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탐식마(貪食魔)
회귀 후, 류 현이 가장 우려한 것은 변한 자신으로 인한 변수 발생이었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기다라는 건 말이 안 되니, 움직이긴 해야겠지만 움직일 때마다 심히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저런 준비를 하면서도, 은근히 미래가 바뀌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런 걱정은 회귀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접었다. 승하가 보여준, 그가 아는 것보다 훨씬 빨리 등장한 블랙 던전-가칭 X던전-은 오히려 미래가 너무 급격하게 바뀌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심어놓았다.
그 불안감은 세아의 병세 악화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 일을 기점으로 류 현은 예상을 포기했다. 아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손을 놓은 건 아니고, 아득바득 예측하려는 걸 포기했다는 뜻이다.
손닿는 일들은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 확보해야하는 아티펙트 재료나 던전 목록을 꾸준히 작성하고 파기하면서, 그 여파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생각했다. 그러고도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잠 못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류 현은 뭘 계획해서 제대로 움직여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인생은 자의든, 타의든 누구와 연관되었다고 단정 짓는 게 무의미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관계 되었고, 엮인 사람이 많을수록 예측하기란 어렵기 마련이다.
욕 나올 정도로 복잡하고 귀찮은 상황 속에서 류 현이 택한 노선은 선 들이받기 후 생각하기였다. 무서울 정도로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결과는 최고였다. 류 현이 생각하기에도 단순 스펙 비교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어떻게 못할 아지다하카라는 괴물을 떨어뜨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 확고한 철학(?)을 가진 류 현은 지금 자신의 철학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마람 무함마드 압둘아지드.
알 라시드가 칼리프 클랜에서 추가 파견해준 지원군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던전이 아니라 패션잡지 표지 모델이 더 어울려 보였다. 겉모습만.
‘미친...이런 괴물은 또 어디서...’
별로 길지도 않았을 비행이 피곤했는지, 연신 하품을 해대는 마람 압둘아지드를 보며 류 현은 입을 헤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옆에서 그를 주시하던 화련이 아랍 미녀 앞에서 굳어버린 류 현에게 눈을 흘겼지만, 류 현은 승하와 같은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못 해도 알 사디크와 동급이다.’
‘그냥 붙어도 영감탱이 이길 거 같은데? 템 떼고 붙으면...어우...’
무슬림 플레이어의 자존심이자, 지주인 자파르 알 사디크를 뛰어넘을 것으로 보이는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도 무명으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경악시켰다.
외부에 제시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몇 점을 줄 수 있는 인재이니, 총합으로 자파르 알 사디크를 뛰어넘는다!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감이었다. 악수조차 하지 않았지만, 보는 순간 아! 하고 느낌이 왔다. 그들이 레드 던전에서 나오는 괴수와 유사하게 생긴 퍼플 던전 괴수를 혼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는 순간 괴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개발 초기 단계인 괴수 탐지망보다 더 날카로운 감!
그건 류 현과 검성을 마주하는 순간 아닌 척, 눈을 슬쩍 흘긴 마람 압둘아지드도 마찬가지였다. 셋 다 최전선을 넘어서, 괴수와 살을 비비적거리며 싸우는 스트라이커들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감. 당당하게 육감이라고 칭해도 정면에서는 비웃음 당할 일 없는, 적어도 플레이어들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감이다. 갑자기 상황이 터져서 불려간 웨인도 마람과 대면한다면 둘이 느꼈던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터.
류 현은 회귀 이후 처음으로 제 감을 부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의 감은 마람 압둘아지드가 그를 휙 지나쳐갈 때 미쳐 날뛰는 것으로 꿈 깨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건 현실이야, 정신 차려 머저리 새끼야!
“라시드, 내 방은?”
“어,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방을 알아보진...”
“...이 일은 기억해 두겠어. 네 방은 어디야?”
“협회 안에서 지내고 있습니다만.”
“내가 그 정도도 생각 못할 거 같아? 어디냐고.”
알 라시드는 그대로 마람에게 귀를 잡힌 채로 협회 안으로 끌려들어가 버렸다. 알 라시드가 끌려가면서 공주님!을 연발했지만, 류 현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용잡이 팀원들은 팀장의 이례적인 반응에 정신이 팔려서 듣지 못했고.
“괴물이네. 어휴, 어디서 저런 게 자꾸 튀어나온 담?”
류 현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승하의 한 숨 섞인 넋두리에 류 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희란과 화련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아니, 공주님! 제 귀 떨어진다니까요! 공주니임!”
알 라시드는 얼굴조차 기억 안 나는 어머니에게도 당해본 적 없는 창피를 당하는 중이었다. 키가 2미터에 달하는 남자가, 여자치고는 크다고는 하나 저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은 여자에게 끌려가는 중이었으니까. 알 라시드는 농담으로도 귀엽다고 하기 힘든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었고, 마람은 근육이 있어도 정상적으로 운동한 여성의 그것 정도였다. 외부에서 보면 꽉 잡혀 사는 남자 그 자체였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마람은 맨 손으로 오우거를 잡아 뜯어 분해하는 괴물이었고, 그런 그녀의 악력은 아티펙트나 마력 운용을 빼더라도 살인적이라고 할 만 했다. 맨손으로 은행금고를 뜯어버릴 수 있는 괴물이니까.
올 브레이커. 칼리프 클랜이 그녀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이 별명은 괴수고 마법이고 가리지 않고, 두 손으로 모든 걸 잡아뜯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무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칼리프인 자파르 알 사디크를 제쳐놓고 세계최고를 다투는 건방진 놈들을 모두 부서 버려주길 바라는 소망도 담겨있었다.
그리고 재능만 보면 자파르 알 사디크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천재였다. 그녀에게 부족한 건 후발주자에게 언제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마람 압둘아지드는 칼리프 클랜이 조용히 날을 세우며 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비수였다. 그냥 비수가 아니라 심혈을 기울여서 고른 칼에 날을 바짝 세우고, 세심하게 준비한 독까지 먹여놓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비밀병기!
세간이 평하기로 칼리프 클랜 내 무력 순위 2위이자, 소위 말하는 템빨 떼고 나면 자파르 알 사디크와 어깨를 나란이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알 라시드조차 막 나갈 수 없는 상대였다.
알 라시드가 그녀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칼리프 클랜은 그녀를 공주 대하듯이 했으니까. 던전 밖에서는 말이다. 그녀의 보모 역할을 맡은 알 라시드는 던전 안에서도 그녀를 공주님 모시듯 해야만 했지만.
알 라시드 입장에서 가장 끔찍한 건, 칼리프 클랜이 그동안 꼭꼭 숨겨놨던 마람을 드러낸 이상 자유고 나발이고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던전 클리어가 순조롭게 끝나면 슬쩍 도발해서 류 현과 한 번 붙어보려던 계획은 당장 폐기해야함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행동의 자유가 없어질 확률이 높았다.
마람 압둘아지드의 경호원 겸 파트너로 붙게 될 테니까. 자파르 알 사디크가 갑자기 미쳐서 다른 칼리프를 추대하고 마람에게 붙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협회의 웨인 크로이츠나 검성 나승하가 이상한 것이지, 세계구급으로 평가 받는 플레이어들은 철통 보안 속에서 산다. 알 라시드는 다른 의미에서 제외된 인간이었다. 실력 있다 싶은 플레이어와 만날 일이 있으면 한 판 붙어보고 싶다고, 시비부터 붙고 보는 상또라이에게 경호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쨌든, 마람의 데뷔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알 라시드에게는 재앙이었다. 자유로운 삶이 끝장날 거라는 양형 선고이기도 했고,
“또 다른 계집을 끼고 돈 건 아니겠지?”
자유로운 삶을 넘어서 인생의 무덤으로 들어가게 될 거라는 사형선고이기도 했다.
귀를 놔주고 제 품에 코를 박고 킁킁 거리는 마람을 내려다보며 알 라시드는 한 숨을 삼켰다. 이 이유 때문이라도 칼리프 클랜은 자신을 마람의 경호원 목록에서 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마람은 스승인 알 라시드의 똘끼마저 그대로 물려받은 미친 여자였으니까.
‘지가 무슨 개야 뭐야...내가 하고 나서 씻었으면 어떻게 알 거야?’
류 현이라는 남자가 X던전의 ‘열쇠’라는 걸 보여준 당일에 자파르 알 사디크에게 증원 요청을 제 입으로 하긴 했지만, 알 라시드는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오는 듯 했다. 클랜 측에서 이렇게 쉽게 마람을 보낼 거라고 상상도 못하고 한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정말 멍청한 발언일 뿐이었다.
겨우 그린 던전이나 돌던 때에 자신을 보모로 붙여주지 않으면 던전에서 머리 박고 죽어버릴 거라고 악을 쓰던, 정신 나간 제자를 떨떠름한 얼굴로 내려다보면 알 라시드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애써 열었다. 그리고 마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마약 단속반께서는 냄새는 제대로 맡으셨나? 왜 악수도 안 한 거야? 평소 같으면 검성 손 덥썩 잡고 집어 던졌을 거면서.”
“...내가 무슨 짐승인 줄 알아?”
알 라시드는 다짜고짜 남자의 품에 코를 박고 냄새로 다른 여자를 건드렸나 아닌가를 따지는 건 동물도 하지 않는 짓이라고 지적하진 않았다.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미 수차례 확인했다. 마람의 집착은 이미 의부증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런 소리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하는 소리지.”
마람 압둘아지드의 천재성은 스승인 알 라시드를 쌈 싸먹을 정도로 빼어난 전투력에 그치지 않는다. 올 브레이커라는 별칭에 어울리지 않지만, 그녀는 손에 쥐었던 대상에 대해서 견적을 기가 막히게 낸다. 주먹질 두 번이면 박살내겠구나, 백 발을 먹여도 소용없겠구나 이런 식으로 말이다.
대상과의 격차가 줄어들수록 정확도가 떨어지지만, 플레이어에 대한 공신력 있는 지표라고 해봐야 협회조차 경험정도 이외에는 별 쓸모없다고 인정한 헌팅레벨 정도가 전부다. 이런 상황인데, 마람이 악수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정밀측정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잡고 싶지 않았어.”
“뭐?”
“검성 옆에 있던 그 남자. 류 현이라던가? 그 남자랑 악수하기 싫었다고. 마음 같아선 근처에도 가기 싫었어.”
그런 마람으로부터 튀어나온 말은 정말 의외의 것이었다.
마람 압둘아지드는 알 라시드의 수제자다. 스승과 제자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 한 플레이어의 세계이지만, 알 라시드는 강제로 떠맡은 제자 덕에 던전이라는 가혹한 닫힌 세계가 스승과 제자에게 무슨 영향을 끼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스승이 또라이면, 제자는 스승에게 똘끼를 물려받고 제자 또한 스승을 더 또라이로 만든다. 예외가 있을지 몰라도, 알 라시드와 마람은 그랬다. 서로를 만나기 전에도 또라이었던 둘은 붙어 다니면서 더 미쳤다는 평을 얻었다.
그 말인즉슨, 마람 압둘아지드가 단순히 보기 싫은 상대 팔을 비틀어 끊어버리는 일은 있어도 잡기 싫다고 표현할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거기다가 검성은 마람이 집어던져보고 싶어하던 대상 중 하나였다. 그런 검성을 포기할 정도라니?
거기에 마람이 꺼려진다는 표현을 말로 한 상대는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행동으로 표현했다. 유일한 예외는 자파르 알 사디크. 훗날 그녀가 보좌해야할 칼리프. 그조차 불편하다는 평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으로 그조차 얼마 안 가 자신의 뒤에 서게 될 거라는 걸 알았기에, 느낀 거라고는 상관에 대한 불편함뿐이었다. 당연히 알 사디크와 악수할 기회를 거부하지 않았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공주님?”
“라시드. 그 괴물이랑 붙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마. 그 전에 내가 네 팔다리를 끊어버릴 거니까.”
마람의 동문서답에 알 라시드는 진지하게 알 사디크 휘하의 친위대 전부를 불러야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류 현은 방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무협지나 절에서 볼 법한 흔들림 없는 좌선이었지만, 류 현의 머릿속은 자세와 정반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마람 압둘아지드. 마람, 마람, 압둘아지드. 없어! 젠장,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눈에 띄는 여자를 기억 못 할 리가 없지...이전 생에서는 없었던 여자야.’
원인은 알 라시드가 칼리프 클랜에서 불러온 지원군. 마람 압둘아지드 존재였다.
류 현이라도 이전 생에서 활동했던 최상위급 플레이어 전체를 기억하진 못한다. 세계구급 인지도로 범위를 좁히면 어느 정도 자신할 수는 있어도, 완벽하진 않다.
류 현이 본격적으로 날뛰었던 시절은 플레이어가 갈려나가던 3차 ‘대소환’ 이후다. 블랙 던전을 수 십 차례 공략한 베테랑도 네임드 괴수 출현에 휘말리면 허망하게 죽을 수 있다. 이름을 기억하기도 전에 죽어나자빠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 시점에서 알 사디크는 못해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 그런데 그 템빨 괴물이랑 동급의 괴물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고? 개소리.’
무장 하는데 못해도 원전 하나를 통째로 팔았다는 비아냥 아닌 비아냥을 듣고 사는 자파르 알 사디크는 템빨 부분을 감안해도 강하다. 세상에는 온갖 고급 아티펙트로 무장해도 오우거는커녕 라가 주술사의 저주 한 방에 쇼크사하는 놈들이 널렸으니까. 그 템빨을 자신의 무력으로 흡수하는 것도 재능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본 마람 압둘아지드는 아침에 본 상태 그대로 알 사디크와 접전을 벌일 수 있는 괴물이었다. 두 단계 정도 낮은 무장을 갖춰준다면? 볼 것도 없이 압승이라고 류 현은 장담할 수 있다.
그런 괴물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다. 여태껏 칼리프 클랜이 숨겨온 것도 용할 지경이다. 명불허전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그래봤자 숨기는 건 3차 ‘대소환’전까지가 한계다.’
류 현은 확신한다. 칼리프 클랜이 아무리 드러난 것보다 수면 아래에 숨기고 있는 저력이 더 대단한 곳이라고 해도, 이전 생의 3차 ‘대소환’ 이후에는 저런 괴물을 숨길 수 없을 것이라고.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던전의 시대에 대놓고 활개 치지 못하고 수면 아래에서 힘을 쌓았던 미국조차, 힘을 쌓은 과정까지 까발려질 정도로 남김없이 힘을 드러내야만 했었다. 칼리프 클랜이 아무리 대단해도 힘을 드러낸 미국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 알 라시드처럼 누군가를 대신해서 죽었거나, 네임드 몹 출현장소에 있다가 네임드 몹의 기지개에 맞아죽었거나.
‘둘 다 가능성은 낮아.’
마람은 누가 봐도 칼리프 클랜의 비밀병기다. 상상력이 뛰어나고 비약을 잘하는 이라면 그녀가 알 사디크의 사냥개로 키워졌다고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대신 죽어줘야 하는 대상은 알 사디크 그 뿐이다.
‘자파르 알 사디크는 3차 ‘대소환’이 확인된 이후로는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그 알 사디크가 3차 ‘대소환’ 내내 머문 아라비아 반도는 ‘마녀’ 이전에는 네임드 몹이 출현한 적이 없다. 진격로가 된 적은 있었어도. 아라비아 반도가 네임드 몹에 진격로에 놓이게 되면 여지없이 대 피난길에 올랐다. 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뜻이다.
‘알 라시드가 알 사디크 대신 죽었을 때도 저런 실력자가 있었으면 팔 하나 정도는 버리더라도 죽을 일은 없어.’
후자의 경우도 가능성은 낮았다. 3차 ‘대소환’이후 칼리프 클랜 소속 퍼플 던전 이상의 실력자는 자파르 알 사디크 옆에 계속 붙어있었으니까. 알 라시드처럼 독립된 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지위가 없으면, 밖으로 나도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정도 지위가 있다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칼리프 클랜의 입장에서도 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날카로운 칼날을 지킬 힘이 있다면 내보이고 위세를 떠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으니까. 힘을 드러낸 미국이 그랬고, 독립국을 꿈꾸던 ‘예거즈’가 그랬다.
결국 류 현이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제한된 정보 내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마람 압둘아지드는 회귀로 인한 변화의 결과물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결론은 내는 게 불가능했다. 계속해서 이전 생과 다른 변화의 조짐들을 봐왔으니까. 거기에 쐐기를 박는 만남까지 최근에 있었다.
‘젠장, 뭐가 사서고 용사야. 이런 변수가 생겼으면 대충 힌트라도 줬어야하는 거 아냐.’
괜히 칼리프 드 오르시아를 씹어보는 류 현이었다.
***
이주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