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탐식마(貪食魔)
“하아...”
하얀 입김이 보일 정도로 쌀쌀해진 11월의 밤이었다. 앞섶을 여민 행인들이 멍하니 서있는 화련을 힐끔거리면서 지나쳤지만, 화련은 그 시선에 불쾌감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화련은 스스로에게 고개를 내젓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단독 주택들이 가득한 동네에서도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빨간 지붕의 집에 도착한 화련은, 언제 나처럼 새빨간 지붕을 쓱 한 번 올려다봤다.
저 눈에 띄다 못해 집주인이 머쓱해지는 빨간 지붕은 이모의 취향이었다. 집을 산 이후에 사흘 이상 있어본 적 없는 그녀의 이모의 취향이었다. 나이에 안 맞게 빨간 지붕 노래를 부르던 이주희 여사를 떠올린 화련은 픽 웃고는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텅 비어있던 집안의 냉기가 그녀를 반겼다?
“...?”
평소와 같은 그 공기가 아니었다. 단순히 차기한 게 아니라 공허함마저 느껴지는 그 공기가 아니었다. 집안에 누군가 있었다.
거기까지 인지하는 데 성공한 화련은 조용히 주변의 마나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마력이 지휘를 하듯 움직였다.
순식간에 몸 주변에 장벽을 두른 화련은 곧바로 거실로 뛰어들었다. 공격용으로 송곳 같은 ‘공간’을 벼려놓은 건 물론이었다.
“어...?”
벽에 좀 구멍을 내는 한이 있어도 초격에 확실하게 이득을 보려던 화련은, 어둠속에 파묻힌 괴한을 확인하더니 굳어버렸다. 거실에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있었다.
“아, 왔어? 좀 늦었네. 기다리다가 자 버리는 줄 알았다니까.”
자다 일어난 것처럼 나른한 어조였다. 화련은 그제야 거실이 술 냄새로 가득하다는 걸 눈치 채었다. 화련의 얼굴에 긴장감 대신 짜증이 자리했다.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담아서 화련은 소파 위에 팔자 좋게 늘어진 사람을 노려봤다. 별 반응이 없자, 화련은 거실 불을 켜고 노려보기를 계속했다.
검성, 나승하는 연보랏빛 눈을 화련에게 향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표정이 왜 그래?”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지금 그게 남의 집에 도둑처럼 들어와서 할 소리에요?”
“아니, 저번에 그랬잖아? 와도 된다고.”
“내가...?”
“음...언제더라...너희가 그 샌 드래곤 잔뜩 있는 던전 갔다 오고 나서였나? 류 현네 집에서 한 잔 마시고나서...”
“그만, 됐어요. 기억났으니까.”
화련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쉽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류 현이 전화 문의에 시달린다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찾아갔더니 욕실에서 홀랑 벗은 승하가 걸어 나왔으니까. 나오자마자 한 대사도 가관이었다. “샴푸 거의 다 됐던데 새로 사야겠더라?”
노발대발한 화련은 그 와중에 장소가 필요한 거면 차라리 내 집에 오라는 식으로 말했었다. 필요이상으로 열이 오른 탓에 비밀번호까지 불어버렸고.
‘나사 두 세 개는 풀어놓고 사는 거 같이 행동하면서...그건 외웠단 말이야?’
역정을 낼만한 상황이었지만, 낼 기분이 안 들었다. 화를 내는 보람이 있어야 낼 것 아닌가. 화련은 지난 시간 동안 나승하라는 인간이 화 좀 낸다고 꿈쩍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학습했다.
화련은 떨떠름한 얼굴로 승하를 내려다보다가, 손짓으로 승하를 밀어내고 소파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 승하의 손에서 따지 않은 캔 맥주를 빼앗은 화련은 한 모금 마신 후에 물었다.
“그래서 혜라한테 쫓겨나서 여기 온 거에요? 웬일이래. 마스터한테 안 가고.”
“본인을 앞에 두고 뒷담화를 할 수는 없잖아?”
“......”
화련은 쥐고 있던 캔맥주를 내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잠시 동안 미동도 않고 침묵하던 화련에게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다 하기 싫어.”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다 죽어가네. 평소처럼 훈련한 거 아니야?”
승하의 물음에 눈을 흘겼다가 다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승하에게 타박해봐야 돌아오는 건 ‘응? 그게 어때서?’같은 대답뿐이다. 검성, 나승하는 생긴 것과 정 반대로 육체파 그 자체였으니까. 훈련이 힘드니 어쩌니 징징거려봐야 받아줄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어디 한곳에 초점을 두지 않고 멍하게 오늘 훈련을 떠올렸다. 오전 중에는 자율 훈련이나 다름없다. 류 현은 희란을 봐주거나 아니면 원정 준비로 바쁘니까. 자신의 공간 마법을 가다듬고, 필요하다면 류 현과 희란을 불러서 혼자 힘으로는 발동 못시키는 마법을 시험 해본다.
슬슬 마력을 조종하는 것도 귀찮고, 점심도 먹어서 슬슬 졸릴 무렵에 마력검 수련을 시작한다. 근래에 화련을 가장 힘들게 하고 있는 일과였다.
검신 길이가 50cm가 채 안 되는 짧은 칼 하나를 들고 흑강목을 찌른다. 칼에 마력을 코팅하듯이 두르는 마력검을 발동 시킨 채로 말이다.
흑강목.
던전 안에서 자라면서 마력이 몰린 정도에 따라서 같은 나무줄기라도 강도가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어디에 써먹기도 곤란한 나무는 마력검을 수련하기에 최고의 교보재였다. 껍질은 손톱으로도 뚫리는데, 중심부가 강철보다 단단하다든지. 아니면 반 이상 관통했는데 갑자기 칼이 안 들어가곤 했으니까.
마력 동조율이 높거나, 마력 내성이 강한 던전 안의 재료들과 달리, 통짜 철검으로 멀쩡하게 이 지랄 맞은 나무를 관통시키려면 마력을 왕창 때려 넣거나, 아니면 세부 조정능력이 달인급은 되어야 한다. 아니면 한 번 찌르고 칼이 구부러질 테니까.
화련은 당연히 전자를 택하려고 했으나, 류 현이 철검 하나를 가지고 흑강목 토막 열 개를 관통시켜야한다고 하자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통짜 철검에 그냥 마력을 때려붓는 식으로 했다가 열 번 찌르기도 전에 검이 부러졌으니까.
결국 화련은 한국으로 귀국한 후로 오후 일과를 나무토막 찌르기로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희란이 이걸 손쉽게 통과하는 걸 보고서 오기가 솟아서 류 현이 시키지 않아도 이 수련으로 오후 일과를 보냈다. 일주일이 넘어가는 기간 동안 다섯 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맥 빠지게 만들지언정, 이렇게 축 쳐지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를 축 늘어지게 만드는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마스터 말이에요.”
이 괴상한 훈련을 지시한 후에 뒤에서 재촉도 안하고 멀뚱히 화련이 그만 둘 때까지 지켜보는 류 현이 그 원인이었다.
“사기꾼 되려면 글러 먹은 거 같지 않아요?”
뜬금없다 못해 이상한 끝맺음이었지만, 승하는 다른 말을 요구하진 않았다. 화련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인 류 현의 행동은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승하는 동의를 표하는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는 대신, 냉장고로 가서 캔 맥주 번들을 꺼내왔다.
냉장고 한 칸을 가득 채운 맥주부대를 본 화련이 헛웃음 지었지만, 내미는 맥주를 거절하진 않았다. 화련은 연거푸 두 캔을 해치운 후에 한 숨을 몰아쉬듯이 말했다.
“말 못해 줄 거 같으면 차라리 티를 내지 말라고...”
“어이구, 그래서 속 상하셨어요?”
승하의 대꾸에 화련의 표정이 확 찌그러졌다. 화련은 승하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시작도 안했지만 지고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쪽도 별 다를 거 없으면서 웬 대범한 척?”
“궁금하기야 하지만 속 끓일 정도는 아니라서.”
“...거짓말, 마스터가 숨기고 있는 거 같이 캐보자고 먼저 꼬드긴 주제에.”
“홀랑 넘어온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
할 말이 없어진 화련은 애꿎은 맥주만 들이켰다. 승하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웃다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뭘 어쩌겠어. 본인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우리가 희란이 같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희란이가 입 다물고 있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
“별 다를 거 없다고 생각하는 데. 개인적으로는 정보 루트보다는 그 쪽이 더 궁금하기도 하고. 넌 못 봤겠지만 ‘강림’썼을 때 진짜 장난 아니었거든.”
“...나도 봤거든요?”
“상대는 안 해 봤잖아. 얘기 들어보니까 던전 안에서 눈 뒤집혀서 날뛴 거 같지도 않고. 뭐, 솔직히 류 현 본인도 그게 정확하게 뭔지 모를 거 같긴 하지만. 알고 있었으면 진작 나 눕히고 최강 먹었겠지.”
“...지금도 마스터가 더 센 거 같은데.”
바로 옆에 있더라도 듣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웅얼거리는 소리였지만, 승하의 귀는 정확하게 그 소리를 포착해내었다. 승하는 곧바로 화련에게 달려들었다. 근접계열도 아니고, 몸집마저 승하보다 훨씬 작은 화련은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요 입이야? 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게?”
장난감 다루듯이 볼을 쭉쭉 두어 번 늘려진 후에 화련은 풀려날 수 있었다. 화련이 벌게진 볼을 쓰다듬으며 눈을 흘기자 승하는 뭐 어쩔 거냐는 듯이 맞대응 했다. 결국 화련은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빠지겠다고요? 하, 사람 나쁜 년 만드네.”
“그럴 리가. 나도 궁금하고, 적당한 상황도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그 때까지만 참자는 거지.”
“상황이 만들어져요?”
“X던전.”
화련은 머리를 굴려 승하의 대답에 대해서 궁리해봤지만 딱히 나오는 답은 없었다. 추리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는 승하보다 접하고 있는 정보가 적었다. 협회는 용잡이 팀의 장인 류 현과 연락하지 화련과 직접 연락하진 않으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요?”
“웨인 크로이츠가 열심히 뛰어다니긴 하겠지만, 원정 대원을 모아봐야 열 명도 안 될 거야. 어쩌면 웨인만 덜렁 따라 들어갈 수도 있고.”
“...네? X던전 발견 됐을 때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데?”
“밖에서 보이는 것 보다 협회가 인원을 끌어 모으기는 힘든 상황이야. 자세한 건 다 설명해주기 좀 그렇고...나중에 웨인 꼬셔서 듣든가 해. 빌어서라도 우릴 집어넣어야 할테니, 얘기해 줄 걸? 아무튼, 아마 원정대 주력은 너 네 팀이 될 거야. 내가 끌어들일 수 있는 전력이라고 해봐야 혜라가 끝이거든.”
“그럼 원정 파토 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열쇠가 있어도 그렇지. 마스터가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이런 저런 소음은 있겠지만 결국 하게 될 걸. 퍼플 던전 혼자서 썰 수 있는 인원이 셋에 그에 준하는 전력이 최소 셋은 붙을 텐데, 안 보내는 게 이상하지 않아? 이번 전조가 보통 전조도 아니고. 솔직히 말해서 웨인 빼면 다 죽어도 협회에 손해는 딱히 없잖아? 욕은 꽤 듣겠지만.”
“......”
화련이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자, 승하는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왔다. 화련이 거부의 몸짓을 보였지만, 승하를 힘으로 당해낼 순 없었다. 화련의 거부가 격렬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너랑 희란이 따로 떼서 봐도 그 정도는 되니까. 쫄지 말고.”
“...마스터가 우리 굴릴 때 하는 소린데 이거.”
“플레이어가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비싼 값에 굴려지냐, 푼돈에 굴려지냐 그 차이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여기까지 말했으면 대충 예상하고 있잖아? 원정대원 모집이 아무리 잘 풀려도 웨인이 돌지 않은 이상은 너희 팀이 중심이 될 거야. 이 이상 외부 팀을 통째로 들이는 건 미친 짓이니까. 류 현이 가진 열쇠가 없었더라도 말이지. 그런데 열쇠까지 생겼으니, 싫어도 그렇게 되겠지.”
“......”
“그리고 류 현은 싫어도 가진 패를 까야 할 거야. 퍼플도 아니고, 그 이상의 던전이니까. 석비 핑계를 대긴 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 전문가가 셋이 붙어서 계속 주시할 텐데 어떻게 계속 숨기겠어?”
“...얘기 들으면서 계속 생각한 건데 말이죠.”
“응?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최초 원정인데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해요? 그 쪽 말 대로면 원정대 구성도 겨우겨우 할 상황인데. 만반의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에.”
말은 이렇게 했지만, 화련은 빠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면 진작 팀을 떠났을 테니까. 돈은 1년 6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용잡이 팀원으로 활동하면서, 이모를 평생 부양하고도 남을 정도로 벌었으니까. 애초에 용잡이 팀원이 될 것도 없이, 하위 던전 헬퍼로 살아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그저 팀원으로서 안정적인 원정을 위해서 당연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뿐이다. 최상위 던전에 대한 첫 도전이라는 걸 고려하면 이상하리만치 온건한 의견제기였다. 보통 팀 같으면 길드나 국가기관에서 가야한다고 살살 달래고, 팀 전체가 말도 안 되는 페이를 부르면서 뻗댈 테니까.
귀국 후에 별 말 없이 ‘저는 믿고 있어요.’같은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희란 쪽이 이상한 것이다. 희란이 도통 입을 열질 않으니, 그 특이한 능력으로 뭔가 알아낸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류 현이 ‘강림’을 샌 드래곤 던전에서 선보인 이후, 희란은 스리슬쩍 세 여자의 음모 논의에서 빠져나갔다. 류 현에게 고해바친 기미도 없으니, 화련과 승하도 별 말 없이 내버려 두는 중이었다.
뭔가 소외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화련은 제 역할을 버리진 않았다. 류 현이 괴물이라지만, 경력은 화련이 가장 길며 희란이 그런 성격이니,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은 언제나 화련의 몫이었다.
“아하하, 난 또 뭐라고. 걱정 마. 나도 너희 마스터가 덩치 불리는 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니거든. 덕분에 영감도 많이 받았고. 그리고 정말로 답이 안 나올 거 같으면, 내가 총대 매고 원정 파토 내 줄게. 나도 이런 나이에 죽긴 싫거든.”
승하가 웃으며 내뱉는 말을 들으며, 화련은 왠지 소름 돋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허장성세라고 여겼겠지만, 그녀가 본 나승하라는 인간은 싸움에 관해서는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한단계 진보가 있었다고 하면 축소해서 말했을 수는 있어도, 과장했을 리는 없다.
‘마스터도 괴물이지만 이 여자도 정상은 아니야...’
아주 조금, X던전 안의 괴수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함께.
그리고 휙 하고 일주일이 지나갔다.
“알 라시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화련은 멋들어지게 인사를 하는 아랍인 남자를 보며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