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탐식마(貪食魔)
그그긍! 키리릭! 고막을 긁어내는 것 같은 마찰음과 함께 벽이 옆으로 물러났다. 못해도 높이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벽이 스르륵 물러나는 모습은 꽤 볼만한 광경이었지만, 원정대원 중 누구도 그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으로 일곱 번째 수정인 보라색 수정을 확보했다. 수정을 발견할 때마다 수정 뒤편을 가로막은 벽이 움직이는 걸 봤으니, 벌써 일곱 번이나 본 광경이니 신기하고 자시고 이전에 그 뒤편에 기다리고 있을 귀찮은 일부터 상상하고 마는 것이다.
가장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는 류 현조차도 제 역할을 끝낸 보라색 수정을 거둬들이는 것 이외에는 벽의 움직임에 관심도 없었다. 자신의 등 뒤편에 부채꼴로 떠있는 수정 무리에 하나가 더 추가된 걸 확인한 류 현은 앞으로 나서며 제 오른손의 ‘열쇠’를 발동시켰다.
다시 미궁을 빙글빙글 돌면서 괴수를 때려잡을 시간이다. 던전에 진입한 지 만 24일째. 류 현은 절로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억눌렀다.
‘생각보다 순탄한데...그래서 문제가 될 줄이야.’
첫 빨강 수정을 발견한 이래로 그들의 행동은 매우 단순해졌다. ‘열쇠’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서 괴수를 때려잡고, 수정이 출력해주는 괴수 목록을 채우고, ‘열쇠’의 안내에 따라 수정을 습득해서 벽을 뚫은 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괴수의 숫자와 질이 보통 던전에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높았지만, 감당불가 수준은 아니었다. 용잡이 팀을 제외하면 원정 대원 하나하나가 세계구급 인지도를 가지고도 남는 실력자들이었고, 뭣보다 미궁이라는 필드가 괴수들에게 호의적이진 않았다. 덤으로 수정이라는 치트급 아티펙트까지.
그래서 문제였다.
시작부터 원정대를 거하게 엿 먹였던 이 던전 특유의 이질감은 ‘열쇠’가 손쉽게 상쇄해버렸고, 미궁타입에 진입하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식수나 식량문제는 수정의 정화기능으로 해결되었다. 그냥 수정 들이대고 정화만 외치면 못 먹는 고기가 먹을 수 있게 되고, 괴수의 피는 식수가 되었다.
원정 대원 중 희란을 제외하면 모두 험한 꼴을 볼대로 다 본 베테랑들이었기에, 괴수 고기에 대한 불평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보존식을 아낄 수 있다는 사실에 기꺼워할 정도였다.
미로 출구 찾기? 괴수만 찾아서 족치다보면 ‘열쇠’가 알아서 안내해주니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원정대는 미로 타입의 던전에서 겪을 수 있는 곤란함은 거의 겪지 않았다. 구획 내의 괴수를 다 때려잡기 전에는 괴수만 가리키는 화살표 때문에 좀 빙빙 돌긴 했지만, 미로 타입이라는 걸 생각하면 양반인 편이었다.
문제점이라면 미로 타입의 문제가 아니라, 던전 난이도를 무시하는 것처럼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땅돼지 같은 하위 괴수과 반대의 의미로 난이도를 무시하는 것처럼 하나같이 수준이 높은 상위 괴수의 존재였다. 거기다가 상위든 하위든 가리지 않고 숫자까지 많았다. 괴수들을 때려잡으면서 어떻게 안 굶어죽고 있었나 생각이 들 정도.
뱀의 하반신을 접붙인 스네이크 리치와 블랙 라미아 같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괴수들이 쏟아지는 건 덤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게 순탄했다. 현존하는 던전 중 최고 던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한 가지 문제점마저, 팀 구성의 호화로움으로 상쇄되었으니 류 현이 우려를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정대는 던전 난이도에 맞는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 탓에 꽤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삼 주가 넘는 기간 동안 집중력을 유지한 건 순전히 개인기량들이 훌륭한 덕택이었다.
‘아랍 커플은 이제 대놓고 딴 짓거리 준비 중인 거 같고.’
두 사람을 돌아보진 않았지만 류 현은 알 라시드의 능글거리는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어젯밤에는 얌전히 잤지만, 엊그제만 해도 거래 품목조차 짐작이 안 가는 거래요구를 해대는 통에 류 현은 진지하게 그를 파묻어버리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나마 웨인이 따지고 들지 않아서 다행이다만은...’
류 현이 웨인 크로이츠 예찬론을 펼치며 다시 한 걸음 내딛었다.
‘어?’
“모두 정...”
류 현이 경고의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끼이익! 세상이 뒤집혔다. 기울어졌다. 찌그러졌다가 폭발하는 것처럼 확 멀어져갔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던 원정대원들이 순식간에 지평선 저 너머 까지 멀어져갔다. 대지를 단단하게 딛고 있던 그의 다리 또한 멀어져갔고, 팔은 이미 어디로 날려갔는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세상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머리만 덩그러니 남은 류 현도 데굴데굴 굴러갔다.
뇌만 풍랑 속에 던져진 것 같은 감각의 혼란 속에서 류 현은 붙잡을 걸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집중했다. 이런 어지러움과 비교도 안 되는 흉폭함을 감추고 잠들어있는 자신 안의 것을 깨웠다.
화르륵! 그의 몸을 기점으로 검은 불꽃이 내달렸다. 발밑으로, 머리 위로, 등 뒤에서. 시선이 닿지 못하는 사각을 가릴 것 없이 검은 불꽃이 미쳐 날뛰었다. 제멋대로 찌그러졌다가 폭발하고, 데굴데굴 구르는 세상이 불타 사라졌다.
미쳐 날뛰던 세상이 불타서 스러지고 나자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병원?”
병원이었다. 그가 정말 싫어하는 장소. 좋은 기억이 없는 그의 역린. 류 현은 왠지 모르게 이 병원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병실 안에는 낯선 물건들뿐이었다. 그가 봐온 어떤 병실도 이런 비싼 장식이나 가재도구가 비치 되어있지 않았다. 마치 주요관리 대상의 개인병실처럼...
병실을 둘러보던 류 현은 넓은 병실에 비해서 왜소해 보이기까지 한 침대를 발견했다. 그 침대가 시트나 매트리스 할 것 없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류 현은 뭐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위에 환자는 없었다. 환자였던, 머리와 사지가 발기발기 찢겨진 사체만이 있을 뿐이었다. 류 현은 손을 뻗어 베개에 얼굴을 쳐 박고 있는 머리를 천장을 보게 했다. 그 얼굴은 그의 누나 류세아의 얼굴이었다.
“쯧.”
쩌엉! 병실이 돌에 맞은 유리창 마냥 터져나갔다. 안개가 바람에 흩어지듯 침대와 가재도구들이 가루로 흩어졌다.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 죽은 누나의 사체가 있던 곳을 내려다보던 류 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미궁으로 돌아왔다. 삼 주가 넘는 기간 동안 익숙해진 조금 어두운 듯한 불빛과 어두운 남청색의 미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의 눈을 가리던 환상이 사라진 것뿐이지만, 류 현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더러웠다. 회귀 후, 누나가 죽었던 순간을 꿈으로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씨발.”
그의 말에 호응 하듯 류 현의 몸에서 탐욕의 안개가 터져 나왔다. 알 라시드와 마람 압둘아지드, 웨인 크로이츠를 의식해서 상위 괴수를 때려잡을 때도 최소한으로 조심스럽게 운용하던 에너지 드레인이 긴 기다림의 한풀이라도 하듯이 미쳐 날뛰었다.
파직! 파지직! 검은 안개가 천천히 주변으로 뻗어나갈 때마다, 스파크가 튀었다. 탐욕의 안개는 제 주인에게 어떠한 간섭도 불허했다. 간섭을 막는 것을 넘어, 사이한 환상을 보여주는 마력을 포식했다.
[끼아악!] 포식의 범위에는 주인에게 달려들려던 밴시 또한 포함되었다. 꺄아악! 반투명한 산발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환수형 괴수는, 이전 생에서 3차 ‘대소환’ 이후 떨친, 마법사 킬러라는 악명에 걸맞지 않게 허망하게 먹혀 사라졌다.
악몽의 전도사들의 악몽이 된 탐욕의 안개는 마음껏 맹위를 떨치며, 홀로 악몽에서 벗어난 주인을 악몽 속으로 던져 넣으려고 몰려드는 밴시들을 집어삼켰다. 류 현은 그런 일에는 관심 없다는 듯,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결국 류 현을 감싸고 있는 탐욕의 안개를 뚫을 수 없음을 인정한 밴시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류 현은 저 귀찮은 괴수들을 쫓지 않았다. 그보다 더 기분 더러운 걸 처리하는 데 온 신경이 다 가있었다.
류 현은 통로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바위 앞에 멈춰 섰다. 바위 중심에 박혀있는 사이한 보랏빛을 발하고 있는 보석을 노려봤다. 순간이지만, 류 현의 항마력을 뚫고 감각을 교란시켜, 틈을 비집고 들어와 환상을 보여준 아티펙트. 값을 따지자면 전투기 한두 대 값은 우습게 넘길 터.
“고맙다. 좃 같은 기분을 상기 시켜줘서.”
콰직! 하지만 류 현의 주먹은 사정없이 보랏빛 보석을 뭉개고, 그것이 박혀있던 바위까지 박살냈다. 다시 주먹을 끌어당기는 류 현의 표정에는 어떤 아쉬움이나 후회도 없었다.
“씨발.”
자신의 역린을 뒤적거린 것이 생물체가 아니라, 그저 부수는 것 이외에는 되갚아줄 길이 없다는 것에 대한 짜증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이히히!][끼아아악!][히아아!]
검은 안개를 머금은 손날이 스치자, 스친 오른팔부터 불에 닿은 비닐봉투 마냥 쪼그라들며 타들어갔다. 밴시는 두 번째 기성을 토해내기도 전에 허공에서 타 소멸했다.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해질 환수타입 괴수를 손짓 한 번에 소멸시킨 류 현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미로 벽을 밟고 훌쩍 날아올라 슬쩍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 다시 밴시 둘을 소멸시켰다.
“염동능력자들은 쟤한테 쪽도 못 쓰겠네. 아, 그건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인가?”
미궁 벽을 밟고 펄쩍펄쩍 뛰어올라 허공에서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손쉽게 밴시를 학살하는 류 현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화련은, 제 앞을 틀어막고 서있는 승하를 돌아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저걸 보고도 그런 생각 밖에 안 들어요?”
“그럼 뭐가 더 있어? 아무리 봐도 그냥 공격용 기술 같은데.”
“아니 저건...”
승하의 말에 반박하려던 화련은 스스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나부터도 저게 뭔지 정확하게 모르는 데 무슨 설교야.’
화련은 고개를 들어 다시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는 류 현을 바라봤다. 류 현은 화련의 비행보조는 에너지 드레인에 먹힐 가능성이 크다며 사양하고, 제 발로 저렇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밴시. 원정대가 세계 최초로 발견한 새로운 환수타입 괴수였다. 보라색 보석을 수령하고 나서 일곱 번째 스테이지에 거의 발을 들이자마자, 원정대를 덮친 환상트랩과 함께 훌륭한 시너지를 내서 원정대를 이틀 가량 돈좌하게 만든 원흉.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해서 트랩을 부수고, 밴시마저 혼자 쫓아낸 류 현이 아니었다면 원정대는 아마 이틀 동안 회복에 힘쓰는 정도가 아니라, 한 둘 정도 원정 기간 내에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리력이 없는 대신 물리력에 거의 영향력도 안 받는 밴시는 적의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순간적이나마 환각을 보게 만드니까.
아예 몸을 겹치면? 환상트랩 이상의 악몽을 꿨을지도 모를 일이다. 환상트랩의 여파만으로 이틀 가량을 그냥 버려야했으니, 밴시까지 제대로 손을 더했다면 그야말로 끔찍했을 것이다.
실험해본 결과, 검성의 수준의 마력검으로도 일격살은 불가능했다. 마람 압둘아지드의 두 손은 올 브레이커라는 별칭답게 밴쉬에게 유효한 타격은 넣긴 했지만, 마력검과 마찬가지로 깎아내기 식으로 잡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되면 밴시와 닿게 되고 여지없이 환각을 보게 된다.
하지만 류 현은 달랐다. 그의 에너지 드레인은 닿자마자 밴시를 불길에 노출된 비닐마냥 태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환각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이유? 모른다. 류 현은 환상 트랩을 부수고 난 뒤에 안 그래도 과묵한 태도를 더 무겁게 했고, 원정대 대장의 조용한 분노에 손을 집어넣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승하마저 한 발짝 물러서서 동태를 살필 정도.
류 현을 제외한 원정대원들이 팔짱끼고 류 현의 밴시사냥을 지켜보고 있는 이유였다. 환상트랩에 호되게 당한 이후로 누구도 선두를 고집하지 않았고, 류 현 없이는 괴수가 있는 방향도 정확하게 잡을 수가 없다. 화살표는 눈앞의 괴수를 처리하기 전에는 다른 곳을 가리키질 않으니, 밴시를 무시할 수도 없다.
류 현은 정중한 말로 대원들을 뒤로 물린 후에 오리 몰듯이 밴시들을 잡아 족쳤다. 기계적으로 괴수를 때려죽이던 평소와는 다르게, 마치 분풀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그런 것 치고는 마스터의 태도가 좀 이상해. 뭔가...화가 많이 난 거 같은 느낌?’
[히아악!][끼야악!]
‘내가 너무 과민한 걸 거야. 어차피 괴수는 잡아야하는 거고...’
소멸을 두려워하는 듯 단말마를 내뱉으며 불꽃도 없이 타들어가는 밴시를 보며 화련은 고개를 내저었다.
쓸데 없는 생각을 떨쳐낸 화련은 류 현이 밴시를 정리하고 나면 대휴식을 제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밴시 무리를 다 잡고 나면, 수정이 출력한 바로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조건은 트윈 헤드 라미아 하나만 남게 된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불침번 시간에 승하와 얘기했던 것처럼 결국 일곱 개 수정을 모두 모았으니, 수정을 지급할 정도로 강력한 최종 보스 전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