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6화 〉탐식마(貪食魔) (126/429)



〈 126화 〉탐식마(貪食魔)

2차 ‘대소환’ 초기, 혼란스러웠던 정국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 시작하자, 각국은 플레이어 확보를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정보조직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재능 있는 플레이어들을 찾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2차 ‘대소환’이 터지기 전에는 최상위 던전이 블루 정도 수준이었지만, 그 당시에도 최상위급 플레이어의 중요성을 모르는 나라는 없었다. 최상위 플레이어가 백 마리 땅돼지는 막을 수 없지만, 백 마리 땅돼지 보다 더 한 화력을 보유한 라가 주술사는 쳐 죽일 수 있다. 땅돼지는 보병과 크레이모어에 맡기면 될 일이다.

괴수는 인간 병과보다 상성 타는 것이 훨씬 심했고,  단계가 올라갈수록 그러한 경향이 더 짙어졌다. 드래곤 피어를 흩뿌리는  드래곤을 상대하는 데는 일개 사단보다, 대대 규모의 플레이어 부대가 훨씬 효과적이며, 그 플레이어 부대 보다 웨인 크로이츠 같은 피어에 적응한 개인이 중심이  팀이 훨씬 효과적이다. 샌 드래곤이 등장한 땅을 통째로 녹여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전 세계 정부가 영웅이 될 재목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을  기다렸다는 듯이 재능을 터뜨리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동아시아의 나승하.


유렵의 웨인 크로이츠.


아프리카의 딘 앗쿰.

미국의 지벡 건터.

인도의 라비 라자.

중동의 자파르 빈 무함마드  사디크.


자파르  무함마드 알 사디크.


중동 플레이어, 아니 정확히는 무슬림 플레어어들의 정신적 지주다.


중동이라는 국경의 범위를 넘어서,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범위를 아우르는 칼리프 클랜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창립 멤버이자 클랜 내외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의 추종자는 플레이어, 일반인을 가리지 않으며 추종자들은 그를 신의 대행자. 칼리프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런 자파르  사디크조차 무슬림 형제들을 아우르는 칼리프 클랜을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는 노릇. 알 사디크는 지혜롭게 처신했다.

종교적으로 강경파인 자신의 입장을 칼리프 클랜의 공식적 입장으로 삼지 않고, 반대파와 사업에 관심이 더 많은 자본가, 왕족들에게 구심점을, 대표자를 만들어줬다. 그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고 의견을 경청했다. 때로는 자신에 버금가는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못 본 척 해주기도 했다.

알 사디크 본인의 지지자들은 이런 처사에 불만이 없진 않았지만, 칼리프 클랜은  사디크의 지혜로운 처신에 힘입어 범국가적 규모의 클랜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결속되었다.


알 라시드는 그런 자파르  사디크의 오른팔이자, 칼리프 클랜 내의 중립파의 우두머리였다. 세력 규모로는 3인자의 위치에 있으며, 일신의 무력으로는 신의 전사라 불리는 자파르  사디크에 버금가는 괴물.

‘지금은 어떠려나...그래도  사디크가 더 세려나? 하긴 알 사디크 템빨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니까 지금 따지는 건 의미 없긴 하겠네.’

 현의 뇌리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몇  되는 플레이어  하나였다.


 라시드는 세간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족쇄를 거부하는 또라이였다. 그는 무슬림 플레이어 조직인 칼리프 클랜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무슬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3차 ‘대소환’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올라타, 유명세를 떨치던  현에게 호의를 보이는 유일한 칼리프 클랜 소속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특이한 걸 넘어서 이상한 일이었다.  라시드는 류 현이라는 플레이어에게 호의를 보일만한 배경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견제내지 제거 후보군으로 보는 게 맞다.

‘그래, 끌어들일 수 있는 놈도 아니고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뭐하겠어.’

이전 생에서 알 라시드는 3차 ‘대소환’ 이후 나타난, 네임드 몹 ‘마녀’에게 살해당했었다. 정확히는 자파르 알 사디크를 대신해서 희생했다. 알 사디크의 오른팔이라는 세간의 평이 아깝지 않은, 아니 과소평가라는 것을 보여준 최후였다. 무슬림스러운 모습은커녕, 망나니 스포츠 스타 같은 행보를 보이던 알 라시드의 최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


따라서 알 라시드에게는 호의를 사는 것 이상의 뭔가를 기대하긴 힘들다. 알 라시드는 이미 자파르 알 사디크에게 목숨을 내줄 정도로 그에게 묶여있으니까. 류 현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가 데려온 일행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지만.

“알 라시드? 라스베가스에서 돈 다 잃고 오우거 잡아준 걸로  쳤다는 그?”

승하로부터 협회사정을 듣고서 후보군 조사를 열심히 한 화련의 반응은 이랬고,


“영감이 너 쫓아냈어?”

 라시드와 안면이 있는 승하의 반응은 이랬다.


희란은 관심 없다는 듯이 일행 뒤편에 우두커니 서서,  라시드의 얼굴을 살피다가 눈이 마주치자 류 현의 뒤로 숨어들었다.


“가끔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영감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 클랜 내에서 나보다 잘 치는 놈도 없고.”

 라시드가 반응한 건 승하의 물음이었다.


클랜 전용기 안에서 이미 면도를 했지만 벌써 거뭇거뭇한 기색이 보이는 턱을 쓸며, 알 라시드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알 라시드의 팔이 승하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엇, 또 바람맞히는 건가?”
“또 헛소리. 어디서 친한 척이야?”
“같이 합 맞춰봤으면 친구 아닌가?”
“그랬지. 칼리프 클랜 쪽에서 뒤로 내 친구들을 협박만  했다면 말이야.”
“그건 할 말 없군. 우리 영감님이 좀 정력적이어야지.”

알 라시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물러났다. 중동 미남의 표본이라고 세워놔도 이의가 없을 것 같은 그가 그러자 모양새가 어떻든 그림이 됐다. 그와 마주한 일행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다행이 모두 라시드님을 아시는  같군요.”

웨인이 재빨리 끼어들어 냉각되려는 분위기를 풀어놓았다. 알 라시드는 웨인의 눈치를 살피더니 뒤로 물러났다. 승하는 삐뚜름하게 팔짱을 끼고 어디 해보라는 듯이  있기만 했다.


“여기서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점심 준비를 해놨습니다.”

부드럽게 권하는 웨인의 말에 이의는 없었다.

***


“추가인원은  라시드 씨 뿐입니까?”

 현의 물음에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확 쏠렸지만 류 현은 뚱한 얼굴로 웨인만을 바라볼 뿐 다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봐, 친구.  말은 나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밥맛 떨어지게 뻐기는  별로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소리는  쪽에서 하는  맞는 거 아닌가? 이거  자존심 상하는 데.”
“알 라시드 씨의 실력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원정대 규모를 정확하게 알아야 포지션이나 계획을 정하지요.”
“엥? 그걸 왜...”


‘니가 정해? 검성이나 웨펀마스터도 있는데?’


류 현은 승하를 힐끔거리고 있는 알 라시드가 삼켜버린 뒷말까지 모두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들추진 않았다. 어찌됐거나 안고 가야할 원정대 동료인데 초장부터 험악한 관계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원정대 대장은 류 현이 하게 될 거야. 본인이 싫다고 하지 않는다면.”

승하가 그런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적절하게 치고 들어왔다. 웨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알 라시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식당에 자리한 이들의 표정을 살폈지만, 자신과 비슷한 심경인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황당함을 다른 방식으로 피력하기로 마음먹었다.


“초면에 이런 소리 하긴 좀 그런데. 혹시 협회장 숨겨둔 아들이야?”


효과는 확실했다. 식당 안에 있는 이들 중 류 현을 제외한 이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썩어들어 갔으니까. 알 라시드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무덤덤하게 차를 홀짝거리고 있는 남자가  무리에서 꽤나 신뢰받는 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검성과의 관계는 길게 됐어도 이 년이 채 안됐을 텐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껄렁한 태도와 달리 알 라시드는 자파르  사디크로부터 단단히 당부를 받고 협회로 왔다. 그가 이곳으로 파견된  X던전 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칼리프 클랜이 올라타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지만, 협회와 검성 사이에 감도는 미묘한 기류를 파악하고 싶어 하는 칼리프의 의중 때문이었다.

던전 공략에서 공을 세우기보다는 안전을 추구하면서 정보를 모을 것! 특히 용잡이 팀이라는 신생팀의 리더에 대해서는 시답잖은 농담이라도 끌어 모을 것!

말하자면 도움을 주는 채하면서 첩자짓을 하러 온 것이다. 던전 공략을 돕긴 하겠지만, 주목적은 아니다. 알 라시드 사전에 눈앞의 던전을 소홀히 하는 법은 없지만.


‘그거랑 별개로 진짜로 궁금하긴 하단 말이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모든 걸 다 제쳐놓고 본인이 궁금하기도 했다. 류 현이라는 남자. 이 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퍼플 던전에서 활동할  있을 만큼 성장한 것도 놀라운 데, 협회에서 조심스럽게 대할 정도로 검성과의 친분마저 있다.


한국이 나서서 작정하고 키웠어도  정도는 아닐 것이다.


아니, 그랬다면 검성과 아예 척을 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거즈’ 창립멤버들이 잇따른 사고로 죽어나간  한국 정부의 장난질일거라고 공공연하게 수군거리는 상태다.

검성이 미치지 않고서야 한국 정부에서 키우는 인물과 협력할 리가 없을 터.

‘돈도, 권력도, 안전도, 스릴로도 못 꼬신 여자를 어떻게 꼬신 건지...’

알 라시드는 임무와는 별개로 류 현을 붙잡고 그가 짜증나서 말해  때까지 매달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칼리프 클랜의 검성 암살 계획의 목표를 매수로 바꿔놓은 장본인으로서 정말로 궁금했다.


칼리프 클랜이 내걸 수 있는 조건을 전부 내걸어도, 간이 계약서 앞에서 방귀 밖에 안 뀌던 도도한 여자를 어떻게 꾀어냈는지!

알 라시드는 눈에서 불꽃을 내쏟을 것처럼 류 현을 바라봤지만,  현은 뚱한 태도를 유지할 뿐이었다. 알 라시드 입장에서는 류 현은 정체를 알  없는 무언가겠지만, 류 현의 입장에서는  라시드는 미친 척하는 충견일 뿐이다.


목줄을 쥐고 있는 자파르 알 사디크의 의향과 알 라시드 본인의 성향마저 알고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이번 원정 대상인 X던전이 수작질을 벌이기 어려운 장소라는 것도 한몫했다.

‘석판에 있던 정보대로만 되어있어도 혼자서 설치는 건 불가능하지.’

 현이 알 라시드의 무례한 발언에도 무덤덤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알 라시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의미가 없다.


‘애초에 힘으로 깨라고 만든 던전이 아니니까. 탐색이고 뭐고 아이고 다 의미 없다.’

 현은 백 마디 말 대신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변이된 석판에 깃든 그 오른손이었다. 손바닥에 새겨진 육망성 같은 문신을 보고 알 라시드의 표정에 의문이 어리자 류 현은 말했다.


“제 조국에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말이 있죠. 제가 원정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드리죠.”

 현은 속으로 미소 지으며, 석판을 발동시켰다.

***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니까! 영감, 나  믿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마법사 목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따잖아. 눈속임 수준이 아니었다고! 어? 아니, 아니. 그냥 방어막 수준이 아니었다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아무튼 우리 마법사들 다 모아서 풀라고 해도  풀 수준이라니까! 아니, 내 머리가 돌인 건 맞는데 이건 그거랑...어쨌든!”


거리에 어둠이 들이닥친 지 오래 되었건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거리 한복판에서 마임 공연이라도 하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통화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 괴수로 인해서  바탕 난리가 나지 않았다면, 몇 안 되는 행인들이 남자를 둘러싸고 구경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을 것이다.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고, 전화기를 향해서 손을 모으는 제스처를 취하길 반복하다가 더 없이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어,  해도 영감 급이야.  감으로는 이미 검성 급이고. 더 성장할지는 글쎄...솔직히 말해서 이제 와서 미친 성장세가 멈추는 게  이상할  같은데. 응, 어...어? 영감? 숨김 패라면서? 잠깐만, 그런 게 어디 있어!”

남자, 알 라시드는 제 휴대폰을 바닥에 내팽개치곤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조금 진정되고 나자, 그는 제 손으로 두 눈을 덮으며 웅얼거렸다.

“...미친, 여기까지 와서 공주님 수발을 들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곱 번째 원정대원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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