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탐식마(貪食魔)
던전은 무엇인가?
던전과 플레이어의 존재가 대중에게 알려진 2차 ‘대소환’이전부터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질문이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지구상에 등장하기 시작한 던전은 무엇인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이 질문에 매달렸지만, 이렇다할 결론이 나질 않았다. 학자들에게는 아주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 했는데, 그들은 던전의 입구만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 뿐. 던전을 통과할 때 플레이어들이 느끼는 감각이나 던전 내의 기후를 플레이어들의 증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억지로 원정대에 끼어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각성자가 아닌 이들은 플레이어들이 던전을 통과할 때 느끼는 감각을 느낄 수는 없었고, 뭣보다 ‘대소환’ 초기에는 전투원인 플레이어의 생존율조차 처참한 수준이었기에 용감하게 동행한 학자의 최후는 그보다 더 처참했다. 그로 인해서 학자들의 탐구욕이 꺼진 게 아니라, 국가에서 나서서 끔찍한 자살을 막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관측기계만 안으로 들여보내면, 화약병기처럼 먹통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학자 중 한 명이 플레이어로 각성하더라도 유의미한 표본으로 삼기에는 수가 너무 부족할뿐더러, 전투능력이 부족해서 레드 던전을 전전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의 탐구욕은 불타올랐고, 이전 생이지만 3차 ‘대소환’ 막바지까지 생존했던 류 현은 그 결과물의 정수는 아니었지만 인상 깊은 가설 하나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던전 입구는 일종의 포탈이며, 던전은 괴수들의 출신지 땅을 조금 떼어내서 조성된 사육장이다. 던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물원 같은 사육장이 키우고자 하는 건 괴수가 아닌, 그 안으로 들어오는 플레이어다! 류 현이 기억하고 있는 가설의 요지는 그것이었다.
농담으로라도 공부와는 거리가 먼 류 현이 가설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생각과 가설이 말하는 바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처럼 에둘러서 말하지 않고 그 자신의 방법으로 그 사실을 말하고 다녔다가는 날아오는 돌이 집이 파묻힐 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류 현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와 죽일 기세로 치고받았던 네임드 몹들까지 갈 것도 없이, ‘대소환’은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유예를 두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었다. 2차 ‘대소환’이 오랜 기간 지속되자, 지레짐작으로 던전을 정복했니 어쩌니 하며 딴생각만 안 품었다면 3차 ‘대소환’때 그렇게 허무하게 쓰러지진 않았을 터.
그 이후에 나타난 네임드 몹도 류 현이 보기에는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대부분 류 현이 혼자서 견뎌내고 성장해서 때려잡았다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류 현 혼자서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조력이 있었다면 피해조차 경미하게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에 등장한 아지다하카라는 거대한 벽에 막혔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류 현이 지금 이 시점에 싸움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기억을 뒤적거린 이유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달랐다. 이제 막 던전에 진입했을 뿐이지만, 달랐다. 학자들이 그토록 비싼 돈을 주고 듣고 싶어 하는 상위 던전 진입 시 느껴지는 이질감이 수백 번, 수천 번 던전 플레이를 반복했던 때와 확연히 달랐다.
보통 때에 느끼는 이질감이 만원버스에 끼어서 가는 것 같은 답답함이라면, 지금 느낀 이질감은 깨어나 보니 바다 속에 쳐 박혀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단순히 신경 쓰이는 걸 넘어서서, 당장 기량을 발휘하는 데 장애가 있을 정도. 아니, 기량 발휘 문제가 아니라 서있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이런 미친, 이럴 거 알았으면 힌트라도 주던가!’
류 현은 던전에 들어오다. 웨인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지 허허로운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람 압둘아지드는 몸을 있는 대로 웅크리고 있어 상태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퍼플 던전을 혼자서 썰어먹는 자들이 이 정도였으니, 화련과 희란이 헛구역질로 그친 건 매우 양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류 현은 주저앉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는 원정대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 집중력을 쥐어짜서 주변 50미터를 마력망으로 감시하에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는 마스터 따라서 최초 도전 안 할 거에요.”
30분 여 동안 헛구역질과 드러눕기를 반복하던 화련의 첫 말이었다. 서로 기대있던 희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했고, 알 라시드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두 여자를 봤다. 그도 그럴 것이, 입장하는 것만으로도 최상위 플레이어들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는 던전 안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마치 무사하게 나가는 게 이미 기정사실인양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알 라시드는 들어오자마자 똥 밟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스펙상으로 가장 부족한 용잡이 팀의 두 여자가 탈락할 거라는 걸 기정사실로 여겼다. 그 당사자들이 저런 소리를 하니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그의 품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마람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 했지만.
마람은 용잡이 팀원인 두 여자가 아니라 그녀들을 돌보고 있는 류 현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인 시선이라 원정대원들 전원이 한 번씩 그녀를 돌아볼 정도였지만, 마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기분 나쁜 괴물 자식.’
원정대원 중에서 던전이 주는 중압감에 가장 영향을 덜 받고, 다른 대원들을 돌본 류 현의 행동에 대한 마람의 감상은 그거였다. 처음 볼 때부터 그랬지만 저 남자는 명백하게 이상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같은 선상에 서있는 알 라시드나, 검성, 웨인 크로이츠 마저 맥을 못 췄고, 이제야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인데 저 남자는 조금 불편한 기색 이외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다. 명백하게 이상한 반응이었다. 마람이 아니어도 다른 원정대원들 마저 류 현을 힐끔거릴 정도니까.
그런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류 현은,
‘뭐야, 이건 또 왜 난리인데? 칼리프 그 여자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열쇠’가 깃든 제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 오른손에 새겨진 문신부분이 간질간질하면서도 이따금씩 욱신거리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젠장, 다들 그냥 앉아만 있어도 저 모양인데 나까지 문제 생기면...’
류 현이 신경질적으로 문신 위를 긁는 순간,
“어?”
“이, 이건 또 뭐야? 류 현?!”
“류 현님? 이게 대체...”
육망성 형태의 문신이 자신은 장식이 아니라는 듯, 갑자기 폭발적으로 빛을 내뿜었다. 내뿜어진 빛은 순식간에 사슬의 형태를 이루어, 원정대원들을 서로 연결시켰다. 졸지에 줄에 엮인 굴비꼴이 된 원정대원들은 류 현에게 어이 없다는 눈빛을 보냈고, 류 현 또한 같은 눈빛으로 응대했다.
‘아니 사용 설명서도 같이 넣어놨다면서? 이런 건 없었다고!’
칼리프에게는 ‘열쇠’사용법은 듣지도 못했고, 석비를 통해서 얻은 정보 중에도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류 현이 이걸 어떻게 끄나하고 제 손을 리모콘 마냥 꾹꾹 눌러보고 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이제 안 갑갑한데?”
“정말이네? 뭐야? 이런 걸 왜 숨기고 있었어?”
화련이 물꼬를 트자, 원정대원들이 하나 둘 폴짝폴짝 뛰어보는 등 제 상태를 확인했고 화련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다짜고짜 칼을 뽑아서 허공에 한 번 휘둘러본 화련은 미심쩍은 시선을 류 현에게 보냈지만, 얻을 수 있는 건 류 현의 얼빠진 표정뿐이었다.
‘이 여자가 진짜...정보 제한이든 뭐든 이런 걸 알려줬어야지!’
괜스레 칼리프를 씹어보는 류 현이었다.
***
어두운 회색빛의 벽에는 작은 흠집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아니, 없어 보였다. 관찰력이 뛰어난 이라면 벽에 난 흠집 중 붙어있는 두 개가 흠집치고는 조금 이상하게 생겼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 두 개의 흠집은 그림자 두꺼비의 두 눈이었다.
그림자 두꺼비. 용잡이 팀과 인연이 있는 괴수다. 정확히는 류 현과 화련의 인연을 붙여준 괴수다.
베테랑도 구경하기 힘든 이 괴수는, 낮은 급수의 던전에 등장하면서도 반쯤 환수타입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어쩌다 자신과 마주친 루키들을 어김없이 삼도천으로 안내하곤 했다.
그림자 두꺼비라는 이름답게, 응달을 좋아하는 이 괴수는 벽과 손톱만한 구멍을 넘나드는 능력으로 제 비루한 몸뚱이를 지키고 사냥을 해왔다. 벽에 스며들어서 벽의 일부인척 하다가 사냥감이 방심한 채로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혀로 확!
벽까지 끌어당겨지면 그걸로 끝이다. 그림자 두꺼비는 앞발에 날카로운 발톱 하나를 가지고 있고, 그림자 두꺼비의 배설물과 사냥감들의 독과 분비물이 뒤섞여서 말라붙은 그 비수가 살갗에 박히는 순간 루키의 생존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그 사냥 법에서도 알 수 있듯, 그림자 두꺼비는 인내할 줄 아는 괴수다.
그런 그림자 두꺼비가 도사리고 있는 벽으로 여자가 걸어왔다. 몸 주변에는 번쩍거리는 사슬 같은 것이 둘러져있었고, 사슬 빛 보다 더 빛나는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물론 그림자 두꺼비에게는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정거리까지 들어온 여자가 등을 돌리자,
투확! 하고 혓바닥이 화살처럼 내쏘아졌다. 궤적과 속도 모든 게 완벽했다. 그림자 두꺼비가 사냥 성공 후를 꿈꾸며 식사를 기대하고 있던 그 때.
퍼엉! 여자를 휘감는 정도가 아니라 후두부를 짓뭉개놓을 것 같은 기세로 내쏘아지던 그림자 두꺼비의 혀가 돌연 허공에서 터져버렸다. 그림자 두꺼비의 동체시력이 오우거급이었다면 여자의 손이 소리를 따라잡을 기세로 빠르게 자신의 혀를 후려치는 걸 목격했겠지만, 저급 던전의 괴수로서는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그림자 두꺼비는 통증을 채 실감하기도 전에 벽을 타고 내달려 달아나려고 했으나,
콰직! 여자의 두 손이 벽을 두부처럼 짓뭉개고 들어와 그림자 두꺼비의 도주로를 틀어막았다. 그걸로 모자라, 여자의 손은 벽과 일체가 된 그림자 두꺼비의 몸을 움켜쥐고,
우두득! 찌이익! [끼이익!] 망설임 없이 반으로 찢어놓았다. 중간에 그림자 두꺼비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머리가 반쪽 나는 참사는 피했지만, 바닥에 내장 대부분을 흩뿌린 그림자 두꺼비는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올 브레이커. 벽과 일체화 된 그림자 두꺼비를 끄집어내서 찢어버린 여자를 상징하는 별칭이자, 무엇보다 여자의 능력을 잘 설명해주는 이름이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법을 파훼하고, 이능을 희롱한다. 벽과 일체화 되었지만, 벽이 파괴되어도 유유히 도망가는 그림자 두꺼비를 잡아채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아마 화련이 방금 전의 광경을 봤다면, 벽과 일체화 된 그림자 두꺼비를 꺼내기 위해서 5분가량을 계산에 할애해야하는 자신의 공간 마법의 쓸모없음을 토로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녀는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이 이뤄낸 위업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발길을 휙 돌려버렸다. [끼이...끼이익] 여자의 무심한 태도를 원망하는 것처럼 그림자 두꺼비의 서글픈 단말마만이 울렸다.
***
“그림자 두꺼비 두 마리. 회색 화이트 팽 세 마리, 땅돼지 서너마리.”
“서너 마리요?”
“어, 땅 밑에서 자꾸 들썩거리는 게 짜증나서 걷어차니까 다 터져 죽어서 정확한 숫자는 모른데. 우리 공주님 성격이 좀...그래. 알지?”
친구에게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짝 다가와서 소곤대는 알 라시드.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류 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잡은 괴수의 정확한 숫자를 따지려고 하는 일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숫자 정확하게 따지려고 한 일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계속 이렇게 대충대충 해도 된다는 식으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압둘아지드 씨가 그러니, 옆에서 좀 잘 챙겨주십쇼.”
“어어, 당연히 그래야지. 공주님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장님은 선도에 신경 써 달라고.”
반쯤 건성으로 끄덕거리며 마람에게 다가가는 알 라시드를 보며 류 현은 억지로 한숨을 삼켰다.
“너 그 여자한테 무슨 뭐라도 한 거야? 대체 왜 그렇게 까칠해?”
류 현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며 다가오는 승하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몸에는 류 현의 오른 손에서 튀어나온 빛으로 된 사슬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녀가 다가오는 방향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제가 뭘 할 시간은 있었고요?”
“아니면 왜 저러는 건데? 가면 갈수록 심해지잖아? 첫날에는 네 얼굴이 맘에 안 들어서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얼굴도 거의 안 본 사이인데 볼 때마다 심해지는 건 좀 이상하잖아?”
류 현은 진심으로 자신의 인복 없음을 한탄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저 칼리프 클랜의 괴물이 왜 자신을 싫어하는 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마람과 류 현은 개인적으로 말 한마디 섞은 적이 없다.
마람이 일방적으로 류 현을 무시하면서도 적의를 내뿜고 있고, 류 현은 원정대 대장으로서 당연히 받아야하는 보고조차 마람에게서 직접 듣지 못하는 상태다. 알 라시드가 눈치 좋게 중간에서 허허 웃으면서 중재하고 있긴 했지만, 정상적인 모양새는 아니다.
“제가 그걸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주식으로 돈 잔뜩 벌어서 승하 씨 같은 플레이어들 여기다가 밀어 넣었겠죠.”
승하는 어깨를 으쓱 해보일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미로의 벽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아무래도 던전이 아닌 거 같지? 여기.”
“...예. 짜증날만한 것들 다 섞어서 여기저기 뿌려놓은 게 무슨 온라인 게임 던전 같네요.”
‘...던전답지 않아.’
류 현은 승하가 보던 벽을 같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천장으로 닫힌 하늘, 하늘까지 닿은 벽. 전형적인 미로형 던전이었지만, 그가 알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미로형 던전이 극히 드물고, 찾았다하면 아티펙트와 유물이 쏟아지는 곳이라고 해도 너무 이질적이었다.
플레이어들은 던전 소리만 들어도 짜증낼 것 같은 표정을 짓지만, 사실 던전은 굉장히 일관적이다. 난이도 보다 위의 괴수가 나오지 않고, 난이도 밑의 괴수도 나오지 않는다.
후자는 언뜻 보면 디메리트 같아 보이지만, 땅돼지나 그림자 두꺼비 같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있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위협으로 다가오진 않지만, 저마다 귀찮은 개성하나 쯤 있는 하위 던전의 괴수들은 상위 괴수와 섞여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두통거리가 된다.
예를 들어 어마어마한 항마력을 가진 샌 드래곤을 상대하는 데, 땅돼지나 지룡 같은 괴수가 발밑에서 분탕질 친다면 마법사들은 방해꾼 역할을 때려치우고 스트라이커를 버리고 도망갈지, 아니면 마법을 난사하다가 땅돼지에게 팔 하나 내어줘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터.
사람이 신경 쓰고 대비할 수 있는 일의 가짓수는 사람마다 달라도,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 일에 목숨이 달려있다면 그 가짓수는 확 줄어들 수밖에 없다. 줄이고 싶어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기존의 던전은 플레이어 친화적이었다. 땅돼지는 옐로우이상급에서 볼일이 없고, 라가 전사는 라가로드가 들어앉아있는 퍼플 던전이 아닌 이상 퍼플 던전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이 사실 덕택에 상위 플레이어들은 땅 밑을 기어 다니는 벌레 같은 괴수 때문에 불침번을 서면서 땅을 주시할 필요도, 수만 많은 잔챙이들을 상대할 걸 고려해서 체력분배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런 전제가 깨져버린 것이다. 류 현 휘하의 원정대원들은 12시간이 약간 넘는 시간 동안 퍼플 던전은커녕, 블루 던전 정도만 되도 볼 일 없는 괴수들을 스무 마리 가까이 잡았다. 명백히 기존의 던전이라는 개념에 반하는 모습이다.
미로형 던전이 딱히 등장하는 괴수의 속성을 정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회색 화이트 팽 같이 태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들이 튀어나오는 것만 봐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오늘 잠은 다 잤군.’
류 현은 제 손목의 던전 출입용 기계식 시계를 힐끗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