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탐식마(貪食魔)
던전 원정 준비는 간소화하려면 영화관에 영화 보러 가는 것만큼 간단해질 수도 있고, 어렵게 가기 시작하면 국가에 손을 벌려야하는 큰일이 되기도 한다.
2차 ‘대소환’초기, 던전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고, 플레이어들을 받쳐줄 인프라도 없었던 그 시절의 던전 사냥은 대부분 국가와 연계를 해야만 했다. 플레이어들이 들어가는 던전이 그 당시 최상위 던전이었던 그린 던전이었으니까. 그 외의 던전에는 투입할 여력도 없었다.
협회 측에서는 그 당시 플레이어 사망률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지만, 언론은 최소 20프로라고 추산했었다. 갈려나간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사망률.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던전 원정을 준비한다는 건 경제적 부담감은 둘째 치고, 사망률을 수직 상승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으니 자연히 국가에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국가에서는 신고제를 도입해서 그들의 원정을 지원을 했고, 플레이어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라도 신고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대소환’이 일어난 지 십년 여가 지난 지금, 대부분의 던전 원정 준비는 길드차원에서 해결하게 되었다. 블루 퍼플 급 이상이 되면 국가차원에서 담당 공무원을 파견해주는 등 편의를 봐주려고 하는 편이지만, 그 이하의 던전은 신경 써 줄 여력도 없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여전히 그린 이상 급의 던전을 돌 수 있는 플레이어는 적지만, 원정 실패율이 비약적으로 줄어들었으니까. 줄어든 실패율은 곧바로 플레이어 전체 질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던전을 돌아서 강해지는 플레이어는 있어도, 부상을 당하지 않는 이상 약해지는 경우는 없다. 인류가 던전을 정복했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이견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플레이어들이 던전을 따라잡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웨인 크로이츠는 그러한 대 던전의 시대에 최선두에 선자로서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원정 준비라니...’
아니, 고민 중이라기보다도 과로로 죽어가는 중이었다. 말끔한 그의 얼굴에 얼룩처럼 내려앉은 시커먼 다크서클과 도무지 초점을 찾을 기미가 안 보이는 눈을 본다면, 그에게 휴가를 권했을 것이다. 아니면 곧장 구급차를 부르거나.
‘그냥 퍼플 던전도 아니고...그 이상...’
웨인의 한탄에 들어간 퍼플 던전 마저 일반적으로는 ‘그냥’이라고 취급할 수 없는 최상위급 난이도였지만, X던전 앞에서는 아무래도 빛이 바래보일 수밖에 없었다.
웨펀 마스터, 시계탑의 수호자, 퍼플 던전 슬레이어. 나열하고자 하면 수 없이 많은 별칭들을 가진 웨인 크로이츠를 괴롭히고 있는 건 X던전이었다. 정확히는 그 던전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자, 류 현의 X던전 원정 주장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웨인은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금발머리를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생각했다. 제 몰골을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한 달이라니...절대로 무리다. 한국만 해도 퍼플 던전에 사용 가능한 전력의 대부분이 지금 원정 중이야. 다른 아시아 권 국가는...생각하기도 싫군.’
웨인 크로이츠는 협회를 대표하는 플레이어다. 이 사실은 그가 얼굴마담이라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그가 강하며, 거기에 협회를 대표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을 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도 이곳저곳 뛰어다니면서 괴수를 썰어버려서 그렇지, 웨인의 주 업무는 협회 본부 내에 마련된 멋들어진 그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진다.
런던의 숙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미남자는, 칼 한 자루 꼬나 쥐고 괴수를 썰어버리는 기사보다는, 만년필과 태블릿 피시를 들고 서류의 산과 대결하는 자로서 사무 업무를 더 많이 본다는 의미다. 괜히 협회에서 검성과 류 현과 접촉할 때마다 웨인을 보낸 게 아닌 것이다. 현장수행 능력도 출중하며, 서류 업무에도 능한 자. 상부에서 갈아대지 않고 서는 버틸 수 없는 훌륭한 재원이다.
그런 훌륭한 재원답게 웨인 크로이츠는 현역으로 뛰고 있는 퍼플 던전 급, 그러니까 헌팅 레벨 150을 넘기는 퍼플 던전에 투입 가능한 플레이어 분포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팀원 헌팅 레벨이 평균이 150이 안 되지만 퍼플 던전 원정 경력이 있는 팀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을 정도.
협회와 다르게 독자노선을 걷고 있는 미국의 경우에는 자료를 얻기가 어렵긴 하지만, 다른 단체보다는 훨씬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준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웨인이 봤을 때, 류 현이 요구한 한 달 이내의 X던전 원정은 성공 실패 여부를 떠나서 준비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검성 효과인지, 아니면 최초의 퍼플 던전이 나타날 정도로 상위권 던전의 이상하리만치 높아서 실전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플레이어 수준이 높은 한국의 2대 길드는, 지금 퍼플 던전에 전력을 쏟아 부은 상태. 근접해 있는 일본은 전력 손실은 거의 없지만 리치에 크게 데여서 여론 상 전력을 차출하기 어렵고, 러시아는 초기 대처가 좋아 피해가 경미하지만 미국과 다른 의미로 독자 노선을 걷기 위해서 협회를 찢어놓을 궁리만 하고 있다.
내전 중인 터키는 언급할 필요도 없고, 그 근처의 이슬람 문화권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칼리프 클랜이라는 협회 다음 가는 규모의 플레이어 단체를 보유 중이다. 거래 상대는 될 수 있지만, 지금 같이 다급한 차출에는 콧방귀도 안 뀔 것이다.
또 다른 X던전 발생지역인 미국은 제 코가 석자라, X던전을 발견한 이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협회에 도움을 요청 중이다. ‘대소환’초기 때 협회와 관계가 표면적으로 틀어지지 않았다면, 대통령이라도 앞세워서 애원할 기세였다.
남은 유럽은 유럽을 대표하는 플레이어로 꼽히는 웨인이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복마전 그 자체다.
미국이 던전의 시대 초반부에 실수로 뒤쳐진 덕을 톡톡히 본 유럽은 협회에서 금지물품으로 지정한 던전 특산품을 유통하는 블랙마켓으로도 모자라서, 아프리카에서나 볼 법한 청부 길드까지 존재한다.
말 그대로 플레이어들이 괴수는 안 때려잡고 사람을 잡는 걸 업으로 삼은 길드가 존재한다는 거다. 실력이 시원찮은 건 둘째치고, 점조직으로 운영되기에 길드라고 지칭하기도 뭣하지만, 협회가 엎어지면 코 닿을 영국에 뿌리를 내렸는데 그런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막장으로 돌아가는 지 잘 보여주는 예시다. 전력을 뽑아내려면 꽤 괜찮은 전력이 나오겠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유럽은...아니야, 그 작자들은 던전을 장난감으로 안다고!’
웨인은 유럽이라는 복마전에서 파견한 시한폭탄이 X던전 원정대에 끼는 걸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원정 자체 보다는 안에 있는 괴수를 때려잡고 나서 사고가 터질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이거저거 가려서는 준비할 수 있는 게...’
던전 원정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 관리다. 한 발당 스포츠카 값을 자랑하는 아티펙트로 완전 무장해도, 결국 그 아티펙트를 다루는 자가 미숙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블루 이상의 상위 던전 원정을 코앞에 둔 길드는 원정 대원에게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곤 한다.
그만큼 사람이, 인적자원이 중요한데 시기가 더럽게 걸려서 사람을 고르기는커녕 차출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웨인은 최후의 선택지로 던전이 터지기 직전까지 미뤄보는 걸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류 현이 깨어나서 열쇠를 발동시킨 당일이었다면, 미룬다는 선택지를 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류 현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본인이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하고, 석비에서 받아들인 정보도 상당부분 소실되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류 현이 깨어나고서 이틀 후, 아프리카에서 공수해온 석비와 뉴욕에 있는 석비의 변화를 들은 이 후에는 그 선택지는 쓰레기통 행이 되었다.
천공성(穿孔城).
왕의 영지.
류 현이 열쇠를 발동했을 때 석비에 떠오른 글자가 웨인과 위원회의 마음을 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그 알 수 없는 단어가 뜻하는 바가 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던전은 한 번도 인류에게 친절하게 안에 든 내용물을 알려주거나 하지 않았었다. 알 수 있는 건 포화기간과 제한 인원수. 단 한 번, 이 원칙이 깨진 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최초의 퍼플 던전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원칙이 깨지고 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좋은 신호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
아예 던전이 터질 때까지 방치했다가, 군 단위 화력을 쏟아 부어서 영지고 뭐고 다 녹여버리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X던전의 위치를 누군가가 읊자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가장 최근에 아프리카에 등장한 5성짜리 리치가 네이팜 폭격을 맞고도 멀쩡하게 폭격기들을 사냥했다는 사실을 상기 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쯤 되자, 협회 내부에서는 정보를 쥐고 있는 류 현에게 다 일임해버리자는 자포자기식 의견마저 나올 정도였다. 웨인은 저도 모르게 동조하려다가 너무 오래 누나 곁을 비웠다며 귀국하는 류 현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다시 올 테지만 준비 잘 부탁드립니다. 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류 현이 떠난 지 일주일이 되었고, 웨인은 시커멓게 죽어가는 얼굴로 원정대원 후보 명단을 뒤적이다가 다시 책상 위로 엎어졌다. 웨인의 뇌는 이때다 하고 그의 의식을 꺼버렸다.
기절하는 와중에도 웨인은 업무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좀 빨리 돌아와 주십시오...’
***
“이대로 만들어 달란 말인가?”
“예, 이렇게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혹시 안 되는 겁니까?”
“아니, 되기야 되지. 구조가 복잡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하지만 이렇게 만들면...”
공방 내의 꼬마들로부터 드워프 영감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남자, 강 찬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스케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다. 농담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의 짧은 목이 그토록 유연하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감탄어린 농담을 던졌겠지만,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농담을 잘 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류 현은 고개를 갸우뚱 하는 강 찬에게 재차 말했다.
“문외한이긴 하지만 저도 그 설계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니, 뭐 문외한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닌 것 같군. 여기 이 이음새 부분은 쇠 좀 만져본 티가 나. 문제는 이 부분 때문에 무게 중심이 개판 난다는 거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 번 사용하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주문하는 거니까요.”
“음? 이만한 물건을?”
강 찬은 솥뚜껑만한 손에 어울리는 굵직한 손가락으로 그림의 하단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에는 재질: 샌 드래곤 뼈라고 적혀 있었다. 같은 가격의 금보다 훨씬 비싼 재료로 발주하면서 일회용이라니?
“보시다시피 들고 휘두를만한 물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네만...샌 드래곤 뼈로 만든 물건을 일회용으로...”
강 찬은 덥수룩한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눈앞의 청년은 믿기지 않는 속도로 성장한 괴물 중의 괴물. 달리 말하면 VVIP다. 그런 그가 이런 칼도 아니고 창도 아닌, 커다란 송곳 같이 생긴 물건을 샌 드래곤 뼈라는 비싼 재료를 넣어주고 발주한다는 건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터.
‘아니, 이렇게까지 할 만한 괴수가 있나? 오우거 옆구리에 갖다 박아도 끝만 조금 찌그러지고 말텐데?’
자신이 아는 괴수들을 세워놓고 가상의 뼈송곳으로 찔러보던 강 찬은 전 괴수 관통이라는 쾌거를 달성하기 직전에 기억 저편에 쳐 박아 두었던 사실을 기억 해내었다.
‘X던전! 맞아, 그게 있었지. 그런데 이 친구가...설마?’
저 혼자서 망상의 나래를 펼친 강 찬의 눈에 묘한 열기가 어렸다. 강 찬은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류 현에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알겠네. 뭘 찌르든 단숨에 관통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만들어 놓겠네.”
“제가 그려놓고도 이상한 물건이다 싶어서 거절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입니다. 아, 그리고 그거 말고도 이 용린갑도...아, 용린갑이라는 건 제가 붙인 이름인데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류 현은 조용히 나름대로의 준비를 마쳐가는 중이었다.