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탐식마(貪食魔)
그리고 이 주일이 흘렀다.
원정대원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의구심으로 골머리를 썩히든 말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이 이주 간 웨인은 칼리프 클랜이니 정부 기구니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원정준비 이외에는 의견을 내지도 못했다. 부산물 분배율이나 던전 안에서 얻은 정보에 대한 지분율에 대해서 협상자로 불려 다니고, 클랜과 국가에서 빌려주는 아티펙트 수령인으로 나서고 웨인은 정말 눈코 뜰 때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미 류 현에게 일임하겠다는 의향을 밝혀서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원정대원들이 원정 사흘 전까지 10회 이하의 만남만 가진 채로 어색한 얼굴로 모이는 지금 같은 상황은 웨인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웨인의 대리로 싫어도 미팅을 주도해야하는 류 현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었지만, 원하던 상황이 되었음에도 류 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젠장,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진 꼴이군.’
최상위 플레이어답지 않게 눈 아래에 시커멓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을 의식할 여유도 없이 류 현은 복도를 가로질러 임시 회의실로 향했다. 웨인에게 말해서 배당받은 방이지만, 마람 압둘아지드가 협회로 오고나서 다음날 웨인이 돌아왔을 때 한 번 쓴 이후로 단 한 번도 모인 적 없는 방이다. 용잡이 팀과 승하와는 그냥 개인방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그 모임조차 시원찮았지만.
‘멍청하긴. 고민한다고 해서 그 여자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추태야.’
그 모임 내내 류 현의 정신이 완전히 딴 곳에 가있었기 때문이었다. 넋을 다른 곳에 두고 온 듯한 류 현의 태도를 세 여자는 한 눈에 알아보았고, 셋이서 알아서 준비하면서 궁금한 건 문자로 물어볼테니, 그 동안 정신이나 추스르라는 통보를 받은 후에 방에서 쫓겨났다.
그 뒤에 다시 찾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들의 말대로 정신이 딴 곳에 가있던 류 현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마람 압둘아지드. 그녀의 존재 때문에 류 현은 이주나 되는 기간을 통째로 날려먹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칼리프 클랜에서 보내온 그 한 쌍도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X던전에 대해서는 류 현이 모든 정보를 혼자 쥐고 있으니 음모 모의도 쉽진 않을 것이다.
이주 내내 마람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한 건 아니었다. 네임드 몹 출현시기나 라인업 변경, 3차 ‘대소환’ 시기가 앞당겨질 시에 협회에 취해야할 태도 같이 변화할 수도 있는 사항에 대해서 고민했다. 물론 고민하게 된 계기가 마람 압둘아지드라는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로 인한 것이었지만.
‘더 빨리 터진다고 해도 어차피 터진 뒤에 움직일 수밖에 없어.’
이 주를 할애한 고뇌 끝에 얻은 결론은 매우 단순했다. 자신의 시선 밖에서 터지려는 일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건 쓸데없는 걸 넘어서 미련한 짓이라는 이주일이라는 기간을 쏟아 부을 것도 없는 매우 당연한 결론.
마람 압둘아지드라는 존재의 임펙트가 그 정도였다. 류 현이 여태껏 애써 외면해온, 조용히 덩치를 불리고 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마람 압둘아지드가 이 타이밍에 등장함으로서 제대로 불을 당긴 것이다.
‘정신 차리자. 정신. 류 현, 이 멍청한 놈아. 지금 당장 앞에 난 불도 못 끄고 있으면서 무슨 미래 타령이냐.’
류 현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회의실 문을 보고 양 볼을 짝 한 번 치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
“청뢰의 장기 대여요?”
“그래. 그것만 보장해 주면 우린 머릿수대로 분배 받고 아무 말도 안하겠어.”
‘제대로 알고 부르는 거야. 아님 그냥 일단 던져보고 배짱싸움하자는 거야?’
태연한 얼굴의 알 라시드를 바라보며 류 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 이 주간 열 번이 채 안 되는 미팅을 진행하는 동안, 류 현은 어쩔 수 없이 용잡이 팀의 패를 까야만 했다.
자신들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화련과 희란을 원정대에 포함시키는 걸 반대할 거라는 으름장에는 류 현도 별 수 없었다. 공식 기록상으로 화련과 희란은 X던전은커녕, 아직 퍼플 던전도 확실한 검증이 덜 된 상태다. 류 현 또한 별 다를 것 없는 처지라는 것은 제쳐두고 말이다.
마음 같아선 저 바퀴벌레 한 쌍을 다 필요 없다고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칼리프 클랜의 정치라인이 얼마나 튼튼한지 알게 될 뿐이다. 이전 생에서 그 대단한 권력과 무력의 연계를 반쪽짜리긴 해도 제대로 맛 봤었으니까. 결국 류 현은 청뢰의 존재를 밝혀야만 했다.
어차피 던전 내에서 보여야 할 테니 딱히 망설임도 없었다. 협회에 부탁해서 클리어 된지 얼마 안 된 레드 던전을 빌렸고, 그곳에서 청뢰를 선보였다. 희란의 컨디션 조절을 생각해서 적당히 조절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과는 대성공. 알 라시드와 마람 압둘아지드는 화련과 희란의 원정대 참가에 대해서 트집 잡기는커녕, 청뢰에 정신이 팔려서 딴소리는 하지도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돈지랄을 잘 한다고 알려진 칼리프 클랜의 간부조차 기존의 최고등급이라는 2등급 이상의 아티펙트 앞에서는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너무 말이 없어서 나중에 청뢰를 노리고 무슨 사고나 터지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였다.
그랬기에 어떤 식으로든 얘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웨인이 없는 자리에서 제의할 줄 알았는데.’
류 현은 자신의 왼편에 자리한 웨인을 힐끗 봤다. 류 현은 별로 내켜하지 않았지만, 웨인이 실질적인 원정 대장이 상석에 앉아야 한다며 권한 결과였다. 왼편에는 웨인, 오른편에는 승하. 승하의 오른쪽으로는 용잡이 팀원들이, 웨인의 옆에는 칼리프 클랜의 한 쌍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성우의 존재가 까발려지지만 않으면 상관없다는 건지, 아니면 류 현이 허락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웨인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거 참, 유성우 떴을 때는 곧 죽을 거 같은 표정이더니...아니, 막말로 유성우 내가 맡고 있는 것도 믿을 구석이라고는 없는데 대체 뭘 믿는 거야?’
류 현은 저 자신도 스스로에게 내보이기 힘든 이상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웨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알 라시드 마람 커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표정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거래 요청을 하는 상대를 보고 있자니 떫은 표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알 라시드가 청뢰를 거래대상으로 보게 된 건 류 현의 수작질이 작용한 결과다. 원정을 코앞에 두고 희란의 컨디션 조절을 고려한 행동이긴 했지만, 일부러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을 숨겼고, 그 최대 출력마저 한계점이 아니라는 사실도 숨겼다.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알 라시드는 청뢰를 현재 협회에서 매긴 최고등급인 2등급 아티펙트보다 1.5단계가량 높은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샌 드래곤같이 정신 나간 항마력을 가진 용종 괴수에게 -뒤를 생각하지 않는 다는 가정 하에-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수준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게 아티펙트가 가진 한계가 아니라 사용자의 한계라고 한다면, 청뢰를 끼고 있는 희란 채로 탈취를 시도할 지도 모를 일이다. 아티펙트라는 틀을 깨부수는 말도 안 되는 물건이니까.
그렇다고 그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기에, 류 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지만 청뢰는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대여 또한 불가합니다.”
“조건도 안 들어보고 이렇게 칼같이 잘라도 돼? 뻐기는 것 같아서 좀 그렇지만 우리 클랜 꽤 부자라고?”
“칼리프 클랜이 부유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청뢰는 거래대상이 아닙니다. 거래 대상으로 내놓는 순간 정부가 나설 테니까요.”
“아, 그 부분은 우리 쪽에서...”
“죄송합니다. 일시적인 무마를 믿고 거래를 하기에는 저희 팀이 딱히 소속도 없는지라.”
넉살 좋게 그럼 칼리프 클랜으로 오라고 권하려던 알 라시드는 멈칫하고 제 옆을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람이 허벅지 살을 생으로 뜯어낼 것처럼 꼬집어대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안 들어봐도 뻔했다. 저 기분 나쁜 남자를 꼬시지마!
마람이 협회에 합류한 첫날 이후, 그녀의 류 현이라는 남자에 대한 적개감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류 현이 청뢰를 공개한 이후에는 복도에서 혼자서 마주치면 선빵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클랜 측에서는 마람을 잘 달래고, 류 현이라는 남자도 회유해보라고 했지만 그로서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마람을 달래는 걸로 이미 한계였다. 아니, 마람의 존재자체가 그에게는 한계상황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알 라시드는 스트라이커답게 행동했다.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상대는 빠르게 포기했다는 의미다. 욕은 먹겠지만, 마람이 깽판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래? 그럼 별 수 없지. 마음이 바뀌면 연락 달라고. 꼭 청뢰 건이 아니어도 되니까. 칼리프 클랜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어.”
그 와중에도 한 번 찔러보는 건 잊지 않았다.
“예, 생각해보도록 하죠.”
“그럼 또 지루한 분배율 얘기를 해야겠네. 젠장, 난 이런 걸 왜 우리한테 시키는 건지 모르겠어. 경제 전문가나 변호사 팀 꾸려서 조율하면 될 거. 서로 등 맞대고 싸워야할 상대랑 던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협상질이라니. 이런 모습을 내 팬들이 보면 환상이 깨졌다고 소송 걸지도 몰라.”
정말 하기 싫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한계까지 몸을 뒤로 젖히는 알 라시드. 류 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응했다.
“어쩌겠습니까.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기왕이면 부유한 칼리프 클랜 측에서 좀 양보해주시는 게?”
“그건 좀. 우리 영감님이 나 때려죽이려고 들 거야.”
***
3일 후.
류 현은 경기도 파주의 한 야산에 서있었다. 그의 앞에는 당장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것 같은 시커먼 블랙홀 같은 구멍이 허공에 떠있었다. 던전의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존재. 던전이다.
류 현은 눈앞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던전 입구를 지그시 바라봤다. 자신의 뒤통수를 간질이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눈빛처럼.
그런다고 던전이 사라지거나, 뒤에 서서 자신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원정대원들의 의구심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지만, 류 현은 그렇게 했다.
‘칼리프. 칼리프 드 오르시아.’
이 너머 안에 있는 것이 그가 알던 블랙 던전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 여자. 평소처럼 그냥 안에 있는 괴수나 때려잡고 나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그의 앞에 나타난 이계인.
‘젠장, 차라리 그 여자가 날 골리려고 거짓말을 한 거였으면 좋겠군.’
지난 한 달간 류 현에게 팔자에도 없는 모르쇠 연기를 하게 만든 장본인. 팀원과 친구에게 의심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기억이 불완전한 척하게 만든 장본인이 그녀였다.
칼리프에게 들었던 정보를 류 현은 도저히 팀원과 친구에게 다 풀 수가 없었다. 석비를 만지고 사흘 넘게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가 일어난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간,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거려주다가 조용히 그에게 정신과 의사를 붙여줬을 테니까.
믿으면 믿는 대로 곤란하기도 했다. 거짓말에 절망적일 정도로 재능이 없는 류 현은 칼리프와의 대화에서 회귀사실을 쏙 빼놓고 모든 걸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류 현도 칼리프가 회귀사실을 운운하면서 얘기하지 않았다면 믿기는커녕, 그 대화를 그냥 악몽으로 치부했을 테니까.
‘거기다..‘열쇠’가 없으면 누가 들어가든 말짱 헛짓이라는 걸 알렸다간 개판이 됐겠지.’
결정적으로 ‘열쇠’는 류 현 몸에 깃든 것 하나 뿐이었다. 다른 ‘열쇠’가 있으면 다행이겠으나, 지난 한 달간 협회를 통해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아프리카에 있는 X던전으로 향하는 아시아 연합, 본토의 X던전을 막기 위해서 조직된 미국의 원정대는 별 특별한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평범하게 던전 원정대를 조직하고 있다고 했다.
‘중요한 건 ‘열쇠’. 머릿수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아무리 머릿수가 많아도 ‘열쇠’ 없이는 문지기를 못 잡아.’
류 현이 석비를 통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다른 두 곳의 원정대는 규모가 큰 만큼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정보를 공개할 수가 없었다. 믿을지도 의문이지만, 믿어도 문제인 건 이쪽도 다를 게 없다. 한 곳을 찌르면 다른 두 곳도 반응 한다는 걸 사실을 숨기더라도, 서로 먼저 ‘열쇠’를 가진 류 현을 데리고 원정 시도를 하려고 들 테니까. 류 현은 그런 웃기지도 않는 경쟁에 시간을 버릴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류 현이 공개한 정보는 두 가지였다. X던전이 겉보기와 달리 포화기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것과, 석비를 통해서 얻은 정보에 대한 기억이 명확하진 않지만 자신에게 그곳에서 주효한 일회용 아티펙트가 깃들었다는 사실.
두 가지 다 거짓말이었다.
X던전의 유예기간은 아직 월 단위로 남아있고, 석비를 통해서 받아들인 정보는 그를 물 먹인 수능문제보다 더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기억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기에 아예 전부 속이기로 한 것이다. 정보를 공개할 경우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을 테지만, 처음부터 철판을 깔고 들어가면 의외로 의심 살 일이 적다.
류 현은 자신이 생각해도 웃기지도 않는 연기를 이 주 동안 지속하며, 어찌어찌 원정준비를 마쳤다. 급조된 탓에, 도전하는 던전 난이도에 비해서 미팅 횟수조차 적었던 팀치고는 준비가 꽤 잘 된 편이었다. 그 준비라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를 상정한 것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칼리프는 한 곳을 닫고 나와도 다른 곳에 도전해서 유예정도는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어느 정도 유예인지는 몰라도 이 파주의 X던전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다음 원정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니까.
‘말하는 꼴로 봐서는 그냥 터지면 화이트 급 터진 걸로는 안 끝나. 두 곳 다 유예기간이라도 받아놔야 한다.’
동시에 류 현은 이 상황이 짜증났다. 동시에 진절머리 났다.
‘젠장...팔자에도 없는 영웅놀이를 하게 될 줄이야.’
푸념은 거기까지였다.
류 현은 뒤돌아서 여섯 명의 원정대원들과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불안, 흥분, 기대, 꺼림칙함 등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는 자들의 눈빛은 그들의 심정을 꽤나 솔직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류 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원정대원들에게 말했다.
“진입합시다.”
그리 말하곤 류 현은 던전에 몸을 던졌다. 그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