 이런 건  처음보네. 유리가 나온 유적이 있던가? 아니, 이렇게 멀쩡한 곳이 있긴 했었나?”

검성 나승하는 류 현이 그랬던 것처럼 스테인드글라스를 멍하니 올려다가 내뱉었다.


“만화경이나 수정구 형태의 아티펙트가 발견된 적은 있습니다만...유적에서 유리가, 이렇게 멀쩡하게 발견된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굴에서  게 전부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단단히 착각했었군요.”

웨인의 대꾸에 승하는 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손가락으로 공동 중앙을 가리켰다.

“련아, 저거 봐봐.”

승하의 부름에 화련의 표정이 확 찌그러졌다. 그녀의 집에서 승하와 대판 술판을 벌인 후. 몇   둘만의 술자리가 더 있었고,  과정에서 화련이 밖에서는 승하에게 존댓말을 하는 관계가 확립되긴 했지만 화련은 저런 애칭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몇 번이나 그런 호칭은 싫다고 의사를 표현했음에도, 제자리걸음이라서 거부감은 더 했다.


하지만 일하는 중에 그런 개인적인 불만으로 틱틱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화련은 잠자코 승하에게 다가갔다. 승하는 화련이 가까이 오자, 그녀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든 말든 어깨동무를 하고 공동 중앙으로 걸어갔다.


공동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화련의 키만  작은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전체가 말끔한 묵빛을 띄고 있는 탑의 탑신부에는, 굴 입구에서 봤던 유적처럼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글자와 마법진의 일부로 보이는 것들이 빽빽하게 새겨져있었다.


승하가 칼집채로 탑을 톡톡 건드리고도 별 일이 없자 화련은 탑에 슬쩍 손을 대고, 눈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읽으려고 했다.

‘으으...룬어 같긴 한데 이런 단어는 본 적이 없...?’

생판 본 적도 없는 형태의 룬어가 문장의 2/3을 채우고 있고, 아는 글자를 이어서 읽으려고 들어도 문맥이 들어맞질 않자 손을 때려고 했으나,


‘어...? 이거 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룬어를  그대로 보기만 하던 화련은 기묘한 위화감을 읽어냈다. 있을 리가 없는 일인데도, 그녀는 석탑에 적힌 글자들의 배열에서 익숙함을 읽어내었다. 화련이 이 익숙함의 정체에 대해서 결론 내리려던 순간,

“혹시 이거 번역기능은 없나? 이거 좀 번역 해 보...?”

뒤늦게 따라온  현이 오른손으로 수정을 만지작거리면서 왼손으로 탑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키이잉! 쿠그그!


“젠장 설마 ‘열쇠’에 반응한 건가?”

탑에 새겨진 글자들이 황금빛을 발하며, 공동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져나가며, 밖에서 비쳐들던 빛이 조명마냥 중앙의 탑으로 모여들었다. 묵빛의 석탑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황금빛으로 백열했다.

빠직! 콰콰!

들썩거리는 공동 가장자리가 내려앉더니, 그 밑에서 중앙의 것과 같은 형태의 탑들이 경계를 따라 여섯 개가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탑들은 중앙의 것을 따라하는 것처럼 황금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쿠구구! 중앙의 탑이 서있는 중심부 반경 3미터가 미친 듯이 들썩거리기 시작하자, 승하가 화련을 들쳐 업고 뒤로 펄쩍 뛰었다.  현도 같이 뒤로 물러났지만, 그의 시선은 탑에 고정된 채였다. 들썩거리며 솟아오르는 탑 밑의 땅속에서, 여태껏 어떻게 눈치 채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볼 것도 없이 괴수가 분명했다. 그것도 6성 리치 이상의 괴물!

‘말이 돼? 왕관 빼고 7성리치가 네임드 몹이었다고!’

문제는 6성 리치의 강력함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하고,  이상 급이면 거의 네임드 몹에 근접한 괴물이다. 뭔가 감각을 저해시키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인지, 정확한 수준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시점에서 나와선 안 되는 괴물인 것은 확실했다.

“마스터! 이거, 이거 게이트에요! 게이트!”


승하의 옆구리에 끼어있던 화련이 소리쳤다. 화련의 말을 듣고  현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가능성이었다.

‘게이트? 설마 네임드 몹이라도 나오는 건가? 젠장, 멍청한 새끼. 그걸 만지긴  만져!’

쿠르릉!


감질나게 조금씩 솟아오르던 탑 밑의 뭔가가 한 번에 확 솟아올랐다. 흙먼지가 일어나며 시계를 어지럽혔지만, 류 현은 작은 움직임이라도 놓칠 새라 눈을 부릅떴다.

반지름 3미터짜리의 원통형 석조물은 안쪽이  찬 게 아니라 빈 공간이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여지없이 뭔가가 들어있었다. 류 현은 시계가 희뿌연 상태임에도 윤곽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었다.

“씨발...”


빈 공간 안에는 거대한 골렘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는 3차 ‘대소환’ 이후, 화이트 던전에서나 볼 법한 골렘이, 눈에 불빛이 들어오자 류 현을 내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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