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탐식마(貪食魔)
[흐아아아-]
미궁을 헤매는 리치는 꽤 피폐한 상태였다. 미궁 안의 희미한 빛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뱀의 하반신을 다 덮고도 남던 로브는 구멍투성이였고, 리치 치고 특이하게도 근접전투에 신경 쓴 기색이 역력한 거대한 뱀의 꼬리를 접붙인 하반신도 성한 관절이 없을 정도였다.
실제로 리치는 평소에 사냥 대상을 향해서 소리 없이 기어가는 것과 달리, 있는 마력 없는 마력을 쥐어짜서 아주 낮게 떠가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리치는 1미터도 나아가기 전에 바쁘게 주변을 살피는 등 꽤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조심스럽다 못해 편집증적인 면모조차 보일 정도.
퍼플 던전의 주인인 리치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모습. 하지만 5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사냥하려고 달려들던 괴물들에게 회심의 역작인 오우거 구울을 던져주고 도망쳐 나왔으니, 차분한 모습을 요구하는 건 너무 과한 처사일 것이다.
그런 리치에게로,
휙! 리치의 반의반도 안 되는 인영이 머리 위로 덮쳐들었다. 리치는 곧바로 낌새를 눈치 채고 움직였다. 반격이나, 앞으로 몸을 날리는 식이 아니라 오른 손에 애지중지 움켜쥐고 있던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텔레포트! 인간 마법사들에게는 불가능한 이적이 리치의 손안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었다.
지지직!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일렁거리던 리치의 몸 위로 노이즈가 터져 나오더니, 거짓말처럼 텔레포트가 멈춰버렸다. 리치가 당황하며 자신을 덮쳐드는 괴한을 돌아봤을 때는,
덥썩! 우지직! 콰직! 여자는 리치의 넓은 등판에 착지해 주먹질을 날리고도 남을 정도의 여유시간을 허용한 뒤였다. 콰직! 세 번째로 날아든 주먹이 경추를 으깨버리자, 리치는 속절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올 브레이커. 마람 압둘아지드는 리치의 텔레포트를 두 주먹만으로 틀어막았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말없이 리치를 분쇄하는 데 주력했다. 라이프 배슬을 찾지도 않았다. 기계처럼 주먹을 당겼다가 내쏘기를 반복할 뿐.
그렇게 5분여가 흘렀을 때, 리치는 온데간데없고 뼛가루의 산만이 그녀 앞에 남게 되었다. 마람은 뼛가루의 산을 한 번 툭 차서 먼지를 일으키고는 몸을 돌렸다. 온 길을 되짚어 가려던 그녀는 멈칫했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라시드? 보고도 그냥 구경만 한 거야 지금?”
통로에 기대서 마람을 바라보고 있는 자는 알 라시드였다. 마람이 사랑해하지 마지 않지만, 동시에 팔다리를 부러뜨려놓고 싶어 하는 남자. 그 알 라시드는 선서하는 것처럼 오른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공주님이 리치 쇄골을 열심히 빻고 있을 때였어. 신께 맹세컨대, 그 때 내가 끼어들었으면 리치께 아니라 내 껄 빻으려고 들었을 걸.”
마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말이나 못 하면.”
“이상하지 않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람의 발걸음이 멎었다. 마람은 삐뚜름한 표정으로 알 라시드를 올려다봤다. 뭐가?
“전부 다. 이 이상한 사슬부터 시작해서”
그 둘에게는 빛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걸려있었다. 물리적으로 아무런 제약도 없었지만, 오히려 이 던전 내에서 걸리는 행동제약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래도 좋게좋게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뭔지도 모를뿐더러, 요주의 인물로부터 비롯된 물건이니까.
“이 던전은 확실하게 이상해. 검성과 그 남자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알던 던전이 아니야.”
“했던 얘기 또 하고 싶어서 쫓아온 거야?”
“아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렇게 이상한 상황에서 덤덤하게 지휘하는 그 남자가 가장 이상하다는 거야.”
마람은 동의한다는 듯이 작게 끄덕거리며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류 현.”
“맞아. 이 던전도 이상하지만, 그 남자가 가장 이상해. 네 감은 둘째 치고 아, 네 감을 무시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 검성이나 웨펀마스터가 대장자리를 고사한 것도 이상한데, 그 남자는 너무 덤덤해. 솔직히 이런 환경에 던져놓으면 우리 잘나신 친위대분들도 광견병 걸린 개 마냥 움직일 걸. 팀장 경험? 퍼플 던전 클리어 경험이 있어서? 절대 아니지. ‘열쇠’? 거기에도 이 던전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는 건 첫날에 확인했어. 그게 연기라면 난 그 남자가 내년에 오스카 상을 탄다에 돈을 걸겠어. 그 남자는 이 던전에 대한 정보가 없어. 있더라도 그건 괴수나 던전의 구조에 대한 게 아니라...”
“그 남자가 이 던전에 들어온 목적과 관련이 있겠지.”
“그래, 맞아. 그 남자는 이 던전에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들어온 거야. 괴수 때려잡고, 그놈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건 덤일 테지.”
“그래서? 그 탐정 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목적이 뭔지 캐낸 다음에 괜찮아 보이면 먼저 꿀꺽하자?”
“그건 무리지. 난 저 친구를 3주전에 처음 봤으니까. 행동을 예측하기는커녕, 저 친구가 브로콜리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조차 모른다고. 선점은커녕, 저 친구가 작정하고 숨기면 그게 뭔지 던전 밖으로 나갈 때까지 눈치 못 챌 수도 있어.”
“그럼?”
“협상거리가 있어. 그의 누나.”
마람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알 라시드는 손을 내저으며, 돌아서서 떠나버리려는 마람을 제지했다.
“납치해서 협박하자는 게 아니라, 그의 누나는 지금 아파. 입원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일 년이 넘었지. 그것도 괴수와 관련해서 아파. 우리 신의님한테 보일 기회를 주겠다고 하면 협상거리로는 괜찮은 편 아니겠어? 그가 이 던전에 찾으러온 그 뭔가를 나눠받는 건 무리겠지만, 정보 정도는 알 수 있겠지. 그게 청뢰 같은 거라면, 협상시도라도 해볼 수 있을 거고.”
“글쎄...”
“공주님이 그 남자 가까이 가서 말을 걸어야하는 일은 안 만들 테니 걱정 말고 지켜보기만 해.”
알 라시드는 너른 가슴을 탕탕 쳐보이고는 마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람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그 손을 슬쩍 잡았다.
***
류 현은 허공에 떠오른 빛의 화살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 숨을 푸욱 내쉬었다. 고개를 떨구고 절레절레 내젓던 그는 오른손을 움켜쥐어서 화살표를 없애고는 근처의 바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그리곤 다시 한 숨을 내쉬었다.
“후우...”
‘돌겠군.’
고개를 한계까지 뒤로 젖힌 그의 눈에 뒤쪽 벽에 자신이 그려놓은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24번째로 발견 갈림길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류 현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눈을 두 손으로 덮은 채 생각했다.
‘뭐가 나침반이야. 젠장, 나침반이 아니라 괴수 탐지기잖아.’
X던전에 진입한지 60시간하고 43분째. 류 현은 자신이 가졌던 확신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기의심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원정대원들에게 잠깐 생각 좀 정리하고 올 테니 따라오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그의 오른손에 깃든 ‘열쇠’는 던전이 가하는 압력을 덜어주는 버프를 걸어주었지만, 나침반으로는 영 엉터리였다. 미로의 출구를 찾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루트에 있는 괴수를 가리켰으니까.
우연이겠지. 다음에는 아닐 거야 하고 화살표를 따라갔다가 열네 번째 괴수를 만나는 순간, 류 현은 뒤에서 따라오던 원정대원들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격렬한 쪽팔림을 느꼈다.
아마 만난 괴수들 중에서 5성을 넘어선 5.5성급 리치가 없었다면 그 착각은 현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우습게도 뒤통수에 두고 공략을 진행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짜증나는 괴수 덕택에 위기를 모면하게 된 셈.
당연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퍼플 던전의 주인자리를 꿰차도 될 만한 괴수들이 미로 안을 활보하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진행이 더뎌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상처 입고 도망치는 걸 그냥 보고 넘길 수 없는 수준의 괴수들이었으니까.
‘난이도는 이미 통상 블랙 급은 넘었어. 보스몹이 없으면 모를까. 아까 봤던 리치 이상급만 나와도 난이도 오버다.’
골치 아픈 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더 심화될 거라는 점이다.
‘미로 공략은 답이 안 보이는데, 벌써부터 딴 생각하는 티내는 놈이 둘이나 나왔고.’
칼리프 클랜에서 파견해온 한 쌍은 휴식 도중에 류 현에게 거래를 제의해 왔다. 자신들에게 정보를 주면, 세아를 칼리프 클랜이 데리고 있는 신의에게 보일 기회를 주겠다는 식이었다.
정확히는 알 라시드가 마람을 끼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지만, 류 현으로서는 그놈이 그놈이었다. 마람의 태도로 봐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이 싫어서 직접 말을 안 하는 것일 테니까.
‘하긴, 의심 안 하는 게 이상하지. 그냥 아예 모르쇠로 나갔으면 모를까.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 거야. 웨인은...비슷한 생각은 하고 있어도 티를 못 내는 거겠지. 그런 인간이니까.’
그들은 멋대로 류 현이 모종의 정보를 가지고, 뭔가를 모리고 이 던전에 들어왔다고 여기는 중이다. 팔자에도 없는 영웅놀이를 강제 당한 류 현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다.
이득은커녕, 무사히 클리어 하고 나가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될 공산이 더 크다. 칼리프 드 오르시아의 말대로 라면 류 현의 원정대가 던전에서 나오는 순간 다른 두 곳의 X던전에서 뭔가 튀어나올 테니까.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안 나온 한 곳의 원정대가 의심 받게 될 것이다. 최소한 알고 내버려뒀다는 의심은 피할 수 없게 될 터.
‘이런 역할은 웨인 크로이츠나 검성한테나 맡길 것이지...젠장, 이게 무슨 뻘 짓이야.’
류 현은 제 뒷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보낸 만 이틀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못 씻었기에 뒤엉킨 머리카락에서 뜨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일단 나가고 생각하자. 나가서. 욕도 나가야 먹을 수 있고, 수습도 나가야 할 수 있다. 미로는...젠장, 나침반을 줄 거면 제대로 된 걸 줄 것이지. 이게 대체 뭐야?’
‘한 번만, 한 번만 나침반 따라가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진짜 벽을 부수고서라도 나간다.’
***
[크루루!][캬아악!]
쉭! 쒜엑! 푹! 푸홧! 허공을 가르는 듯했던 검은 여지없이 오우거의 검은 동체에서 시커먼 피를 쏟아내게 만들었다. 그 뒤를 따라 상처를 헤집고 들어간 낚시는 그대로 180도 회전해서 오우거의 살점을 단단하게 물었다. 낚시와 연결된 끈을 붙잡고 있는 금발의 남자는, 오우거의 몸부림을 동력삼아 로데오를 하듯이 훌쩍 뛰어올라 오우거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주변에 수십 개의 강철 바늘을 띄우고 있는 남자, 웨인 크로이츠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커다란 송곳을,
콰직! [크루룩?] 그대로 오우거의 정수리에 쑤셔 박아버렸다. 손가락 세 개 굵기의 송곳은 오우거 머리가 아니라 두부를 파고드는 것처럼, 손잡이 바로 앞까지 파고들었다. [끄르륵...] 오우거의 커다란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며 그 육체도 뒤로 넘어갔다. 볼 것도 없이 즉사.
오우거 시체에서 훌쩍 내려온 웨인은 위쪽을, 거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위쪽을 바라봤다.
[캬아악! 크악!] 쉭! 뻐억!
위쪽도 싸움이 한창이었다. 몸길이가 거의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샌 드래곤은 천장 바로 밑의 공간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중이었다. 그 원인은 샌 드래곤 주변을 날파리 마냥 날아다니고 있는 세 명의 스트라이커들이었다.
류 현, 알 라시드, 마람 압둘아지드는 화련의 부유마법을 받은 채 샌 드래곤의 체력을 천천히 깎아먹고 있었다. 하나가 달라붙어서 샌 드래곤이 떼어놓으려고 손을 뻗으면 다른 둘이 무시할 수 없는 타격을 가하는 식이었다. 시간이 걸리지만 체력 안배를 신경 쓴 전술.
[캬아악!] 콰릉! 샌 드래곤이 뒤틀어 틈을 만들고 도주각을 보면, 여지없이 청뢰가 뿜어낸 벽력이 샌 드래곤을 후려쳤다. [오오옹!] 샌 드래곤은 뜬 채로 천천히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
쿠웅! 샌 드래곤이 그 거체를 미궁 바닥에 쳐 박게 된 건 그로부터 2분 후의 일이었다. 말 그대로 누더기가 된 샌 드래곤은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한 번 더 움찔거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샌 드래곤의 뒤를 이어 샌 드래곤을 괴롭히던 스트라이커들과 화련과 희란도 바닥에 내려섰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샌 드래곤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자신들이 싸우는 동안 뒷짐지고 지켜보고 있던 나승하, 그녀가 등지고 지키고 있던 커다란 수정에 쏠려있었다.
붉은 빛의 수정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수정의 아름다움에 있지 않았다. 원정대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수정이 띄우고 있는 화면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블랙 오우거 1/1]
[샌 드래곤 1/1]
[스네이크 리치 1/1]
[오우거 구울 1/1]
....
[미션 성공! 보상을 수령하세요!]
“아니 왜 지 멋대로 장르 변경하고 난리야?”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어이없는 표정의 승하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